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기축옥사와 류몽정 할아버지 구전 이야기

ryu하곡 2019. 7. 27. 05:59

1. SNS를 이용하다보면 알려야할 대상들이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 daum이나 naver를 이용합니다. 두 회사가 보통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상대방회사의 카카오스토리, 밴드, 카카오톡 끼리 공유를 막아놓고 심지어 모 회사는 자기회사 블로그와 카페 공유를 막아 놓고 있으며, 두회사 모두 미국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공유하도록하고 있습니다.

장사는 여러집이 모여 있어야 서로 잘된다는데 우리 모바일회사들은 서로 소통을 막고 있어 한회사에 올리고 다시 작업을 한번 더해서 다른회사 SNS에 올립니다.

2. 밴드에 가입해야 볼 수 있는 저의 선조와 관련 있는 “기축옥사” 글을 소개합니다.

출처 : https://band.us/band/59242908/post/1177?referrer=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ontentsView.do?blogid=0HeWN&articleno=7724141&looping=0&longOpen=

① 읽기 전 알아 둘일

○ 정철 처가가 담양인데 담양 일부 사람들이 정철 호인 송강을 좋아해서 송강터널, 송강공공주차장을 만들더니 현재 7회째 시행하고 있는 담양에 "송순문학상"을 송강문학상으로 바꾸자고 무식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송순이 송강정철보다 문학적으로 더 훌륭한데 고등학교때 사미인곡 외운 향수를 송순 시문학을 무시하려는 일부 문인이 있습니다

○기축옥사에서 고부현감 류몽정은 정여립아버지 제사에 제사상 차림에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관내 유생이 부친이며 전라관찰사를 지낸 분의 제사를 못 지낸다니 관례에 따라 곡식을 한되 주었는데 정철에게 당일 고문으로 옥사하십니다

당시 유학자들은 선친제사에 제물 보낸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정여립을 만나 곡식을 준 것이 아니고 곡식한되를 선친제사에 부조한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를 꼬투리 잡아 정적을 죽인 것입니다.

정적이라기 보다는 담양에서 정철(1536년생)을 만났는데 류몽정(1529년생)에게 자기가 왕족이라고 거만하기에 7살 아래이기에 꿀밤을 주었다고 합니다. 집에 와서 어머니(대승공18세 용공 부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 어머니께서 꿀밤을 줄 때 정철이 웃었냐? 화를 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정철이 웃었다고 하니 어머니께서 화를 냈으면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웃었다니 항상 정철에게 고개 숙이고 조심하라 하셨는데 고부현감 남원부사 때 정철에게 문안 인사를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관직은 정철보다 낮았지만 정철보다 연상인 류몽정청계공께서 정철에게 특별히 부탁할 것도 없어 인사를 안 갔는데 정철은 어렸을 적 꿀밤으로 갈고리를 가지고 있다가 기축옥사에 써 먹었다는 구전임) .

○ 1589년 기축옥사에 천여명이 무고하게 죽었는데 3년후 달로는 2년후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농간에 희생당한 호남인들이 의병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선조가 도망갈때 궁궐을 불 지른 한양과 함경도 민란(극세필등 회령변고사건)처럼 다른지역처럼 선조임금을 응징하려하지 않고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에 가족을 죽인 선조를 구하겠다고 나선 호남인들입니다

저의선조 류몽정 조카인 류렴은 의병으로 이순신 작전에 참전하여 전사하십니다(나사침 두 아들도 의병에 참전합니다)

전남 나주시 왕곡면 옥곡리 13에 호암서원은 기축옥사에 정철에게 피해를 본 금호 나사침, 문헌공 곤재 정개청, 청계 류몽정, 만취당 이황종, 북산 이급, 동암 이발, 정곡 조대중, 남계 이길 등 당시 희생 당한 호남 출신의 사림 아홉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나주나씨, 고성정씨, 문화류씨, 전주이씨, 광산이씨, 창녕조씨, 6문중이 향사를 매년 음력 3월 20일 모십니다.

○ 호암서원 안내문.

서원의 주벽 이중호는 기축옥사로 죽임을 당한 이발(1544~1589)의 아버지. 조선 선비 1천 명이 학살을 당한 전대미문의 대사화가 일어나면서 가장 큰 화를 당한 곳은 정여립(1546∼1589)의 근거지가 되었던 호남지역. 사건의 장본인인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자결함으로써, 비교적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나, 문제는 살아남은 자였다. 특히 정여립의 후원자였던 이발이 그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면서 광산이씨 가문은 풍비박산이 난다.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이들까지 강물에 던져지는 참화를 당한다.

호남 선비의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는 이 대형 옥사의 행동대장은 정철(물론 기획자는 선조였겠지만). 그 한이 오죽 컸으면 지금도 광산이씨와 연일정씨는 혼사는 물론이고 한자리에 앉지도 않는단다. 힘겹게 살아남은 광산이씨들이 모여 사는 곳답게 지금도 고기를 다질 때 '정철, 정철'이란 저주의 주문을 외울 정도로 깊은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② 밴드에서 "지원님" 글입니다.(사진은 일부만 발췌하니 출처 원본을 참고하십시오)

글 쓴이 : 지원 경북 61년생

2019년 7월 26일 오후 4:28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ㅡㅡ (28)

? 기축옥사 조작의 증거

1,000여 명이나 피화자가 생긴 기축옥사가 얼마나 엉성한 조작이었는고 하니, 정여립과 편지 등으로 서로 교류하여 연루 혐의로 죽은 애매한 선비들을 빼고 나면, 역모에 참가한 사람 이라고는 황해도에서 잡혀온 무지렁이 농민 두어 명뿐이었다.

허~참! 글쎄 조작이라는 증거가 자그마치 여섯가지나 된다.

(내가 이럴줄 알았다니까~)

1. 역모를 꾀했다는 물적 증거가 단 한가지도 없었다.

오로지 관련자들의 자백만이 유일한 증거였다. 편지랑.

(고문을 월매나 해댔길래..덴쟝!)

2. 대동계는 반란을 위해 조직된 단체가 아니었다

대동계가 비밀 무장조직이었으면 왜구를 몰아 낸다고 관군과 합세하지 않았을것이고 정여립은 죽기 전에 대동계를 이끌고 저항했을 것이다. (맞아~맞고 말고..)

3. 정여립이 죽도에서 자살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정여립은 자신의 역모사건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죽도로 갔다가 서인이 보낸 민인백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4. 정여립이 활동했던 지역은 전라도 전주인데 황해도 관찰사가 역모를 고발했다.

(이거 이거~말이 되냐?)

5. 당시 조선은 동인이 정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상황 이었으므로 동인이었던 정여립이 반란을 모의할 이유가 없었다.

6.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던 사람들은 정여립만 빼고 나중에 대부분 신원되었다.

정여립 역모사건의 최정점에는 '길삼봉'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정여립은 길삼봉 다음의 서열이라 했다

전국에 비상망을 치고 괴수인 길삼봉 체포에 전력을 다했으나 조선이 망할 때까지 길삼봉은 체포되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길삼봉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정여립 하나만 가지고는 역모로 모함하기에 좀 모자란듯 하여 서인들이 조작해 낸 허구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기축옥사의 추관은 정철이었고, 백유함과 이춘영이 추국을 도왔다. 이들은 옥사를 주관 하면서 서인인 자신들과 의논이 다른자들을 모조리 연루시켜 때려 죽였던 것이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인물들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기축옥사의 가장 큰 피해자는 맑은 선비로 명성이 높았던 이발, 정개청, 최영경 등이었다.

정여립은 서인에서 동인으로 돌아서면서 동인의 실세 '이발'과 친해졌다. 이발은 임금 앞에서 보는 알성시에 장원급제한 인재인데다 혁명가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어서 정여립과 기질상 잘 맞았다.

이발의 부친은 전라관찰사를 지낸 이중호이고, 형제들이 모두 벼슬에 나아가 이발은 아주 괜찮은 집안 출신이다

이발은 중후하고 엄정했으며 성격이 분명해 시비를 논하기 좋아했다. 이발도 정여립과 가깝게 지냈다 하여 혹독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오매~아까운고..ㅠㅠ)

이발의 친족이 모두 잡혀와 고문을 받았는데, 이발의 어머니 윤씨는 나이가 82세였으나 압슬형을 받고 죽었으며, 겨우 여덟 살이었던 이발의 아들도 선조의 명으로 맞아 죽었다.

압슬형이란 널빤지 위에 날카로운 사기 조각을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게 한 다음, 무릎 위에다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형벌이다.

죄인이 고문을 해도 죄를 불지 않으면 사람이 올라가서 밟는데 글쎄 말라깽이들만 올라갔는지,

여섯 명까지 올라갔다는 기록이 있다.

(오매~징한것! )

정여립과 한 동네에 살던 정개청은 정여립의 집터를 봐 주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또 그를 따르던 제자 50여 명이 처형되었고, 남아 있던 다른 제자들 400여명은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도동서원에 위패가 모셔진 최영경이 옥에 갇히자 1,000여 명의 선비들이 모여들 정도로 그는 학문과 덕망이 높은 선비였다.

최영경은 길삼봉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다. 조작된 인물인 길삼봉과 인상착의가 비슷하다는 것이 그의 죄였다.

?같은 것들! 이렇게 사람이 조금만 쓸 만하면 모조리 죽어나갔으니..남은 인간들은 ?

만도 못한 것 들이었다.

(오늘욕이 마구 나오네~이러니쪽발이들이 당쟁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게지~)

기축옥사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고 하니, 전라도 도사 조대중의 경우를 보자!

조대중은 원래 마음이 약해 총애하던 관기와 이별하면서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다.

어떤 놈이 도사가 우는 것을 보고 정여립의 죽음을 전해 듣고 슬퍼하여 울었다고 고자질을 해서 조대중은 국문을 받던 중 장살되었다.

조대중 뿐만 아니라 그의 처첩과 자녀, 동생과 조카들도 잡혀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기생과 헤어지면 헤어졌지.. 사내가 질질 짜기는 왜 짜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냐?

결론적으로 정여립 정모사건은 당시 서인의 영수 정철이 동인을 핍박하기 위해 확대 조작한 사건이다.

정철은 이 옥사를 공정하게 처리한 것이 아니라 동인을 누르고 서인이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호기로 여겼으며,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어김없이 표출 했다.

기축옥사를 조종해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정철은 본격적인 당쟁 시대를 연 장본인이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500만이라고 했는데 (노비와 천민을 합하면 1,000 만 명) 1,000여 명이 죽고 유배에 처해졌으면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소인배 선조는 이렇게 아까운 선비들이 죽어 나갈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선조 이중요한 순간에 뭐 하고 있었던겨?)

♡ 서인의 주정뱅이 투사 정철 ♡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확대 재생산 하여 동인들을 대거 제거한 소인배 정철을 보자!

정치야 어떻든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정철은 가사문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는데 그가 지은 '관동별곡' '청산별곡' '사미인곡' 등은 한국 시문학의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

정철의 작은 누이는 계림군 '이유'의 처로서 정철은 왕실과 친척 간이었다.

그러나 계림군이 을사사화에서 역적 혐의로 처형되는 바람에 정철 집안도 그 바람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아버지 정유침은 여러 군데 귀양을 갔으며, 정철은 귀양다니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을 전전했다

명종 6년에 대사면이 있어 정유침이 사면되었고 정철은 아버지와 함께 담양에 내려가 공부를 시작했다

정철은 당시의 대학자인 기대승, 김인후, 양응정, 송순 등 호남 선비들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고, 이이, 성혼 등과 교유했다

정철은 머리는 좋으나 직선적이고 다혈질이었으며, 시기와 질투심이 많아 선천적으로 포용력이 없는 옹졸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당쟁이 일어나자 서인이 된 정철은 투사로 변신해 할 말이 있으면 반드시 입 밖에 내야 했고, 남의 허물을 보면 가까운 사람이라도 조금의 용서함이 없었다.

화를 산 같이 입더라도 앞장서서 싸우기를 불사했다.

거기다 정철은 술을 지나치게 좋아해 하루종일 술에 취해 있었다

조정에서 공무를 볼 때도 술이 취해 사모가 한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곤 했다.

그가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일 처리가 공정치 못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백성들이 정철에게 얼마나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면, 이름을 잘 모르는 물고기가 잡히면,

"이놈, 정철아!" 하고 욕을 퍼부은 다음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한다.

(오매~시원한 것!)

정여립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고향에 머물고 있던 정철은 즉시 궁궐로 달려갔다

선조는 이런 정철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우의정에 임명하고 정여립의 옥사를 맡게 하였다.

옥사의 책임을 맡은 정철은 동인을 박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고 동인의 세력은 현저히 위축되었다.

정철은 서인의 영수가 되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선조도 과격한 정철을 점점 싫어하게 되었다.

이를 눈치 챈 이산해가 세자책봉 문제를 정철에게 간언하도록 부추긴 후 저는 쏙 빠져버려 정철 혼자 간언하다 파직되어 유배길에 올랐다.

(고 샘통이구먼! 그러니 자기 눈에 들어있는 들보 먼저 보라했지?)

영수인 정철이 유배되자 서인은 다시 몰락하였고 동인이 득세를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했는데 선조의 피란길에서 정철의 사면을 요청하는 간언에 선조는 그를 석방했다

전쟁의 책임으로 동인인 이산해가 파면 되고, 서인 윤두수가 좌의정에 오르면서 다시 서인시대가 시작 된것이었다.

1592년 9월 정철은 체찰사가 되어 기호지방과 호남으로 내려가 군무를 독려하게 되었으나, 자신을 모함하는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파직되어 강화로 물러났다.

성격은 더러웠으나 평생을 청렴 하게 살았던 정철은 입에 풀칠 조차 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 5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남인과 북인의 분열 ♡

기축옥사를 계기로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었다.

사건을 조작한 서인을 불구대천지 원수로 본 사람들은 북인, 온건파 는 남인이 되었다.

기축옥사의 진실이 채 밝혀지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진실은 역사 속에 묻혀 버렸다

정여립이 호남 선비였기 때문에 호남은 반역향으로 지목되어 그때부터 호남 선비들은 인재등용 에서 차별을 받고 소외되기 시작 했고 이 연장선상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삼국시대 부터 지역에 대한 차별이 있어 왔으나, 1589년 일어난 기축옥사를 기점으로 차별은 더욱 심화되었다.

(에궁~지역차별 나쁜거임)

♡ 정감록 ♡

배우지 못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은 사상이나 이념은 골치 아파해도 구전되는 참설에는 혹했다.

'정감록'은 조선 개국 이래 전해 오는 참설로 계룡산에 있는 개태사를 장차 정씨가 도읍할 길지로 지목했다는 내용의참서이다.

당시 떠돌던 '정감록' 은 길흉 화복을 예언한 여러 기록을 집대성한것으로 반왕조적이고, 현실 부정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어 금서였다.

이러한 참설이 유포되고 백성들이 믿게 된 바탕에는 현실을 부정 하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조선 백성들의 삶은 너무도 비참하여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나 세상이 뒤집혀 지기를 기대했다

이때까지 조선의 상황은 최악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이 조선인들을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데려갈 때 같이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천민들이 넘쳤났다니...

그런 나라가 어떻게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겠는가?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