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定獻公)寶白堂 金係行

ryu하곡 2018. 1. 16. 13:00

 

 

정헌공 보백당 김계행 선생 가문 동영상크릭->(보백당 김계행종가불천위재사)

계행(係行)(성종(成宗) 1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김계행은 서기 1431년[세종13]에 태어나 1521년[중종16]에 세상을 떠났다.

(자는 취사, 호는 보백당)이다.

보백당은 조선 전기 영남 유림에 몇 안되는 중량급 인사이다.

영남 지방의 거장 김종직과 동갑내기로 함께 영남 유림을 이끌며 도덕과 학문으로 사귀었다.

조정으로 나아가서 임금[성종]을 보필하며 명관으로 조야에 성망이 높았다.

특히 성희안과 교분이 두터웠다. 성희안은 숭유정책의 신진사류로서 임금이 많은

자문을 구할 만큼 학문이 깊었다.

진성대군을 옹립,중종반정의 거사를 성공시킨 1등 공신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보백당은 대사간[오늘의 검찰총장격]을 지내며 강직하기로 유명하여 성희안, 희증 형제가

경외하는 마음의 친구이었다.

한편 김계행은 흔히 장동김씨로 불리는 안동김씨[신] 김상헌 조부 김생해 가문의 여명기에

안동김씨의  문호를 연 중흥 시조나 다름없다.

조선조 전기 안동김씨 초기에 가문을 이끌던 원로급 문장으로 군림하였다.

보백당은 "청백"의 표상이다.

그 기상이 푸르고 성품이 깨끗했다. 푸르기가 청옥 같고 깨긋하기가 백옥을 닮았다.

절개가 얼음과 같이 쨍쨍했다. 서예 유성룡이 "보백당은 강직한 분"이라 칭송했다.

성종 때 1480년 문과하여 1498년[연산군4]에 대사간으로 그릇되는 국사를 바로 잡으려 애를 썼다.

권간들의 횡포를 극간하다가 무오사화에 호된 형벌을 받았다.

여생은 황학산 아래 길안 묵계촌에서 보냈다.

(만휴정)에서 울회를 달래며 후진을 양성하고 후손들에게

((우리 집안의 보물은 오직 "청백)) 뿐이라 노래하며 임천을 벗삼아 학처럼 살았다.

1706년[숙종32] 영남 유림에서 안동에 (묵계서원)을 지어 보백당의 덕망을 추모하고 있다.

1859년[철종 10] 이조판서의 벼슬이 내렸다.

(시호는 정헌이며, 어명 불천위)로 향사하고 있다.

보백당은 비안현감 김삼근의 둘째 아들이다.

맏집의 형은 김계권이며 맏조카는 학조대사이다.

학조는 당대의 고승으로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고,

고승 신미와 함께 쌍벽을 이루며 국사로 추앙되었다.

또한 맏집 조카 김영추는 문과하여 부사를 지냈다.

보백당은 아들 다섯을 두었다.

맏은 참봉,

둘째 세째는 진사로 아버지가 물려준 가보 "청백"을 지키며 사랑했다.

딸 하나는 예천 금당곡 박눌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다섯을 낳아 모두 문과에 급제를 시켰다.

아들 다섯이 현달했다.

그 중에서 아들박종린의 후손들이 문한으로 예천을 떠들석하게 했다.

문집이나 유고가 있는 선비가약40-50명이 나왔다. 

의병장 박주대도 여기 출신이다.

딸 또하나는 안동 하회 유자온에게 시집을 갔다.

손자 유중영을 키워 관찰사를 시키고 증손자 유성용이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서애 유성용이 조선의 명상으로 추앙 받고 그 후손들이 영남을 빛냈으니

지하에서도 반가워 하였을 것이다.

보백당의 가문에 현달한 자손으로 김종윤,(苟全公,金中淸,) 김정준,

김주우,김경호,김병수,김용규 등을 들 수 있다.

김종윤은 자가 찬선,호가 묵재이며 진사시에 합격하여 봉사를 지냈다.

시문을 잘했으며 덕망이 있었다.

김정준과(구전공,김중청)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구전공,김중청)은 1566년[명종21년]에 태어나 1629년[인조7년]에 졸하였다.

((자는 而和, 호는 晩退軒))봉화군,명호면,풍호리(구미당) 에터를잡으시고,

월천 조목에게 글을 배웠으며, 영주에서 명망이 높았던

대사간 소고 박승임을 찾아가 학문을 닦았다.

한강 정구에게도 배웠다.

1610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예조정랑 등을 지냈다.

1614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사간원의 정언으로 있으면서 대의를 지켰다.

 대북들이 왕후를 폐하려 광분했다.

대북파의 정인홍이 폐모론을 반대하는 이원익을 탄핵하라는 압력을 (구전공,김중청)에게 가했다.

대의를 위해 이를 거절하다가 벼슬에서 쫏겨났다.

1621년 승지로 선유사가 되어 영남을 순행하였다.

(봉화의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봉화존덕사(奉化尊德祠) - 중청(中淸)
김중청의 자 김주우는 1598년에 태어나 1644년에 졸하였다. 자는 만고, 호는 이면이다.

한강 정구에게 글을 배우고 1624년 문과하여 지평을 거쳐 울진현감을 지냈다.

시문에 뛰어나고 명필이어서 진주 촉서루 현판에 글씨를 남겼다.

김경호는 1554년에 태어나 1593년에 순국했다.

자는 문보이다. 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봉화의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부장 권극기와 함께 의병 18대를 편성하여 문경, 함창 방면의 적을 소탕하려 출진했다.

수천명의 적을 만나 적의 수급을 많이 베었으나 중과 부적으로 사로 잡히었다.

항복을 거절하다 순국했다.

난리가 끝난 뒤 여절교위의 벼슬이 내렸다.

김병수는 1878년에 태어나 1944년에 몰했다. 자는 덕진, 호는 해선이다.

1908년 이강년의 선봉장 권용유에게 군자금을 도와 주었다.

1919년 용연리, 갈산리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갈평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의 언도를 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출옥했다.

독립유공 포상이 있었다.

김용규는 호가 번와 이다.

문행이 있었다. 문집 4권을 남겼다.

보백당 김계행 가문은 초기[조선조를 초,중,하 3기로 나누었을 때]에 기운이 융성했다.

조선조 초기인 1430년경부터 1580년 까지 보백당 적은집이 안동김씨[신]

가문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맏집은 김영추가 문과하여 군수를 했을 정도로 활동이 부진했다.

이 때 적은집[보백당]은 보백당이 문과하여 대사간으로 안동김씨 가문의 깃발을 힘껏

들어올렸으며 김종윤이 시문으로,김경호가 충성스런 행동으로,

(구전공,김중청)이 과환으로 가문의 기세를 드높혔다.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1590년, 1596년 각각 문과에 오르면서

보백당이 이끌어온 적은집의 기운은 중기로 내려오면서 서서히 큰집으로 옮겨 가기 시작하였으며.

1600년대 초부터 기운은 역발산하는 왕기로 바뀌었다.

이것은 조선 천하에 다시 없는 왕기로 보백당이 주도하던

안동김씨 가문을 조선 최강의 가문으로 만들고 말았다.

김상용, 김상헌의 왕기는 보백당의 기운을 이어 받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안동 지역에 선비문화를 정착시킨 주역은 역시 16세기 중반에 활동한 퇴계 선생이다.

외래사조인 불교를 이 땅에 토착화시킨 인물이 원효라고 한다면,

중국의 주자성리학을 조선 실정에 맞게 토착화시킨 이는 퇴계선생 이다.

하지만 안동에서 퇴계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보백당 김계행 같은 한 세대 앞선 선배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 불천위(不遷位)   
제사는 돌아가진 선조 4대까지만 지낸다.
그래서 4代 봉사(奉祀)라 한다.
돌아가신 분이 있으면 가장 윗분은 사당에서 위패를 옮긴다.
즉 천위( 遷位)한다.
그런데 임금은 우리 모두가 존경해야할 인물에 대하여 자손이 있는한

제사를 지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대대로 그분의 음덕을 기리고 ,

모범의 도를 따르자는 것이고 최고의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분의 위패를 일컬러 불천위(不遷位)라 한다.
임금이 정한 불천위를 국(國) 불천위(不遷位)라 한다.
가문의 최고의 명예이다.
안동에는 퇴계, 류성룡등 불천위가 많이 있다.

아래는 임금의 불천위 지정 명령서이다.
모든 사람들이 계행의 삶과 철학을 따르라는 뜻이 된다.

特施不祧之典事

제사 모시기를 그만두는 일 없도록 특별히 시행하라.

 
세도가의 산실 석실마을을 찾아서

동영상크릭-> ( 보백당 김계행종가불천위재사 )

安東金氏 不遷位

定獻公(정헌공)  寶白堂(보백당)     係行(계행)

苟全公(구전공)  晩退軒(만퇴헌)     中淸(중청)(향,유림不遷位)

文正公(문정공)  淸陰(청음)         尙憲(상헌)

忠獻公(충헌공)  夢窩(몽와)         昌集(창집)

忠敏公(충민공)  竹醉公(죽취공)     濟謙(제겸)

忠正公(충정공)  翠栢軒公(취백헌공) 省行(성행)

文忠公(문충공)  仙源(선원)         尙容(상용)

文忠公(문충공)  文谷(문곡)         壽恒(수항)

文簡公(문간공)  農巖(농암)         昌協(창협)

文貞公(문정공)  竹里(죽리)         履喬(이교)

忠文公(충문공)  楓皐(풍고)         祖淳(조순)

 국불천위 .학행. 향불천위.유림불천위

 

불천위 제사 제도의 실제

1. 김보백당의 불천위 제사 승인

이 절에서는 김보백당이 불천위로 승인받아 불천위 제사를 지내게 되는

과정을 여러 자료를 통하여 확인하여 보기로 한다. 부록에서 보듯이,

김보백당은 세종13년-중종12년 때 사람으로 조선조 중기의 인물이다.

공은 만년에 공직을 사양하고 길안면 묵계리에 살면서 자손들을 번성시켰다.

공이 지은 만휴정(晩休亭)은 그의 청렴 강직한 인생여정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공은 안동의 여러 불천위자 중에서 비교적 앞 시대의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런 김보백당이 실제로 불천위로 공의를 얻은 것은 100년 남짓 된다.

그러니까 꼭 100년 동안 보백당의 종손을 비롯한 자손들은 백세의 불천위 제사를 행해 왔다.

존현의 개인 사정에 따라 배향받은 시기는 다르지만,

안동지역의 불천위자들은 많은 경우가 비교적 조선조 후기 또는 말기에 불천위로 받았고,

사후 4대봉사를 끝내고 불천위 제사를 계속 받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인원보다 적다는 점이다.

김보백당은 이밀암(휘 栽)가 찬한 「行狀」(1729년)에 나타나듯이,

중년에는 조정의 요직에서 해마다

달마다 자리를 옮겨가며 빛나는 벼슬길을 일관했다고 한다.

이때 공이 낸 간문(諫文), 소장(疏章) 등 문사(文辭)가 이미 흩어져 전하지 않고

단지 도승지 사임장의 소문(疏文)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장년에는 김점필재(휘 종직)과 더불어 학문과 덕행을 연마했다고 한다.

공은 장조카, 國師 학조대사의 간청을 꾸짖고 50세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화려한 관직에서도 대사헌에서 사직하고, 종신동안 향리에서 淸白을 보물로 삼았다.

또 향중의 사람들은 1706(숙종32)년에 공의 은거지 묵계리의 호담에 사당을 짓고

향사했는데 이보(李簠, 1629-1710)의 유사(遺事) 1편에 전한다.

후손들은 공의 실상을 年譜로 꾸며 이밀암에게 교정을 부탁하고,

이런 연원을 따라 행장15)을 서술하길 간청한 것이다. 훨씬 전에,

류서애는 공의 외현손인데, 공의 세덕을 기리면서 지은 「영모록(永慕錄)」에는

류서애가 그린 김씨 세계보도와 김점필재가 공에게 증정한 2편의 시가 있다.

공의 묘소는 학가산 아래 직곡리(맛질)에 있는데 운명한 지 215년이 지나도

당시에 세운 비석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공의 8세손 등은 이눌은(휘 광정, 1677-1760)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여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사림에서는 백성들이 향사한 곳에 다시 서당과 사우를 짓고,

옥응계(휘 沽)을 합향하는 봉안을 열겠다는 통문을 보내었다. 통문은 이보가 작성했다.

게다가 이밀암은 여기에 김제산을 함께 합향하여 한 사당에 3분이 계시게 된 제문을 고유했다.

이 내용의 통문과 제문, 봉안문은 묵계서원이 창건(1706년)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묵계서원을 창설할 때는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시대였다.

그 후, 공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리고 150년 정도 세월이 흘렀다.

드디어 사림에서 철종(1858년)조에 수백년 동안 묻혀진 김보백당의 포상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때 증직을 청하는 소수(疏首)는 이주정(李周禎)이었다.

상소의 목적은 문헌이 구비되고, 여러 세대가 지나 성군을 만났는 데도 법전을 따라 백세의 공의를

해주지 않으니, 밝게 빛나는 절의와 특행을 가진 故보백당은 숭상할 만한 자격이 있다면 장려해서

증직을 주고 시호를 내리며 백세의 예전(禮奠)을 행하도록 해 줄 것을 청하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지나친 칭찬은 자신의 이름을 도둑질하는 일이라는 보백당의 유계’를

따라 감히 서두루지 못했으나, 선배를 찬양할 사적이 있는 데도 숨긴다는 것은

임금에게 결점을 남기고 정치와 교화에도 이익이 없으며, 고을의 풍속에도 계울이 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상소하는 사림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그 斯文을 빛나게 해달라고 임금께 청한다.

그 해 10월에 이조의 좌승지 판서 金炳學으로부터 회답을 보내어 왔다. 말하자면,

내용은 류서애의 후손 류졸재의 후손이 쓴 상소 안에도 보백당에 대한 사적이 있고,

이조에도 행적이 등재되어 있으며, 점필재의 문집에도 증시가 있음을 확인했다.

본 조에서 지금까지 공을 표창하지 못한 결례를 행했으나,

예조의 심의를 동시에 거쳐야 하므로 다시 상소를 하라고 권한다.

마침내 보백당의 증직 교지 를 받았다.

공은 가선대부 이조참판(종2품)과 ... 로 증직하고,

그 이유는 공의 충효와 청백한 인품, 도학에 연원을 둔 학덕 때문에 내린 것이라고 한다.

증직을 받은 선조는 반드시 분황고유(焚黃告由)를 드린다.

분황고유는 가묘가 있으면 사당의 신주에 고유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묘소나 배향된

서원의 위패에 고유한다. 이때 지금의 불천위의 배위도 추증되는데 부인은

본가에서 본손들이 별도로 글을 지어두었다가 제사를 행할 때 함께 고유한다고 했다.

이러한 사항에 대한 의절(儀節)을 류정재가 이밀암의 가례를 인용하여 전거로 삼았고,

분황고유 를 했다.

그리고 길일을 잡아 새로 목주를 만들어 개제(改題)를 하면서 고유를 한 것이다.

사림과 가문에서는 종2품으로 증직받은 것은 보백당의 공적이 아직 국가로부터

완전히 인정을 받지 않은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1859년에 방후손이 상소하여 1품계 이상의 증직과 시호를 받게 해달라는 처음 상소의 주장을 편다.

이에 대하여 이조에서는 같은 해 5월 예조에 청원하여 판서의 증직과 시호를 내리는 것이

사리에 합당한 일이라며 심의를 권한다.

드디어 예조에서

자헌대부,이조판서 겸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으로 다시 증직하고 청백을 힘쓴 보백당에 대한 업적을 추가한 교지를 다시 내린다.

분황고유문에서는 이제 사당을 지어 보백당을 존향하는 것을 찬양한다.

곧 이어서 영남유생과 대표 柳進鳳(1809-1858) 등은 보백당의 시호를 받기 위한 시장(諡狀)

왕에게 올린다. 그럼으로써 얼마 후 ‘정헌(定獻)’공이란 시호교지를 받는 영광을 얻었다.

받은 시호로 묘소의 묘비를 재건하는 길로 처리한다.

1887년에 이미 세운 묘갈명에 증직한 일과 시호받은 일을 개수(改竪)하면서 추가해 넣는다.

보백당의 묘소에 신도비를 세우는데 비명이 전한다.

유림 또는 본손들은 위와 같은 절차와 검증을 거치고,

각 교지를 받을 때마다 묘소나 장소를 마련하여 고유식을 조상에게 드렸다.

그리고 그 분에 대한 갖추는 예식과 구비물에도 절도가 따른다.

한번 의식을 행할 때마다 그 가문과 조상을 잘 하고 명망이 높은 분을

찾아 찬양해 줄 것을 청한다.

그러면서 조정으로부터 특례의 칙명을 추가로 받았다.

곧바로 이제는 보백당의 대묘(祠堂)에 다시 봉안한 신주를 조매하지 말고 영원히

예식을 행하라는 왕명을 하사받은 것이다.

불천위의 칙명은 조선조가 멸망하기 전, 1909년에서야 어렵게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보백당의 불천위는 약 100년 정도 되었다.

증직을 받아 이미 신주를 개제했다 하더라도 150년을 넘기지 않는다.

이것이 안동지역에서 잘 보존되고 어느 지역보다 많으면서 가문마다 독특한 불천위 제사이다.

모든 불천위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유명한 실직자의 경우,

칙명을 받는 때는 계속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지만 47위 가운데서도 많은 불천위가 이러한 실정에 있을 것이며,

어쩌면 이러한 경로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가운데 또 다른 과정에서 명의만 얻어

불천위를 행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사정은 각 종가에서 전하는 유적(遺籍)을 통하여야 확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로 보면 몇 종가의 확실한 자료를 감안할 때,

불천위는 19세기에 많은 현인에게 내렸고,

곧 불천위 제사를 세대를 초월하여 지내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안동 지역 불천위

이름

본관

     

세거지(종택)

  

諡號

具鳳齡

능성

중종21(1526)선조19(1586)

栢 潭

와룡면지내리 現가구리

함창김씨

文端

 

안동

현종13(1672)영조25(1749)

 

풍천면가곡리 가일 시습재

재령이씨

 

 

안동

명종7(1552)-선조23(1590)

 

와룡면 이상리

전주류씨

 

 

안동

세종8(1426)-세조13(1467)

 

와룡면가야리 늪실

화산권씨

 

 

안동

선조13(1580)-효종2(1652)

二愚堂

임하면임하리 이우당

문소김씨봉화금씨전주류씨

 

琴蘭秀

봉화

25(1530)-선조37(1604)

惺惺齋

예안면 부포리

횡성조씨

 

 

풍산

효종4(1653)-영조11(1735)

 

풍산읍오미리 미동

전의이씨

 

金係行

안동

13(1431)-중종12(1517)

寶白堂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이천서씨 ,의령남씨

定獻

金土宏

의성

영조15(1739)순조16(1816)

 

일직면 구미리

진성이씨 벽진이씨

 

풍산

명종8(1553)-선조35(1602)

悠然堂

풍산읍오미리 미동

전주이씨

 

金誠一

의성

중종33(1538)선조26(1593)

 

서후면금계리 검제

영가권씨

文忠

金聖鐸

의성

숙종10(1684)영조23(1747)

 

임하면천전리 비릿골

무안박씨

 

金楊震

풍산

세조13(1467)중종30(1535)

虛白堂

예천호명면 직산리 大枝

양천허씨

 

金彦璣

광산

중종15(1520)선조21(1588)

惟一齋

와룡면 가구리

영양남씨 영천이씨

 

 

광산

선조10(1577)-인조9(1641)

 

와룡면오천리 외내설월당

現안동용상

영양남씨

文貞

 

의성

명종12(1557)광해12(1620)

 

임하면천전리내앞귀봉종택

00이씨

 

 

의성

연산6(1500)-선조13(1580)

 

임하면천전리 내앞

여흥민씨

 

柳景深

풍산

중종11(1516)-선조4(1571)

 

풍천면하회리

00배씨

 

柳成龍

풍산

중종37(1542)선조40(1607)

西 

풍천면하회리 충효당

00이씨

文忠

柳升鉉

전주

숙종6(1680)-영조22(1746)

 

임동면박곡리박실

現구미해평 일선리

00김씨

 

柳雲龍

풍산

중종34(1539)선조34(1601)

 

풍천면하회리 양진당

00이씨

文敬

柳正源

전주

숙종29(1703)영조37(1761)

 

예안면 주진리

선성이씨,무안박씨

 

柳仲淹

풍산

중종33(1538)-선조4(1571)

 

풍천면광덕1

영천이씨

 

柳仲郢

풍산

중종10(1515)-선조6(1573)

 

풍천면하회리 양진당

00김씨

 

  

전주

선조35(1602)-현종3(1662)

百拙庵

임동면고천리

안동권씨

 

柳致明

전주

정조1(1777)-철종12(1861)

 

임동면수곡리한들(수곡리)

00김씨,00신씨

 

柳徽文

전주

영조49(1773)순조27(1827)

好古窩

임동면마령리

現구미해평면 일선리

영해신씨,동래정씨

 

裵三益

흥해

중종29(1534)선조21(1588)

臨淵齋

월곡면도목리

現안동시 송천동금역당

영양남씨

 

邊中一

원주

선조8(1575)-현종1(1660)

 

서후면금계리 금고

동래정씨 信川강씨

 

李繼陽

진성

세종6(1424)-성종19(1488)

老松亭

도산면(예안) 온혜리

영양김씨

 

李德弘

영천

중종36(1541)선조29(1596)

 

녹전면원천리 외내

영양남씨

 

李溟翼

진성

광해9(1617)숙종13(1687)

反招堂

녹전면원천리 외내

안동권씨 高敞오씨

 

李山斗

전의

숙종6(1680)-영조48(1772)

懶난拙齋

풍산읍하리 우렁골

안동권씨

淸憲

李象靖

한산

숙종37(1711)-정조5(1781)

大 山

일직면망호리 소호리

長水황씨

文敬

李詠道

진성

명종14(1559)인조15(1637)

 

도산면토계리 하계

영가권씨

 

 

진성

예종1(1469)-중종12(1517)

 

도산면온혜리 애련정

(現안동 옥정)

월성이씨

 

 

진성

1400(1424년에 3자 출생)?

.

와룡면주하리/주촌 두루마을경류정

안동김씨

 

李宗洙

진성

경종2(1722)-정조21(1797)

 

일직면송리 후산정사

문소김씨

 

 

진성

연산군2(1496)명종5(1550)

溫溪

翠微軒

도산면온혜리

연안김씨

貞愍

李賢輔

영천

세조13(1467)명종10(1555)

 

도산면분천리 부내긍구당

現안동시옥정동(도산운곡동

안동권씨

孝節

李弘祚

한산

선조28(1595)-현종1(1660)

 

일직면망호리 소호리

영양남씨

 

 

진성

연산군7(1501)선조3(1570)

 退  溪

도산면토계리 상계

김해허씨 안동권씨

文純

李後榮

고성

효종원년1649숙종37(1711)

 

안동시법흥동 임청각

진성이씨

 

張興孝

안동

명종19(1564)인조11(1633)

 

서후면성곡리 춘파

안동권씨 안동권씨

 

 

청주

중종3(1508)-선조9(1576)

 

와룡면태리 말바우/마암

안동권씨

 

 

횡성

중종19(1524)선조39(1606)

 

도산면동부리 부용산下

(現부산전포)

안동권씨 선성김씨

 

河緯地

진주

태종12(1412)-세조2(1456)

 

서후면교리 창렬서원

00김씨

文烈

이름

혈연관계

과거급/문인

행직/증추

具鳳齡

謙의

생원,문과,

퇴계 문인

이조참판

이조판서

주계서원

당우의 인물, 한송의 문장이란 세칭을 얻음.율곡과 동서당론을 조절,곧 실패. 義理를 강독하여 골수를 터득.

백담문집,

속집

정곡 징의

갈암 이현일 문인

지평,

증이조판서추증

(고종 28)

노동里社

벼슬 대신 사창을 열어 빈민 구제,

향학으로 양풍진작,시습재로 후학양성, 이인좌의 난에서 영조에게 결백받음.

병곡집

10권 5

忍齋 大器의장자

사마시

퇴계 문인

경릉참봉,승정원 자승지,경연참찬관

.

왕자시전 제수, 맑은 인품에 지조가

높음.

송소집 2

修義副尉 可後의

사마시,문과

서헌부지평,집의

.

세조 13년 병마평사로 이시애의 난을 토평하는데 지휘하다가 자결.

이기설 저술

副率 宏의弟,

권씨 五賢者

사마시식년문과 병과한강정구의문인

성균관

직강 봉례

정묘호란에 창의하여 의병부장으로

활약.

이우당문집 4

琴蘭秀

첨지중추부사憲의 子, 영양남씨 교수軾의외손

사마시, 퇴계문인

봉화현감

좌승지

예안

동계서원

퇴계가 호를 지어줌. 고산주인.

임진년에 고을의 수장이 되고 명군이 남하하자 군량미를 비축하여 原從勳에 책록됨.

성재집

진사 弼臣의

사마시문과,

孤山 李惟樟

장예원

판결사

낙연서원

영조 무신년(1728) 鄭希亮의 난에

首倡義로 공을 세움.

죽봉문집

2

金係行

비안현감

三近의 子. 서애선생

김종서 등과

교유함,

생원, 식년문과

육조관직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이조판서

양관대제학

묵계서원

고령현감으로 나아가

청렴공직으로 치적 거둠.

홍문관부수찬 재직시 정언과 직언으로 시페를 논박하여

권신들의 이간으로 파직.

보백당실기

金土宏

오우당近의后光憲의

생원시,문과

대산 이상정의

문인

예조참판

대산에게서 심학 전수받음. 풍도엄정, 골상준위, 학문과 행검 탁월. 사림의 推重.

귀와문집

7책과

속집 4

金大賢

청백리楊震의

증손,

문정공義貞의손,

증좌승지 農의

사마시

우계 성혼의 문인

산음현감

증이조참판

구호서원

인조가 공의 8子가 진사, 5子가 문과에 급제하자八蓮五桂라 하고, ‘五美’

洞으로 하사함. 임란시 안집사 金玏과 鄕兵을 모아 싸움.

우복 정경세가 묘명찬.

유연당집

金誠一

청계璡의 4

진사,증광문과

퇴계문인

경상도 관찰사

이조판서

임천서원,

사빈서원

퇴계가 공의 行高學精을 칭찬하여 心學淵源을 屛銘으로 써 줌.

일본 사신으로 가 直節不屈함.임진란에 경상도초유사로有功하여 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됨.

학봉집외

다수,

운장각에

전시

金聖鐸

약봉克一의后

표은 是증손

증광문과 을과,

갈암 이현일의

문인

홍문관교리

귀록 조현명의 천거로 어전에서 강론하고 遺逸로 단성현감에 제수되나 상소로 사퇴. 花山風雨五龍飛 중 1人. 갈암의 신원소를 청하였으나 不允되고 제주로 유배, 광양의 謫所에서 사망. 퇴계의 이기이원론 지지.

문집 10

金楊震

진산군수 徽孫의

진사시,별시문과 四佳, 서거정에 師事

공조참판

송도 유도재상으로 숙위

물계서원,

대기재사

淸白吏에 錄選. 학문은 역학, 음양,

복서에 통달.호음 정사룡찬, 女婿동고 이준경이 신도비 씀.

문집2

金彦璣

담암 金用石의손자

생원시로 진사

성균관 생원

용계서원,

옥계서원

백담 구봉령, 후조당 김부필. 회곡

권춘람, 송암 권호문. 지산 김팔원 등 제현과 강학에 힘씀.화산문학이 융성함, 공의 문인록에 오른 문도 189인 중 비지 남치리 등 현달한 분 다수.

후세 안동 道學의 공로 인정받음.

문적은

灰燼,詩書 수편이

용산세에

전함.

 

설월당 부륜의

문과

사간원

이조판서겸 양관대제학

백봉서원

광해군조 잇따른 벼슬 제수에도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伯夷에 견줌. 병자란에 가재를 군비로 보조, 그 후 西向으로 앉지 않음 . 尊周錄에 척화제1등신으로 재록. 숙종조 도승지로 증직. 영조조 殷 三人에 비유. 정조는 공의 공적으로 후손을錄用하는교지림.

천하지도,

문집 6권책

계암일기

(39년간)

8

 

귀봉수일의子청계진의손자학봉성일의 조카

문과

학봉 김성일에게수업

병조참의

이조판서

사빈서원

조부 청계로부터 전해진 보검을수상함. 임진왜란의 호종공으로 선조를 수행하면서 일기를 써 귀중한 사료가 됨.

문집 9권

5책,

호종일기

 

승지禮範의子

사마시

이조판서겸 의금부사

사빈서원

후진교도에 진력하여 전암서당과 임천서당 창건.공의 자식교육 열의는 3子가 문과에, 2子가 소과에 급제하여

내앞파의 문호를 열어줌.

유물전시관

柳景深

공조전서從惠의 현손,

公權의 子, 입암仲郢從弟

생원과 진사,별시문과중시문과장원

평안감사,중추부사,

사헌부대사헌

선조4년 평안감사 재직 중 지병의 악화로 체임을 상소하여 중추부사가 되어 돌아오던 도중에 卒. 국왕이 관을 하사하고 歸葬시키며 不祧命함.

柳成龍

입암仲郢

생원과진사시,

별시문과,

퇴계문인

풍원부원군,

영의정

병산서원

퇴계는 공은 하늘이 낸 사람이라 칭찬함. 퇴계의 연원정맥이 됨. 임진왜란에 문무를 겸한 관직을 지내(出將入相) 經世大業이 당시 제일로 士林에서는 泰山北斗와 같이 추앙함

문집 20책,

징비록6책,

柳升鉉

기봉復起의后 奉侍의 長子

증광문과

공조참의,

풍기군수

이조참판

이인좌의 난에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나아가 왕이 弓矢를 하사하고 錄勳함. 사직하고 향리에서 시서에 몰두.

풍기군수 재직 중 순직

문집2

柳雲龍

입암仲郢장자

퇴계문인

원주목사

이조판서

우곡서원,

화천서원

퇴계문하의00제자로 평생 학문에 힘씀. 인동현감 때 백성을 공정히 하고, 고을의 풍속을 振作함. 임란 중 풍기군수로서 의주의 선조에게 正祖問安使를

보내고 國軍便宜疏를 올림

겸암집

柳正源

錫龜의

생원,증광문과

을과

대사간, 知製敎

고을 수령 때 선정을 베풀어 목민의

의절이란 치적을 목민심서에 실림.

공은 경학과 이학의 연구가 깊고,

눌은 이광정은 당대의 문학하는 선비로 비견할 사람이 드물다고함.

역해참고

10책,

하락지요

1편,

삼산집 4

柳仲淹

참봉公奭의자숙부公季에게

出系,

겸암과서애의 종숙부, 입암 중영과 從弟

퇴계문인

處士

분강서원, 타양서원

겸암과 서애와 동문수학하여 위기지학에 전심함,

34세에 조몰. 비지 南致利와 함께 ‘

溪文의 안자’로 세칭됨.

파산일고,

그 외

유실됨.

군수公綽의子李享禮의외손

문과

황해도관찰사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풍산부원군

차자 서애의 貴로 관직이 추증되고

추봉됨.

문집

 

기봉復起의손 도헌友潛의子

사마시

성균관 진사

학문에 정진하여 유림의 重望을 받음. 황해도 유생(인조 8년)에 이어 성균관(효종 1년,1650)에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배향하기를

疏請하자 영남 선비들이 백졸암을

疏首로 추대하여 저지함. 공은 黃籤에 붙여 儒籍에서 제명, 과거응시 자격

박탈. 향리에서 후학양성에 전력함.

문집 2

柳致明

형조참의양파

觀현의 증손, 행원 星休의 손자, 진사 한평晦文의

증광문과,

동암 柳長源,

손재 南漢朝,

대산 李象靖

병조참판

퇴계의 淵源適傳으로 불림,

대산의 학문을 강명하여 후진을

계몽함.

가례집해, 주절휘요, 대학동자문태극도해, 대산실기. 정재문집

27

柳徽文

삼산류정원의

손자,

萬休의

동암 류장원,

손재 남한조,

입재 정종로

장릉참봉

손재와 입재에게 師事하여

성리학을 탐구.

璿璣玉衡(혼천의)을 만들어 일월성신의 운행을

소학장구, 소학동자문계몽익요, 창랑문답

염락풍아

보유

주역통편,

문집 10

裵三益

백죽당

裵尙志의

8대손

사마시,문과

퇴계문인

황해도 관찰사

도생서원

퇴계에게 ‘臨淵齋桃木村’

大字와 경재잠, 숙흥야매잠을 받음.

명나라에 가 宗系를 바로잡고

會典改正草本을 받고, 신종황제에게

진귀한 보물 다수를 수상함.

문집 4

邊中一

상의원정동호

永淸의 손자

문과 을과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충효정각, 금고서원

사림의공의로 불천위

18세에 초야의 백성으로 임란에 사재를 군량미 백석으로 내어 상주진에 보냄.형 백씨 喜一과 진주 김학봉의 진중에 갔으나 학봉이 몰한 후라 곽재우 진에 가 참여함. 선조 30년에 왜병이 침입하자 화왕산성고 도산전지에서 박수춘, 심청 등 여러 의병과 적을 물리침.

간재집

李繼陽

李子脩의증

진사

봉화훈도

이조판서

향현사

단종이 폐위되자 출사를 단념하고

온혜에 집을 짓고 만년송을 심고 삶. 그곳 국방봉에 단종의 제단을 쌓음.

李德弘

농암이현보의

증손

퇴계문인

영춘현감

이조참판

우계서원

퇴계의 명으로 선기옥형을 제작,

유언으로 서적 관리를 맡김.

9현에 천거됨.

임진왜란으로 육전의 진도와,

해전의 병도를 첨부한 상소를

방책으로 냄.

호종1등공신에 추증됨.

계산기록,

주역질의, 사서질의, 심경질의, 고문질의, 가례주해, 주자서절요강록, 주자서절요의, 심경표제,

간재집,

李溟翼

별시문과

대사간,

충청도 관찰사

효종 8년 대교 재직 중 실록을 태백산사고에 봉안. 관찰사 재직때 영남의

세곡을 육로에서 단양 배편으로

운반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임.

영남에도 대동법을 확대 실시토록 건의하여 백성의 조세부담을 공정하게 함.

李山斗

병조판서

양정공 樺의

7대손

향시, 소과

생원, 문과

지중추부사

풍암서원,

어필 영정각

耆老社에 등입되고, 영조가 공의 집에 화공을 보내어 공의 화상을 2점 그리게 하고 친필로 ‘知中樞李山斗’를 써

주고 원손 정조에게 ‘九十歲像’이란 휘호를 쓰게 함.

난졸재집

2

李象靖

수은 이홍조의현손

밀암 이재의 외손

문과, 밀암문인

예조참의

이조판서

(고종)

고산서원

밀암의 문인으로 퇴계의 학문을

講明하여 유림의 宗師가 됨.

퇴계서절요 경재잠집설 이기휘편,

제양록,

약중편,

병명발휘

李詠道

퇴계 李滉의

손자,

寯의 子,

純道의

퇴계에게 수학

원주목사,

이조참판

퇴계가 공은 집안을 이을 소목이라

예견함. 약관에 부친상으로 여묘살이

하여 관직에 임명됨. 임진년에

안동에서 의병을 모아 싸우고 明軍에게 군량을 지원하며 명장에게 왜적 정벌의 계책을 변론하여 선무원종훈에 책록됨. 순조조 도에廟堂을 疏請하여 허락받음.

 

    

출처 : 吾金.定獻公後.生員公(克禮)派宗會.구미당(九未堂)
글쓴이 : oldbo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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