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20년 1월 14일 모강공 이사회의에서 또 일부 종원이 남재공묘가 호화스럽다면서
① 묘비2개(구비와 한글번역비)중 한개를 없애라(모강공, 판서공, 청계공도 묘비가 구비 신비 2개임), 묘비를 하나 치우라는 종원에게 모강공 등 묘비는 구비가 마모되기 전에 당시 한자 사용 종원이 많아 한자로 비를 만들어 2개 세웠고 남재공도 구비 한자를 읽지 못한 종원에게 한글로 번역해서 묘비가 2개라 했는데 한글묘비는 필요 없다고 형평성에 어긋난 말을 함(하정공, 고양공 부제학공 등 오래된 묘는 모두 묘비가 구비 신비 2개또는 3개임).
② 아버지 모강공 묘에 둘레석이 없는데 아들 남재공 둘레석을 제거하라(그래서 모강공 둘레석 시공비 천만원을 모강공종중에 희사했으나 둘레석을 설치 하지 않고 있음),
③ 문관석을 제거 해라(고양 벽제묘에 있던 문관석을 옮겨왔는데 일부종원은 고양 벽제에 버리고 와야 한다고 함, 450년된 문화재급 문관석을 고양시에 버리고 오라는 것은 말이 안됨),
④ 묘 안내판을 제거 해라(하정공 묘 안내판, 시흥 부제학공 고양공묘역 안내판, 약재공 묘역 안내판, 분수동 묘역에도 안내판이 있다는데)하면서 남재공 묘를 또 이야기 했다는데 남재공이 모강공 아들인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망우정 이씨도 안내판이 있고 요즘은 안내판을 설치하는 묘역이 많음).
⑤ 남재공이 450년 만에 고향 모산에 오셨는데 남재공 형님들 후손들이 묘역에 와서 남재공에게 술한잔이라도 권하고 인사드렸는지?.
⑥ 2017년 모강공 이사회에서 승인하여 서당동으로 이장했고 바로 다음 2018년 모강공총회에서 아무 말이 없었는데 2019년 총회 때부터 그리고 2020년 1월 모강공 이사회에서 남재공 묘에 대하여 철거하라 말하는 것은 남재공이 모강공 5남 막내로 네명 형후손들이 아래로 보았는데 450년이 지난 오늘날에 남재공을 비하하는 발언을 한 것은 그 말한 분들의 갑질이라 생각합니다.
⑦ 남재공도 모강공 아들이고 또 모강공과 다른 산맥인데 남재공 묘를 또 이야기 하며 모강공과 세 형 묘와 같이 하라는 것은 말이 않됩니다.
⑧ 남재공묘 아래 영모재 재각은 모강공 4 아들 후손들이 돈을 모아 지은 제각(영모제 중수기에 내용이 영모재에 결러 있음)인데 일부 몰지각한 종원들은 영모재가 자기 할아버지 재각이며 자기 할아버지 재각위에 남재공 묘가 있다고 말하는데 지금 남재공 묘자리는 남재공 손자 휘 인남(선전관) 묘가 있던 곳으로 선전관 묘를 쓸 때 모산 분들이 인조왕 때 승락한 자리인데 이제는 묘를 썼다고 한 것은 부당합니다.
⑨ 남재공 구비를 보면 “통훈대부”라고 되어있고 묘비 뒤 내용에 직산군수라 되어 있어 “통훈대부 행 직산군수”라 한글 묘비를 썼는데 일부 종원들이 이 비문을 보고 모산선조들 묘비는 품계를 안쓴 분이 있고 쓴 분도 있는데 품계(통훈대부)와 관직을 썼다고 남재공 관직이 가짜라고 한다.
남재공 관직이 가짜라고 하려면 일제 때 인구선조가 만든 모강공파보와 그 이전 발행 족보를 보고 모강공과 네 아들 관직을 보고 말해야지 현재 남재공만 보고 남재공 관직이 가짜라고 하는데 내 5대조 때 만든 족보에 직산군수로 묘비와 행장이 있는데 5대후손인 내가 그대로 묘비에 써야하는 것이 당연한대 류재균이 가짜로 관직을 썼다고 하면 모강공과 네 형의 관직이 있는 인구선조가 만든 족보와 이전 족보를 보고 말해야지 현재 남재공 관직은 가짜고 우리 할아버지 관직은 진짜라고 말하면 해방이후 족보를 만들면서 큰집인 참의공집안과 부자정승은 판서공집안에서 당시 어른 들이 남재공 관직을 승락 인정해 주었기에 족보에 직산군수라 썼을 것인데 이제 후손들이 선조들 결정을 무시하고 직산군수가 가짜라하면 말이 안됩니다.
⑩ 위 내용이 부당한 나의 주장이라면 언제든지 연락주면 옛날 족보를 가지고 만날 용의가 있으니 연락 바랍니다.
(아래 글은 1월 15일 모산에 가서 찍어온 남재공 계책 사진을 추가했습니다)
2. 남재공 영암종중 종중토지 등본 대표자 변경하려 영암 모산에 오늘 다녀 왔습니다.
모산 낙향조 모강공 휘 용공 선조의 5남 휘 몽삼 선조는 중종 임진1532년 모산에서 출생하여 연촌 전주최덕지 현손녀에 장가들고 명종 임술1562년 생원진사 급제하고 직산군수로 임지에서 졸하니 선조 신축1601년 향년70세로 고양 벽제에 장사지내셨습니다.
묘소가 경기 고양군 벽제면 사리현에 합장인데 묘역이 서울 문산 고속도로에 수용되어 모강공종중이사회의 승인을 받아 2017년 7월 부모과 형제가 있는 영암군 신북면 서당동으로 이장합니다.
모강공 아들 5명 중 장남 참의공 휘 몽벽 선조와 2남 판서공 휘 몽익 선조와 3남 내금의장 휘 몽두 선조는 한양에서 출생하셨고 4남 청계공 휘 몽정과 5남 남재공 휘 몽삼 선조는 모산에서 출생하십니다.
남재공은 과거 급제후 한양으로 가서 살았고 아들 휘 약(사복시 정)의 처가는 신립장군댁이기에 남재공 손자인 휘 인남, 휘 의남, 휘 신남은 외가집에서 학문을 익히고 성장하십니다.
휘 인남 선조는 선조 을사1569년 출생하여 광해 폐모사건에 이이첨(광해조 예조판서)일당을 비난한 일에 재앙을 대비하여 모산으로 낙향하였는데 외종동생신경진(인조조 좌의정)과 이종동생구굉(인조조 병조판서) 도움으로 절의를 세우고 모산에 거주하시다가 인조 반정후 부임 상경중 병으로 동생의남집에서 졸하니 묘는 병술년 증조 모강공용공 묘국 임좌로 현재 사당동 영모재 뒤편에 있었는데 2017년 남재공과 사복시정 묘를 이장하면서 휘 인남 선조 묘 위쪽에 모시게 됩니다.
휘 인남 선전관께서 모산에 낙향해 보니 네분의 큰할아버지와 당숙들과 제종형(6촌형)들이 사후에 모강공묘역에 묘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모강공 재실 영모재는 모강공 다섯 아들 후손들이 자금을 모아 재산을 마련하게 됩니다.
남재공 후손들은 모산과 정읍, 청주, 원주에 살게 되지만 모산은 남재공 장손자 휘 인남 후손들이 숙종조에 나주 향교에서 활동하신 휘 영한(진사)께서 재산을 많이 늘렸고
3. 을유乙酉(1945년) 해방되던해 태리동문계를 창계하여 벼를 한근 두근 모았고(사진은 문계책 처음 부분만 소개함)
4. 계사癸巳(1953년) 6.25 전쟁후 고양문계를 창계하여 이 당시는 해방후 보다는 좀 여유가 있어 벼(正租) 10근(1근 600g) 이십근 형편에 따라 다섯근 여섯근 등 출연하신 분이 계신데 특히 대승공 27세 휘 발영(發榮) 후손들도 똑 같이 출자하십니다.(사진은 계책 페이지수가 많아 중간중간 생략함)
백의(伯義,족보에는寅伯, 휘 발영2남후손, 명단을 전부 확인 못함), 계열(癸烈, 숙부)
금열(金烈, 아버지), 휘 인환선조도 발영 후손임
① 휘 발영 장남 후손
대승공 31세 휘인호(휘발영1남 자손, 재선 조부), 인동(寅東,재근 조부), 인종(寅琮,재권조부), 동열(東烈,신북면장), 금열(錦烈,휘 인호조카)
② 휘 발영 2남 후손
인덕(寅德,간은정 백의님 동생), (백의 선조처럼 중간중간에 명단이 있어 더 먾은 휘 발영 후손이 있을 수 있음)
③ 휘 발영 3남 후손
정권(貞淵, 종열조부), 판용(明淵, 신북초 인수선생님 아버지), 인안(寅安, 선열부) 인보(寅報,신북초선생님), 인표(寅表,재국조부)
유사 모산 휘 명열(휘 발영후 제일건설 재선 아버지) 휘 재욱(봉석아버지)
④ 1979년까지 휘 발영 후손들과 고양 벽제로 시제에 참석한 기록입니다.
5.모강공 총회와 시제, 분비재 시제, 청풍원시제에 가기 싫은데 어떻게 할까????????????????
선전관 휘 인남 선조가 한양에서 모산에 오니 당숙들과 6촌 형들이 대접을 하지 않았겠지만 400년후 현대 사회에서 남재공 형님들 후손들이 남재공을 모강공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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