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부설원기 단종과 세조 그리고 신라 애장왕과 현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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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장왕과 헌덕왕, 단종과 세조 그리고 차원부 설원기
류병수|2012.09.27. 17:00
신라시대 애장왕과 헌덕왕, 조선시대 단종과 세조 그리고 차원부설원기
1. 우리 역사에 숙부가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거나 형제간 또는 친족간에 왕위를 찬탈하는 사례는 많햇고 중국은 물론 세계역사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7대 세조로 즉위한 사건이다. 그런데 유사한 일이 신라시대에도 있었는데 숙부 김언승이 21살의 애장왕을 시해하고 헌덕왕으로 즉위한 사건인데 이 두 사건을 역사기록과 연안차씨 족보 및 차원부설원기 등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애장왕 - 헌덕왕 | 단종 - 세조 | |
시대 | ◯신라시대(800년경) | ◯조선시대(1455년) |
관계 | ◯애장왕(조카) - 헌덕왕(숙부) | ◯단종(조카)-세조(숙부) |
역사서 기록 | ◯39대 소성왕(재위기간 798-800)은 38대 원성왕의 장손자로 세자로 책봉된 아버지 죽고 그 뒤에 세자로 책봉된 숙부가 죽자 795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798년에 왕이 되었고 800년 6월 아들 김청명을 세자로 책봉하고 죽었고 세자 김청명이 40대 애장왕이 됨 ◯40대 애장왕(재위기간 800-809)은 39대 소성왕(재위기간 798-800)이 죽자 800년 13세에 왕이 되고 그의 숙부인 김언승이 섭정을 함 ◯809년 숙부 김언승이 22세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41대 헌덕왕이 됨 ◯ 41대 헌덕왕(재위기간 809-826) 시절 822년 김헌창의 난 등이 발생 | ◯문종이 1452년에 죽고 12세에 왕이 되었고 문종이 황보인, 김종서 및 집현전학사 등에게 세자를 부탁 ◯1453년 숙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실권 장악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줌 ◯1455년 10월 성삼문등이 단종복위를 계획하여 준비함 ◯1456년 5월 17일 차원부설원기 찬 ◯1456년 6월 초하루 거사를 앞둔 시점에서 김질, 정창손(김질의 장인)등이 세조에게 고변하여 사전에 발각되어 성삼문 등 죽음 ◯1457년 10월 단종은 노산군 등으로 강등되고 영월에서 죽음 |
연안차씨족보 기록 | ◯32세 차건갑은 39대 소성왕 때 원로 신하로 소성왕이 어린 태자 애장왕을 부탁함 ◯32세 차건갑은 39대 소성왕이 죽고 40대 애장왕이 등극하자 39대 소성왕의 유언을 받들어 섭정을 하다가 죽었고 소성왕 묘에 배향되었음 ◯33세 차승색은 숙부 김언승이 809년에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된 것에 대하여 친질을 죽인 폐륜아하며 헌덕왕을 시해하려고 동지들과 모의, 헌덕왕이 수렵을 나갈 때 시해하려고 했는데 누군가 계략을 헌덕왕에게 밀고하여 발각됨 ◯헌덕왕은 금 천근과 식읍 만호를 걸고 차승색을 잡으려고 했는데 차승색과 아들 차공숙은 외종 김반전의 아들인 김생의 집으로 피신했는데 생질 김생이 현상금이 탐이 나 밀고하려고 했는데 김생의 충복이 그 사실을 알고 차승색등에게 알려주어 황해도 유주 묵방동으로 피신하였고 할머니 성씨는 양씨를 본따 가성으로 류씨라하고 이름을 백으로 개명 |
2. 위의 연안차씨 족보 및 차원부설원기에 나오는 32세 차건갑, 33세 차승색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등에 등장하지 않은 인물(연안차씨 족보상 신라시대 계보도 마찬가지임)이고 그 내용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사서에 기록된 것이 아닌데 그 내용이 약 650년이 지난 조선시대 단종과 수양대군의 역사기록과 거의 유사함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우연이라고 볼 수 있을까?
(1) 선왕이 죽으면서 어린 세자를 원로신등에게 부탁
(2)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원로신등이 섭정, 보필하였는데 숙부가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함
(3) 이에 원로신등이 왕위를 찬탈한 숙부를 죽으려고 모의하다가 밀고로 발각됨
(4) 차승색은 성과 이름을 바꿔 도피하여 살았음
3.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연안차씨 32세 차건갑 및 33세 차승색에 대한 연안차씨 기록, 즉 위의 2의 (1),(2),(3),(4)의 내용이 당시 신라 하대의 사회 관념상 가능한 일인지 검토하여 보자.
(1) 역사학자들은 신라시대를 크게 3기로 나누는데 상대(bc 57-654)시기로 원시부족국가, 씨족국가를 거쳐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골품제도가 확립된 시기이고 중대(654-780)시기는 삼국을 통일하고 전제왕권이 확립되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시기이며 하대(780-935)는 골품제도의 붕괴, 족당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 해상세력이 등장하고 멸망에 이르는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2) 즉 신라는 하대로 들어서면서 신라 중대의 전제왕권이 무너지고 중앙은 귀족 연립적인 정치형태로 국가가 운영되고 지방은 호족, 해상세력들이 등장하여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대로 결국 935년에 멸망하는데 신라 하대 155년 기간 동안 왕이 20명이 교체되었고 1년 미만의 왕도 4명이나 되고 이 과정에서 김언승(41대헌덕왕)은 조카 40대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고, 44대 민애왕은 43대 희강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고, 45대 신무왕은 4대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되어 무력에 기반에 왕이 되거나 중앙 귀족간 일정한 타협 등에 의하여 왕을 선출하는 등 신라 중대의 전제 왕권과는 전혀 다른 이름만 왕인 사람이 많았다.
(3) 신라 하대 왕들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36대 혜공왕(재위기간 765-780) 김건운은 태종 무열왕의 직계 손으로 전제왕권시대인 신라중대에서 귀족 연립적인 정치형태로 운영되는 신라 하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왕을 하였던 사람으로 어린 나이 8세에 왕이 되었고 왕태후가 섭정을 하였는데 780년 왕당파인 김지정이 반란이 일으키고 이 과정에서 내물왕계의 김양상과 김경신이 김지정과 혜공왕을 죽이고 김경신이 37대 선덕왕(재위기간 780-765)이 되었다
◯ 37대 선덕왕 김양상이 아들이 없이 죽자, 원래 화백회의에서 무열왕계의 김주원이 왕으로 내정되었으나 내물왕계 김경신이 이를 제치고 38대 원성왕(785-798)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열왕계 김주원은 명주로 퇴거하였으나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 38대 원성왕 김경신은 그 아들을 태자에 책봉했는데 일찍 죽었고 그를 이어 의영이 태자가 되었는데 794년에 죽자 38대 원성왕은 그의 장손자 김준옹을 태자를 책봉하였고 38대 원성왕이 798년 사망하자 김준용은 39대 소성왕(재위기간 798-800)이 되었다.
◯ 39대 소성왕이 800년 아들 김청명을 태자로 책봉하고 사망하자 김청명은 13세의 나이로 40대 애장왕(800-809)이 되었고 이때 숙부인 김언승이 섭정을 하게 된다.
◯ 40대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은 809년 조카 애자왕을 죽이고 41대 헌덕왕(809-826)이 된다.
◯ 42대 흥덕왕은 41대 헌덕왕의 동생이자 38대 원성왕의 손자이다,
◯ 43대 희강왕은 38대 원성왕의 증손자로 42대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삼촌인 김균정과 왕위 다툼을 하다가 김균정을 죽이고 왕이 되었고 838년 김명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자살하였다
◯ 44대 민애왕은 38대 증손자로 838년 43대 희강왕이 죽자 왕이 되었으나 3개월 만에 죽었다
(4) 이렇게 신라 하대는 원성왕의 직계 후손들의 친족 간에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왕권싸움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비참(신라 하대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왕이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다)했고 이 와중에 지방귀족들의 반란, 민란 등이 많이 발생하였고 결국 신라는 멸망하게 된다.
4. 이러한 신라하대의 사회, 역사, 문화적 배경에서 조선시대 만큼의 충(忠) 효(孝)등 의식을 가지고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지켜할 도덕, 윤리가 있었을까? 의문이다. 연안차씨 족보에서는 숙부 헌덕왕이 조카 애장왕을 죽인 것을 패륜이라고 하였는데 패륜이 무엇인가? 패륜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하여할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말한다. 신라시대 왕이나 귀족들의 혼인관계는 거의가 근친 간에 이루어졌는데 이것도 패륜일까? 패륜이 아닐까? 신라시대는 계급사회였는데 귀족이 노예를 개인 감정으로 죽이는 것은 패륜일까? 아닐까? 그리고 연안차씨 족보에 의하면 20세 차연광은 18대 실성왕 딸과 혼인하였고 19대 눌지왕이 18대 실성왕을 죽이고 왕이 되자 눌지왕에게 극간을 하다가 눌지왕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면서 21세 차휘만은 아버지 20세 차연광을 죽이고 자신의 외조부를 죽인 19대 눌지왕에 충성하여 승상이 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패륜일까? 아닐까? 이것을 지금 우리나라의 사회의 도덕, 윤리적 관념으로 보면 패륜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도덕, 윤리 관념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그 시대의 사회, 역사, 문화적 환경에서 이를 이해하여야 한다.
5. 이렇게 본다면 연안차씨 족보에 나오는 32세 차건갑 및 33세 차승색 이야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안 나오는 다분히 작위적(현상금으로 식읍 만호와 금 천근을 걸었다고 하는데 삼국통일에 기여한 김유신도 식읍 500호 정도를 받았고 금 천근이면 지금 시세로 하면 300억정도 된다)이라고 볼 수 밖에 없고 그 모티브는 조선시대 단종과 수양대군 기록을 보고 꾸며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연안차씨 족보 및 차원부설원기의 내용은 논리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차원부설원기에 의하면 1398년 차원부가 죽은 이유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때까지 추증, 신원등이 이루어 졌고 1456. 5. 17 차원부설원기 찬하면서 완결되었는데 성삼문 등이 1456. 6. 2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면서 이것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못하고 필사본 형태로 유통되었다고 한다.
(2) 그런데 이 차원부설원기 응제시 등에서 차원부 상계를 밝히면서 신라시대의 32세 차건갑과 33세 차승색이야기가 나오는데, 즉 소성왕이 어린 세자를 두고 죽으면서 32세 차건갑에게 어린세자를 부탁하였고 어린세자가 애장왕에 오르자 32세 차건갑은 이를 보필하다가 죽었는데 이때 숙부 김언승이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자 33세 차승색은 패륜아 헌덕왕을 죽이려다 실패하여 도피하면서 성씨를 류씨로 바꾸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내용이 차원부설원기에 포함되어 세조에게 보고되었다면 세조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마 불충으로 보아 응제시에 참여한 사람을 물론 연안차씨까지 역모로 몰아 능지처참을 당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시대 차승색이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패륜아 헌덕왕을 죽이려고 했다는데 결국은 이것은 세조 본인에게도 똑같은 상황이지 아니한가?
(3) 차원부설원기가 1456. 5. 17 시점 이전에 쓰여졌는데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단종은 죽지 않은 상황(1457. 10월에 죽음)이고 세조를 제거하려고 했던 성삼문 등도 그때까지는 살아 있었으므로(1456. 6. 2 김질 등의 고변으로 사건이 발각됨) 적어도 차원부설원기 쓰여진 1456. 5. 17 시점에서는 세조는 그래도 조카의 왕위만 찬탈하였지 신라 헌덕왕처럼 조카를 죽인 폐륜행위는 하지 않았는데 결국은 연안차씨 족보와 1456. 5. 17 쓰여진 차원부 설원기의 차승색과 관련된 내용처럼 신라시대의 소성왕은 차건갑을 불러 어린세자 애장왕을 부탁하였고 조선시대 문종은 김종서, 집현전학자들을 불러 어린 세자 단종을 부탁하였고, 헌덕왕이 어린 조카 애장왕을 죽였듯이 결국은 세조도 단종을 죽였고, 이를 패륜으로 보고 차승색은 헌덕왕을 죽으려고 했고 성삼문 등은 유교적 가치와 명분으로 세조를 죽으려 했는데 차승색은 누군가의 밀고로 실패하였고 성삼문 등도 김질 등의 밀고로 실패하였는데 차승색은 황해도 유주로 둔적하여 류씨 변성하여 목숨을 부지하였고 성삼문 등은 죽임을 당했다.
6. 결론적 차원부설원기에 등장하는 차건갑, 차승색 이야기는 여러 가지 정황상 단종-세조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꾸며낸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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