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문화류씨의 바른 역사(正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1424년(세종 6) 세종이 변계량에게 편찬을 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432년(세종 14)에 전국 지리지인『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로 완성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문화류씨는 문화현으로 이주해 온 성씨로 시조 류차달 대승공 선조가 신라에서 구월산으로 이주한 사실이 없고 본래부터 황해도에 거주한 고구려 후예입니다.
후삼국시대 류차달(문화류씨시조) 류천궁(정주류씨시조) 류법반(전주류씨 류기휴→류법반→류윤겸→류방헌) 류훈률(신라관리) 류긍순(염주호족) 류척량(궁예부하) 등이 구월산을 무대로 활동합니다.
구월산은 황해남도 은율군 삼천군 안악군 은천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 954m입니다. 궁홀산 증산 아사달산 삼위산(三危山)이라고도 하며 구월산맥의 일부에 속합니다.
문화류씨는 중국 황제(黃帝)와 관련 없으며 구월산 주변에 거주한 성씨는 많습니다.
B. 문화류씨 선계(先系) 고찰
"세종실록지리지"(이하 "실지")의 문화현 항목에 류씨가 래성(來姓)으로 나온다.
"토성(土姓)이 2이니, 오(吳)·강(康)이요, 망성(亡姓)이 6이니, 노(盧)·구(仇)·나(羅)·표(表)·임(任)·영호(令狐)요, 래성(來姓)이 2이니, 류(柳)·김(金)이요, 속성(續姓)이 2이니, 이(李)【대흥(大興)에서 왔다.】·최(崔)이다.【모두 향리가 되었다.】 인물은 첨의 중찬 문정공(僉議中贊文正公) 류경(柳璥)이다.【원종(元宗) 때 사람이다.】"
여기서 '토성'은 토착해 있는 성씨라는 말이고 '래성'은 다른 곳에서 온 성씨라는 말이다. 당시 성씨는 소수에게만 주어진 것이기에 토성은 대략 지배계층이었다.
그런데 문화류씨가 '래성'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또 이 사실에 비추어보면 대승공의 행적과 그 선계에 관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이런 것이 바로 이 글에서 주로 살펴보려는 점들이다.
우선 래성이라는 말의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토성이니, 망성이니, 래성, 속성이니 하는 것들은 역사적, 사회적 의미가 있다. 물론 일정한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붙이는 명칭들이다. 곧, 예를 들어 같은 柳씨가 이 지역에서는 토성이고 저 지역에서는 망성일 수가 있다.
이제 '래성'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래성은 다른 곳에서 온 성
결국 이런 것을 보면 래성이 어디선가 옮겨온 시점이 언제인가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한 가지, 비록 15세기에 작성된 "실지"에서 토성, 래성 운운하고 있지만 그 당시의 기준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초기의 "고적"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임은 확실해 보인다.
가정해서 940년경에 작성된 국가기록이 있다고 하자. 대략 그 20여년전쯤부터 한성들이 다수 만들어졌고 계속 만들어져가고 있다고 하자. 이런 시점에서 토성이니 래성이니 구별을 할 수 있을까. 이를 해결할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생각나는 것은 다음의 2가지이다. 첫째는 한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을 더 이전, 신라말엽부터로 보는 것이고, 둘째는 토성과 래성의 구별의 시점이 940년보다 더 이후라고 보는 것이다. 둘 다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된다.
문화류씨의 존재 및 관향을 확립한 류공권(1132-1196)의 등장을 검토해보자. 그가 1132년생이고 그 묘지명에 나타난 몇 대 위까지 생각하면 넉넉잡아 최소한 그 백여년전인 11세기 초반에는 문화에서의 정착이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시기가 더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다. 또한 "실지"에서 13세기 중엽에 활약한 류경을 문화현의 인물로 들고 있는 것을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그 지역에서의 지위는 상당하고 확고했음을 알 수 있다.
"실지"에 문화에 인접한 지역에 류씨가 나오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황해도 / 황주목 / 안악군 : 망성
황해도 / 풍천군 / 송화현 가화현 : 래성
평안도 / 의주목 위원(威遠) : 입진성(入鎭姓)
평안도 / 의주목 / 인산군 : 입진성
망성은 "고적"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실지"를 작성할 즈음에는 해당지역에서 사라진 토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황해도 안악군에 망성이 있는 것을 보면, 그곳이 문화와 인접한 지역이기 때문에 류씨들이 고려시대 초기부터 구월산 근방의 토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대승공 류차달의 무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월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그 무덤은 이북에 있어 비록 고고학적, 학술적 증거는 확보할 여유가 없었지만 대승공의 무덤임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대승공의 생몰년은 알려진 바 없지만(880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말도, 심지어 사주팔자도 있는데, 근거는 희박함) 그 분에 관한 전승(傳承)을 따지고 보면 후삼국통일에 기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승공께서는 대개 문화지역에 살면서 부를 축적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필자 역시 그렇게 묘사해왔음) 그것이 큰 부라고 가정하면 부를 축적하는 데 시간이 어느 정도는 걸릴 것이다. 그런데 지리지의 '래성'의 묘사에 합치하려면 문화에서 부를 축적하고 그것으로 왕건의 삼한통합을 도울 수 있는 기간은 최소한 짧거나, 최대한 넓게 생각하면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대승공께서는 다른 지역에 있으면서 부를 축적했고 그 부로 후삼국통일에 기여하고, 언제쯤인가 문화로 옮겨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실지"의 래성 기록을 보면 문화로 옮기기 전에 이미 '류'라는 성을 쓰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고려 개국 전부터 문화에 살던 것은 아니었고 다른 지역의 호족이었다가 옮겨갔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손들은 대개 문화 지역에서 향리(鄕吏)로 지내다가 류공권 때에 이르러 현달하여 중앙무대로 옮기게 된 것은 대개 기정사실이다. (류공권은 경기도 長湍郡 지역에 묻힌 것을 보면 당시 수도에서 산 것으로 보임.)
대승공께서 이전에 거주하던 지역이 안악이라면 생전에 문화로 이주하지 않고 살다가 돌아가셔서 구월산에 묻혔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살던 곳 가까이에 묻는 일이 많았을 것이기에 문화로 거주해 사셨을 가능성이 훨씬 크고, 이 설명이 다른 전승들과도 합치된다. 마찬가지로 가능성만 얘기하자면 전국 어디서나 살고 있다가 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무덤과 전승을 생각하면 문화는 아니지만 다른 구월산 지역에 살고 있다가 가까운, 역시 같은 구월산 자락에 있는 문화로 이주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안악(安岳)은 '악'자가 들어가는 만큼 험한 지형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고구려 때부터 양악군(楊岳郡)으로 '군'이었다. 그리고 별칭이 양산(楊山)인데, 이 옛 이름의 楊(버드나무)을 따서 柳로 성을 삼았을 가능성은 없을까. (위서(僞書) 설원기의 어떤 할머니의 성씨인 양씨를 모방해서 류씨가 되었다는 조작된 설명과 비슷하게 되어 버리긴 했지만...)
대승공께서 고구려 사람이었는지 신라 사람이었는지 백제 사람이었는지 하다못해 중국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모를 일이다. 구월산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던 분이라면 고구려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 전라도 어디나 다른 어디에서 옮겨간 것일 수도 있고 심지어 신라시대에 경주에서 벼슬을 하다가 구월산 지역으로 전임이 되었거나 변방 강화 정책에 따라 이주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실은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2008. 9. 20. 채하 류주환)
C. 성씨의 고향(한국성씨대백과)(중앙일보사, 1997.)를 바탕으로 각종중홈페이지를 분석 자료임(파란글 부분은 모위서 내용과 유사함)
1. 중국 황제 를 선조로 한 성씨
① 연안차씨 : 황제(黃帝)의 후손인 사신갑(姒辛甲)께서 고조선 때 평양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살면서 성을 왕씨(王氏)로 하고 이름은 조명(祖明)이라 하였다
② 수원백씨 : 황제(皇帝)의 후손이 중국 백씨성의 근원이며 시조 송계공은 곧 중국 소주 사람 이 동방에 건너와 산 것이라는 뜻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백씨의 조상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황제 헌원(軒轅)이라는 것이다.
③ 진주동방씨 : 중국 고대 복희(伏羲)씨의 후손이다.
④ 개성왕씨 : 고대 黃帝의 후손으로 전해온다. 조선 초기에 왕씨 학살을 당해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대동야승 야사에 따르면 왕씨들은 탄압을 피해서 족보에 획을 더하는 식으로 다른 성씨로 바꾸었다고 하며, 옥(玉)이나 전(全)씨, 혹은 전(田)씨, 김(金)씨 또는 용(龍)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일부는 이렇게 성씨를 바꾼 왕씨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옥씨 전씨 김씨 등은 왕씨와 관련 있다는 성씨가 없다)
⑤ 나주 나씨 : 시조는 고려중엽에 중국의 예장에서 동도하신 부공이다.
중국에서 성씨는 황제(黃帝)와 염제(炎帝)에서 출발하는데, 나씨는 황제(黃帝) 계열이다.
2. 구월산과 관련 성씨
①문화 류씨 : 문화는 황해도 신천에 속한 지명으로 단국시대의 당장경(단군의 네 아들이 황해도 구월산밑에 도읍을 정했던 곳)이며 류차달 선조가 이곳에 살았다.
② 정주 류씨 : 고려 초기 삼중대광 지낸 류천궁(柳天弓)이 시조이며 정주의 호족이었다.
고려 태조 1번째 부인 신혜왕후, 6번째 부인 정덕왕후 류씨, 고려 숙종의 부인 명의왕후 류씨 등이 있다. 왕건은 궁예의 부장으로 있을 때 경기도 정주(貞州) 지방을 지나다가 신혜왕후를 만났다. 인구(2000년) 679명
③ 문화김씨(文化金氏) : 시조 김검달(金檢達)은 경주김씨의 후손으로 그가 유주(문화)에 대를 이어 살면서 후손들이 그를 1세 조상으로 하고 본관을 문화로 하였다.
④ 신천강씨 : 시조 강후(康侯)는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무왕의 아우 강숙봉(康叔封)의 둘째 아들이 함께 평양(平壤)에 와 백성의 교화에 공을 세워 강자(康字)로 사성(賜姓)하고 관정대훈공신(關鼎大勳功臣)에 봉함으로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궁예 부인 강씨와 이성계태조 왕후 神德高皇后가 신천 강씨이며 919년(고려태조2) 3대를 추존할 때 개성왕씨 시조 원덕대왕이라 하였다. 고려사에 인용된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에 의하면 호경(虎景)의 아들이 강충(康忠)이고 그의 아들로 이제건(伊帝建)과 손호술(損乎述: 寶育)이 있는데, 손호술은 국조 원덕대왕으로 추존되었다고 한다.)
⑤ 연안차씨 : 박혁거세에게 車씨를 사성 받은 차무일 33세손 차승색이 애장왕을 죽인 김언승에게 구월산에 도망가서 유씨로 변성하여 살았는데 왕건이 차씨로 복원해 주었다.(자신도 성씨가 없어 후세들이 성을 붙여준 박혁거세가 성씨를 사성했다는 것과 신라 6부족이 아니면 고위 관직을 할 수 없는 신라에서 승상을 한 것이 의심스럽고 40대 애장왕을 섭정한 김언승이 41대 헌덕왕 때 암살사건이 삼국유사에 없음)
⑥ 연안 이씨 : 시조는 당나라 고종 때 장군이었던 무(茂)로 660년(신라 태종 무열왕7) 신라 김유신이 소정방방 합세하여 백제를 침공할 때, 중랑장으로 공을 세워 연안백(延安伯)에 봉해졌다.
⑦ 해주왕씨 : 시조 왕유(王儒)는 원래 중국 산동성 사람인데 고려조에 귀화하여 태조 때 사성(賜姓)되었고, 대상(大相)을 지냈으며 장순공(章順公)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해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D. 결론
1. 모 성씨가 유래비를 수정하면서 “신라에서 헌덕왕을 피하여 구월산으로 피신하여 柳씨로 바꾸고 6세손 海가 車達이란 사명을 받고 벽상2등공신으로 대승이 되었다”는 문구가 들어 있다는데 이문제로 2007년 5월 28일 모성씨와 결별한 당시 중중어른들의 뜻과 상반된 일로 유래비에 “柳와 車達”이란 문구가 타성씨 유래비에 들어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황제와 구월산까지는 타성씨도 사용하기에 양보할 수 있으나 “柳와 車達” 문구는 타성씨가 사용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2007년 양문 종중을 해체한 주역들이 현재 살아계시고 문화류씨 시조를 자기들 사당 의덕사에 이름을 達로 바꾸어 모신 것도 무례하지만 자존심도 없이 남의 시조를 車公達로 조작하여 자기 유래비에 세긴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만행입니다) 3. 모 성씨 유래비문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했다는데 우리 족보에 없는 대승공 부인을 위패도 모시자, 대승공 이름이 해(海)라는 말을 안 했으면 합니다. 2008년 무자보를 좀 읽어 보고 써진글자의 뜻을 풀이해 보고 말했으면 합니다. 4. 무자보 1권 1쪽 시조 류차달에 一諱 海 見丁巳譜, 配 신라김알지 후손 균 딸 見 丙寅譜(처음 이름 해는 1803년 정사보부터 사용하였고 부인 김알지후손 균 딸은 1926년 병인보부터 사용했다는 것으로 1600년대에 위서로 나타난 원파록에 의한 海 稛(균)딸은 원파록이후 발행된 1689년 기사보, 1742년 경신보, 1765년 을유보 4번 족보에 없던 一諱 海, 호 아사를 1803년 정사보에 등재한 것과 4번족보와 정사보, 1864년 갑자보에 없던 配를 병인보에 등재한 것은 원파록의 영향인데 2008년 무자보에서 원파록을 삭제하였기에 대승공의 일명, 호, 자 배우자를 사용하자고 하면 않 됩니다(출처 : http://cafe.daum.net/moonwharyu/2i2D/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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