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사라진 원본 류형원 여지지 13권

ryu하곡 2017. 11. 12. 19:55

출처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dokdo&no=43262

제목 : 사라진 원본 류형원 여지지 13권본의 증거는 이익의 반계 류형원전

글쓴이 okidoki

2016-02-13 18:39:09

류형원 여지지 13권본 원본의 증거는 이익의 반계류형원전

여지지에 대한 모든 회의론이 붕괴하는 건 동국여지지 9, 류형원 여지지 13

류형원 여지지는 13권본이 진본인데 아무리 9권 짜리 비슷한 책을 가지고 반론을 제기하더라도 소수자의 소극적 회의론은 가능할지언정 시모조 마사오 식의 적극적 부정을 추진하기에는 절대적으로 증거력 부재임.

설사 같은 계통의 비슷한 책이라는 주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요약본을 가지고 원본이 어떻다 말할 근거가 있겠냐? 희망사항이지 왜 9권짜리 비슷한 동국여지지가 류형원 여지지 원본과 같은 책인지 시모조건 누구건 입증한 바 없다.

강한 주장을 하려면 먼저 응당의 강력한 입증부터 마치고 시도할 것. 불가능할 것이다. 그딴 증거는 없다.

단지 신증여지승람의 문구와 동국여지지의 문구가 많이 비슷할 뿐이다.

울릉 우산 이도설 뒤에 일도설을 첨기한 책이 어디 한 둘이었냐?

아래는 참고 자료로 붙여 둡니다.

<조선 실학의 비조 반계 류형원 선생 탄생 390주년 기념 전북일보 기사에 실린 영정(2012.10.14)>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450269

1656년 류형원(柳馨遠; 1622-1673)이 밝혀낸 특별한 지식은 울릉도 우산도 이도론을 확립했다

일본의 대중적 시인 시모조 마사오 씨가 본 동국여지지는 910책인데,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살았던 18세기의 류형원 여지지는 13권 본이었다.

증거 : 이익(1681-1763)이 쓴 류형원의 전기반계류선생전에 따르면 류형원의 여지지는 13권의 형태였다. - ‘磻溪柳先生傳星湖先生全集68,

1787년 정조 11년에 처음 찬진된 어제문집홍재전서(弘齋全書)에 실린 정조 임금의 독서 목록 중에 류형원의 여지지(柳馨遠之輿地志)가 나온다.

위 두 개의 사실은 신경준이 말한 여지지운 : " 일도설도 있지만 여러 지지 지도를 고려할 때 두 섬이고 그중 하나는 우산이며 왜인이 말하는 송도이고 두 섬 모두 옛 우산국의 땅이라"는 진술을 올바로 평가하는 데 중요한 근거를 마련한다.

星湖先生全集 68, 磻溪柳先生傳

磻溪柳先生馨遠字德夫 文化人 右議政寬之後也 生質長大魁梧 目朗如明星 五歲通籌數 甚有記性 讀書不過數遍 終身不忘 其舅李監司元鎭 所稱太湖先生者也 博學多聞 先生從而受業 未成童 已有偉器之稱 稍長該涉百家語 益涵心爲己之學 乃喟 爾曰士志道而有不能立者 心不率氣也 君子飭躳之要四 吾未能一焉 夙興夜寐未能也 正衣冠尊瞻視未能也 事親柔色未能也 與家人敬相對未能也 四者惰於外而心荒於內 猛省必勉 不在玆乎 因箴而自警 自是日用言爲 有法守而無違 旣而倜儻慷慨 日諷誦陶元亮詩 有曠世之感 遂南歸扶安之邊山下居焉 結廬數椽 藏書萬卷 刻意覃思 至忘寢食 常以不及古人一步地爲深 恥 嘗燕居深念 天下爲己任 病世之學者不達時務 徒尙口耳 其爲言皆苟而已 故在家在邦 當事齟齬 卒歸於大言無實 而生 民受其禍 於是取先王之法 考之以因革 參之以國典 著爲一書 規模宏節目詳 驗乎人情 稽乎天理 筋脈相連 氣血流通 命之 曰隨錄 要之可行於今日也 或疑其不務大體 零瑣是擧 先生曰天下之理 非物不著 聖人之道 非事不行 古者敎明化美 自大 經大法 以至於一事之微 制度規畫 無不備悉 天下之人 日用而心熟 如運水搬柴 皆有其具 以行其事 及周之衰 王道雖廢 典章猶存 聖人居下 槩言出治之源 其於度數 無所事於曲解也 虐秦以還幷與其宏綱細目而蕩滅之 聖人之意 無復徵信 人欲 肆行 羣言亂道 遂乃耳目膠固於見聞 雖高才深智 博於古者 亦無由得其詳也 故間有識其大體而條貫未明 一欲施措 動多釁 罅 終焉格而不行也 天下之理 本末大小 未始相離 寸失其當 尺不得爲尺 星失其當 衡不得爲衡 未有目非其目而綱自爲綱 者也 及不得行也則不惟小人以爲嚆矢 其君子亦未免有疑於時之異宜 謂古道眞若不可復明於世 此豈小害也哉 吾爲此懼 究 古揆今 細大兼該 用著此道之必可行 嗚呼 徒法不能以自行 苟有有志者思而驗焉則亦必有以知此矣 至我顯廟癸丑先生歿 年五十二

所著有隨錄十三卷 理氣總論一卷 論學物理二卷 經說一卷 詩文一卷 雜著一卷 問答書一卷 續綱目疑補一卷 郡縣制一卷 東史條例一卷 正音指南一卷 紀行日錄一卷 其所編有朱子纂要十五卷 東國文十一卷 紀效節要一卷 書說書法各一卷 遁翁稿三卷 輿地志十三卷 其佗兵謀師法陰陽律呂星文地理醫藥卜筮籌數譯語之類 無不旁通 多所筆削 皆未及成緖云 後士林集議建院 俎豆不廢 贊曰先生之學 源於太湖 太湖授之以博 先生濟之以世務 據始要終 協義而協 如有用我 將擧以 措之 蓋國初以來 論經世之才 皆以先生稱首

 

위 자료는 류형원의 여지지 인용문구가 신경준이 자의적으로 개찬한 후대의 날조라는 소위 개찬설에 쐐기를 박을 증거력을 제공한다.

만약 신경준이 강계지와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에서 류형원의 여지지 문구를 함부로 개찬하여 날조했다면 독서량이 많았던 정조 임금에게 바로 들켰을 텐데 신경준은 천수를 누리다 갔다.

시모조가 상상하듯 함부로 개찬하였다가는 임금을 기망한 혐의를 받아 목이 날아갔든가 귀양을 갔을 것이다. 아무리 신경준이 천재적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하나의 목숨을 도박에 걸 인간은 없다.

그러므로 현 서울대 규장각에 남은 910책 본 동국여지지를 류형원의 원작으로 보는 학계 일부의 시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이와같은 시각이 성립할 가능성을 합리적인 수준에서 최대한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저본이 필사본으로 알려진 규장각 본 910책 본이 류형원의 원작을 고스란히 보전한 것이 아니라 원작을 초사하는 과정에서 일부를 누락시키고 베껴쓴 초략본일 확률이 높다.

매 권이 비슷한 길이의 비슷한 문자수를 담았다고 가정할 경우 13권에서 9권으로 대략 30%를 생략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이보다 간단한 설명 역시 가능하다. 910책본 동국여지지가 류형원의 13권 여지지가 완성되기 전에 비교적 일찍 갈려나간 류형원의 제자나 문인 혹은 다른 실학자의 아류작일 가능성이다.1

요약하면, 1656 류형원 여지지 > 1756 신경준 강계지 > 1770 신경준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로 이어지는

우산 울릉이 두 섬이고 하나가 (즉 우산이)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이며 두 섬 모두 본래 우산국지라는 명제는 실학의 선구자 류형원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병란을 경험한 조선인들의 산 교섭 경험에서 실사구시적으로 밝혀 정리한 조선 중기의 역사지리적 규명이었다.

적어도 18세기 말까지는 전해졌을 13권 본 류형원 여지지가 있었음을 볼 때, 다음이 해명된다.

"(2) 중 한 섬은 우산이다."

"이는 왜인이 말하는 송도이다."

"울릉 우산 두 섬은 모두 우산국의 땅이었다"

등이 각 문헌에 인용될 때 순서를 달리하며 인용되는 모습이 보인다.

시모조는 이마저도 개찬의 증거라고 근거가 희박한 비약적 판단으로 내달리는 듯한데,

실제로는 신경준 개찬의 증거가 아니고 13권본 류형원의 여지지가 유통되던 당대 현실에 기인한다고 보면 훨씬 쉽게 납득되는 결과다.

류형원의 반계수록을 위시하여 그의 저작들의 존재가 널리 알려진 것은 1740년대에 들어서이다.2

이점에서 류형원의 13권본 여지지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정조 임금이 곁에 두고 읽던 류형원 여지지가 역사지리학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읽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시모조 씨가 상상하듯 신경준이가 홀로 류형원 여지지에 없던 문구를 날조하여 유포하였던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동시 다발적으로 류형원 여지지에서 각자 필요한 문구를 원하는 순서대로 독립적으로 인용한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동국여지지와 비교해서 문자가 약 44% 많았을 류형원 여지지 13권본에서 일도설만을 인용하려 했다면 고려사 지리지와 같은 일주이종적 제시방식의 다른 지리서도 있는데 굳이 이주일종에서 쥐꼬리 만한 일도설을 얻기 위하여 여지지를 인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3

신경준이 여지지를 인용한 것은 시모조가 상상하듯 일도설이 필요해서가 아니고 그 속에 일도설을 선명하게 부인하는 특별한 변별적 가치를 지닌 역사지리적 탁견이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따라서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이미 주류설로 등극한 이도설에 이어

임란 호란을 통해 강도 높은 국제교섭을 경험한 조선인들이 1656년 류형원 여지지에서 역사 지리 국제정치 어느 면으로도 흠결이 없는 완벽한 울릉도 독도 지배력을 확보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같은 지식은 이를 확보한 조선인 안용복이 1690년대에 발생할 울릉도 쟁계에서 성공할 국제적 소양으로 무장시켰으며 또한 근대기 이래 한국인들이 제국주의적 겸병의 쟁탈전을 견뎌내고 울릉도 독도를 지켜낸 현대 한국의 앎에서 나오는 힘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1: 류형원은 비록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당대의 명석한 두뇌들과 활발히 교섭하였다. 일례를 들자면 박자진(朴自振;16251694)과 함께 한백겸의동국지()(東國地())에 대해 깊이 토론한 끝에 지리의 식견을 정리한 여지지(輿地志)를 비롯해 지리군서(地理群書)를 찬술한 것인데 그와 교유하며 토론하던 역사지리학가들 중에 비슷한 성향의 저작가가 류형원과 동시에 혹은 전후하여 같은 경향의 연구와 저작 활동을 추진했을 수 있다. 이는 류형원의 반계수록이나 신경준의 강계지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대단한 관심과 칭송을 받았던 사실로 보아 실학적 저작물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있었음을 뜻한다.

2: "33세 무렵(1742년 경) 한성부에 올라온 실학자 안정복은 남대문 밖 도저동(桃楮洞, 현 후암동 부근)에 살고 있던 류형원의 증손 류발(柳發, 1683-1775)이 둘째 아들 류광위(柳光渭)의 상을 당하여 조문차 방문하게 되었다.[15] 이때 류형원의 유고(遺稿)를 소장하고 있던 류발을 알게 되었고, 그 후 류발을 자주 만나 그 동안 한 번 보기를 염원하던 반계수록(磻溪隨錄)을 비롯하여 류형원의 여러 저술을 빌려볼 수 있게 되었다.[15] 성호 이익의 문인이자 수제자이기도 했던 안정복은 특별히 그를 만나 그의 저서를 수시로 빌려 탐독, 직접 영향을 받기도 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류형원#.EA.B8.B0.ED.83.80

3: 류형원의 여지지가 이주일종이었다는 직접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간접적 증거는 많다. 류형원 여지지가 동국여지승람에서 실용성이 적은 문학(제영)과 씨성(성씨)을 제외한 실용적 역사 지리 정보만을 추려 실사구시적으로 증보 갱신하는 문헌임을 본다면 동국여지승람과 마찬가지로 이주일종 체제를 따랐음은 분명하다. 세종실록 이래 그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이나 공히 이주일종 체제로 이도론을 주류 이론으로 앞세우되, 일도설을 비주류 가설로 남긴 형태였음을 볼 때 류형원 여지지가 특별한 근거도 없이 조선조의 대세인 이주일종 체제에서 이탈하여 일도설만 다뤘다든가 일주이종 체제를 따랐을 가능성은 전무했다고 봐야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