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좌상공에 대한 오류 정보

ryu하곡 2019. 9. 8. 09:17

좌상공에 대한 오류 정보

 

1. 좌상공께서 일찍이 무속(巫俗)의 음란한 행위를 규탄 근정시켰는데 지금까지 무당들의 노래에 공의 이름을 들치는 가사(歌辭)가 전해오고 있다는 어느 분의 잘 못된 분석으로 성주풀이에 만수(萬壽)를 만수(曼殊)로 대신(大神)을 대신(大臣)으로 하여 지금 일부 종원들이 좌상공을 폄훼(貶毁)하는데 동참하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좌상공께서 무당들을 단속하여 무당들이 성주플이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고 하면 성주풀이가 좌상이 되시기 이전 고려말에 생긴 歌辭 라는 것과 萬壽大神의 한자를 모르고 있다는 자신의 무식을 폭로 하는   것입니다,  또 성주풀이는 전라도 민요인데 좌상공께서 돌아갈실 때는 한양에 사셨는데 전라도 무당을 단속했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2. 성주풀이 노랫말

[에라 만수(萬壽) 에라 대신(大神)이야 대활연으로 설설이 나리소서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로구나 놀고놀고 놀아봅시다 아니 노지는 못허리라]

이댁 성주는 와가(瓦家)성주 저댁 성주는 초가(草家)성주 한테간에 공대성주

초년성주 열일곱 이년성주 스물일곱의 삼년성주 서른일곱 사년성주

마지막 성주는 쉬흔 일곱이로다

[대활연으로 설설히 나리소서]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성주야 성주로구나 성주 근본이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땅에 제비원에 솔씨받어 봄동산에 던졌더니마는

그 솔이 점점 자라나서 황장목(黃腸木)이 되었구나 돌이 기둥이 되었네

낙락장송이 쩍 벌어졌구나

 

왕왕헌 왕왕헌 북소리는 태평연월(太平烟月)을 자랑허고

둘이 부는 피리소리 쌍봉황이 춤을 추고

소상반죽(瀟湘斑竹) 젓대소리 어깨춤이 절로 나누나

 

청천에 뜬 기럭아 니가 어디로 행허느냐

소상(瀟湘)으로 행허느냐 동정(洞庭)으로 행하느냐

소상동정 어디다 두고 여관한등(旅館寒燈)에 잠 못 이루나

 

반갑네 반가워 설리춘풍(雪裏春風)이 반가워

더디도다 더디도다 한양행차가 더디어

남원(南原) 옥중(獄中) 추절(秋節)이 들어 이화춘풍(李花春風)이 날 살렸구나

 

세월아 가지마라 아까운 청춘이 다 늙는다

천증세월(天增歲月) 인증수(人增壽)요 춘만건곤(春滿乾坤)에 복만가(福萬家)

어이타 세속인심 나날이 달라 변곤이로다

 

낙양성(洛陽城) 십리허(十里許)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대가인(絶代佳人)이 그 누구냐

운하춘풍(雲霞春風)은 미백년(未百年) 소년행락(少年行樂)이 편시춘(片時春) 아니놀고 무엇하리

한송정(寒松亭) 솔을 베어 조그맣게 배를 모아 한강에 띄어놓고

술이며 안주 많이 실어 술렁술렁 배 띄워라 강릉 경포대로 가자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대활연으로 설설이 나리소서

[ ] 부분은 후렴

 

풀이

만수(萬壽): 오래오래 사는 것을 기원하는 말

대신(大神): 조상 중에 무당 혹은 불사를 했던 영험한 분을 말함. 이 대신이 자손에서 복과 수명을 준다고 믿었기에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라고 했다. 전체적인 뜻은 조상신에 만수를 기원하는 것.

대활연으로 설설이 나리소서: 눈 굿판에서 여러 신령에게 자신의 소망을 기원하고 그 내용을 노래로 마지막에 항상 들어가는 구절. 신령님의 복이 가득하게 내려서 인간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라는 의미이다.

와가(瓦家): 기와집

한테간에 공대성주: 집 밖에서 집을 지키는 성주. 공대성주는 와가나 초가처럼 구체적인 집이 없지만 섬기는 성주이다. 결국 이 말은 집밖에서 집을 지켜주는 성주님이다.

황장목(黃腸木): 연륜이 오래된 말린 소나무, 목재로 사용한다

소상반죽(瀟湘斑竹) 젓대소리: 좋은 대나무로 만든 대금소리

소상(瀟湘): 중국의 소상강

동정(洞庭): 중국의 동정호

여관한등(旅館寒燈): 중국 당나라의 시인 고적(高適)이 지은 제야작(除夜作)의 한 구절에서 나온 말. 원시(原詩)는 다음과 같다.

여관한등독불면 旅館寒燈獨不眠 여관 차가운 등불 아래 홀로 잠 못 이루고

객심하사전처연 客心何事轉悽然 나그네 마음 무슨 일로 점점 더 쓸쓸해지는가

고향금야사천리 故鄕今夜思千里 이 밤에 고향 생각하니 천리길인데

상빈명조우일년 霜鬢明朝又一年 서리 같은 귀밑머리 내일이면 또 한 살을 더하네

설리춘풍(雪裏春風): 눈 속에 부는 봄바람

이화춘풍(李花春風): 오얏꽃을 피우는 봄바람. 여기서는 이도령이 춘향을 구해줌을 뜻함.

천증세월(天增歲月) 인증수(人增壽): 하늘은 세월을 늘려가고 사람은 수명을 늘려간다

춘만건곤(春滿乾坤)에 복만가(福萬家): 몸과 마음이 봄기운에 가득하니 가문이 복락을 누리는구나

변곤이로다: 와음인 듯하다. 무당들도 이 말을 쓰는데 변화가 심화다. ‘믿을 수 없다는 말로 쓰인다.

낙양성(洛陽城) 십리허(十里許): 낙양성 십 리 부근에, 십 리쯤에

운하춘풍(雲霞春風)은 미백년(未百年): 봄에 이는 구름과 노을과 봄바람은 백년이 못 된다. , 좋은 인생은 짧다는 뜻.

소년행락(少年行樂)이 편시춘(片時春): 젊어 즐겁게 노닐 시간은 짧은 봄철과도 같으니

 

해설

성주풀이는 전라도 민요이다. 굿에서 비롯한 민요로 성주굿에서 나온 무가(巫歌)가 민요화된 것이다. 성주굿은 집터를 관장하는 신령인 성주왕신(成主王神)과 그의 아내인 성주부인 등에게 집안의 무사태평과 번영을 빌기 위해 하는 굿이다. 주로 집을 새로 짓거나 이사를 한 뒤에 하는 굿이다. 서울 경기 지역에서는 황제굿이라고 한다. 노랫말 중에 성주(成主) 본향(本鄕)이 어디메뇨 경상도(慶尙道) 안동(安東) 땅이 제비원이 본향(本鄕)일러라라는 구절로 판단해 성주풀이를 경상도 민요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다. 경상도 성주풀이는 다른 노래이며 경상도 지방의 소박한 토속 민요이다.

 

참고문헌

김미숙. 해설 남도민요. 민속원, 2009.

이창배. 한국가창대계. 홍인문화사, 1976.

[네이버 지식백과] 성주풀이 (창악집성, 2011. 07. 04., 하응백)

 

3. 류만수 (柳曼殊), 좌상공(左相公), Ryu, Man-Soo, 생몰년: ?-1398, : 13, 左相公派祖

태조조 상신, 자 득휴(得休).

공은 장경공 돈(章敬公 墩)의 손이요, 우부대언 총(右副代言 總)의 아들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음사(蔭仕)로 보마 배행수(寶馬陪行首)가 되고 12년 계요(1363)에 장군(將軍)이 된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랐다.

우왕(우왕)초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재직중 양백연(楊伯淵)의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독곡 성석린(獨谷 成石璘)과 함께 합포(合浦)로 유배되었더니 바로 방면되어 동북면순문사(東北面巡問使)로 나가 호구(戶口)를 점검하고 돌아와 만호(萬戶)를 거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3년 정사(1377)에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황해도(黃海道)에 침입한 왜구를 무찔러 공을 세웠다.

9년 계해(1383) 2월에 왜선120척이 남해를 침입했는데 공은 당시 경상도원수로서 정지(鄭地)의 지원을 받아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선 17척을 침몰시키고 그들을 격퇴시켰다.

14년 무진(1388)에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威化島)회군(회군)에 공을세워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승진하였다.

창왕(昌王)즉위 초에 왜선 20여척이 해주()근방을 노략질함에 이방원(李芳遠)과 함께 나가 왜적을 몰아내고 그 공으로 궁시(弓矢)를 하사받았다.

공양왕(恭讓王) 원년 정오(1390) 4. 워화도 회군 일등공신에 책록됨과 아울러 전답과 녹권(錄券)을 하사받고,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로서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을 겸임하였다.

순군만호(巡軍萬戶)로 재직중 이괄(李括)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다가 사헌(憲司)의 탄핵을 받고 판개성부사(判開城府)로 좌천되었더니 곧 바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전직되었다.

조선개국후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됨과 아울러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使)에 제수되고, 이어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을 거쳐 태조(太祖) 7년에 무인(1398) 4월에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승진되었다.

동년 8, 소위 제 1차 왕자란(王子亂)에 공의 위엄과 몀망을 시기하던 간당(奸黨)들의 무고로 동월 26일 밤에 피살되고, 또한 장자 원지(原之)도 동시에 피살되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등이 세자 방석(世子 芳石)을 옹호하고, 태조의 전실 한씨( 韓氏)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모의하던차, 무인 8월에 태조가 병으로 26일 밤에 찬성 류만수(贊成 柳曼殊)의 집으로 이어(移御)하게 되었다. 정도전 등이 이를 계기로 왕자들을 궐내(闕內)로 불러들인 후 작란(作亂)하려 하였는데 이무(李茂)가 또한 정도전의 당인(黨人)으로 그 모의를 정안군 방원(靖安君 芳遠)에게 밀고하였다. 이에 정안군이 영추문(迎秋門)으로 나가 수하를 보내어 정승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등을 부르고, 다시 삼군부(三軍府)문전에 돌아와 말을 멈추고 있는데 때가 밤 사경(四更)이었다. 이를 눈치 첸 관원들이 서로 모여드는데 찬성 류만수도 아들 원지를 데리고 나와 정안군을 배알하였다.

정안군이 묻기를 무슨 까닭으로 왔는가?하니 류만수가오늘 밤에 주상(主上)께서 저의 집으로 이어 하신다 하였는데 이제까지 오시지 않고 또 듣기를 변고(變故)가 있다길래 시위하고자 급히 왔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정안군이갑옷을 가지고 왔는가?하고 붇자 류만수가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정안군이 즉시 갑옷을 내주면서 나의 말 뒤에 서있으라명하였다. 이때 이천우(李天祐)류만수도 정도전의 당이니 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말하자 정안군이 옳지 않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회안군 방간(懷安君 芳幹)과 이천우가 강경한 어조로 이같이 급한 때에 중의(衆議)를 막아서는 아니됩니다고 말하자 정안군이 이숙번(李叔蕃)을 돌아보며형세가 어쩔수 없으니 죽이라고 명하였다. 류만수가 곧 말에서 내려 정안군의 말고삐를 잡고 나는 결단코 결백하옵니다 고 하는 찰라 궁노 김소근(弓弩 金小斤)이 칼로 목을 내리 쳤다.

정안군이 류만수의 아들 류원지에게 너는 죄가 없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하므로, 류원지가 망극한 슬픔을 억누르고 돌아오는데 회안군 방간이 예빈문 앞까지 쫒아와 류원지의 목을 베었다.

얼마 후 왕자 방번과 방석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정안군이 이숙번에게 은밀히 말하기를류만수도 내가 그 목숨을 보전코자 하였는데 하물며 골육(골육)을 죽이다니, 지금 인심이 안정되지 못한 때문에 내가 참고 노기를 보이지 않노라하였다. 이상은 실록(實錄)에 게재된 대로임을 밝혀 둔다.

이로서 공의 관작이 강등되어 찬성(贊成)이 되었으나 세종(世宗)5년 계묘(1423)에 신원 복직(伸寃 復職)되었다.

공께서 일찍이 무속(巫俗)의 음란한 행위를 규탄 근정시켰는데 지금까지 무당들의 노래에 공의 이름을 들치는 가사(歌辭)가 전해오고 있다.

공의 묘소가 양주 무둔산(楊州 無屯山).용인 구수동(龍仁 九水洞). 양근 서종면 중대(楊根 西終面 中臺)라고 하나 실전되고, 지금 양주군 남면 경신리(楊洲郡 南面 庚申里)에 있는 배위묘소에서 합사하고 있다.

배위 영숙택주 남양홍씨(寧淑宅主 南陽洪氏)는 남양군 주(南陽君 澍)의 따님인데 33녀를 두어 장자 원지(原之)는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使)로 부친과 동시에 돌아가시고, 2자 은지(殷之)는 도총제(都摠制)로 시호 황호공(荒胡公)이요, 3자 연지(衍之)는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냈으며, 사위는 대경 진주강중경(大卿 晉州姜仲卿판서 능성 구성우(判書 陵城具成佑직장 한산이문호(直長 韓山李文浩)이다.

영숙택주 홍씨께서 부군과 장자를 동시에 여의고, 창황한 나머지 장방(長房)의 손자 셋을 거느리고 친정(親庭)인 양주 경신리로 피란하여 손자들을 장성시키고, 85세의 고령(高齡)으로 돌아가시니 이 마을 앞산 언덕 자좌(子坐)에 묻히셧다.

영조(英祖)7년 신해(1731)10월에 개비(改碑)하였는데 외예(外裔)인 좌의정 덕수이집(左議政 德水李)이 비문을 짓고, 13대손 세모(世模)가 글씨를 썻다.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영숙택조묘표 (문화류씨대종회 인물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