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파록(源派錄)의 실체는 무엇일까?
문화류씨의 선계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근원인 원파록을 살펴보았습니다.
차식 3부자는 왜 원파록을 창조하여? 조작하였으며 문화류씨는 왜 이 원파록을 수용하였다가(1689년 기사보) 300여 년이 지난 2008년 문화류씨 족보에서 삭제하였는지를 탐구하여 봅니다.
차원부가 지은 원파록이 아래와 같은 이유로 소실되었다고 하면서 [차원부 설원기] 국역본 44~45쪽에서 다음과 같이 설원기를 지어야 할 원인을 세워놓았습니다.
網者趙鄭咸河俱以車門近孽柳車二姓同原之也系專數焚湯于海州神光寺權結一時之?貴人作此禍之本根珍滅基嫡氏也 成三門奉 敎主
<결국 私怨 報復의 그물에 떨어졌다>는 것은, 조영규, 정도전, 함부림, 하륜이 모두 차씨 가문의 가까운 서얼로서 차문과 류문의 世系가 같은 근원으로 된 책은 모두 海州의 神光寺에서 불태운 다음에 일시의 權臣 貴臣들과 손을 잡고 禍根을 만들어 그 嫡氏들을 모두 죽인 것이다.
p44, 45에 선계의 기록이 없어졌다. 라고 공고를 하고 1580년 설원기를 위작하여 세상에 내 놓습니다.
연안차씨 블로그 족보 <20세 차원부> 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386년 우왕(禑王) 12년에 공(公)은 가문(家門)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을 자신(自身)에게 주어진 사명(使命)으로 여기고 왕(王)·차(車)·류(柳) 삼성(三姓)의 역사를 정리하여 왕차류보판(王車柳譜版)을 판각간행(板刻刊行)하여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 소장(所藏), 이 판각보판(板刻譜版)이 우리나라 족보(族譜)의 효시(嚆矢)이다.
1398년 태조(太祖) 7년 무인(戊寅) 음 9월 15일에 막료(幕僚) 이숙번(李叔蕃)과 사병(私兵)을 시켜 공(公)께서 한양(漢陽)에서 귀향(歸鄕)한다는 소식 듣고 내외친족(內外親族)들이 마중을 나왔는데 송원(松原)과 마원(麻原)에서 70여인을 일시에 추살(椎殺)하고 공(公)도 참화(慘禍)를 당하고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 소장(所藏)되어 있는 공(公)께서 만든 판각보판(板刻譜版)과 문헌(文獻)들이 분탕소실(焚蕩燒失)되었다.
이는 엄청난 조작이요 위작임이 이수건교수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참 주도 면밀한 사전 작업이였습니다. 그래서 원파록을 다시 복원한다. 라는 사전 포석이였습니다.
차식 차운로 차천로 3부자는 [차원부 설원기]를 위서 할 때 한미한 연안차씨 가문의 근본을 미화하고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약4716년 전 BC. 2704년 중국 헌원(軒轅) 황제(黃帝) 공손씨(公孫氏)를 성씨의 근원을 삼습니다.
동쪽으로 이동한 후손들은 평양의 一土山에서 一 + 土 를 합하여 王씨가 되었다고 합니다. 王자에서 아래위 가로획을 더하고 가운데 획을 길게 내려 車자를 만들어 車씨 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명문 거족인 문화류씨의 시조 대승공 柳車達의 가운데 글자 車자를 빌려옵니다. (이수건 교수가 이런 견해를 밝혔습니다.) 차씨와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王씨 車씨 柳씨 글자와 이름은 다르지만 뿌리는 같다는 동조이성의 논리로 조작합니다.
王씨-田-씨-申씨-車씨로 성씨의 파(派)를 형성하고 2,000여 년 전 신라 박혁거세 왕으로부터 차씨를 사성받아 차무일이 득성시조가 되고 또, 1,000년 후 차승색에게 고려태조가 특명으로 큰 아들 효전은 車씨로 사성하여 득관시조가 됩니다. 작은 아들 효금은 柳씨로 사성하여 문화류씨의 시조가 되었고 왕씨 차씨 류씨는 중국황제 헌원 공손씨 姬씨-姒씨-王씨-田씨-申씨-車씨-楊씨(류씨가 숨어 잠시 빌려 썼다고 함) 柳씨의 원파가 형성되었다고 황당한 선계를 조작합니다. 참 놀랍고 천재적인 이 계보에 의하여 왕*차*류씨의 동조이성의 원파록(원파기)이 작성됩니다.
중국의 황제 자손인 문화류씨, 연안차씨 개성왕씨는 조선사회에서 자존심을 높이는 긍지를 갖게됩니다.
당시는 고려가 망한 후 조선은 공맹사상에 바탕한 성리학을 국가 통치 이념아래 숭유억불로 모화사상과 사대주의가 극에 달하여 조상의 뿌리를 중국에 두어야 성씨의 근본이 권위를 갖는 관념이 사회를 풍미하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중국에 조상을 두어 중국성(姓)이라고 하는 말들을 주위에서 종종 접할 수 있습니다. 수나라 당나라 명나라 송나라 원나라 등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 귀화한 경우도 있겠으나 위조 족보를 만들거나 이웃 가문에 자기 가문을 의탁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임진왜란 이후 족보의 개념이 사회에 확장되어 감에 따라 선대를 조작하고 미화하는 족보 장사도 있었다고 합니다.
문화류씨가 중국황제의 핏줄이라는 원파록의 계보는 큰 매력이였을 것입니다. 이 또한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 조작의 극치였습니다. 이 지구상에 5,000여 년의 조상 선계(先系)를 가진 성씨가 있습니까 이는 위선이 아니겠습니까?
2. 설원기 원파록이 기사보에 1689년 등재됩니다.
세계최초 족보인 문화류씨
① 영락보가 1423 세종5년 양도공에 의해 간행되었고
② 설원기가 1456년5월17일 박팽년이 찬했다고 했으나 이는 위조입니다. 이후 류희잠에 의해
③ 1565년 가정보가 발간되는 데 여기에는 대승공 류차달과 첫 아들 효금 이후만 기록되었습니다.
④ 1580년 위서 [차원부설원기]가 차천로 주도로 차식3부자에 의해 발간됩니다. 그들은 교묘한 발상과 집요한 접근으로 1565년에 발간된 문화류씨 가정보에서 상당한 정보를 인용하여 원파록을 조작하여 세상에 내놓습니다.
⑤ 임진왜란이 1592년~1598년 6년간 진행됩니다. 차천로는 1615년 59세로 졸합니다.
차씨 문중의 누군가가 중국의 황제 자손인 희씨 사씨 문화류씨, 연안차씨 개성왕씨 5성의 원파록을
문화류씨 류처후 선조님에게 제시하면서 갖은 방법으로 접근
⑥ 온통 조작 위조로 점철된 원파록이 1689년 문화류씨 기사보 등재에 성공합니다. 설원기 발간 1580년 이후 109년만입니다.
발간자 류처후는 설원기를 기사보에 등재하면서 족보 말미에 다음과 같은 부탁 말을 첨언합니다.
“ 삼가 고찰해 보니 차제능 이하 21대 계보가 이미 서희 정지상 김방경 세 사람의 야사에 나타났고 설원기 중 이예장의 시주에 기록되어 있은즉 그 증거가 명확하여 의심할 여지지가 없다. 그러나 여러 책에 기록된 이름자가 같지 않은 것이 많아 보전(輔傳) 이상으로부터 차무일에 이르기까지 16세 계보는 어느 때 어느 사람의 기록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고 차무일 이상으로부터 왕수긍에 이르기까지 여러 책에 기록된 대다수가 같지 않은 것이 있으니 이예장도 선현의 출처가 자세한 것을 잃음을 한탄한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부득이 두 설을 그대로 두어 각 이름아래 별도로 주를 달았다.
또 원본에 왕조명이 유루와 함께 평양에 같이 왔고 왕수긍에 이르러 비로소 기자를 섬겼다고 하는 말은 류지원의 기록이 또 이와 같은데
류몽인이 인용한 정지상의 야사에 차제능은 유루의 후손인데 그 조상이 기자와 함께 동으로 왔다고 말하여 하나는 왕조명의 자손이다. 하고 하나는 유루의 자손이다. 라고 하였으니 두 설의 옳고 그름을 밝힐수 없다.
동래한 사실이 서로 다른데도 역시 말단에 기록을 아니 할 수 없는 것은 참고하는데 도움을 위해서다. 대개 류씨의 본원이 가장 오래 되었으나 우리 동국에는 문헌이 부족하여 증거를 댈 수 없다. 이는 비록 국가의 사실이라도 소략함이 많은데 사가에서 전하는 계보가 어찌 착오가 없기를 바라겠는가? 하물며 고려 이전 실록은 이미 중국에 들어갔고 차류의 대계도 조영규 정도전 함부림 등이 불태워 버렸으니 그 후에 비록 김사형 김전이 기록한 바 있으나 불타고 남은 데서 밝혀낸 것이니 흩어지고 자세치 못한 것이 어찌 없겠는가?
여러 책에 혹 다르고 같은 것이 있음을 필경 이것 때문일 뿐이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오히려 다행이도 류희잠이 편수한 대보기록이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역시 여러 책에 상고할 수 있었는데 류희잠이 편수한 대보 기록에 대강도 보이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아는 이는 아마도 그 때 이 강남보를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득성 하기전의 연대가 너무 멀어 자세한 것을 기록하기 어려워 기록을 못했다고 한다면 이는 심히 그렇지 못한 점이 있다.
엣날 굴원의 이소경과 대사공의 자서 모두 그 소자출(所自出)을 먼저 기록 하였으니 어찌 그 세대가 멀어 자세한 것을 알기가 어렵다고 소홀히 하겠는가? 이에 멀고 먼 화주(華冑)의 놀림을 받을 것을 각오하면서 믿을 것은 믿는대로 의심나는 것은 의심 나는 대로 전하기 위하는 뜻으로 여기에 기록한다.“
위서 설원기를 근본적인 고증과 논증 없이 문화류씨 족보에 등재하여 기사보 이후 1689~2008년은 가공의 원파록이 문화류씨의 선대의 정체성이 혼돈에 빠지는 엄청난 실수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후 족보를 발간 시 기사보를 관행대로 발행하는 잘못과 실수를 300여 년 간 벗어나지 못한 점 우리는 깊이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2000년대 초 류*차문제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문화류씨의 원파록이라는 글과 기록들이 인터넷상에 올려져 있습니다. 원파록은 조작 위작되었으니 삭제가 마땅 할 것입니다. 연안 차씨가 문화류씨를 폄하하는 최대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초 연안차씨가 문화류씨를 극히 폄하 하고 가성 모성 모칭하는 모멸적인 행태를 자행하였습니다. 이에 문화류씨의 대종회와 류주환교수는 설원기가 위서임을 밝히고 때를 맞추어 이수건 교수 김난옥 박은정 등의 학자에 의해 위서로 연구 결론을 내립니다. 차씨가 류문을 공격하는 중 위와 같이 설원기가 위서라는 사실이 밝혀짐에 진서(眞書)로 오판하여 오던 차씨들에게는 엄청난 파문이 되었을 것입니다. 경(經)과 같이 신봉하여 가문사에 접근하는 관행을 쉽게 버리기는 힘들 것입니다. 류*차 문제의 근원을 쉽사리 포기하기는 매우 힘들 것입니다.
원파록과 같은 형태의 가문사를 갖은 타 성씨들에게도 좋은 자료가 될 것입니다.
문화류씨 대종회에서는 2008년 무자보에서 [원파록삭제의변]을 발표로 류*차 관계를 깨끗이 결별하는 쾌거의 용단을 내립니다.
3. 원파록에는 무엇이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1955년에 발간된 전남광산군 본량면 동호리 대동사원지(大東祠院誌)에 실린 원파록 주요부분을 올립니다.
35쪽의 본문을 영인하여 올리기가 여의치 않아 장절의 문장만 실었습니다.
중국황제의 희씨사씨왕씨차씨(34세 공숙까지)류색에서 차달까지차씨상계21세까지류씨14세까지
* 차씨 세계 2번 * 류씨 세계 2번을 실었습니다. 이는 대승공 류차달의 흔적을 말살하는 교묘한 위조입니다.
* 위의 세계를 보면서 이를 조작한 그들에게 비열함까지 그리고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까지 왕차류 선계를 조작하여 차씨에게 무슨 득이 있겠는가??? 왜? 이를 시인하고 시정하지 않을까?
서문은 幸州 奇世哲이 지었습니다.
① 희씨세계 제일편(姬氏世系第一編) 1세 皇帝 2세 少昊~~~5세 夏后씨 까지 기록됨)
② 희씨상계 자황제지숭백범 사세이전우사씨 (姬氏上系自黃帝至崇伯凡四世而傳于姒氏)
③ 사씨세계제이편 (姒氏世系第2編) 1세 夏后禹~~~11세 向까지 기록됨
④ 사씨 자하우지불강 범십세이전우왕씨 왕씨세계제삼편
(姒氏自夏禹至不降凡十世而傳于王氏 王氏世系三編)
⑤ 1세 王祖明 2세 仙牛 3세 北頭~~~~59세 浩까지 기록됨
⑥ 왕씨상계 자조명지엄범 오십구세이전우차씨 (王氏上系自祖明至嚴凡五十九世而傳于車氏)
⑦ 차씨세계제4편 (車氏世系第四編) 1세 車無一 2世 神乙 3세 夫道~~~
33세 承穡 34세 恭叔까지 기록됨
⑧ 차씨상계 자무일지건신범32세이전우류씨 (車氏上系自無一至建申凡32世而傳于柳氏)
(柳氏世系第5編)
* 차씨 무일에서 건신 32세까지 지나 류씨에게 전해졌다.
⑨ 1세 柳穡 2세叔 3세 振阜 4세 茂先 5세 普林 6세 車達 까지 기록
* 차승색이 고려태조 명에 의하여 본성명을 1세 류색~6세 차달까지 계보를 조작했는데
여기서부터 대승공 류차달이 사라집니다. 교묘한 비열한 조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⑩ 1세 柳車達 2세 큰아들 車孝全 둘째아들 柳孝金 까지 기록
* 류차달 큰아들 차효전은 차씨시조가되고 둘째아들 효금은 문화류씨 시조가 됩니다.
* 도대체 이렇게 류 차 상계를 조작하는 수법이 발상이 놀랍습니다.
⑪ 류씨사성전상계 자색지보림5세이전우차달 (柳氏賜姓前上系自穡至普林5世而傳于車達)
* 류씨는 사성 전 색에서 보림까지 5세를 전하여 차달에 이르렀답니다.
⑫ 원파5성상계범108세역년황제원년정사지후량균왕정명4년무인(신라경명왕원년)합3612년
⑬ (源派5姓相系凡108世歷年黃帝元年丁巳至後梁均王貞明4年武人(新羅景明王元年)合3612年)
* 원파5성은 황제 원년부터 신라경명왕 원년까지 3612년이 흘렀다고 기록합니다.
황제 자손 姬씨 姒씨 王씨 車씨 柳씨 5姓이 한 원파를 이루었다고 기묘하게 조작합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아야 전후좌우가 분별될 것입니다.
⑭ 차씨각파상계
⑮ 1세 柳車達 2세 車孝全 3세 秀毗~~~~~ 21세 密頫까지 기록됨
⑯ 류씨각파상계
⑰ 1세 柳 穡(차승색인데 류씨로 복성했다고 조작) 2세 柳 叔 3 세 振阜 4세 茂先 5세 普林 6세 車達 까 찌 기록됨
⑱ 1세 柳車達 2세 孝金 3 세 金奐~~~~~ 14세 南浦까지 기록됨
* 원파록의 왕차류로 분파가 되는 과정이 미로를 헤메는 듯합니다. 차천로의 천재성이 놀랍습니다.
* 4716년 전 중국황제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온 왕씨차씨류씨는 원파다. 분성되어 동조이성이랍니다.
* 이렇게 황당무계한 논리와 조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차천로의 치밀한 천재성이 놀랍습니다.
* 위와 같이 조작된 원파록이 문화류씨에게서 3백 수십 년 간 존속되어졌음이 참 안타깝습니다.
❑ 원파록을 분석함으로써 차식 3부자와 주도자 차천로의 조직력 조작력의 우수성을 확인합니다.
4. 원파록을 조작 위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① 원조를 중국황제로 하여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 성세(姓勢)를 확장하고자 하였습니다.
② 나라를 잃은 王씨의 王짜와 車씨의 글자 조합이 쉬웠고 왕씨는 세력을 소진하고 있었습니다.
③ 류 * 차 동원설을 조작하여 류문을 차문에 끌어 안으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④ 문화류씨 시조 대승공 류차달을 삭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차씨 시조를 대승 문탁공 차달”로 변경)
학자들은 문화류씨 족보에 원파록 등재를 어떻게 기술하는가 살펴 보았습니다.
[김난옥 논문] “ 1565년(명종 20) 발간된 문화류씨 가정보 이후의 문화류씨 족보편찬에 도 설원기가 큰 영향을 미쳐 족보발간의 편찬자들 역시 이후 족보를 간행하면서 가정보 이전의 세계, 곧 고려시대 개국공신 류차달 이전의 선대 세계를 그려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문화류씨 족보 중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족보인 가정보는 고려개국공신 류차달을 그 시조로 하고 있고 그 다음 세대는 류효금 아들 한명 뿐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조 류차달은 대승 삼한 벽상공신으로 자 류효금은 좌윤으로 기록되어 있다.
설원기에서는 차원부의 선대를 류차달의 후예로 상정해 놓고 이예장의 응제시 주역부문에서 그 내력을 설명한 뒤 류차달의 큰 아들 효전에게는 차성을, 둘째 아들 효전에게는 류성을 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권문해는 설원기를 그대로 믿고 있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차씨 보도(譜圖)의 차제능 윗대 기록을 보고 대동운부군옥 성씨조 항목에 문화류씨를 언급하면서 가정보에 나오지 않은 류차달의 선대를 차씨도보를 통해 사실로 인식하였다.
이후 문화류씨 쪽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형성되고 있음을 가정보 다음 발간된 족보인 1689년(숙종15) 기사보에서 문화류씨원파기와 이예장의 글이 확인되는 것으로 알수 있다. 유학 류처후가 중심이 되어 간행한 기사보는 ‘先子後女의 기록방식을 본종으로 중시여기기 때문’이라고 명시하고 있어 가정보의 체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 기사보에 실린 원파기에 류씨의 선대세계에 대한 자세한 전말이 실려 있다. 여기서 차달 윗대의 계보가 설원기의 계보와 거의 일치하고 있으니 그 내용이 그대로 수용 되면서 문화류씨 문중에서는 선대 선조를 확인하고 인식하는 범위를 확장시키면서 가문을 현창할 수 있었다.
1708년 초간 되고 난 즈음부터 1768년 간행되는 사이의 한 편에서는 위작설이 등장하고 있다.
설원기의 위작 사실을 말하는 최초의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남극관(1689~1714)의 몽예집 잡저 편에 실린 글을 통해서이다. 그는 몇 줄 되지 않능 글이지만 설원기의 사리(辭理)가 비루하고 교망하여 위작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차천로가 문조가 있으나 이에 이르지는 못하였을 것이고 차식(차원부의 6세손)이나 그 선대에서 족보를 넓히고자 하는 목적 때문에 성삼문 등의 봉교에 기탁하여 꾸며낸 것이라 단언 하였다.
이후 이익(1681~1783), 홍계희(1703~1771), 윤광소(1708~1786), 황윤석(1769~1791), 이선(1522~1589)등이 위서로 지목하였다. 2,000년대에 류주환교수, 이수건교수 김난옥, 박은정 등이 위조 위작 위서의 실체를 연구하여 적라라하게 지적하였다.
기사보의 편찬자였던 류처후가 원파기에 대해 의심하며 신중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후대 편찬된 족보에 이 계보는 그대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황제의 후손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가문의 유구함을 드러내는 신성화 된 이야기가 형성되어 류차달의 첫째 아들이 차효전, 둘째 아들이 류효금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었고 문헌비고 권246, 예문고5에 박팽년의 차원부설원록이 실리게 되었다. 또한 같은 조상에서 갈라진 뿌리라는 각 문중의 이와 같은 입장은 문헌비고 씨족편의 문화류씨 연안차씨 항목에 위와 동일한 것이 기록되는 등 국가적 인정을 받게 되었다.
문헌비고 권48 제계고 문화류씨 권52 연안차씨. 현재 문화류씨 문중은 설원기를 위서라고 단정짓고 문화류씨와 연안차씨의 계보를 부정하였다. [문화류씨대동보] 2008 문화류씨 대종회“
5. 문화류씨 대종회는 아래와 같이 차문과 결별을 통쾌하게 선언합니다.
源派錄削除辨
우리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족보(族譜)를 편수(編修)함에 있어 편수위원회(編修委員會)의 결의(決議)와 대종회(大宗會)의 인준(認准)에 의하여 원파록(源派錄)을 삭제(削除)하고 오직 그 최초에 실린 기사보(己巳譜)의 원문(原文)을 그대로 영인(影印)하여 예전 그 자리에 보존(保存)하는 바, 이를 삭제(削除)함은 그 기록(記錄)이 경위(經緯)에 맞지 않은 때문이요, 보존(保存)하는 것은 그 기록(記錄)을 근거로 삼기 위함이다.
이는 조선(朝鮮) 말엽부터 세보(世譜) 문헌편(文獻篇)에 실려 있었는데 기록(記錄)이 허구(虛構)함이 넘치고 말이 번거로움이 심하여 위로부터 아래까지 수천년간(數千年間) 모든 사적(事蹟)을 보기가 어제 일을 보는 것 같고 듣기가 오늘 아침의 사적을 듣는 것 같은 바, 가령(假令) 기혈(氣血)을 받고 태어난 후손들이라도 오히려 그를 위본(僞本)으로 의심이 많겠으니 이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이를 깊이 연구(研究)하게 된 발단(發端)은 지난 정축(丁丑)(일구구칠(一九九七))에 연안차씨(延安車氏)들이 대전(大田) 안영공원(安永公園)의 한 모퉁이에 그들의 유래비(由來碑)를 세운 바, 비석(碑石) 안에 원파록(源派錄)에 의거하여 우리 류씨(柳氏)를 폄훼(貶毀)한 글이 있는데 우리 류씨(柳氏)를 가성(假姓)이라 이르고, 시조(始祖)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을 차해(車海)라 고치고, 이세(二世) 좌윤공(佐尹公) 효금(孝金)을 문화류씨시조(文化柳氏始祖)라 하고, 이 밖에 류씨(柳氏)를 헐뜯는 등 여러 말은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孔子)를 폄훼(貶毀)한 것과 같았다.
또 갑신(甲申)(이영영사(二○○四))에 그들이 족보(族譜)를 간행(刊行)하면서 그 유래비문(由來碑文)을 중(中) 일(日) 영(英) 독(獨) 불어(佛語) 등 오개국어(五個國語)로 번역(飜譯) 해석(解釋)하여 그 책 머리에 올려, 가까이는 역내(域內)에 반포(頒布)하고 멀리는 해외(海外)에 전파(傳播)하여 온 세상의 이목(耳目)을 바꾸고자 한 바, 그 심지(心地)의 사악(邪惡)함과 모사(謀事)의 졸렬(拙劣)함은 그 분수를 헤아리지 못한 것으로 가소(可笑)로울 뿐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우리 영락(永樂) 가정(嘉靖) 양보(兩譜)를 또한 주먹으로 치고 발로 짓밟듯 여지(餘地) 없이 배척(排斥)한 바, 해동(海東) 족보(族譜)의 효시(嚆矢)라 일컫는 것과 비교해 볼진대 어찌 그 하늘과 땅처럼 서로 다른가? 눈으로 가히 볼 수 없고 귀로 가히 들을 수 없는 바, 그 공교(工巧)로운 말이 앵무새보다 지나치고 사악(邪惡)한 뜻이 도깨비에 가까워 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는 것보다 더 간사(奸邪)하였다.
이에 동년(同年) 팔월(八月)에 우리 대종회(大宗會)에서 긴급히 대책회의(對策會議)를 열어 저들의 방자(放恣) 흉악(凶惡)함이 날로 심하여 형세상(形勢上) 그대로 둘 수 없다 하고, 난상토론(爛商討論)한 끝에 여러 의론(議論)이 하나로 모아져 이르기를 "차문(車門)의 주장이 정녕 사실(史實)이라면 마땅히 승복(承服)하는 것이 옳거니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철저히 대응(對應)하는 것이 옳다." 는 것이었다. 곰곰 생각건대 사람의 자손(子孫) 된 자로서 남이 자기 할아버지를 무망(誣妄)하는 것을 보고도 변명(辨明)할 줄 모른다면 아들을 두고 손자를 둔들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남의 능욕(凌辱)을 중지(中止)시키는 데는 증거(證據)를 세우는 것이 최선(最善)인 바, 공사가문헌(公私家文獻)으로 우리 류씨(柳氏)의 유래(由來)와 관련이 있는 것을 널리 수집(蒐集), 심층(深層) 탐구(探究)하고 정밀(精密) 분석(分析)하여 글 한편을 만들어 종보(宗報)에 등재(登載)하였으니 실로 이는 한편으로는 종인(宗人)들에게 두루 알리는 자료를 삼고, 한편으로는 차문(車門)의 소요(騷擾)에 대한 조목조목 분별의 증거를 삼기 위함이라, 그러나 결코 감정(感情)에 치우치지 않고 오직 논리(論理)를 세워 기술(記述)한 것과 증빙문헌(證憑文獻)을 동봉(同封) 우송(郵送)하여 시정(是正)을 촉구(促求)하였다.
그 후 수차 회의에서 종합(綜合) 토론(討論)한 바, 소위 차모설원기(車某雪寃記)와 강보원파록(江譜源派錄)은 전혀 역사적(歷史的) 증거(證據)가 없는 것인데 오히려 우리 선세(先世)에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젖어 들어 그 말을 맹신(盲信)하고 후인(後人)들 또한 선인(先人)의 유서(遺緒)라서 맹종(盲從)함으로 이에 이르러 저들이 그 시기(時期)를 틈 타서 또 날조(捏造)하고 또 왜곡(歪曲)하여 일(一)을 십(十)으로 더하고 십(十)을 백(百)으로 불린 것이다.
곰곰 생각건대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바꾸기 수천년(數千年) 동안, 부인(婦人)도 없이 독신(獨身)으로 백대(百代)를 전한다는 것이 어찌 있을 만한 일이라 이르겠는가? 지금에 이르도록 세간(世間)에서 아는 류씨(柳氏)와 차씨(車氏)가 동조이성(同祖異姓)이라는 말은 실로 근거없는 거짓이요 잘못된 전설(傳說)이다.
이제 모욕(侮辱)을 막고자 함에 있어 실로 이 기록을 삭제(削除)하는 것보다 우선(于先)할 것이 없고, 또한 성인(聖人)도 일찌기 의자궐지지훈(疑者闕之之訓)이있다, 곧 의심되는 것은 빼라는 교훈(敎訓)이 있었는데 우리가 오늘날 모욕(侮辱)을 막는 때에 이르러 어찌 성인(聖人)이 이른바 의심되는 것은 빼라는 말씀을 따르지 않겠는가?
더욱이 분명한 증거가 있는 바, 근래 들으니 영남대학교(嶺南大學校)에 이수건(李樹健) 교수(敎授)가 있어 사학(史學)으로 일세(一世)의 추중(推重)을 받은 분으로 그 논문(論文)에 이른 바 『조선시대(朝鮮時代) 신분사(身分史) 관련(關聯) 자료조작(資料造作)』이란 글이 출현(出現)하였는데 그 가운데 「차모(車某)의 설원기(雪寃記)는 그 후손 이재(頤齋) 삼부자(三父子), 곧 이재(頤齋) 식(軾)과 그 아들 오산(五山) 천로(天輅)와 창주(滄洲) 운로(雲輅)의 공저(共著)라.」 이른 말이 있다.
이로써 볼진대 원파록(源派錄)을 삭제(削除)하고 삭제(削除)하지 않음은 사리(事理) 판단에 밝았던 공자(孔子)의 제자(弟子) 자공(子貢)의 변명(辨明)을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결정될 것인 바, 우리 대승공(大丞公)의 후손 된 자 스스로 반성(反省)하는 자리에 있어 류(柳)씨와 차(車)씨가 근원이 한가지라는 말은 점점 후인(後人)의 입에서 없어질 것이니 성인(聖人)의 의심되는 것은 빼라는 경계(警戒)의 의의(意義)를 어찌 가볍게 이르겠는가?
저들이나 우리를 논할 것 없이 사실(史實)을 왜곡(歪曲)할진대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고 후손(後孫)을 속인다는 기롱(譏弄)과 세상을 미혹(迷惑)시키고 사람을 속이는 죄(罪)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더욱 조심하고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다.
차문(車門)에서 소요(騷擾)를 일으킨 지 십년(十年)만인 정해년(丁亥年)(이영영칠(二○○七))에 드디어 양성(兩姓)이 한 자리에서 친목(親睦)을 다지던 모임이 깨지고 각기 본래의 처지(處地)로 돌아간 바, 기분의 상쾌함이 장마에 개인 날을 얻은 것 같고, 마음의 통쾌함이 가뭄에 비를 얻은 것 같다. 이 상쾌하고 유쾌함이 마땅히 길이 전할 일로서 오직 원하는 바, 여러 종친(宗親)들은 함께 그 뜻을 힘쓰고 함께 그 힘을 다하여 오늘날 이 글을 삭제(削除)하는 의의(意義)를 계속 지켜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처: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 글을 맺으며
그동안 [차원부설원기] 독후록을 써 오면서 류*차 양문이 동조 이성이라는 허구속에 살아오게 한 위서에 대하여 종사에도 학식에도 많이 부족한 본인으로서는 참으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때를 맞추어 뿌리의 정체성을 바르게 잡으려는 류씨문중 학자의 열정과 연구자들의 위서 판정이 공개되어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면서 차문과 결별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은 조상님의 보살핌이라 생각합니다.
그 방대한 역사와 중국의 황제를 가문사에 끌어드리는 아부성, 희씨사씨왕씨차씨류씨 5성의 원파를 조작함으로써 전통성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차식 3부자의 열정과 천재성을 알게 됩니다.
이의 조작설을 연안차씨들은 극구 부인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난날 실학자와 오늘날 학자들이 조작 위작한 위서라는 판정을 수긍 못하고 집착하는 차문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또한 아직껏 류문에서 “원파록삭제의변”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류문이 계심을 압니다. 중대한 사안이라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필귀정입니다. 시간이 해결할 거라 기다려봅니다.
자료가 국한되어 폭넓은 분석을 못한 점 양해있으시기 바랍니다.
종원이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원파록(원파기) 자료를 카페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추가자료
차문은 신라 1대왕 박혁거세로부터 차씨성을 하사 받은 차무일 38대손을 차달(류를 빼고)이라 합니다. 그런데 당시 박혁거세 자신도 성씨가 없었는데 어떻게 남의 성씨를 하사 했다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다음 기사(아래 영문 주소를 클릭)를 읽어 보십시오.
1. 한자성씨(1,500개)가 아닌 한글성씨(4,075개)이 많이 생겼다.
2. 박혁거세 김알지는 성씨가 없는 사람으로 이름만 있었다(중국문화 영향으로 소급해서 성씨를 붙였다)
※주1---자신도 성씨가 없는 왕 박혁거세가 어떻게 차무일에게 차씨성을 하사 했다는 말인가? (차원부설원기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임)
3. 왕건이 후삼국 통일후 호족들에에 성씨와 본관을 주었다(토성분정)
※주2---후삼국 통일전 왕건에게 수레와 군량을 지원할 때 류차달 문화류씨 시조는 이미 성씨가 “류”씨로 왕건이 성씨를 준 것이 아니다.
4. 17세기에 족보를 많이 만들기 시작하니까 그 중간 계보 자료가 없어 박씨(로 성을 만든 사람)들은 다 박혁거세와 연결하여 왕손이 되는 것이다.
※주3---차원부설원기 작가가 이런 부분을 이용하여 이런 이야기를 만듭니다.
황제, 희씨, 하우제, 사씨로 이었다가 고조선 “왕조명”을 끌어들여 왕조명 후손으로 다시 기자조선 왕수긍 후손이 되고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할 때 차무일이 좌상(국무총리급, 다시 시중으로 고침)으로 차씨성을 하사 받고 柳車達에서 車라는 글자와 류차달 시조의 외아들 柳孝金에서 孝자를 이용하여 柳孝全 이란 이름을 만들고(차효전이 실존인물이라면 왕건에게 식읍 천호를 받았으니 고려개국공신 명단에 있어야하는데 공신명단에 없다) 왕건이 차씨로 하라고 했다고 하여 다시 車孝全으로 류차달 큰아들로 만들었는데 2000년 “차문 역사 바로세우기” 하면서 차달(류자를 빼고 차달이라 했는데 문화류씨에서 항의하니 고려대전에 차달 위패를 철수 하면서 류차달로 고침)은 차무일의 38세손이라고 했습니다.
※주4---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차씨성을 가진 관리는 없으며 신라는 화백회의 6부족이 아니면 관리를 할 수 없는 나라인데 6부족이 아닌 차싸가 14-18명의 승상 좌상(신라에 없는 관직임)을 했다는 말인가?
※주5---이렇게 해서 원파록을 만들어 어느 스님이 주고 중국으로 갔다고 하였으며 세조 왕명으로 차원부설원기를 박팽년이 썼다고하니 당시 감옥에 있는 박팽년이 차원부 설원기를 쓸 수 없다는 정보를 알 수 없었고 일부 학자는 자기 문집에 차원부설원기 작가(문장력이 뛰어니 남의 과거를 대리로 봐주었고 희미한 차문을 명문가로 만들기 위해서)가 위서를 만들었다고 했으나 이 정보를 공유할 수 없는 우리 선조들이 차씨를 큰집으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했으나 지금 후손이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합니다.
위 기사의 요약1. 한자성씨(1,500개)가 아닌 한글성씨(4,075개)이 많이 생겼다.
2. 박혁거세 김알지는 성씨가 없는 사람으로 이름만 있었다(중국문화 영향으로 소급해서 성씨를 붙였다)
※주1---자신도 성씨가 없는 왕 박혁거세가 어떻게 차무일에게 차씨성을 하사 했다는 말인가? (차원부설원기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임)
3. 왕건이 후삼국 통일후 호족들에에 성씨와 본관을 주었다(토성분정)
※주2---후삼국 통일전 왕건에게 수레와 군량을 지원할 때 류차달 문화류씨 시조는 이미 성씨가 “류”씨로 왕건이 성씨를 준 것이 아니다.
4. 17세기에 족보를 많이 만들기 시작하니까 그 중간 계보 자료가 없어 박씨(로 성을 만든 사람)들은 다 박혁거세와 연결하여 왕손이 되는 것이다.
※주3---차원부설원기 작가가 이런 부분을 이용하여 이런 이야기를 만듭니다.
황제, 희씨, 하우제, 사씨로 이었다가 고조선 “왕조명”을 끌어들여 왕조명 후손으로 다시 기자조선 왕수긍 후손이 되고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할 때 차무일이 좌상(국무총리급, 다시 시중으로 고침)으로 차씨성을 하사 받고 柳車達에서 車라는 글자와 류차달 시조의 외아들 柳孝金에서 孝자를 이용하여 柳孝全 이란 이름을 만들고(차효전이 실존인물이라면 왕건에게 식읍 천호를 받았으니 고려개국공신 명단에 있어야하는데 공신명단에 없다) 왕건이 차씨로 하라고 했다고 하여 다시 車孝全으로 류차달 큰아들로 만들었는데 2000년 “차문 역사 바로세우기” 하면서 차달(류자를 빼고 차달이라 했는데 문화류씨에서 항의하니 고려대전에 차달 위패를 철수 하면서 류차달로 고침)은 차무일의 38세손이라고 했습니다.
※주4---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차씨성을 가진 관리는 없으며 신라는 화백회의 6부족이 아니면 관리를 할 수 없는 나라인데 6부족이 아닌 차싸가 14-18명의 승상 좌상(신라에 없는 관직임)을 했다는 말인가?
※주5---이렇게 해서 원파록을 만들어 어느 스님이 주고 중국으로 갔다고 하였으며 세조 왕명으로 차원부설원기를 박팽년이 썼다고하니 당시 감옥에 있는 박팽년이 차원부 설원기를 쓸 수 없다는 정보를 알 수 없었고 일부 학자는 자기 문집에 차원부설원기 작가(문장력이 뛰어니 남의 과거를 대리로 봐주었고 희미한 차문을 명문가로 만들기 위해서)가 위서를 만들었다고 했으나 이 정보를 공유할 수 없는 우리 선조들이 차씨를 큰집으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했으나 지금 후손이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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