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문화류씨 바른 역사(正史) 수정보완 자료22

ryu하곡 2019. 9. 5. 16:22

이 글은 저의 개인적인 글(의견)이며 저의 종중이나 종원 결정 사항이 아니기에 잘 못된 표현이 있어 댓글 주시면 수정하여 다시 올리겠습니다.


문화류씨 바른 역사(正史) 수정보완 자료


A. () 성씨에게(서론)

2007528일 양문대종회가 해체될 때를 과정을 양문 현재 임원이라면 대강 알고 있을 것이며 양문에 해체 서류가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당시 모성씨중앙회장 *, 부회장 님을 중심으로 종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면서 2004년 차씨 갑신대동보에 차무일38세손 차해(車海)라 했고, 2007년 파주 고려대전에 대승문도공연안차공 달大丞文悼公延安公車達선생 위패 모셨다가 모성씨 결의로 2015년 대승공 위패를 자진 철수 한 것은 대승이나 차달을 부정한 것이라 생각한다.

차씨 갑신보와 의덕사 109여분의 위패에 류()씨는 한명도 없다. 33세 승색, 34세 공숙, 35세 진보, 36세 무선, 37세 보림, 38세 해, 다음에 득관 1세 효전으로 모시지만 이 선조들 성명은 차승색, 차공숙, 차진보, 차무선, 차보림, 차해이다.

차씨 종사바로세우기 운동 전개한 그때 자기 임원들의 뜻과 갑신족보와 의덕사 위패를 무시하고 남의 시조 이름을 자기성씨 일개 선조로 폄훼(貶毁)하는지? 일고의 가치가 없지만 모성씨 수정 유래비문을 다시 본다.

이번의 유래비를 수정한다고 하여 류문에서 모든 글자를 삭제하라고 했다는데 수정안의 일부분인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 성을 유씨(柳氏)로 이름을 색으로 아들은 숙으로 바꾸어 살았다. 고려 태조 남정시 유씨(柳氏) 6세인 해()께서 수레를 많이 내어서 군량의 길이 통하였으므로 차달(車達)이라고 사명(賜名) 하였고 삼한을 통합하자 익찬벽상2등 공신으로 대승이 되였다. 수공(首功)을 세운 장자 효전(孝全)에게는 선대…………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하여 성과 이름을 바꾸어 살았다. 고려 태조 남정시 득성 6세인 차해(車海)께서 수레를 많이 내어서 군량의 길이 통하였으므로 삼한을 통합하자 익찬벽상2등 공신으로 대승이 되였다. 수공(首功)을 세운 장자 효전(孝全)에게는 선대……로 수정해 보았다.

물론 차씨 문헌위원들이 계시기에 부질없는 일이지만 한번 재수정해 보니 글자 수가 약 30여자정도 삭제되는데 글자를 줄일 수 없다면 득관조 공적을 추가하야 될 것인데 족보와 위패에 반하는 柳氏車達을 고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글자를 빼면 유래비를 수정할 수 없다는데 자를 빼야 차문 족보와 일치하고 매년 의덕사에서 위패를 열고(閉櫝) 후손들이 보는 선조 와 일치하여 반듯이 자를 빼야한다.

B. 문화류문 각종중 협조 구함

대전 뿌리공원에 차씨 유래비에 문제가 발생하여 서울권종친회에서 대전 중구청장에게 수정을 요구했고 문화류씨대종회에서 차씨 유래비문에서 자를 삭제 요구 했다.

문화류씨 각종중에서는 차씨 유래비문에 문제점이 있어 수정을 요구하기를 원하면 서울권종친회처럼 각종중에서 대전 중구청창에게 부당성을 알리고 수정을 요구해야 한다.

차씨는 남의 성씨 시조 이름()을 가지고 소설을 쓰면서 처음 이름이 해이고 왕건태조에서 차달 이름을 사성 받았다면서 자기문중 정체성과 자존심을 상처 내면서 자기들이 주장하는 車海을 사용하지 않고 문화류씨와 마찰을 자초하는지 알 수 없으나 류차달 시조가 살았던 시대는 , , 諡號가 없던 시절(1등 개국공신들 시호도 후대에 만들어 진 것임)이지만 차씨 선조가 만들어준 호 아사(鵝沙)는 사용(호는 친지 제자 등이 지어줌) 가능하다고 해도 응통, 김균딸은 사용하면 안 된다.

대승공 류차달 시조는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왕건이 궁예 장수로 세번째 전투가 903년 나주 전투이며 양길을 배신한 궁예가 왕건의 배신을 의심해서 군대를 주지 않기에 장인 류천궁이 배(軍船)家兵을 지원하면서 류차달에게 부탁하여 가병들이 먹을 군량미를 제공한다.

이때부터 918년 고려 건국 때까지 또 후삼국 통일한 936년 까지 수많은 전투에 류차달 이름으로 수레와 군량미를 제공한 기록은 넘치고 있으나 柳海라는 이름은 없는데 모성씨에서 류해는 차달(성은 차씨 이름은 달)이라 하니 문화류문은 라는 이름과 황제후손, 신라에서 구월산으로 도망간 것이 아니고 황해도 정주나 황주에 살다가 유주로 갔다 등을 차씨와 싸울 것이 아니고 대전 중구청장에게 차씨유래비 부당성을 시정 요구하면 중구청장이 삼국사기나 고려사를 연구하든지 다른 방법으로 차씨 유래비문에 자가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고려사 어디에도 柳海車達은 없고 柳車達이 나오는데 왕건이 車達을 사명(賜名) 했다는 사명의 뜻은 성과 이름을 내린 것이 아니고 공이 많은 신하(臣下)에게 임금이 이름을 지어줌 또는, 이름이므로 賜名한 이름이 차달이라면 차씨 종사바로세우기운동하신 당시 임원과 문헌위원들이 류씨는 가성이고 차무일 38세손 성명이 車車達이되기에 의덕사에 위패를 모시면서 車達로 하지 않고 諱 海로 했다.

차씨 유래비문을 수정한 임원진과 문헌위원들이 車公達이라 하지 말고 종사바로세우기운동처럼 로 표기하기를 바라며 류문과 구별하기 위해 車公海로 또는 車海로 표기하면 류문과 마찰이 없을 것이다.

아래 모 성씨 유래비 수정을 보시고 판단하시기를 바란다.

1. 차씨 종친회 중앙회에서 류문에 보내온 유래비문 수정안

황제(黃帝)의 후손인 사신갑(姒辛甲)께서 고조선 평양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살면서 성을 왕씨(王氏)로 하고 이름은 조명(祖明)이라 하였다. 고조선 말 그의 후손 왕몽(王蒙)이 기자조선 준왕(準王)의 모함을 받아 7남 왕림(王琳)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어서 살게 되었다.

이때 몽()은 자손번창을 위하여 성을 세 번 바꾸어 차씨(車氏)로 하고 이름은 무일(無一)이라 하였다. 공은 신라를 세울 때 시중이 되었으며, 차씨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다.

차무일의 32세인 건신(建申)께서 신라39대 소성왕 때 승상벼슬에 있었는데, 소성왕께서 태자를 잘 보살펴 달라는 왕의 유언에 따라 12세로 보위(寶位)에 오르신 애장왕을 보필 하시다가 아들 승색(承穡)에게 다시 왕을 보필할 것을 부탁하고 별세 하시니, 왕례로 기장 만화동에 예장케 하였다. 이때부터 차능(車陵)이라 하고 신위(神位)도 소성왕 종묘에 배향하였다. 그 후 왕의 숙부인 김언승(金彦昇)이 반역하여, 왕 위를 빼앗아 헌덕왕이 되였다.

차승색(車承穡)께서는 아들 공숙(恭叔)과 더불어, 헌덕왕(憲德王)을 살해하려다 누설되었어,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 성을 유씨(柳氏)로 이름을 색()으로 하고 아들은 숙()으로 바꾸어 살았다.

고려 태조 남정시 유씨(柳氏) 6세 인 해()께서 수레를 많이 내어서 군량의 길이 통하였으므로 차달(車達)이라고 사명(賜名)하였고 삼한을 통일하자 익찬 벽상2등 공신으로 대승이 되었다. 수공(首功)을 세운 장자 효전(孝全)에게는 선대의 큰 공결을 승습하기 위해 특별히 차씨 성을 내려 주시고 종적을 연안 땅으로 하였다.

차문은 신라, 고려조에 수 많은 문무장상(文武將相)이 대를 이어 배출된(이하 생략)

2. 어느 성씨가 황제후손이다, 신라 승상이다, 구월산으로 피신해서 살았다(1 : 류차달家門은 구월산에서 대대로 살았던 고구려 사람이며 신라 경주에서 살다가 헌덕왕을 피해 구월산을 피신한 차승색 후손이 아니다), 그들 6세손이 수레로 공을 세웠다. 대승이 되었다. 등은 어느 성씨나 가능한 일이기에 자기 성씨 유래비에 쓰는 것은 가능하지만 구월산의 柳氏, 車達은 문화류씨 고유명사이며 문화류씨만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타성씨가 사용하면 안된다. 유씨(柳氏)를 사용하려면 구월산 이야기를 빼야 그들이 말한 문화류씨만 유()자를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결과가 성립한다.

구월산으로 피신한 차승색은 가능한 이야기 이지만 유()씨로 성씨를 바꾸었다는 것은 구월산에서 대대로 살아온 씨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기에 “~~~차승색의 6세손 車海가 수레를 많이 내어~~~”정도는 가능할 것 같으나 다른 류문은 이것도 안된다 할 수 있으나 차문에서 의덕사에서 “38세 휘 해로 위패롤 모시고 향사를 지내고 있으니 저 개인 의견은 이정도는 양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류문은 어떻게 할지 모른다..

모성씨에서 유()씨라 했으니 文化柳氏와 관련 없다는 말을 한다는데 현재 유씨에서 류씨로 변경 중 진행형이기에 유씨(柳氏)는 타성씨가 사용할 수 없다.

C. 후삼국 시대

통일신라 말기에 신라는 다시 분열되고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되었다.

신라는 768(혜공왕 4)부터 887(진성여왕 1)까지 100여 년 동안 무려 20여 차례의 정치적 변란이 일어났는데 진성여왕 대에 전국적으오 각지의 많은 반란 세력들 중에서 뚜렷한 것은 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죽주(竹州 : 지금의 경기도 안성 竹山)의 기훤(箕萱), 북원(北原 : 지금의 강원도 原州)의 양길, 완산주(完山州 : 지금의 전라북도 全州)의 견훤, 철원(鐵圓 : 지금의 강원도 鐵原)의 궁예 등으로 이들은 모두 지방민의 불만을 기반으로 해 일어난 것이다.

견훤은 옛 백제의 유민을 바탕으로 백제를 부흥시킨다는 구호를 내걸고 후백제를 건국했고, 궁예는 옛 고구려의 유민을 바탕으로 고구려를 부흥시킨다는 구호를 내걸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그 이후 견훤은 전제 군주로서 행세하면서 신라를 적대시하고 궁예와 왕건의 대립자로서 존재하였다.

견훤은 사벌주 출신으로 서남 지방 방수군(防戍軍)의 비장(裨將)으로 있다가,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자 큰 뜻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남 지방의 주현(州縣)을 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호응을 보내 군사가 5,000명에 이르렀으며, 892년에는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2 : 궁예는 894600명으로 명주(김순식) 입성하여 3,500명의 병력을 확보하였고 견훤은 무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지만 서남해안 호족의 저항으로 8년후에 완산주로 옮기지만 이후에도 서남해안 호족들은 왕건을 도와 준다)

이어 서남 지방 각지의 호응을 얻어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900(효공왕 4)에는 마침내 완산주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의 부흥과 신라의 타도를 표방하면서, 정식으로 백제 왕을 자칭하고 관직을 설치해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후백제의 판도는 한때 경상도 서부까지 세력을 뻗쳤는데 대체로 충청남도의 중부에서는 태봉과 대치하고, 남쪽으로 전라남도의 서남부에서는 왕건의 수군과 다투었으며, 동쪽으로는 상주 합천 진주를 잇는 지역을 전선으로 해 한때는 안동 영천 경주 등지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신라 왕실 또는 몰락한 진골 귀족 출신으로 여겨지는 궁예는 처음에 세달사(世達寺)의 중이 되어 이름을 선종(善宗)이라 했는데, 세상이 소란해지자 891년에 죽주의 반란군 두목 기훤에게 투신하였다. 그러나 기훤이 거만해 함부로 대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다시 북원의 반란군 두목 양길에게 투항하였다.

궁예는 양길의 군사(3 : 기병 100)를 나누어 동쪽 10여 군을 공략해 모두 점령한 뒤에 명주(溟州 : 지금의江陵)에 들어가 그 곳 지방 세력의 후원으로 병력을 늘리고 장군으로 추대되어 자립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고는 영서 지방으로 넘어와 여러 군현을 점령하고 철원에 도읍하니 그의 위세가 사방에 떨쳐 황해도를 비롯한 각지의 지방 세력들이 귀순해 왔다.

세력이 커진 궁예는 895년에 내외 관직을 설치해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다음 해에는 송악군(松嶽郡 : 지금의 開城)의 대호족인 왕건 부자(父子)가 귀순했는데, 이 때의 판도는 강원 경기 황해 등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과거 궁예의 주인이었던 양길을 격파하고 901년 고구려의 부흥과 신라의 타도를 표방하며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구려(즉 후고구려)라고 하였다.

이 후 궁예는 휘하의 장군 왕건 등을 보내 각지를 공략하게 해 강원 경기 충청북도의 전부와 평안남도의 일부, 충청남도의 북부, 경상북도의 서북부, 그리고 전라남도의 서남부를 점령해 당시 후삼국 판도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최대의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918(경명왕 2) 궁예는 그에 반대하던 부하들에게 축출되고 왕건이 왕위에 오르면서 국호를 고려라고 정함으로써 후삼국은 신라 고려 후백제의 형태로 바뀌었다.

이 삼국의 패권 다툼은 사실상 고려와 후백제 간의 싸움이었다. 고려와 후백제의 다툼은 신라의 영향권이라고 할 수 있는 경상도 일대에 대한 작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 경상도 일원의 지배권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이 패권 다툼의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으로부터 여러 번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그의 친신라 외교 정책은 신라 왕실을 비롯해 각지의 세력자가 고려로 기울어지게 하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또한 왕건은 견훤의 무력주의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무력으로 대결하기도 했으며 작전 면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먼저 해군을 보내 서남 해안 지방을 점령함으로써 후백제의 배후를 교란, 견제하고, 일본과의 내왕을 차단했으며, 서해안으로는 강력한 해군을 내왕시켜 후백제가 오월(吳越후당(後唐) 등 중국과 교류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후백제를 포위, 고립시켰다.

소백산맥을 이용한 남진 정책을 취하였다. , 왕건은 상주에서부터 성주 합천을 거쳐 진주에 이르는 전략선을 확보함으로써 후백제 포위를 완성하고, 신라 일대를 고려의 지배하에 두고자 하였다.

반대로 견훤은 동진 정책을 취하였다. 즉 상주에서부터 안동 쪽으로 연결되는 전략선을 마련함으로써 고려의 후백제 포위 정책을 타파하고, 경상도 일대를 후백제의 지배하에 두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두 정책이 충돌하는 경상도 서북부의 상주를 비롯해 안동 합천 진주 등지에서 자주 큰 전투가 벌어졌으며, 최후의 승리는 고려가 차지하게 되었다.

고려와 후백제 간의 패권 다툼은 신라를 두고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나, 930년 후백제군이 안동에서 크게 격파되면서 주도권은 고려에게 넘어갔다. 이어 934년 고려는 후백제를 정면으로 공격해 웅진(熊津 : 지금의충청남도 공주) 이북의 30여 성을 점령함으로써 대세를 결정지었다.

신라의 경순왕도 935년에 고려에 항복해 천 년 사직을 끝맺게 되었다.

드디어 936년 고려 태조는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후백제를 공격해 신검 등의 항복을 받아 냄으로써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리하여 후삼국시대의 혼란은 끝이 나고 새로운 통일된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후삼국시대발췌)

D. 문화류씨의 바른 역사(正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24(세종 6) 세종이 변계량에게 편찬을 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432(세종 14)에 전국 지리지인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로 완성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문화류씨는 문화현으로 이주해 온 성씨로 시조 류차달 대승공 선조가 신라에서 구월산으로 이주한 사실이 없고 본래부터 황해도에 거주한 고구려 후예이다.

후삼국시대 류차달(문화류씨시조) 류천궁(정주류씨시조) 류법반(전주류씨 류기휴류법반류윤겸류방헌) 류훈률(신라관리) 류긍순(황해도 연안인 염주호족) 류척량(궁예부하) 등이 구월산을 무대로 활동한다.

당시 황해도에 씨는 류천궁류차달류긍순가 살았다.

구월산은 황해남도 은율군 삼천군 안악군 은천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 954m이다. 궁홀산 증산 아사달산 삼위산(三危山)이라고도 하며 구월산맥의 일부에 속한다.

문화류씨는 중국 황제(黃帝)와 관련 없으며 구월산 주변에 거주한 성씨는 많다.

E. 문화류씨 선계(先系) 고찰

"세종실록지리지"(이하 "실지")의 문화현 항목에 류씨가 래성(來姓)으로 나온다.

"토성(土姓)2이니, (()이요, 망성(亡姓)6이니, (((((영호(令狐), 래성(來姓)2이니, (()이요, 속성(續姓)2이니, ()대흥(大興)에서 왔다.·()이다.모두 향리가 되었다.인물은 첨의 중찬 문정공(僉議中贊文正公) 류경(柳璥)이다.원종(元宗) 때 사람이다."

여기서 '토성'은 토착해 있는 성씨라는 말이고 '래성'은 다른 곳에서 온 성씨라는 말이다. 당시 성씨는 소수에게만 주어진 것이기에 토성은 대략 지배계층이었다.

그런데 문화류씨가 '래성'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또 이 사실에 비추어보면 대승공의 행적과 그 선계에 관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이런 것이 바로 이 글에서 주로 살펴보려는 점들이다.

같은 씨가 이 지역에서는 토성이고 저 지역에서는 망성일 수가 있다.

첫째는 한 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을 더 이전, 신라말엽부터로 보는 것이고, 둘째는 토성과 래성의 구별의 시점이 940년보다 더 이후라고 보는 것이다. 둘 다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된다.

문화류씨의 존재 및 관향을 확립한 류공권(1132-1196)의 등장을 검토해보자.

그가 1132년생이고 그 묘지명에 나타난 몇 대 위까지 생각하면 넉넉잡아 최소한 그 백여년전인 11세기 초반에는 문화에서의 정착이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시기가 더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다. 또한 "실지"에서 13세기 중엽에 활약한 류경을 문화현의 인물로 들고 있는 것을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그 지역에서의 지위는 상당하고 확고했음을 알 수 있다.

"실지"에 문화에 인접한 지역에 류씨가 나오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황해도 / 황주목 / 안악군 : 망성

황해도 / 풍천군 / 송화현 가화현 : 래성

평안도 / 의주목 위원(威遠) : 입진성(入鎭姓)

평안도 / 의주목 / 인산군 : 입진성

황해도 안악군에 망성이 있는 것을 보면, 그곳이 문화와 인접한 지역이기 때문에 류씨들이 고려시대 초기부터 구월산 근방의 토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대승공 류차달의 무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월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그 무덤은 이북에 있어 비록 고고학적, 학술적 증거는 확보할 여유가 없었지만 대승공의 무덤임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대승공의 생몰년은 알려진 바 없지만(880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말도, 심지어 사주팔자도 있는데, 근거는 희박함) 그 분에 관한 전승(傳承)을 따지고 보면 후삼국통일에 기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승공께서는 대개 문화지역에 살면서 부를 축적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필자 역시 그렇게 묘사해왔음) 그것이 큰 부라고 가정하면 부를 축적하는 데 시간이 어느 정도는 걸릴 것이다. 그런데 지리지의 '래성'의 묘사에 합치하려면 문화에서 부를 축적하고 그것으로 왕건의 삼한통합을 도울 수 있는 기간은 최소한 짧거나, 최대한 넓게 생각하면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대승공께서는 다른 지역에 있으면서 부를 축적했고 그 부로 후삼국통일에 기여하고, 언제쯤인가 문화로 옮겨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실지"의 래성 기록을 보면 문화로 옮기기 전에 이미 ''라는 성을 쓰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고려 개국 전부터 문화에 살던 것은 아니었고 다른 지역의 호족이었다가 옮겨갔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손들은 대개 문화 지역에서 향리(鄕吏)로 지내다가 류공권 때에 이르러 현달하여 중앙무대로 옮기게 된 것은 대개 기정사실이다. (류공권은 경기도 長湍郡 지역에 묻힌 것을 보면 당시 수도에서 산 것으로 보임)

대승공께서 이전에 거주하던 지역이 안악이라면 생전에 문화로 이주하지 않고 살다가 돌아가셔서 구월산에 묻혔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살던 곳 가까이에 묻는 일이 많았을 것이기에 문화로 거주해 사셨을 가능성이 훨씬 크고, 이 설명이 다른 전승들과도 합치된다. 마찬가지로 가능성만 얘기하자면 전국 어디서나 살고 있다가 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무덤과 전승을 생각하면 문화는 아니지만 다른 구월산 지역에 살고 있다가 가까운, 역시 같은 구월산 자락에 있는 문화로 이주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안악(安岳)''자가 들어가는 만큼 험한 지형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고구려 때부터 양악군(楊岳郡)으로 ''이었다. 그리고 별칭이 양산(楊山)인데, 이 옛 이름의 (버드나무)을 따서 로 성을 삼았을 가능성은 없을까. (위서(僞書) 설원기의 어떤 할머니의 성씨인 양씨를 모방해서 류씨가 되었다는 조작된 설명과 비슷하게 되어 버리긴 했지만...)

대승공께서 고구려 사람이었는지 신라 사람이었는지 백제 사람이었는지 하다못해 중국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모를 일이다. 구월산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던 분이라면 고구려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 전라도 어디나 다른 어디에서 옮겨간 것일 수도 있고 심지어 신라시대에 경주에서 벼슬을 하다가 구월산 지역으로 전임이 되었거나 변방 강화 정책에 따라 이주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2008. 9. 20. 채하 류주환글 발췌함)

F.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중앙일보사, 1997)를 바탕으로 각종중홈페이지를 분석 자료임(파란글 부분은 모위서 내용과 유사함)

1. 중국 황제 를 선조로 한 성씨(중국 래성은 상당수 성씨가 있음)

연안차씨 : 황제(黃帝)의 후손인 사신갑(姒辛甲)께서 고조선 때 평양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살면서 성을 왕씨(王氏)로 하고 이름은 조명(祖明)이라 하였다

수원백씨 : 황제(皇帝)의 후손이 중국 백씨성의 근원이며 시조 송계공은 곧 중국 소주 사람 이 동방에 건너와 산 것이라는 뜻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백씨의 조상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황제 헌원(軒轅)이라는 것이다.

진주동방씨 : 중국 고대 복희(伏羲)의 후손이다.

개성왕씨 : 고대 黃帝의 후손으로 전해온다. 조선 초기에 왕씨 학살을 당해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대동야승 야사에 따르면 왕씨들은 탄압을 피해서 족보에 획을 더하는 식으로 다른 성씨로 바꾸었다고 하며, ()이나 전(), 혹은 전(), ()씨 또는 용()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일부는 이렇게 성씨를 바꾼 왕씨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4 : 옥씨 전씨 김씨 등은 왕씨와 관련 있다고 하지 않는다)

2. 구월산과 관련 성씨(간접관련 성씨 상당수 임)

문화 류씨 : 문화는 황해도 신천에 속한 지명으로 단국시대의 당장경(단군의 네 아들이 황해도 구월산 에 도읍을 정했던 곳)이며 류차달 선조와 류차달 家門이 이곳에 살았다.

정주 류씨 : 고려 초기 삼중대광 지낸 류천궁(柳天弓)이 시조이며 정주의 호족이었다.

고려 태조 1번째 부인 신혜왕후, 6번째 부인 정덕왕후 류씨, 고려 숙종의 부인 명의왕후 류씨 등이 있다. 왕건은 궁예의 부장으로 있을 때 경기도 정주(貞州) 지방을 지나다가 신혜왕후를 만났다. 인구(2000) 679명인데 2015년 인구조사에서는 통계에 잡히지 않음.

(5 : 황해도 염주(鹽州,연안)지역의 최대 세력인 류긍순(柳矜順)904년 궁예에 항복하는데 본관이나 후손의 지취를 알 수 없다. 만약 류차달도 궁예에 항복한 왕건을 돕지 않았다면 류긍순처럼 후손이 흩어져 버렸을 것이고 문화류씨 존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류차달이 류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는 조작된 이름이다.

高麗史泰評 전에 鹽州 柳矜順은 상당 기간 궁예에게 항복하지 않다가(久不服) 투항하였다. 궁예에게 8958989033차에 걸쳐 내항한 浿西가 예성강 서방(왕건 등) 이며 염주 지역은 904浿江道 10餘 州縣(류긍순)이 항복하여 왔다.(신라본기) 903년 이전 항복해 왔던 패서도 지역이 다시 투항해 오는 등 903년을 비롯한 3차에 걸쳐 궁예에게 부용한 浿西세력은 따라서 평안도 지방이다.)

문화김씨(文化金氏) : 시조 김검달(金檢達)은 경주김씨의 후손으로 그가 유주(문화)에 대를 이어 살면서 후손들이 그를 1세 조상으로 하고 본관을 문화로 하였다.

신천강씨 : 시조 강후(康侯)는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무왕의 아우 강숙봉(康叔封)의 둘째 아들이 함께 평양(平壤)에 와 백성의 교화에 공을 세워 강자(康字)로 사성(賜姓)하고 관정대훈공신(關鼎大勳功臣)에 봉함으로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6 : 궁예 부인 강씨와 이성계태조 왕후 神德高皇后가 신천 강씨이며 919(고려태조2) 3대를 추존할 때 개성왕씨 시조 원덕대왕이라 하였다. 고려사에 인용된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에 의하면 호경(虎景)의 아들이 강충(康忠)이고 그의 아들로 이제건(伊帝建)과 손호술(損乎述: 寶育)이 있는데, 손호술은 국조 원덕대왕으로 추존되었다)

연안차씨 : 박혁거세에게 씨를 사성 받은 차무일 33세손 차승색이 애장왕을 죽인 김언승에게 구월산에 도망가서 유씨로 변성하여 살았는데 왕건이 차씨로 복원해 주었다.(7 : 자신도 성씨가 없어 후세들이 성을 붙여준 박혁거세가 성씨를 사성했다는 것과 신라 6부족이 아니면 고위 관직을 할 수 없는 신라 관직명이 없는 승상을 한 것이 의심스럽고 40대 애장왕을 섭정한 김언승이 41대 헌덕왕 때 암살사건이 삼국유사에 없다)

연안 이씨 : 시조는 당나라 고종 때 장군이었던 무()660(신라 태종 무열왕7) 신라 김유신이 소정방방 합세하여 백제를 침공할 때, 중랑장으로 공을 세워 연안백(延安伯)에 봉해졌다.

해주왕씨 : 시조 왕유(王儒)는 원래 중국 산동성 사람인데 고려조에 귀화하여 태조 때 사성(賜姓)되었고, 대상(大相)을 지냈으며 장순공(章順公)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해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G. 결론

1. 모 성씨가 유래비를 수정하면서 신라에서 헌덕왕을 피하여 구월산으로 피신하여 씨로 바꾸고 6세손 車達이란 사명을 받고 벽상2등공신으로 대승이 되었다는 문구가 들어 있다는데 이문제로 2007528일 모성씨와 결별한 당시 중중어른들의 뜻과 상반된 일로 타 성씨 유래비에 車達이란 문구가 들어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출처근거 : http://cafe.daum.net/moonwharyu/Gh3E/282)

2. 황제와 구월산까지는 타성씨도 사용하기에 양보할 수 있으나 車達문구는 타성씨가 사용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8 : 2007년 양문 종중을 해체한 주역들이 현재 살아계시고 문화류씨 시조를 자기들 사당 의덕사에 이름을 로 바꾸어 모신 것도 무례하지만 자존심도 없이 남의 시조를 車公達로 조작하여 자기 유래비에 세긴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이다)

3. 모 성씨 유래비문에 대하여 문화류씨종중에서 열띤 토론을 했다는데 우리 족보에 없는 대승공 부인을 위패로 모시자는 말과 대승공 이름이 해()라는 말을 안 했으면 한다. 2008년 무자보를 좀 읽어 보고 써진 글자의 뜻을 풀이해 보고 말했으면 한다.

4. 무자보 11쪽 시조 류차달에 一諱 海 見丁巳譜, 신라김알지 후손 균 딸 見 丙寅譜(9 :처음 이름 해는 1803년 정사보부터 사용하였고 부인 김알지후손 균 딸은 1926년 병인보부터 사용했다는 족보를 보라)는 것으로 1600년대에 위서로 나타난 원파록에 의한 諱 海 配 稛()딸은 원파록이후 발행된 1689년 기사보, 1742년 경신보, 1765년 을유보 등 3번 족보에 없던 一諱 海, 호 아사를 1803년 정사보에 등재한 것과 4번족보와 정사보, 1864년 갑자보에 없던 1926년 병인보에 등재한 것은 원파록의 영향인데 2008년 무자보에서 원파록을 삭제하였기에 대승공의 일명, , , 배우자를 사용 하면 안 된다.

(출처 : http://cafe.daum.net/moonwharyu/2i2D/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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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부분에 결론 내용을 쓴 것은 대부분 종원들이 처음을 읽고 끝까지 안 읽기 때문이며 주석을 페이지 말미에 달지 않고 중간중간에 주석을 단 것은 페이지 말미에 주석을 달면 본문과 연관지어 이해를 못하는 분을 위한 배려입니다. 논문이나 글을 많이 보신분은 글 형식이 이상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조치이오니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