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車門에 대한 柳門의 立場[柳氏와 車氏는 同宗이 아닙니다]

ryu하곡 2018. 1. 12. 22:52

 

> 대종회 > 차문에 대한 류문의 입장, 2011. 3. 31.


 
車門에 대한 柳門의 立場
[柳氏와 車氏는 同宗이 아닙니다.]


 
    『世有許多文獻而不檢證於其眞僞虛實則寧不如無者也』
    「세상에 많은 문헌이 있으나 그 진위와 허실이 검증되지 않았다면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이는 옛 성현께서 탄식하신 말씀을 의역한 것인데, 후세 학자들도 공감하는 견해이고 우리 역시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4년부터 수년간, 류 차 양문 간에 선계 문제로 상호 시시비비 많은 필전(筆戰)을 가졌던 바, 차문에서는 우리 류문에서 제기한『차원부설원기』에 의한 원파록 조작에 대한 해명은 모두 얼버무리고, 동선이성(同先異姓)이라는 해괴한 논조로 근세 양문 간에 뻔히 아는 상황만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한편 예전대로 환원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류문과 차문과의 관계에 대해서 한두 가지 쉬운 예를 들어 이르겠습니다. 첫째, 부부간에 자녀를 낳아 기르다가 성격상, 혹 경제적, 혹 어떤 이유로 이혼한 부부 간에 후에 자식을 위해서든 또는 여하한 사정으로 재결합하는 경우도 있고, 둘째, 어려서 고아원에서 만나 서로 형제로 알고 지낸 고아 사이에 후에 친부가 나타나 동기간이 아님을 확인하고 헤어질 경우도 있습니다. 상식으로 전자의 경우는 이해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계속 형제의 의를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
    돌이켜 보건대, 근세에 들어 왜곡된「원파록」의 사실을 모르고, 의심 없이 지내던 오늘날 류ㆍ차 양문의 입장이 후자의 경우와 똑 같습니다.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은 터에 2011년 3월19일 입수한 2010년판 『車門宗報』를 살펴보고 그 가운데 실린 몇 가지 사항을 간추려 쪽수 차례로 간략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55쪽,『차원부설원기가 나오기 전 고려 초기 서희의 야사와 정지상의 서경잡기와 김방경의 초당일기 등에 선계에 대한 단편적인 것만 전해 내려왔다.』운운에 대하여, 현재까지 국가공인 고전 서지목록에 서희와 김방경의 저서는 없고, 다만 정지상의 저서로『정사간집』이 있을 뿐인 바, 앞서 이른 서적이 분명 존재한다면 그 복사본이라도 제시하기를 요구한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63쪽,『대승공 류차달의 행적이 고려사에 나타나지 않는다.』운운에 대하여, 고려사 열전, 공의 6세손 문간공 류공권 편에「공의 6세조 대승 차달은 태조를 도와 공신이 되었다.」고 등재되어 있고, 그 밖에 동국여지승람 황해도 문화현의 인물편에「류차달은 태조가 남방을 정벌할 때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융통 공급함으로써 그 공훈으로 대승의 관직과 삼한공신의 훈호를 받았다.」라고 소연히 등재되어 있습니다. 문헌을 보았는지요? 못 보았는지요?
    64쪽, 류문의 모 임원이 쓴『車譜序疑』(「차씨 족보 서문에 대한 의문」)이란 글을 보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약재상공 류상운(約齋相公 柳尙運)을 모독하는 불경스런 주장이다.』라고 힐책한 데 대하여, 우리 대종회에서는 조선왕조실록 및 약재상공의 묘갈명과 연보 등을 두루 살펴 사실을 쓰고, 또 그 유고 「약재집(約齋集)」에 차씨의 귀중한 족보서문이 실려 있지 않음을 들어 의혹을 제기하였습니다. 짐작건대 차문에서 그 훌륭한 명망을 흠앙하여 약재상공이 서거한 직후에 날조하였는지? 그렇지 않았다면 약재집에 빠질 이유가 없는 바, 납득할만한 해명을 못하는 차문에서 그 모독 불경을 오히려 사과할 것을 정중히 권합니다.
    65쪽,『양문이 불화를 계속하게 되면 부산 기장 차능과 광주 광산 대동사 세향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차류대종회에서 1970년대 들어 차능을 봉축하여 향사를 주관하고, 2000년대 들어 대동사 사우 중수를 계기로 그 숭모회 및 보존회를 결성하여 향사에 적극 협조하였으나, 2007년 차류대종회가 해체된 후로는 양쪽 모두 그 지역에서 근근이 향사를 받들고 있습니다.
    옛말에〈可祀者祀之非其鬼而祭之諂〉〈가히 제사를 지낼 분에 제사를 받드는 것이지, 제사 지낼 신령이 아닌데도 제사를 받드는 것은 아첨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차ㆍ류 양문의 관계가 종결되어 차류대종회가 해체된 이상 우리 대종회에서는 앞으로 시조 대승공의 향사를 주관하여 받들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68쪽,『1390년 운암 차원부가 차류보판을 해주 신광사에 보관한 후에 월파옹을 포함한 차문 70여인이 송원 마원에서 추살 당하고 차류보판도 소실 당하였다.』운운한 데 대하여, 그 말대로 차류 양문의 족보를 함께 발간했다면 류씨들은 전혀 모르게 차원부 혼자 간행했다는 말입니까?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또 차문 70여인이 추살 당했다 하는데, 차씨 족보에 당시 생존자를 모두 헤아려 보아도 70여인이 되지 않는데 70여인 추살 운운은 신빙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엄청난 사건이 있었다면 정사는 물론 어느 야사에라도 나타날 것인데 전혀 없으니 이 또한 차원부설원기의 날조의 극치라 여겨집니다.
    75쪽, 호랑이 설화를 무려 30쪽에 달하도록 장황하게 쓰고 도표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그에 대하여 전국 여러 성씨를 통틀어 이야기를 모으면 어찌 그 뿐이겠습니까? 일고의 가치가 없는 횡설수설에 불과합니다.
    85쪽,『문화류씨 조상인 중대광 대승 문탁공 차달』운운한 데 대하여, 중대광은 1품, 대승은 3품으로서 고려 때 지방 토호 등에게 준 향직의 품계입니다. 한 사람의 직계가 1품이면 1품, 3품이면 3품이지 1품, 3품을 병기할 수 있습니까? 문탁공이란 어휘의 시호는 금시초문이고, 우리 시조 류차달은 다만 대승일 뿐 시호를 받지도 않았고 전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차문에서 임금을 사칭, 대승공의 관직을 높여 시호를 내린 격으로서 외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후손으로서 선대의 관직을 사실대로 기록해야지, 높이거나 올리는 것은 법도를 모르는 천박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111쪽,『몇몇 사가들이 설원기를 위작이라는 주장이 약간 있다.』운운한 데 대하여, 설원기를 위작이라 주장한 분들은 모두 당대에 학문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사학에 조예가 깊은 대표적인 실학자들로서 곧 영조 때 담와 홍계희(淡窩 洪啓禧), 몽예 남극관(夢囈 南克寬), 이재 황윤석(頤齋 黃胤錫), 성호 이 익(星湖李 瀷), 지호 이 선(芝湖 李 選) 등 석학들이었고, 현세의 학자로는 이수건(李樹健), 김난옥 및 우리 종중의 류주환(柳朱桓) 교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예전 석학들은 물론 현세 학자들 또한 차씨와 무슨 철천지원수이기에 괜히 남의 선대의 기록을 위작이니 날조니 공개적으로 비판하겠습니까? 그 분들을 힐책하기에 앞서 공사, 진위, 시비를 가려 후학들에게 바르게 가르치고 전하려는 학자들의 우수한 정신과 정직한 기개를 우리 모두 높이 평가하고 존경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대종회에서는「차원부설원기」를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설원기의 허구성, 그에 의한 원파록의 날조 등, 하나에서 백까지 수긍하려고 해도 수긍할 수 없는 조작의 실태가 환히 드러나는데 귀문에서는 이러니 저러니 추측 운운하며 얼버무리고 있는 바, 참으로 삼척동자 아니고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112쪽, 정조 10년(1786) 9월7일,「일성록」에 의하면, 차원부의 시호를 청하는 상언에 대하여『수백 년 동안 거행하지 못했던 일을 지금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운운하였습니다. 그런데 2004년도에 간행한 연안차씨대동보 문헌편을 펴 보니, 세조 2년(1456) 5월 차원부에게 문절공의 시호가 내린 냥 교지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세조 때 이미 시호를 받고서 330년이 지난 후 정조 때 시호를 또 청하다니? 자가당착도 유분수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문화류씨 대종회에서는 지난 2004년부터 역대 족보 및 많은 공ㆍ사가 문헌을 수집, 수년에 걸쳐 정밀탐구하고 앞서 거론한 학자들의 유고 및 연구논문들을 참고하여 대종회의 결의로《원파록삭제변》을 부쳐 드디어 2008년 5월 대동보(23권 1질)를 간행, 세상에 배포하였습니다. 우리 문화류씨는 예전과 다름없이 역사적으로 확연한 대승공 류차달을 시조로 받들어 명문의 전통을 지켜나갈 뿐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끝으로 드릴 말씀은 옛날에 문장과 박식이 많았지만 공가문헌을 접하기가 실로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반대로 학문은 예전만 못하지만 모든 문헌이 전부 공개되어 누구나 구하여 보기가 쉬워짐으로써 거짓이 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논어에『過則勿憚改』곧 허물이 있거든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라는 뜻으로, 자신을 다스림에 용맹치 못하면 악한 마음이 날로 자라나기 때문에 허물이 있으면 속히 고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차문에 거듭 이르는 바, 사실이 뻔히 왜곡된 것을 알면서도 선대의 일이라 고집하며 괜한 억설을 일삼아 세월을 보내는 것은〈조상을 욕되게 하고 후손을 기만하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 하루빨리 용단을 내려 세간의 냉소를 면하고 후손들의 의혹을 해소하여 떳떳한 종중의 역사를 확립하는 것이 현세대의 지혜로운 정도의 선택이라 고언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서기 2011년 3월 31일,     文化柳氏大宗會  

 

2008 문화류씨세보(世譜): 류씨와 차씨는 관계없음을 천명함

연안차씨가 10여년전부터 문화류씨의 시조 대승공 류차달을 모독하기 시작해서

촉발된 류씨와 차씨의 문제(이하 류차문제)는 2008년에 문화류씨 대동보(전체 족보)인

"문화류씨세보"가 발간되어 류씨와 차씨는 관계없음을 대내외에 천명(闡明: 드러내서

밝힘)함으로써 결론이 났습니다.


문화류씨 대종회에서 문화류씨 전체의 의견을 종합하여 대동보에까지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더 이상 대승공의 성명에 대해 왈가왈부하여

문화류씨의 시조를 모독하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이나 류씨와 차씨의 조상이 같다고

하는 잘못된 말은 없어져야 합니다. 아래의 "4. 원파록삭제변(辨)"에 이런 결론에까지

이른 내력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문화류씨세보에 나와 있는 관련 내용을 종합-정리하여 소개합니다. 류차문제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합니다.


주:

- 편의상 관련 부분만 발췌하였습니다.

- 한자로만 나와 있는 부분은 한글을 먼저 쓰고 한자를 괄호 안에 넣었습니다.

- 말이 어려운 부분은 필자가 괄호 안에 해설하거나 쉬운 말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1. 문화류씨세보서(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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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차씨(車氏)들의 소요(騷擾: 시끄러운 사건을 일으킴)에 대한 변명(辨明)은

처음에는 곧은 것으로 원망(怨望: 분하게 여겨 탓하거나 미워함)에 보답하는데

시작되어 나중에는 바른 것으로 사특(邪慝: 잘못되고 악한 것)한 것을 물리침으로서

마치었으니 이른 우리 류씨(柳氏)의 공통된 의견이었던 바, 회계(會稽)의 수치(羞恥),

곧 중국(中國)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했던 회계산(會稽山)에서의 수모(受侮: 모욕을 받음)를 구천(句踐)이 가히 잊겠는가?"


해설: 

족보의 서문입니다. 여기서는 류차문제가 불거졌을 때 처음에는 그것을 원망하였고

사실을 가지고 차씨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그 원망을 갚으려고 했는데, 점점 근본적인

문제점과 차씨들의 간계(간사한 꾀)를 알게 되어 마침내 류씨와 차씨의 관계를 해소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복수를 이룩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달게 겪는 것)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구천과 부차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월나라 왕 구천은 회계산에서 오나라

왕 부차에게 항복을 하고 온갖 치욕을 겪었는데 이것을 "회계지욕(會稽之辱)"이라

합니다. 구천은 갖은 고생을 다하며 복수를 계획해서 마침내 성공합니다. 그렇게

류씨들이 차씨들이 일으킨 사건을 잊지 않고 대응을 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 문화류씨세보발(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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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차문(車門)에서 우리 류씨(柳氏)에 대해서 감히 가성(假性: 임시로 쓰는 성,

가짜 성)이라 이르고 우리 가정보(嘉靖譜)에 대해서 또한 감히 조작(造作)이라 운운하며

그 망령(妄靈)됨이 다함이 없었다. 이에 우리 대종회(大宗會)에서는 의논하기를, 남의

능욕(凌辱: 모욕; 업신여겨 욕보임)을 막으려면 증거를 세움보다 앞설 것이 없다 하고

드디어 내외 문헌(文獻)으로 우리 류씨(柳氏)의 유래와 관련이 있는 것을 모아 연구하고

더욱 연구하기를 무려 수년만에 저들의 주장이 모두 날조(捏造)와 허위(虛僞)의 지경으로

돌아가 차문(車門)에서 소요(騷擾)를 일으킨 지 십년 만인 정해(丁亥; 2007년)에 드디어

양성(兩姓)이 회동하는 약속을 파기하였다. 아아! 운무(雲霧: 구름과 안개)가 태양(太陽)을

가리운들 어찌 가히 오래 가겠는가?"


해설: 

발(跋 = 발문跋文)은 본문 내용의 대강이나 또는 그에 관계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입니다. 


차씨문중(차문)에서는 그동안 '류씨'가 가짜 성, 또는 임시 성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리고 가정보에서는 대승공의 맏아들이라고 주장되는 차효전이 나오지 않으니

조작되었다고 비난해왔습니다.


그런데 가정보는 가정임술년(1562년)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문화류씨의 가장 오래된

족보입니다. 가정(嘉靖)은 중국 연호의 하나입니다. 가정보 앞에는 영락보(永樂譜)가

있었는데 1423년 만들어진 이 족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의 체제를 갖춘 본격적인

족보인데 아쉽게도 남한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고 북한에는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정보는 외손의 외손까지 기록하여 문화류씨들보다 다른 성씨들이 훨씬 많이 올라있는

족보이며 그 내용이 엄밀하여 학계에서도 귀중한 자료로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치 있는 족보에서 대승공의 맏아들이 있었다면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대승공의 아들은 가정보에 나온 대로 류효금이라는 분 하나뿐인 것입니다.


그 후 문화류씨들은 열심히 문헌을 찾아보며 대체 어떤 것이 진실인지를 탐구했습니다.

그 결과 차원부설원기가 위서(僞書: 가짜 책)임을 밝혀냈고 류씨와 차씨가 같은 조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류문에서는 2007년에는 그동안

차씨와 류씨들의 결합 단체였던 "차류대종회"를 파기함으로써 차문과의 관계가

없음을 천명했습니다.



3. 문화류씨세보범례(凡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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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문(車門)에서 근래의 성씨(姓氏)와 족보(族譜)로써 분란(紛亂)을 일으킨 일이 있는데

우리 성씨(姓氏)를 폄훼(貶毁: 남을 깎아내리고 헐뜯음)하여 가성(假姓)이라 이르고

우리 족보(族譜)를 비방(誹謗)하여 위보(僞譜: 거짓된 족보)라 이른 것이다. 우리

종회(宗會)에서는 그 진위(眞僞)를 분별(分別)하고 그 시비(是非)를 규명(糾明)하고자

더욱 널리 더욱 깊이 탐구(探究)하였는데 "가성위보"(假姓僞譜) 4자(四字)의 명목(名目)이

돌아갈 곳은 마땅히 저들의 차문(車門)이요 우리 류문(柳門)이 아닌 바, 어찌 그

분란(紛亂)에 대치(對峙: 서로 맞서서 버팀)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에 당시 여러 말과

관계되는 문헌(文獻)을 모두 지나간 일은 말하지 않고 이미 지난 일은 꾸짖지 않는 데로

돌려보내는 바, 이는 나에게 대들어도 굳이 상대(相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기사보(己巳譜)에 실린 원파록(源派錄)만은 후일 고고학자(考古學者)를 위해서 특히

영인(影印: 사진을 찍어 인쇄함)으로 남겨 전하는 바, 보는 이는 양지(諒知: 살피어 앎)하기

바란다.


해설: 

족보에서 범례(일러두기)는 의외로 중요합니다. 족보를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만들고

구성했는지를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범례 항목에서는 류문이 차문에서

일으킨 문제들을 연구해왔고 충분히 세세하게 대응할 수 있지만 족보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보이겠다는 태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기사보(1689년의 문화류씨

족보)에는 류씨와 차씨가 같은 조상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의 원파록이 처음 실렸는데

"망매(茫昧: 흐리터분하고 밝지 못함)하지만 실어서 훗날 연구하게 한다"고 범례에 특별히

지적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이 경고는 잊고 그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2008년 족보에 와서야 비로소 그 기사보의 지적을 받아들여

원파록을 깊이 연구하고 그 결과 허황됨을 밝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번 족보에서는

그 원파록을 모두 없애는 것보다는 일부 남겨놓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판단을 했고

그래서 그 범례와 원파록 첫 페이지만을 기사보 그대로 촬영해서 싣고 있습니다.


 

4. 원파록삭제변(辨)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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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번 우리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족보(族譜)를 편수(編修)함에 있어

편수위원회(編修委員會)의 결의(決議)와 대종회(大宗會)의 인준(認准)에 의하여

원파록(源派錄)을 삭제(削除)하고 오직 그 최초에 실린 기사보(己巳譜)의 원문(原文)을

그대로 영인(影印)하여 예전 그 자리에 보존(保存)하는 바, 이들 삭제(削除)함은

그 기록(記錄)이 경위(經緯)에 맞지 않은 때문이요, 보존(保存)하는 것은 그 기록(記錄)을

근거로 삼기 위함이다.

   이는 조선(朝鮮) 말엽부터 세보(世譜) 문헌편(文獻篇)에 실려 있엇는데 기록(記錄)이

허구(虛構)함이 넘치고 말이 번거로움이 심하여 위로부터 아래까지 수천년간(數千年間)

모든 사적(事蹟)을 보기가 어제 일을 보는 것 같고 듣기가 오늘 아침의 사적을 듣는 것

같은 바, 가령(假令) 기혈(氣血)을 받고 태어난 후손들이라도 오히려 그를 위본(僞本)으로

의심이 많겠으니 이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이를 깊이 연구(硏究)하게 된 발단(發端)은 지난 정축(丁丑, 1997)에

연안차씨(延安車氏)들이 대전(大田) 안영공원(安永公園)의 한 모퉁이에 그들의

유래비(由來碑)를 세운 바, 비석(碑石) 안에 원파록(源派錄)에 의거하여 우리 류씨(柳氏)를

폄훼(貶毁)한 글이 있는데 우리 류씨(柳氏)를 가성(假姓)이라 이르고, 시조(始祖)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을 차해(車海)라 고치고, 2세(二世) 좌윤공(佐尹公)

효금(孝金)을 문화류씨시조(文化柳氏始祖)라 하고, 이 밖에 류씨(柳氏)를 헐뜯는 등

여러 말은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를 폄훼(貶毁)한 것과 같았다.

   (*주: 노(魯)나라의 대부(大夫) 숙손무숙(叔孫武叔)은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공자(孔子)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했음.)

   또 갑신(甲申; 2004)에 그들이 족보(族譜)를 간행(刊行)하면서 그 유래비문(由來碑文)을

중 일 영 독 불어(中 日 英 獨 佛語) 등 5개국어(五個國語)로 번역(飜譯) 해석(解釋)하여

그 책 머리에 올려, 가까이는 성내(城內)에 반포(頒布)하고 멀리는 해외(海外)에

전파(傳播)하여 온 세상의 이목(耳目)을 바꾸고자 한 바, 그 심지(心地)의 사악(邪惡)함과

모사(謀事)의 졸렬(拙劣)함은 그 분수를 헤아리지 못한 것으로 가소(可笑)로울 뿐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우리 영락(永樂) 가정(嘉靖) 양서(兩書)를 또한 주먹으로

치고 발로 짓밟듯 여지(餘地) 없이 배척(排斥)한 바, 해동(海東) 족보(族譜)의 효시(嚆矢)라

일컫는 것과 비교해 볼진대 어찌 그 하늘과 땅처럼 서로 다른가? 눈으로 가히 볼 수

없고 귀로 가히 들을 수 없는 바, 그 공교(工巧)로운 말이 앵무새보다 지나치고

사악(邪惡)한 뜻이 도깨비에 가까워 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는 것보다 더

간사(奸邪)하였다.

   이에 동년(同年) 8월(八月)에 우리 대종회(大宗會)에서 긴급히 대책회의(對策會議)를

열어 저들의 방자(放恣) 흉악(凶惡)함이 날로 심하여 형세상(形勢上) 그냥 둘 수 없다

하고, 난상토론(爛商討論)한 끝에 여러 의론(議論)이 하나로 모아져 이르기를

"차문(車門)의 주장이 정녕 사실(史實)이라면 마땅히 승복(承服)하는 것이 옳거니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철저히 대응(對應)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다.

   곰곰 생각하건대 사람의 자손(子孫)된 자로서 남이 자기 할아버지를 무망(誣妄)하는

것을 보고도 변명(辨明)할 줄 모른다면 아들을 두고 손자를 둔들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남의 능욕(凌辱)을 중지(中止)시키는 데는 증거(證據)를 세우는 것이 최선(最善)인 바,

공 사가문헌(公 史家文獻)으로 우리 류씨(柳氏)의 유래(由來)와 관련이 있는 것을 널리

수집(蒐集), 심층(深層) 탐구(探究)하고 정밀(精密) 분석(分析)하여 글 한편을 만들어

종보(宗報)에 등재(登載)하였으니 실로 이는 한편으로는 종인(宗人)들에게 두루 알리는

자료를 삼고, 한편으로는 차문(車門)의 소요(騷擾)에 대한 조목조목 분별의 증거를 삼기

위함이라, 그러나 결코 감정(感情)에 치우치지 않고 오직 논리(論理)를 세워 기술(記述)한

것과 증빙문헌(證憑文獻)을 동봉(同封)하여 시정(是正)을 촉구(促求)하였다.

   그 후 수차 회의에서 종합(綜合) 토론(討論)한 바, 소위 차모설원기(車某雪冤記)와

강보원파록(江譜源派錄)은 전혀 역사적(歷史的) 증거(證據)가 없는 것인데 오히려

우리 선세(先世)에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젖어 들어 그 말을 맹신(盲信)하고 후인(後人)들

또한 선인(先人)의 유서(遺緖: 남긴 내력)라서 맹종(盲從)함으로 이에 이르러 저들이

그 시기(時期)를 틈타서 또 날조(捏造)하고 또 왜곡(歪曲)하여 일(一)을 십(十)으로

더하고 십(十)을 백(百)으로 불린 것이다. 곰곰 생각건대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바꾸기 수천년(數千년年) 동안, 부인(婦人)도 없이 독신(獨身)으로 백대(百代)를 전한다는

것이 어찌 있을 법한 일이라 이르겠는가? 지금에 이르도록 세간(世間)에서 아는

류씨(柳氏)와 차씨(車氏)가 동조이성(同祖異姓: 조상이 같은 다른 성씨)이라는 말은 실로

근거없는 거짓이요 잘못된 전설(傳說)이다.

   이제 모욕(侮辱)을 막고자 함에 있어 실로 이 기록을 삭제(削除)하는 것보다

우선(于先)할 것이 없고, 또한 성인(聖人)도 일지기 의자궐지지훈(疑者闕之訓)이 있다,

곧 의심되는 것은 빼라는 교훈(敎訓)이 있었는데 우리가 오늘날 모욕(侮辱)을 막는 때에

이르러 어찌 성인(聖人)이 이른 바 의심되는 것은 빼라는 말씀을 따르지 않겠는가?

   더욱이 분명한 증거가 있는 바, 근래 들으니 영남대학교(嶺南大學校)에

이수건(李樹健) 교수(敎授)가 있어 사학(史學)으로 일세(一世)의 추중(推重: 추앙하여

중히 여김)을 받은 분으로 그 논문(論文)에 이른 바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

(朝鮮時代 身分史 資料造作)이란 글이 출현(出現)하였는데 그 가운데 "차모(車某)의

설원기(雪冤記)는 그 후선 이제([턱 이]齊: 차식(車軾)의 호(號)임) 3부자(三父子),

곧 이제 식(軾)과 그 아들 오산(五山) 천로(天輅)와 창주(滄洲) 운로(雲輅)의 공저(共著)라."

이른 말이 있다. 이로써 볼진대 원파록(源派錄)을 삭제(削除)하고 삭제(削除)하지 않음은

사리(事理) 판단에 밝았던 공자(孔子)의 제자(弟子) 자공(子貢)의 변명(辨明)을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결정될 것인 바, 우리 대승공(大丞公)의 후손 된 자는 스스로 반성(反省)하는

자리에 있어 류(柳)씨와 차(車)씨가 근원이 한가지라는 말은 점점 후인(後人)의 입에서

없어질 것이니 성인(聖人)의 의심되는 것은 빼라는 경계(警戒)의 의의(意義)를 어찌

가볍게 이르겠는가?

   저들이나 우리를 논할 것 없이 사실(史實)을 왜곡(歪曲)할진대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고 후손(後孫)을 속인다는 기롱(譏弄: 실없는 말로 농락함)과 세상을 미혹(迷惑)시키고

사람을 속이는 죄(罪)를 면치 못할 것이니, 더욱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차문(車門)에서 소요(騷擾)를 일으킨 지 십년(十年)만인 정해년(丁亥年; 2007)에 드디어

양성(兩姓)이 한 자리에서 친목(親睦)을 다지던 모임이 깨지고 각기 본래의 처지(處地)로

돌아간 바, 기분이 상쾌함이 장마에 개인 날을 얻은 것 같고, 마음이 통쾌함이 가뭄에

비를 얻은 것 같다. 이 상쾌하고 유쾌함이 마땅이 길이 전할 일로서 오직 원하는 바,

여러 종친(宗親)들은 함께 그 뜻을 힘쓰고 함께 그 힘을 다하여 오늘날 이 글을

삭제(削除)하는 의의(意義)를 계속 지켜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5. 조선시대 신분사(史) 관련 자료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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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이 논문은 성씨 관련 연구로 저명한 이수건이라는 분이 저자인데, 이 분은 영남대

명예교수였던 분입니다. 이 교수가 "조선시대 역사속의 사건조작과 기록조작"의 방대한

주제로 연구논문을 계획했다가 2006년에 작고했기에, 이수환이라는 분이 일부 정리해서

연구 논문으로 낸 것입니다. 여기서는 논문의 일부(첫 페이지와 주요한 내용이 나온

다른 두 페이지)만 사진으로 보였습니다.

  

  - 저자: 이수건(李樹健), 이수환(李樹奐)

  - 출처: "대구사학" 86집(2007년 2월)

  - 내용: 조선시대 신분의 역사에서 자료 조작이 만연했음을 지적하며,

그 대표적인 예로서 "차원부설원기"를 들고 있음. 이 논문에서는

"차원부설원기"가 위작이라고 단언하며 그 위작자, 위작시기, 위작동기,

위작내용 등을 단정적으로 추정하고 있음.


그런데 이번 문화류씨 대동보인 문화류씨세보(2008년)에서는 이 논문 전체를 

싣고 있습니다. 한편 같은 논문에는 다음과 같은 지적도 나와 있습니다.

 

   "14세기 이래 지방의 토성이족에서 성장한 성관이나 한미한 가계에서 권문세족으로

성장한 가문들은 그들 나름대로 각기 선조의 유래와 得姓 사실을 조작하거나 부회하는

예가 많았다. 가령 文化柳氏 . 安東權氏 . 全義李氏 . 善山金氏 등의 시조 성명이

柳車達 . 權幸 . 李棹 . 金宣弓 이라는 字義를 두고 각기 그럴듯한 해석을 가하여

改姓 . 改名사실을 부회하고 있는데 이러한 서술은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하겠다."


이것은 문화류씨에게는 좋은 얘기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세보에 실은 것을 보면

문화류씨가 얼마나 사계(斯界)의 연구와 역사적 객관성을 존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여기는 이것을 토론하기 위한 자리는 아니지만, 참고로 저는 위의 지적에 대해

자세히 고찰했었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화류씨는 14세기가 아니라 12세기에

이미 류공권이라는 중흥시조가 등장하고 있고 대승공은 그의 6대조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선 후기로 들어와서 대승공 당시에는 없던 호(號) 같은 것을 붙인다든지 하는

조상높이기는 일정수준 진행되었음은, 사회분위기상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위작(僞作)인 "차원부설원기"에서도 차원부와 그 집안을 높이려다보니 대단한

문벌을 이루고 있던 문화류씨에 거짓으로 계보를 잇대었고 그런 분위기도 일조를

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설원기 이전에도 고려시대의 금석문에 대승공 류차달의

사적(事蹟)이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사"의 류공권 항목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후에 류릉(柳陵)으로 불린 류차달의 무덤, 그리고 관련 얘기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계룡산 동계사 등의 여러 요소들이 류차달의 역사성을 전혀 부인할 수 없게 만듭니다.

  


2008. 6. 17.

채하 류주환

         



출처 : 문화류씨 충경공파 16세 사정공 후손세계도
글쓴이 : 국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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