대한민국에 양반 아닌 가문이 없다.
그러나 조선중기까지도 양반은 10%에 불과했고 18세기 이후 신분의 변동 등으로 조선말에 이르러서도 전 인구의 20%에 달할 뿐이었다. 18세기 이후 족보 간행의 붐이 일고, 돈을 많이 벌게 된 상민들이 양반 족보를 사게 되거나 또는 그들 가문에 이어붙임(계대)으로써 하나 둘 양반화 되어갔던 것이다. 아울러 1909년 호적법의 시행으로 너도나도 성씨를 가지게 됨으로써 이왕이면 김, 이, 박 등 왕족이나 유명 성씨를 선택하게 됨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한국 최초의 족보는 조선 성종 7년(1476)에 만든 안동 권씨의 성화보(3권, 364 페이지)로 알려지고 있으며, 다음은 문화류씨의 가정보(嘉靖譜, 1562년 명종 17년; 10권 2204 페이지)가 유명하다. 물론 둘 다 현전한다.
이처럼 15세기 말부터 시작된 각 문중의 족보 간행은 과거급제자나 학식이 높은 학자가 있는 가문일수록 자신들의 조상에 대하여 족보나 가승보, 가첩의 형태로 계보를 만들어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족보 간행의 형태는 17세기 때까지만 해도 실학사상의 영향 탓인지, 대개 고려 중기나 말의 자신들 직계에 대하여 기록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너도 나도 족보가 없으면 양반이 아니라는 풍조 탓인지, 그동안 본관이 같더라도 계촌(計寸-촌수를 따지는 일) 할 수 없던 계보를 하나로 잇거나 심지어 고려 초나 신라시대로까지 자신들의 조상 계보를 연장시키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아울러 같은 본관의 같은 성씨라 하여도 인구가 늘면서 상대가 아저씨인지, 10촌인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계보로 이으면서 같은 뿌리임을 강조하기 위해 먼 위대에서 갈라진 것처럼 조상 대수를 대폭 올려 꾸미거나 당시 인물과 계촌상 맞지 않는 불합리한 대수를 메우기 위해 몇 대는 가공인물로 채우는 등의 행위도 많았던 것 같다.
그뿐 아니라, 계보가 오래될수록 권위가 있다 생각했는지, 17세기까지도 주장되지 않던 일까지 벌어졌다. 일례를 들면, 토착 신라인 장보고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친을 중국인 장백익이라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는 고증이 안 될 뿐만 아니라, 17세기 문서에는 그러한 기록이 모든 장씨 기록에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유학사상에 의한 사대주의의 심화와 모화사상 탓으로 타성씨와 비교하여 오래된 인물이 조상이어야 더 권위가 있다는 인식의 발로에서 이러한 현상이 벌어졌던 것 같다.
현재에도 대부분의 문명한 가문에서는 대부분 고증이 되는 실제 조상만을 족보상 계보로 인정하여 올바로 수정하는 문중이 있는가하면, 아직도 같은 성씨를 사용하면 같은 혈통이라는 단순한 인식하에 시조를 중국인으로 만들어 하나로 합보 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요, 한편의 소설이다.
그러나 같은 성씨를 사용한다하여도 본관이 다르면 기본적으로 혈통이 다름을 의미한다. 물론 같은 조상을 둔 혈통이라도 성씨와 본관을 달리하는 경우도 소수 존재하고 고려시대에는 불교사회로 족내혼(族內婚-같은 성씨의 같은 본관끼리 결혼하던 풍습)의 흔적도 보이나, 백이정의 유학 유입과 신돈 의 폭정 이후 불교가 유교로 대체되면서 족외혼이 기본이 되어갔다.
하여튼 18세기 간행 족보의 조상에 대한 과대, 미화 등의 특성은 마약과 같다할 것이며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요약된다.
①모화사상과 사대주의 풍조로 조상을 중국인으로 만들어 족보를 꾸미는 문중이 많았다.
②대개 오래된 고려 시대의 인물에 대하여 관직을 높이거나 문과급제자라 날조, 미화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한 가문에 3정승이니, 3대제학 배출가문이 진정 명문 양반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더욱 관직 과대, 미화 풍조는 늘어만 갔다.
③같은 성씨를 사용하면 같은 혈통이라는 인식이 태동, 합보 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럼으로 계대를 맞추기 위해 더 오래된 인물을 내세우거나 중간에 가공인물을 세워 족보를 꾸미는 경향이 있었다.
④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탄식했듯, 양반들끼리 짜고 조상들의 혼인관계를 날조하여 족보에 서로 짜 맞추기 하는 것이 유행했다는 점이다.
⑤같은 성씨를 사용하는 이름이 같은 유명인이 타관에 있으면 동명이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 족보에 자기 조상이라고 왜곡 기록하는 풍조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18세기의 엉터리 족보 붐조차 이를 타파할 수 있는 근거가 있으니, 천만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부끄러운 가짜 조상 만들기와 타관 잇대기(계대), 관직 높이기, 거짓 문과 급제자에 대한 기록이 깨짐에 환호해야할지 모를 일이다.
정사인『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과 족보를 비교, 연구해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수 있다. 어떤 가문의 족보를 보니, 17세기 그들 자신이 만든 족보에 현감(종6품)으로 나오는데, 현 족보는 부자(父子)가 평장사(정2품-장관급)라 하거나 대제학(정2품-국립대 총장)이라 하고 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대개 조상의 음덕(음사로 관직에 진출)이나 무공 또는 과거급제를 통해 오를 수 있는 고위직인 평장사(고려시대 관직명)나 대제학을 거친 인물이라면 정사인『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에 한 줄 이상의 기록이 남아있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한 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함은 족보가 잘못되었다고 봄이 타당하고 합리적이다. 그저 자신들 문중에서나 통할 마약과도 같은 과대미화라는 점이다. 아울러 대부분 그들 각 문중이 18세기에 만든 족보보다 100여 년 앞선 자신들의 족보를 보면 부끄러워 쥐구멍에 숨을 일이다.
1680년경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풍양조씨 조종운 공의『씨족원류』라는 족보 종합책이 있다. 이는 조종운 공의 할아버지 대부터 전국의 540여 문중 족보를 모아 정리 간행한 것으로 이는 각 문중이 당시 가지고 있던 것을 제출했거나 풍양조씨 조중운 공 할아버지 때부터 전국을 돌며 베끼거나 모은 것이다. 때문에 신뢰성이 높다는 점이다.
상기 책에는 절대 자기 조상을 중국인이라 헛되이 주장한 가문도 없고, 하물며 8학사를 본 따 중국에서 귀화했다고도 섣불리 왜곡하지 않았으며, 현감이나 현령인 조상을 거짓으로 평장사니, 대제학이니 하지 않았다. 그저 사실대로 적었을 뿐이다.
이처럼 17세기의 족보는 실제 자기 조상만을 적고 위했지, 18세기 족보처럼 허황되고 거짓된 기록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도 일본만 못하지만 조선 초에 완성된 고려시대 정사인 『고려사』『고려사절요』가 있고, 과거급제자를 알 수 있는『고려열조등과록』이 있어 대조 확인 가능하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기록은 더욱 자세하기에 얼마든지 족보상의 관직과 과거급제 여부는 물론 무과, 사마시, 생원시까지 확인 가능한 마당에 무슨 공신이니, 뭐니 거짓 기록이 많다함은 족보를 믿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일에 일조할 뿐이다.
이러한 판국에 정확한 고증이나 연구 없이 각 문중이 주장하는 족보 내용을 그대로 취합하여 족보관련 책을 편찬하거나 이를 인터넷에 배포함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각 문중의 족보 기록을 정사와 『고려열조등과록』및 350여 년 전 각 문중 자신들이 만들어 가지고 있었던 진실이 묻어나는『씨족원류』를 들춰보면 금세 그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가문의 기록은 소중하며, 또한 진실만을 기록해야한다. 일본이 고대에 있지도 않은 임나일본부라는 허위 사실을『일본서기』에 기록하여 한일관계가 최악의 상황에 이름은 물론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한반도 침략이나 일제의 침탈에 이용되었듯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한 허위 기록이 이제서 일본인 학자조차 사실이 아니라고 뒤늦게 인정했듯 역사나 가문의 기록은 중요한 것이다.
때문에 투철한 역사의식 하에 족보연구나 역사연구를 해야지, 과대,미화, 날조된 각 문중의 마약과도 같은 18세기 이후의 왜곡된 족보 내용을 마구 인터넷에 쏟아 부으면 안 된다. 이는 부정확하며 날조, 왜곡된 족보의 확대재생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고증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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