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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족보는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ryu하곡 2018. 1. 17. 16:35

족보는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지금 당장 “여러분을 보고 당신은 양반이 아니오!”라고 대한민국 누구에게라도 물어본다면 거의 100프로 싸다구를 맞을 것이다. 그 이유로 뺨을 때린 사람은 자기 집에 소중하게 모셔진 족보를 뒤적이며, 자신은 역시 양반임이 틀림없다고 위안을 삼을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대부분의 족보가 여러 성씨와 문중 간 경쟁이 불면서 왜곡되어졌음을 알면 그저 하품이 나올 지경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대부분은 확률 상 양반이 아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말까지도 상당수는 족보조차 없었고 성씨마저 사용치 않았던 사람이 많았다. 하물며 같은 성씨, 같은 본관일지라도 직계 조상 중 사화를 입었거나 자손이 번창 하지 못하고 후손이 끊기거나 양반에서 상민으로, 노예로 신분이 바뀐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유학이 우리 민족의 정치와 사상을 잠식하면서 중국을 위하는 사대주의가 전염병처럼 번지면서 자신들의 조상을 중국인으로 만드는 나쁜 병폐가 족보 간행에도 깊숙이 침투되었다. 특히 18세기 이후가 더욱 심각했다.


실제 16세기 이전에는 무자(無子)로 인하여 가계가 단절된 가문이 많았다. 이는 1680년 경의 풍양조씨 조중운 공의 ‘씨족원류’를 보아도 명확하게 확인되는 점이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아들이 없는 형이나 동생에게 양자를 보내 계보를 잇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아울러 대학 교수로 한국인의 성씨와 족보 연구로 한평생을 보낸 이수건 교수의 논문이나 저술에 보면, “17세기 말 이래 현조를 확보하지 못한 신흥세력들은 기존의 명문거족과 연결시키기 위하여 개관하거나 투탁하기도 하며 동성이라도 파계에 따라 현조가 없는 계열은 현조가 있는 계열과 세대를 적당히 연접하여 합보하는 예가 많았다”고 한다. 이는 17세기 이후 성관에 따라 우열관념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족보로 양반, 상놈을 가리려는 유치함 때문이다.


아울러 합보나 개관의 대상으로 이 교수는 “신라 말 또는 고려 말의 충절인사 또는 왜란, 호란 때의 의병장, 순절인 또는 포은,목은,퇴계,남명,율곡,우계와 같은 儒賢의 문인과 연결시키려하였다. 그러나 세계가 제대로 연접되지 않은 파계는 ‘別譜로 처리하였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졸부나 신흥 세력들은 목숨 걸고 큰 재산 날려가면서 까지 대대로 당해 온 서러움을 한 번에 풀기라도 하듯  명문이나 거족(세력이 큰 가문)에 대한 투탁과 연접하려는 움직임이 집요하리만큼 끈질겼다.


이들 신흥세력이나 졸부들은 그 가문의 족보를 위조하기 위해 “가첩. 가보. 호구. 입양문서 등을 위조하거나, 가짜 誌石을 발굴하거나 명문족보의 先代無後系 와 연결하거나, 형제수를 늘려 끼우거나, 한 대수를 삽입해서 연접하는 등의 협잡을 자행했던 것이다.”라고 이수건 교수는 족보의 왜곡을 꼬집었다.


이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족보의 협잡 외에도 “①僻貫들은 아예 개관하여 기존의 명족파계와 연접하는 경우, ② 동성동본의 여러 異派 가운데 명조가 없는 파계들은 명조가 있는 세계에 연접하여 합보 하는 경우, ③ 異本이라도 동성은 당초 同出於同祖, 즉 동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후대에 올수록 同性異本들의 합보, 즉 대동보적 성격의 족보가 많이 나오게 됨에 따라 최근에는 혈연적으로 전혀 다른 성관이 동성동본으로 오인되는 예가 많다. ④ 비양반이 일정한 부를 갖고 가난하거나 궁벽한 기성사족을 찾아서 족보편찬 경비를 부담함으로써 합보 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이상 이수건 저『한국의 성씨와 족보』62~63pp)


한편 조선말 사림파의 득세에 따라 여말선초 두 왕조를 섬긴 정도전과 권근, 하륜 등과 불교를 용인한 이제현, 이색을 비판하는 풍조가 일면서 의리와 명분이 지고지순의 가치체계로써 일반화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왕조에만 충성을 다 바친 절개 굳은 정몽주, 장하, 길재와 같은 충신을 숭앙하는 추세에 따라 한미한 가계와 졸부 및 신흥세력들은 고려 말의 수절인사와 조선조 단종을 위해 죽은 충신들을 자신들의 가계와 결부시켜 족보를 정리하는 바람이 크게 불었다 한다.


이러한 바람에 편승하여 “차씨 인사에 의해『車原覜雪冤記(필자 주, 차원부 설원기의 ‘覜(조)’는 ‘頫(부’의 오기)』가 편찬되고 경주김씨 인사에 의해 고려 말 金澍(필자 주, 김주)와 金自粹(필자주, 김자수)의 충절 사실이 조작되었는가 하면,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의리 명분과 존주사상이 고조되고 숙종조 단종복위와 사육신 등의 신원, 영조의 개성행차 때 不朝峴 立碑와 杜門洞 72현 추승과 같은 국가적인 포충. 장절책에 편승한 신흥세력의 조상세계 조작과 함께 위보가 속출하게 되었다.”고 이수건 교수는 상기 저술에서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이 교수는 18세기 들어 박씨, 김씨는 신라 왕계에 이. 최. 정. 손씨 등은 신라 6촌성에 연접시켰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한씨와 기씨. 선우씨는 마한 내지 箕子(기자)까지, 심지어 단군까지 소급하여 계보화 하려는 데서 조상세계가 지나치게 소급된 위보들이 쏟아져 나왔다고한다(상게서, 64p).


이처럼 조선후기부터 일제시기에 창간된 족보는 대부분이 충분한 고증을 거치지 않거나 원형이 변질된 것과 성관 및 조상세계가 조작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이교수 연구 논문 및 저술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족보 왜곡, 조작, 과장, 미화 바람을 타고 1천 여 년이 지난 후손들이 고려 시대 인물을 가공하여 여러 본관이 합보 하여 만든 대동보에 공동 시조로 올려놓고, 실존 인물이었던 것처럼 후대에 비석까지 만들고 유고집이라며 교묘히 간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면 족보 속 인물 중 고증을 통해 밝혀지지 않는 신비의 인명은 대부분이 역사소설 속 가공인물에 지나지 않음이다. 그러한 헛 조상을 만들어 놓고 섬김은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도깨비 조상 만들어 가문 자랑하는 허풍의 시대에서 벗어나 진짜 참 조상을 위하는 솔직한 조상 숭배 운동이 일어나야할 때가 아닌가 한다.

 

*참고서적

 

 

                                                                    이수건 저『한국의 성씨와 족보』

 

 

출처 : 동양고대사의 연구실
글쓴이 : 장팔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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