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설원기의 기막힌 마술, 요지경

ryu하곡 2012. 8. 21. 13:11

 

설원기 독후록 18. 설원기의 기막힌 마술(魔術), 요지경(瑤池鏡)에 속지 않을 이 있셌습니까?|류-차 문제
한뜻 류재준 | 조회 30 |추천 0 |2012.08.20. 09:43 http://cafe.daum.net/moonwharyu/Gh3E/71 

문화류씨 시조 대승공 류차달(인터넷 검색하면 AD 880~ (1132년 전))의 함자(銜字) 차달을 도둑질하여 연안차씨 차 달로 둔갑시킨 [차원부설원기] 원파록의 미스터리, 요지경, 만화경, 탐정소설, 전설, 동화(童話), 같은 이야기를 인터넷 YAHOO-검색창 연안차씨족보-음악의시조 루퍼에서 검색하였습니다

 

1. -문제를 탐색, 탐구하여 가다보니 인터넷 www.rootsinfo,co.kr “뿌리를 찾아서--성씨의 유래의 기사 중 필요한 부분을 여기 올리니 참고 바랍니다.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성씨 관계자료인 '지리지' 邑姓氏條에는 전체 250여 성 가운데 이미 소멸된 망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성종 17(1486)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세종 이후에 귀화한 외래성과 '세종실록지리지' 소재 全姓氏(전성씨)를 수록한 결과 277성이나 되었다.

영조 때 李宜顯(이의현)이 편찬한 '陶谷叢說(도곡총설)'에는 298성인 데 비하여 한말에 발간한 '增補文獻備考'(증헌문헌비고)에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존재했던 고문헌에 있는 것을 현존 유무에 관계없이 총망라했기 때문에 무려 496성이나 수록되었는데, 여기에는 漢姓化(한성화) 이전의 固有名字(고유명자)와 이미 소멸된 역대의 망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10세기 이래 한말까지 존속한 성 수는 15세기 지리지 소재 성() 수대로 대략 250성 내외였다. 그러한 사실은 1930년대 국세 조사 때 250, 1980년대 국세 조사 때 250성 안팎으로 나타나는 데서 확인된다.

姓勢(성세)와 본관 수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지만 대체로 김··박 씨 등과 같이 대성일수록 본관 수가 많았다. 상기 이의현은 그의 '도곡총설'에서 한국의 성 298성을 그 유명도와 성세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성자(姓字)에 의한 성()의 수효를 아래와 같이 집계하고 있습니다.

문화류씨와 연차씨의 성()의 수효를 비교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① 著姓(저성)((((((()·(() ((() (12개 성)

그 다음 著姓(저성) ((((((((() (((() ((() (16개 성)

그 다음 다음 著姓(저성) (((((((((((((((((()((((((()(25개 성)

稀姓(희성) ((((((((((((((((((((((((((((((((((((((((() (41개 성)

그 다음 稀姓(희성) ((((((((((((((((((() (19개 성)

僻姓(벽성) (((((((((((((((((((((((((((() (((((((((() (38개 성)

貴姓(귀성) ((((((((((((((((((((((((((((((((((((((((((()()((((((((((((((((((((((((((((

(((((((((((((((((((((((((((((((((((((((((((((((((((((((((((((((() (136개 성)

複姓(복성)

南宮(남궁鮮于(선우皇甫(황보石抹(석말扶餘(부여獨孤(독고令孤(영고東方(동방西門(서문司馬(사마司空(사공)

 

: 위의 집계표에서 보듯이 1486년도에 조사한 성씨수효는 문화류씨가 1번 저성(著姓) 7에 있고 연안차씨는 5번 희()성으로 96번째에 자리하고 있으니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 의 를 연안차씨의 와 연계하여 차문의 성세를 확장하기 위한 씨를 씨와 동원(同源)으로 하고픈 유혹 때문에 원파록을 조작(造作) 하였다고 추정합니다.

 

대체로 조선 전기에 족보를 발간했거나 초안해 놓았던 가문들은 일단 중간적인 정리 단계를 거쳤기 때문에 후기에도 내용이 충실한 족보를 속간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중간의 정리 단계를 거치지 않은 채 조선 후기 내지 한말 또는 일제 시대에 와서 비로소 족보를 편찬하려고 했던 각 성() 족보의 경우는, 당대인의 수록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그들의 조상 서계(世系)를 추적하여 계보화하기에는 관계 자료가 없었던 것이다. 중간의 정리 단계를 거치지 못하면서 또 관계 자료까지 이어받지 못한 신흥 양반들에 의해 작성된 家乘(가승)이나 족보는 자의적인 조작과 수식이 가해졌던 것이다.

그 결과 18, 19세기 이후에 처음 나온 족보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띠고 있다.

첫째, 자기 조상이 신라 내지 고려 시대부터 왕실의 후예나 공신, 또는 고관 요직을 역임했거나 명문 출신이었고, 또 가문의 유래가 오래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데서 先代世系가 상당히 소급되었는가 하면, 족보상에 기재된 先祖들의 관직도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신라시대 여안차씨 족보 1세 차무일에서 38세 달 중에서 34세 공숙까지 승상, 좌승상, 사공, 대승상, 상주국, 상장군, 대장군, 집주 등의 벼슬이 1세도 빠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한 가문에서 1~34세까지 벼슬이 이어지는 가문이 있습니까? 조작의 극치가 아닐까요?

둘째, 조선 시대 사족들은 대개 모화사상에 젖어 자기 조상의 유래를 중국에서 찾았다는 데서 현존 족보상에는 그 시조가 중국 출신이 많다. 이는 대개 후대에 와서 조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원파록은 중국황제 헌원 공손씨로 부터 희씨 사씨 왕씨 차씨 류씨가 원파로 4700여년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모화사상 사대주의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셋째, 동성이 당초에는 同本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후대에 올수록 大同譜的 성격을 띤 족보가 많이 나오게 됨에 따라 최근에는 실제 혈연적으로 전혀 다른 성씨가 동성동본으로 오인되는 예가 많다.

 

원파록의 류씨와 차씨는 중국황제를 근원으로 하여 동조이성(同祖異姓)으로 조작된 주장으로 여기 해당됩니다.

넷째, 현존하는 한국의 족보 가운데는 십중 팔구가 19세기에서 일제 시대에 발간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족보가 개별 가문에 있어서는 일차적인 世系 유래와 조상 관계 자료라 할 때 이러한 족보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성씨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존 족보상으로 보면 모든 성씨와 가문이 顯祖(현조) 名祖(명조)의 후예로서 일찍부터 양반이 되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 한국의 신분사를 추적해 보면 임란(1592) 이전에 刊布(간포)된 족보는 1423년 문화류씨 영락보(永樂譜) 서문만 전하여 옴. 1476'安東權氏成化譜'(안동권씨성화보) 1565'文化柳氏嘉靖譜'(문화류씨가정보) 뿐이며, 조선 전기에는 천민층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했으니 무성층(無姓層) 이 적어도 40% 안팎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689년 문화류씨 기사보에 원파록이 차문의 집요한 접근으로 등재됩니다. 따라서 류 차문제가 잉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2. 연안차씨 족보 원파록에서 성씨의 변화 탐색 문화류씨가 등장할 때 까지

 

1세 득성시조 차무일에서 ~~~ 38세 차 달까지 성씨의 변화 부분만 발췌 하였습니다.

 

4700여년 전 BC. 2704년에 중국 헌원(軒轅)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황제(黃帝)로 즉위(卽位)를 하셨는데 황제(黃帝)의 본성(本姓)공손씨(公孫氏) 지명(地名)에 따라 헌원(軒轅)이라함 황제(黃帝)께서는 모후(母后)께서 희수(姬水)의 강변(江邊)에 살았으므로 희씨(姬氏)라는 성()을 지어 받치하후씨우(夏后氏禹)를 낳으셨다.

()사씨(姒氏)로 사성(賜姓) 사신갑(姒辛甲) 망명(亡命)하시니 이때가 BC.1878(4090년 전)이었다. 평양(平壤) 일토산(一土山) 글자를 합하여 왕자(王字)를 만들어 성()으로 정()하여 왕씨(王氏)로 하고 이름은 조명(祖明)으로 개명(改名)하시었다.

왕자(王字)에 동서(東西)를 막아 전자(田字)로 또 다시 전자(田字)에 중획(中劃)을 상하(上下)로 이어 신자(申字)로 또 신자(申字)에 천지양획(天地兩劃)을 가()하여 차자(車字)로 하고 이에 차자(車字)로 성()으로 정()한 후 무()의 허공(許空)에서 다시 하나로 시작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무일(無一)로 개명(改名) 신라 태조(太祖)이신 박혁거세(朴赫居世)에게 지리산(智異山)의 영주권(領主權)을 내어 주시고 임금으로 섬기어 큰 공훈(功勳)을 세우시니 신라 태조께서 벼슬 시중(侍中)을 제수(除授)하시고 차씨(車氏)로 사성(賜姓)하시어 차문(車門)의 득성시조(得姓始祖), 차승색(車承穡)께서 본성(本姓)을 감추고 조모(祖母)님의 성()양씨(楊氏)를 모칭(冒稱) 모성(冒姓)한 양자(楊字)를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즉 남의 성()을 가칭(假稱). 개명(改名)한 후 유주(儒州)의 부두가(富荳家)에 고용살이를 하시면서 천명(天命)을 보존(保存)하였다.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丞穡)의 차자(次子) 차공도(車恭道)는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님의 34세 차손(次孫)인데 아버지와 형을 따라 피란을 가지 못하고 혼자서 강남(江南)으로 도주하여 본성(本姓)을 감추고 옛 조상의 구성(舊姓)인 왕씨(王氏)로 복성(復姓)하여 성명(姓名)을 왕공도(王恭道)라 개칭(改稱)하고 피신(避身)하게 되었는데 이분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증조(曾祖)이시며 고려개국(高麗開國)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숭(追崇)하시고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始祖)이시다.

차승색(車承穡)으로부터 류씨(柳氏)로 모성(冒姓)하고 이름 백()으로 개명(改名)하여 가성명(假姓名) 류백(柳栢)으로 칭()한 것이 가성류씨(假姓柳氏)의 시초(始初)로 해()까지 109년간 가성류씨(假姓柳氏)를 전()하면서 삼한(三韓)의 제일호부(第一豪富)시다.차씨(車氏)로 분부 류씨(柳氏)로 사칭(詐稱)하여 부른 것을 또 버리는 것도 옳이 아니하다. 장자(長子) 효전(孝全)은 윗 할아버지의 홍렬(弘烈)을 승습(承襲)하여 차씨(車氏)가 되고, 차자(次子) 효금(孝金)류씨(柳氏)로 사성(賜姓)을 명()한 것이다.?이에 형제분(兄弟分)이 차씨(車氏)와 류씨(柳氏)분성(分姓)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양문(兩門)으로 계승(繼承)하고 있다.

 

4700여년 전 중국황제 公孫氏로 출발하여

⓵ ☞ 公孫氏 ⓶ ☞ 姬氏 ⓷ ☞ 姒氏 ⓸ ☞ 王氏 ⓹ ☞ 田氏 ⓺ ☞ 申氏 ⓻ ☞ 車氏 ⓼ ☞ 柳氏

여덟 원파가 등장합니다. 이를 분석 탐구하여봅니다.

 

1) 4700여년 동안 여덟 가문사가 위와 같이 정확하게 기록되고 유지될 수 있다고 봅니까?

2) 중국황제 헌원의 자손인 문화류씨의 선조들은 황하와 양자강을 건너 그리고 요동반도를 건너 만 주를 건너고 또는 배로 황해를 건너 평양 일토산에서 왕씨 가문이 생성되고, 왕건으로부터 평 양에서 차무일은 차씨 성을 받아 천년 후에는 차승색의 큰아들 차효전은 남쪽나라 경주에서 박혁거 세로부터 차씨로 사성을 받았다 하더니 작은아들 효금에게는 문화류씨를 사성하였다 합니다. 도대체 헷갈려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미스터리(mystery), 요지경, 만화경속의 탐정소설이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3) 공손씨, 희씨, 사씨, 왕씨, 전씨, 신씨, 차씨, 류씨 여덟 성씨는 원파(源派)로서 동조이성입니다.

그런데 원파록에서는 이에 형제분이 차씨와 류씨로 분성하게 되어 오늘까지 양문으로 계승하고있다고만 할뿐 다른 원파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4) 여덟성씨 원파는 사는 곳이 다르고 인구수가 다른데---중국, 만주, 한반도 3,000리 영토에 어떻게 4700여년 동안 정확하게 분성되고 가문사를 유지하여 왔을까요? 왕씨 전부가 전씨가 되었을까요? 전씨가 일시에 신씨가 되고, 신씨 전부가 차씨가 되고 갑짜기 차씨가 류씨로 분성 되었답니다. 瑤池鏡(요지경)입니다. 미스터리입니다. 이해와 해석이 불가능입니다.

 

3. 원파록에 난무하는 에 관한 용어 개념이 아래와 같이 추적하니 요지경입니다.

 

1) BC 2704(4700년전) 중국황제 헌원 공손(公孫氏)로부터 원파록은 출발합니다.

2) 황제 공손씨(公孫氏) 모후(母后) (姬氏)지어 바침, 황제도 公孫氏에서 씨로 바꿈

3) 하후씨우(夏后氏禹)로 선위(禪位)하여 (姒氏) 바꿈

4) BC 1878년 고조선 평양 일토산(1土山) 글자 합하여 왕씨로 하고 씨 시조는 왕조명

5) 왕몽(王蒙)--자로 성을 바꾸어 차무일이 됨

6) 신라태조 박혁거세에게서 차씨 賜姓 받음 득성시조(得姓始祖) 사전에는 득성단어 없음

7) 33세 차승색(車承穡) 묵방동에 둔적(遁迹)하여 조모의 성 양() 뜻이 같은 씨로 모칭(冒稱)

8) 조모의 성 양씨를 모성(冒姓)한 양자와 같은 뜻 假姓柳氏 이름은 (假姓 : 사전에 없는 단어)

9) 차공도 -- 구성(舊姓) 왕씨로 복성(複姓) 왕공도로 개칭 개성왕씨의 시조

10) 109년간 가성류씨(假姓柳氏)로 이어옴 (차승색~차 달)

11) 33세 차승색 -- 柳氏로 모성(冒姓) 柳 栢으로 개명 가성류씨(假姓柳氏의 시초) 차씨로 復姓

12) 그의 아들 34세 공숙(車恭叔) 가성명(假姓名) 류 숙(柳淑)으로 개명 차씨로 復姓

13) 그의 아들 35세 진부(車振阜) “ ” 류진부(柳振阜)로 개명 차씨로 復姓

14) 그의 아들 36세 무선(車茂先), “ ” 류무선(柳茂先)으로 개명 차씨로 復姓

15) 그의 아들 37세 보림(車普林) “ ” 류보림(柳普林)으로 개명 차씨로 復姓

16) 그의 아들 38세 달 (車 達) “ ” 류 해(柳 海 )로 개명 차씨로 復姓

가성명(假姓名) : 성도 가짜요, 이름도 가짜라고 하더니 갑자기 모두 차씨로 복성(復姓)하였답니다. 이름도 복명하였답니다. 복명이란 한자어는 사전에 없습니다. 이런 가문사가 어느 집안에 존재하겠습니까?

 

4. 류 차 동원의 근거

 

차씨로 족보가 이어지더니 갑자기 33세 좌승상 차승색을 등장시킵니다. 국사 편찬위원회에 차승색이 신라시대 존재여부를 질의 하였더니 없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확인하였더니 신라시대에는 차씨가 없습니다. 그러니 벼슬도 없습니다. 그런데 없는 존재하지 않는 차승색을 가성류씨(假姓柳氏) 류백으로 둔갑시킵니다.

33~38세 달까지 가성류씨로 둔갑시키더니 모두를 차씨로 복성시키 차무일의 38세 손자(孫子)인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조작하여 뚱딴지 같은 궤변을 늘어 놓습니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효전(孝全) 둘째는 효금(孝金)이다.

장자(長子) 효전(孝全)은 윗 할아버지의 홍렬(弘烈)을 승습(承襲)하여 차씨(車氏)가 되고, 차자(次子) 효금(孝金)은 류씨(柳氏)로 사성(賜姓)을 명()한 것이다.

이에 형제분(兄弟分)이 차씨(車氏)와 류씨(柳氏)로 분성(分姓)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양문(兩門)으로 계승(繼承)하고 있다.“

 

5. 글을 맺으며

 

[차원부설원기] 독후록 18번째를 기록하면서 엄청나게 황당함을 다시 느낍니다.

문화류씨와 연안차씨는 할아버지가 같은 형제 집안임을 차식3부자의 해박한 문필로서 이렇게까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위서하였음을 측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원기]를 창작한 당시1580년 전 후의 진위(眞僞), 정보(情報)432년이 지난 2,012년에도 진서 (眞書 : 참을 쓴 책)로 남을 줄 믿었다고 봅니다.

[설원기] 작자가 위(거짓)를 진()으로 서술하는 문재(文才)에 일단은 경의를 표합니다.

학식도 부족하고 보학에도 미천한 저로서는 [차원부설원기]를 탐구하면서 거짓으로 포장된 책이 어 떻게 조선(朝鮮)학계에, 보학계에 문화류문에게, 연안차문에게, ()으로 내려왔는지 심히 궁금합 니다.

설원기 독후록을 쓰면서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무슨 소득이 있다고 이런 글을 쓰느냐고요.

그런데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깊이 빠져들어 가는 걸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원파록은 진화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 진화될지 두고 볼일입니다.

이에 문화류문은 공분(公憤)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문에서 제시하는 원파록의 모든 문장의 끝에는 다음의 글로 마감합니다.

 

1456년 세조(世祖) 2년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선생께서 조선조(朝鮮朝)의 왕명(王命)에 의()하여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이 기술(記述)한 기문(記文)에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등 제현(諸賢)들이 주석(註釋)을 붙이고 유신석학(儒臣碩學)48인의 응제시(應製詩)를 모아 서문(序文)을 찬()하여 역은 차운암선생 설원기(車雲巖先生 雪寃記)를 살펴보면 고려조(高麗朝)에 내사(內史)를 역임(歷任)하신 서희(徐熙)께서 찬집(撰集)한 가사(家史)와 고려 16대 예종(睿宗) 9(서기1127)에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이 왕명(王命)을 받아 고려왕실(高麗王室)에서 신라(新羅)의 본계(本系)를 찬술한 서경잡기(西京雜記), 또는 서경야사(西京野史) 및 고려조 장군 김방경(金方慶)이 기술(記述)한 초당일기(草堂日記) 등의 기록을 성삼문(成三問)과 최항(崔恒)이 입증(入證)하였다.

 

가사, 서경잡기, 초당일기 : 실존하지 않고 겁증되지 않은 불분명한 책입니다.

[차원부설원기]에서 제시하는 찹고 문헌은 [차원부설원기] 일명 설원기뿐입니다.

[차원부설원기]는 만화, 요지경, 미스터리, 추리소설, 탐정소설, 전설, 설화, 동화라고 생각합니다.

문화류문 모든 분에게 안녕과 강녕과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