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ryu하곡 2020. 5. 8. 22:54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출처 : http://cafe.daum.net/byhdg/BGOD/2072?q=%EF%A7%A1%E6%A0%BD%E6%B4%99

1)오 항 녕*

. 머리말

. 이발 노모와 아들의 죽음

. 1590년 아니면 1591

. 제도 : 추국청과 추관

. 맺음말

 

. 머리말

이 글은 몇 년 전 있었던 논쟁에서 착안하였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이덕일이 한겨레신문에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를 연재하면서 노론사관에 일그러진 조선후기사’(200979일자)라는 글을 실었다. 이에 대해 오항녕이 반론을 제기함으로써1) 세간의 주목을 끌었으나 무슨 일 때문인지 급작스럽게 문을 닫았다.

논쟁은 원래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조작이라는 이덕일의 주장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나 오항녕은 이정귀의 율곡 諡狀, 이항복의 신도비문 및 이덕일이 이용한 율곡전서 판본의 오류 등 여러 사료를 제시하면서, 십만양병설은 조작으로 볼 수 없으며 이덕일이 사료를 오독 내지 왜곡하였다고 반박하였다.

 

*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저서로 ?조선의 힘?, ?광해군, 그 위

험한 거울?, ?한국사관제도성립사? 등이 있다.

1) 한겨레신문, 2009713일자.

246 ?韓國人物史硏究? 23

 

그 논쟁에서는 많은 주제와 사건이 다루어질 수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본고에서 다루려는 사건이다. 1589(선조 22)에 기축옥사가 일어났고, 우리는 이를 鄭汝立 모반사건이라고도 알고 있다. 그 때 李潑이라는 사람이 연루되었는데, 그의 어머니와 어린 아들도 감옥에 갇혀 신문을 당하다 죽는 일이 발생했다. 여든이 넘는 노인과 어린 아이가 죽었다는 점에서 혹독한 鞫問에 대한 여론의 지탄이 일었다. 그러다 보니 推鞫廳의 책임자였던 委官 역시 지휘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사안이 심각해졌다.

이덕일은 그 사건이 선조 23(1590), 鄭澈이 위관이었을 때라고 주장하였고, 필자는 선조 24(1591), 柳成龍이 위관이었을 때라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덕일이 이발 노모의 사망 시기가 경인년 513’, 즉정철이 위관이었을 때였음을 보여주는 사료로 제시했던 광해군 9(1617) 생원 楊夢擧 등의 상소가 실은 숙종 때 올린 상소였기 때문이다.

이덕일은 干支를 잘못 보았다.

하지만 이발 노모와 어린 아들이 언제 죽었는지 하는 문제는 탐구될 가치가 있다. 400년이 넘은 이력을 가진 기억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가장 큰 옥사 중의 하나였던 기축옥사였고, 거기서 하루 이틀의 날짜 차이도 아니고 1년이나 차이가 나는 기억이 생기다니! 그것도 어느 모로 보나 당대 최고의 정치가로 정승의 반열에 있었기에 기록도 많이 남아 있는 두 인물, 송강 정철과 서애 유성룡에 대한 기억과 기록의 편차가 생겼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덕일이 사료를 오독하기는 했지만,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이 죽었을 때가 선조 23년인가, 24년인가를 두고 기억이 엇갈린 일이 과거에 실제로 있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으며, 진실은 무엇인가? 이것이 본고의 과제이다.

장에서는 사건의 개요를 살펴볼 예정이다. 이어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의 차이를 살펴보고 각각의 논거를 확인하고자 한다.

장에서는 실록 등의 사료를 면밀히 검토하여 어떤 기억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47살펴볼 것이다.

장에서 진실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본고가 기대하는 바가 사건의 진실만은 아니다. 역사 공부의 목적이 진실이기도 하지만, 공감과 이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에서 이 사건이 벌어진 역사 무대로서의 추국청과 형신, 자백 등 객관적 제도를 다루었다.

 

. 이발 노모와 아들의 죽음

기축옥사, 또는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알려진 1589년의 이 사건을 사전 수준에서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2) “1567년 선조의 즉위로 정계에 진출하여 정국을 장악한 사림 세력은 1575년 이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한때 이이의 천거로 淸顯職에 오르기도 했던 동인 정여립은 李珥가 죽은 후 그를 배신했다 하여 선조의 미움을 받고 고향인 전주로 쫓겨 갔다. 정여립은 전라도황해도 일대의 세력들과 결탁하여 大同契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모역을 꾀하였다. 그는 천하는 公物이라는 전제 아래 혈통에 의한 왕위 계승이 결코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 하고, 不事二君論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옥사는 황해도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158910월 황해감사 韓準 등의 고변으로 시작되었다.”

기축옥사는 국왕의 최측근이었던 인물이 모반하였다는 사건 자체의 충격만큼이나 수사 대상, 처형자의 범위 등에서 당대에 보기 드물게 규모가 컸다. 이 때문에 이후 서인이 동인을 제거하기 위해 꾸몄다거나, 위관을 맡은 鄭澈이 옥사를 확대하였다는 흉흉한 소문과 해석이 잇달았다.

그러나 ‘1589(선조 22) 鄭汝立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동인과 서인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브리태니카? 기축옥사 항목에서 발췌.248 ?韓國人物史硏究? 23호들 사이에 벌어진 세력 다툼’(브리태니커)이라거나, ‘1589(선조 22) 鄭汝立의 모반으로 일어난 동인과 서인간의 정쟁’(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으로 보는 것은 기축옥사를 당쟁론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다.

심지어 동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자가 무려 1,000여인에 이르는 대옥사로 발전하였다는 식의 서술은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사실의 오류에 기초하여 또 다른 왜곡을 낳는다. 조정 관원을 다 합쳐도 1,000명이 안 되던 시절이었는데 어떻게 동인이라는 이유로 1,000명이 처형되었겠는가?

기축옥사는 무엇보다도 정여립의 모반이라는 데서 촉발된 하나의 사건이었다. 정여립의 모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심 또는 해석이 실상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모반은 조작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여립의 대동계는, 실상은 알 수 없으나 실재하였고 활동하고 있었다. 모반이 아니었다면 강력히 아니었다고 주장했을 당사자인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竹島로 도망쳤다가 자살하였다. ?推案及鞫案?3)에 나타난 사례를 놓고 볼 때 정여립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는 처신이었다. 역적모의를 꾸미지 않았거나 모의에 연루되지 않았으면 적극 해명해야지 이렇게 자살하면 혐의를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시대의 반역을 마치 모두 저항이나 혁명인 것처럼 해석하는 상투적인 경향이 사태의 이해를 가로막기도 한다. 그런 역사관에서 조선시대를 보다보면 작은 사회 변동조차, 심지어 반동적인 변화조차 새로운 시대인 근대로 나아가는 몸짓인 것 같은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본고의 주제인 이발 노모와 어린 아들의 죽음도 이 기축옥사 와중에 발생했다.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한 기억은 이미 언급한대로 두 인물, 정철과 유성룡과 관련되어 있다. 정철은 기축옥사가 시작된 뒤 위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조정의 기강을 마음대로 하여 그 위세가 세상을 뒤3) 김우철 외, 2014, ?국역 추안급국안?(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고전국역총서), 흐름출판사.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49 덮었다는 이유로 옥사의 와중에 파직되었다.4) 유성룡의 경우, 호남 유생 丁巖壽를 비롯한 50여인의 상소에서 유성룡은 역적모의에 가담한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 만약 반성해 본다면 태양 아래서 어떻게 낯을 들고 살 수 있겠습니까라는 비난을 들었지만, 기축옥사 후반기의 위관이기도 하였다. 두 인물에 대한 이러한 기록은 당쟁론적 시각에서 접근할 때 해석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기축옥사 초기에 국문을 당하고 죽었던 인물 중 한 사람이 이발이다. 이발은 1573(선조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5) 그 무렵 사림들이 갈리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東西分黨이다. 兩司尹斗壽尹根壽尹晛을 논핵하여 파직시켰을 당시, 사류들이 두 파로 나뉘어져서 선배 그룹을 서인이라 하고 후배들을 동인이라 하였다. 정철은 서인의 좌장 격이었고 이발은 동인의 좌장 격이었는데, 두 사람은 모두 淸望을 지고 있어서 당시 사람들에게 추대를 받고 있었으므로, 이이가 늘 정철과 이발 두 사람에게 그대들이 의논을 화평하게 유지하고 마음을 함께하여 협조를 해간다면 사림은 아마 무사할 것이다.”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6)

이발은 1583(선조16) 정월에 부친상을 당해 남평에서 어머니 윤씨를 모시고 지냈다. 윤씨, 지금 우리의 주제인 이발 노모와 어린 아들이 죽은 시기의 주인공인 윤씨이다. 본관은 해남이다. 이발의 집안은 고조 李亨元 5형제, 증조 李達善 대에서 문과급제자가 8명이었다. 그래서 돌림자인 원과 선을 따서, 五元八善家라는 명칭이 있던 명문가였다. 거기에 이발 형제가 급제함으로써 10대에 걸쳐 급제자가 나오자, 十代紅門이라는 명칭을 얻었다.7) 이발은 당초 이이를 존경하고 따랐다. 하지만 이이가 세상을 뜨고

4) ?宣祖實錄? 24년 윤314, 16.

5) ?宣祖實錄? 6926.

6) ?宣祖修正實錄? 11101.

7) 이발의 가문 내력과 동서 분당 및 기축옥사 전후에 대한 개관은, 이종범, 2006, ?사림열전? 1 이발, 아침이슬, 참고.

250 ?韓國人物史硏究? 23

 

이발이 대사간이었을 때, 그는 자신이 이이와 입장을 달리한다고 밝혔다. 이때 선조는 三色桃花詩를 지어 넌지시 이발을 비판하였다.8)

같은 나뭇가지에 곱게 핀 복사꽃 夭桃一樹枝

어인 일로 두세 가지 빛깔이던가 何事兩三色

식물들도 오히려 이와 같을지니 植物尙如此

인심이 반복하는 것 당연하리라 人心宜反覆

이런 상황에서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이발은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 받았던 사실 때문에 하옥되었다가 귀양을 떠났다.9) 이어 樂安에 거주하는 敎生 宣弘福의 집에서 나온 문서로 인해, 다시 잡혀왔다가 동생 李洁과 함께 곤장을 맞으며 신문당하다 죽었다. 그리고 한 해 또는 두해 뒤에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 역시 신문을 받다가 죽었다. 이제 그 기록과 기억을 더듬어 보겠다.

3백여 년 뒤에 梅泉 黃玹(1855, 철종61910)남평 오현당에서 이남계의 일에 느낌이 있어서[南平五賢堂感李南溪事]10)라는 시를 남겼다. 1902(광무 6), 48세 되던 해였다.

옥당의 문장을 두 봉황 새끼 배출하니 玉署文章兩鳳雛

광산 이씨 문호는 호남에서 으뜸일세 光山門戶冠全湖

공론은 지금도 옥사를 원통해하는데 祗今公議終寃獄

맑은 명성은 당대에도 대유로 칭해졌네 當世淸名亦大儒

황량한 부학촌엔 산 귀신이 울어 대고 副學村荒山鬼嘯

어두운 오현당엔 물반딧불이 죽어 있네 五賢堂暗水螢枯

송야와 애상 중에 누가 과연 은원인가 松爺厓相誰恩㤪

야사는 흐릿하여 태반이 거짓인 걸 野錄沉沉太半誣

 

8) ?宣祖修正實錄? 2031

9) ?宣祖實錄? 22128

10) ?매천집? 4, (壬寅稿)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51

 

황현은 오현당에 답사를 갔다가 기축옥사 때 죽은 이길을 생각하며 이 시를 지었다. 남평 오현당은 이발의 고조 항렬인 자 돌림 다섯사람을 기린 사당이다. 남계는 기축옥사 때 죽은 이발의 동생 李洁의 호이다. 玉署는 옥 같은 관청, 玉堂으로 홍문관을 말한다. 이발은 홍문관 장관인 부제학까지 지냈고, 이길은 수찬을 지냈으므로 두 봉황 새끼라고 말하였다. 아직 봉황은 아니지만, 봉황이 될 인물들이었다는 뜻으로 보인다. 시에 보이는 부학촌은 바로 부제학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발이 부제학을 지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광산 이씨는 광주 이씨, 이발의 본관을 말한다.

한편, ‘송야’, 송 노인은 송강 정철을 가리키며, ‘애상’, 애정승은 서애를 가리킨다. 매천은 둘 중 누가 은인이고 원수인가 묻고있다. 서애와 송강 중 누가 은인이고 원수라는 말이 아니다.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마지막 구절에서 확인된다. 野錄, 곧 떠도는 이야기를 적은 기록은 명확하지 않고 태반이 거짓이라는 말이다. 이 시의 행간에서, 300년 전의 기축옥사가 매천 당대에도 오해와 원망이 덧붙여진 채 세인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추정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을 듯하다. 그런데 매천 200년 전으로 올라가면 매천과 전혀 다른 태도의 자료를 만날 수 있다. 1694(숙종 20) 어느 날 경연에서 있었던 일이다.11)

黨人이 한때의 충성스러운 현자들을 모함하여 거의 다 죽게 한 일에 대해 宣祖大王께서 즉시 깨달으시고 毒澈이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그 후 조정의 의론이 준엄하게 일어나 追奪(죽은 뒤에 삭탈함)하도록 계청하였으나, 仁祖 계해년(1623)에 한쪽 사람들이 곡진하게 비호하여 곧바로 그의 관작을 회복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망령되이 무함하는 무리들이 줄지어 일어났습니다. 安邦俊은 심지어 충현 및 李潑의 어미와 어린 아들을 모함하여 죽인 것은 鄭澈의 소행이 아니라 先正臣 文忠公 柳成龍이 한 것이라고 버젓이 책에 써놓아 시비를 뒤집고 사람들의 귀를 현혹11) ?갈암집? 부록 권1, 연보 숙종 2034.252 ?韓國人物史硏究? 23호 시켰으며, 유생 柳景瑞 등은 날짜를 바꾸어 유성룡이 재상으로 있던 때의 일이라는 것을 입증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발언은 葛菴 李玄逸(1627, 인조51704, 숙종30)에게서 나왔다.

그는 張禧嬪이 왕비가 되고 인현왕후가 폐출된 뒤 정계에 나와, 대사헌,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경연에서 숙종에게 강의하였다. 이현일은 이 말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갑술환국 이후 함경도 종성으로 위리안치 되었다.

1694년 경연에서 했던 갈암의 말은 1691(숙종 17)에 있었던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1691, 호남 사람 鄭武瑞 등이 상소하여, ‘정철의 관작을 추탈하기를 청하였다. 이는 1677(숙종 3) 楊夢擧가 이미 했던 말과 같은 취지였으며, 한편으로는 1680(숙종 6) 柳景瑞의 상소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띠었다.

양몽거의 상소는 2009년 이덕일이 필자와 논쟁할 때 이발 노모가 죽었을 때 정철이 위관이었다는 논거로 제시했던 것이다. 이덕일이 간지를 잘못 보고 양몽거의 상소를 광해군 9(1617)’의 일이라고 했던 점도 언급한 바 있다. 양몽거의 상소가 올라온 것은 당시 예송논쟁으로 서인이 실각한 뒤 남인이 득세했던 시기인 1677년이었다.12) ?肅宗實錄? 기사에는 단지 전라도 儒生 楊夢擧 등이 상소하여, 相臣 鄭澈의 관작을 追奪하기를 청했다고만 되어 있고13) 나머지는 이를 둘러싼 조정의 논의만 나와 있다.

그렇지만 ?기축록 속?을 통해 정철이 다시 위관이 된 것은 경인년 2월이었고, 이발의 어머니가 죽은 것은 경인년 513일이었으며, 성룡이 우의정에 제수된 것은 같은 달 일이라 아직 위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日記에 소상히 실려 있는 바요,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데도 감히 이와 같이 속였습니다.” 라고 했던 그의 상소 내용을 12) ?顯宗實錄? 1418, 19. 13) ?肅宗實錄? 3218.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53 알 수 있다.14) 상소에 대해 숙종은 지금 50년이나 된 뒤에야 어찌 이처럼 번거롭게 하느냐? 내가 생각하기에 매우 해괴하다라고 대답하였다. 숙종의 해괴하다는 답변이 흥미로운데, ‘50년이 지났다는 말은 인조 2년 정철이 복권된 시점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양몽거의 상소는 처음으로 공공연히 경인년설, 즉 정철이 위관으로 있을 때 이발 노모와 아들이 죽었다는 설을 드러낸 것이었다. 100년이 지난 뒤에 기축옥사의 불씨가 살아난 것이다. 그런 정황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는데, 眉叟 許穆(1595, 선조281682, 숙종8)의 말도 그중 하나이다.

?白沙遺稿??己丑錄?이 있어 선생(최영경)의 원통한 일이 매우 상세하게 실려 있었는데, 후에 그 자손들이 권력을 가진 자들의 말을 듣고서 감추어 버리고 僞作?기축록?이 세상에 퍼졌다.15)

허목은 白沙 李恒福(1556~1618)?기축록?권력을 가진 자들의 손에 의해 왜곡되게 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이현일도 이 말을 이어 받아 최영경의 행장에 적었다.16) 이현일이 인용한 허목의 주장은 원래 尹善道1658년에 鄭介淸의 복권을 청하며 올린 國是疏에서 한 말을 확대시킨 것이었다. 그러니까 ?백사집? 변개의 원래 근거는 윤선도의 상소였다.17)

윤선도는 ?백사집?을 다시 간행한 것이 기축옥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윤선도의 주장은 두 가지이다. 첫째, 저자의 기축 기사에는 본래 정철의 간악한 죄상이 모두 드러나 있어 강릉 초간본에서는 자손들이 숨기고 수록하지 못하였다는 것, 그런데 晉州에서 중간하면서 정철의 아들인 정홍명이 이 기사를 개작하여 정철이 오히려 14) ?己丑錄續? 「정사년(1677) 봄 생원 양몽거 등의 소[丁巳春生員楊夢擧等疏]

15) ?記言? 26, 崔守愚事跡

16) ?葛庵集? 28, 수우당선생 최공 행장(守愚堂先生崔公行狀)

17) ?孤山遺稿? 3.

254 ?韓國人物史硏究? 23

 

선비들을 변호하고 구원하려고 했던 것처럼 조작하여 간행했으니, 그 증거로 문체가 전반부와 후반부가 동일인의 것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둘째, 강릉본에는 백사가 정언신의 아들 鄭慄의 억울한 죽음을 매우 애통해한 挽詩가 실려 있는데 진주본에는 삭제되었던 바, 이것도 정홍명이 꺼려해서 삭제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허목은 윤선도의 이 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강릉본에 원래의 ?己丑錄?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 책을 모두 없애 버리고 새로 진주본을 판각하면서 僞作 ?기축록?에 수록하여 온 세상을 속이려 하였다고 주

장하였다.

초간본인 강릉본은 희귀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정률의 挽詩도 윤선도의 말처럼 진주본에서는 산삭되었다. 그런데 기축옥사 기록은 당초 강릉본에 수록되지 않았으므로, 강릉본에 ?기축록?이 수록되어 있었다는 허목의 말은 사실과 다른 것이 분명하다.18)

윤선도의 말도 추측이 많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무리 권세가 있기로 남의 집 문집을 마음대로 산삭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 ‘안목 있는 사람들이 누구를 말하는지도 분명치 않다.

이런 까닭에 윤선도 자신도 시종 추측으로 일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19) 이렇게 되자, 서인들 사이에서도 당시의 사건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고, 明齋 尹拯남쪽에서 올린 한 통의 소장이 마침내 임금에

18) 신승운, ?백사집? 「해제, 한국고전번역원 종합DB.

19) 윤선도의 말은 더욱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억울하게 죽은 이발의 노모가 바로 해남 윤씨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과 함께 기축옥사의 기억이 겹치면서 최근까지도 광산 이씨와 해남 윤씨의 유대가 이어지고 있다. 李栽洙, ?光山李氏世譜史?(반도문화사, 1985)의 서문을 尹永善이 지었는데, “光山 李氏 履素齋先生의 네 아들 諱 汲(호 북산), 휘 발(호 동암), 휘 길(호 남계), 휘 직(호 서천)은 모두 나의 16대조이신 귤정공의 외손자이시다라고 하였듯이, 이발의 노모 윤씨에서 맺은 집안의 교류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55 게까지 보고되었고 단번에 백 년의 공론을 뒤집으려 하였다고 한다

고 말하였다.20) 李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己丑事蹟? 한 편을 남의 집에서 얻었는데, 이는 돌아가신 아버지21)의 큰외삼촌 獨石 黃公22)이 쓴 기록이다. 공이 당시 문사낭청이었기 때문에 사건의 본말을 두루 거론하여 상세하며 남김없이 기록하였으니, 참의 安邦俊?己丑記事?와 양 날개가 되어 진실로 세상에 전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발 노모와 어린 아들이 곤장을 맞아 죽은 해와 달은, 月川 李廷馣이 쓴 기록과 독석공의 이 책이 실로 조응하지만, 진사 朴光後의 기록이 더욱 명백하니, (유성룡)와 이(이양원)가 위관이었다는 중요하고

공정한 문서가 될 것이다.23)

독석 황혁의 ?기축기사?(인용문의 ?기축사적?)를 보고 이선이 이 발문을 쓸 때가 기미년, 그러니까 1679(숙종 5)이었다. 즉 양몽거의 상소 이후의 일이다. 필자는 아직 황혁의 ?기축기사?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선이 말한 박광후의 기록’, ‘(유성룡)와 이(이양원)가 위관이었다는 중요하고 공정한 문서부터 살펴보자. 송강이 유 정승을 탓한 것으로 보면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죽은 것은 송강이 귀양 간 뒤의 일로 보인다. 그런데도 한편 사람들은 굳이 이 일을 송강에게 돌리고, 지금까지 화근으로 삼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만일 송강이 조정에 있을 때여서 말 그대로 이발의 노모와 아들을 죽었다면, 비록 송강이 위관이었을 때가 아니라도 송강과 유성룡이 함께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니 어찌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눌 날이 없어서 굳이 永柔까지

20) ?明齋遺稿? 12, 서경휘 봉령 에게 답함-정사년 37[答徐景翬-鳳翎-

丁巳三月七日]

21) 돌아가신 아버지 : 이후원(1598, 선조311660, 현종1)으로, 본관은 全州, 자는 士晋士深, 호는 迂齋이다. 어머니는 長水黃氏廷彧의 딸이다. 金長生의 문인이며, 金集趙涑(宋浚吉 등과 교류하였다.

22) 獨石 黃公 : 독석은 黃赫(1551, 명종61612, 광해군4)의 호이다. 본관은 長水. 이다. 아버지는 廷彧이며, 어머니는 趙詮의 딸이다. 奇大升의 문인이다.

23) ?芝湖集? 6, 己丑事蹟跋

256 ?韓國人物史硏究? 23

 

와서 난리 통에 책망한다는 말인가. 이 때문에 마음속에 의심한지 오래되었다.

정사년(1677, 숙종3) 3월에 마침 일이 있어 南平에 갔는데, 洪潤河와 함께 李韶 어른에게 인사를 했다. 이소는 바로 이발의 동생이었던 진사 李溭의 외손이었다. 그 사람이 자못 진실하여 지난 일을 물어볼 만하였다. 또 이씨 집안의 토대를 지키며 지금까지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기축년의 일을 상세히 물었더니, 이씨 어른은 탄식하며 편치 않은 기색이었다. 이윽고 조용히 대답하기를, “기축년의 화는 말하기에 참혹하다. 이 승지 형제가 죽음을 당한 뒤, 외증조모인 尹氏가 경인년 10월에 저 上村으로 옮겨와서 살았다. 상촌은 바로 이발이 살던 마을이다. 12월에 또 연루되어 한양으로 잡혀갔다. 趙重峯이 길에서 윤씨를 배웅하면서, 털옷 한 벌로 추위를 막아주었다. 윤씨는 여러 번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이어 의금부에 갇힌 것이 여러 달이 었다. 외조모도 따라가서 옥바라지를 했다. 신묘년 522일에 외증조모가 압슬의 화를 당해 죽었다.”했다. 나는 이씨 어른의 말에 착오가 있을까 의심하여, 다시 묻기를, “기축옥사가 과연 그렇게 오래 지체되었습니까?”

하니, 이씨 어른이, “이 승지 형인 井邑 이급의 아들 李汲은 재앙이 있은 뒤 오래 옥에 갇혀 있다가 임진왜란 때 비로소 풀려났으니, 몇 해 동안 재앙이 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했다. 내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윤씨의 죽음을 송강이 귀양 간 뒤의 일인데, 요즘 사람들이 왜 윤씨의 죽음을 두고 송강에게 원한을 돌립니까?”

하니, 이씨 노인은,

내가 외조모를 모신지 오래되었다. 외조모가 그 재앙을 눈으로 보고 집에 사사로이 기록해둔 것이 있었다. 그 때문에 내가 외조모의 말을 상세히 들었고 자세히 알게 되었다. 송강이 귀양 간 날짜는 내가 알지 못하지만, 윤씨의 죽음은 과연 그와 같다.”

했다. 내가 이씨 노인의 말을 듣고, 이어 송강이 영유에서 유성룡을 책망한 말을 생각하니, 비로소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죽은 것이 송강이 이미 귀양 간 뒤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성룡이 위관이 되어 구원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가, 송강이 책망하는 말을 듣고 비로소 눈물을 흘리며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던 것이다.24) 박광후가 남평에서 이소라는 노인의 증언을 들은 것이 1677년이었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57

. 본문 중, 정철이 유성룡을 탓한 얘기는 사계 김장생의 송강행록에 나온다. 귀양에서 풀려난 정철이 조정이 피난 간 평안도 永柔에 가서 유성룡을 만났을 때 했다는 이야기이다. 송시열의 제자이고 西人의 기록이라는 혐의를 피할 수 없겠지만, 박광후의 증거는 매우 구체적이 라는 점에서 신뢰성이 있고, 기축옥사 피해 당사자였던 이발 집안의 증언을 인용했다는 점에서 다른 차원의 증거라는 의미가 있다. 무엇보 다도 박광후의 기록은 우리가 ?宣祖實錄??宣祖修正實錄?을 통해 검토하여 다가갈 진실의 연장에 있다.

1680(숙종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세력을 잡자 상황이 달라졌다. 1677년 양몽거의 상소에 대한 반론 상소가 올라온 것이었다. 앞에서 이현일이 비난했던 柳景瑞의 상소였다. 그는

이발과 이길이 죽은 뒤에도 임금께서 이발 등은 여러 번 역적 공초에 나왔으니 같이 참여한 것이 틀림없다 하여, 이발의 어미 尹氏와 여러 아들들을 묶어다 국문하라 명하였으므로 이발의 어미는 드디어 신묘년 5월에 압슬형을 당하여 죽었습니다. 정철은 이미 이해 윤 3월에 참언을 입어 조정을 떠났고, 李陽元柳成龍 등이 서로 위관이 되었으니, 실로 이 옥사는 정철이 관여하지 않은 것이 명백합니다.”라고 했다.25)

다시 기사환국 뒤에 정무서는 윤씨는 경인년 정월 14일에 붙잡혀 동년 513일에 죽음을 당하였으니, 513일은 명백히 성룡이 재상에 제수되기 전이며, 또 더구나 양원이 재상에 제수된 것은 신묘년 가을이었는데, 지금 유경서의 양원과 성룡이 사실 이 옥사를 맡았다

한 말은 또 무엇을 이르는 것입니까.”라고 되물었다.26) 정무서는 또한 安邦俊의 사당을 헐 것을 청하였다. 안방준은 기축옥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긴 바 있었다. 숙종은 발본색원한다는 말은 매우 명쾌하나,

 

24) ?安村集? 3, 참봉 이소와 송강의 사안을 문답하다[與李參奉韶問答松江事]

25) ?己丑錄續?, 이해 가을 진사 유경서 등의 소[是年秋進士柳景瑞等疏]이해1680년을 말한다.

26) ?己丑錄續?, 신미년(1691. 숙종17) 1122일 유학 정무서 등의 소[辛未十一月二十二日幼學鄭武瑞等疏]

258 ?韓國人物史硏究? 23

 

추삭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답했으나, 며칠 뒤 이현일이 경연에 들어와 힘껏 요청함으로써 마침내 정철의 벼슬을 추삭하였고,27) 유성룡의 손자 柳後常의 상소에 따라 안방준의 사당도헐었다. 그런데 유후상의 상소에는 흥미로운 발언이 있다.

안방준은 바로 故 相臣 鄭澈의 문도인데, 기축년에 대한 거짓 僞錄을 지어내, 崔永慶을 죽인 일은 돌아간 할아버지 臣 柳成龍이 실지로 주도한 것이라고 하여, 선조께서 정철을 죄주셨던 분부를 깎아 고치고, 할아

버지가 정승에 제배된 날짜를 바꾸어, 정철은 흠을 씻어주고 저의 돌아간 할아버지에게는 모함을 가하려고 했습니다. 정철을 위해 편을 드는 사람들이 그의 저서를 기쁘게 여겨 간행하여 중외에 배포하고 안방준의 사당을 세워 높이고 있으니, 士林들이 얼마나 통탄스럽겠습니까?28) 안방준은 기축옥사에 관한 집성 연구라고 할 수 있는 ?己丑記事??混定編錄?을 편찬했다. 유후상의 상소에서 말한 기축년에 대한 거짓 기록이 바로 이들 기록일 것이다.29) ?혼정편록? 5에 나오는 경인년 5월에 유성룡이 위관이 되어 윤씨를 국문하며 壓膝刑까지 가하니 [後庚寅年五月, 柳成龍爲委官, 推問尹氏至加壓膝]’라는 부분이다. 경인년(1590, 선조23) 5월에 유성룡은 일시 귀향해 있다가 부인 이씨의 상을 당하였고, 당시 위관은 이산해 또는 정철 같은 정승을 맡고 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방준의 이 기록은 경인년이 오류든지 유성룡이 위관이라는 말이 오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30)

 

27) ?肅宗實錄? 171122.

28) ?肅宗實錄? 18414.

29) ?기축기사??은봉전서(隱峯全書)? 5에 수록되어 있고 ?혼정편록?은 권17~34에 실려 있다.

30) ?은봉전서? 10 매산문답(買還問答)에서 보여주는 객관성과는 별도로, 윤선거로부터 정철에 대한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받았다.?魯西先生遺稿 卷7 與安持平 邦俊庚寅冬? 윤선거(1610, 광해군21669, 현종10) 는 파평이 본관이고, 자는 吉甫, 호는 美村魯西이다. 의 아버지이다.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59

 

. 1590년 아니면 1591

이발 노모의 사망 시점에 대해서 이렇듯 엇갈리는 두 기억, 즉 정철이 위관일 때인 경인년(선조23) 5월이라는 기억과 유성룡이 위관일 때인 신묘년(선조24) 5월이라는 기억이 있다. 해결할 길이 없는 것일까?

이런 경우 조선시대 연구자라면 제일 먼저 확인하는 자료가 실록일것이다. 하지만 ?宣祖實錄? 경인년(선조23) 5월 기사에는 이발 노모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 없다.

그러면 서애나 이양원이 위관으로 있던 1591(선조24)5월의 기사는 어떤가? 마찬가지였다. ?宣祖實錄? 신묘년 5월 기사에도 이발 노모의 사망과 관련된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 ?宣祖實錄?에는 이발 노모의 사망에 관한 기록만이 아니라, 기축옥사 자체에 대한 기록이 매우 성글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선조 후반, 그러니까 임진왜란 이후에 이산해, 이이첨 등 북인 일각에서는 정철을 기축옥사의 원흉으로 지목하였고, 유성룡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화의를 주장했다는 등의 이유로 탄핵하였다. 이런 점으로 보자면 이이첨이 주도하여 편찬한 ?宣祖實錄?에서 기축옥사 기록이 소략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宣祖實錄?이 소략한 큰 원인은 전쟁에 있었다. 광해군 즉위년 9, 선조 때의 실록을 편찬하려고 했을 때 나온 말이, ‘史冊이 모조리 없어져서 걱정이니, 사료를 수집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31)

임진왜란으로 실록을 편찬할 사초를 대거 손실한 상황에 더해, 이러 저러한 정치적 사건으로 ?宣祖實錄? 편찬이 늦어졌다. 임해군 옥사, 김직재 옥사, 계축옥사가 이어졌다. 초기의 이항복-이정귀-신흠으로 구성

된 실록편찬 당상관을 대체한 것은 신임 대제학 이이첨이었다. 다른 실록과 달리 광해군 때의 ?宣祖實錄? 편찬은 무려 8년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 ?宣祖實錄?은 늦어진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실31) ?光海君日記?(중초본) 즉위년 917. 260 ?韓國人物史硏究? 23호 록의 내용,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宣祖實錄?을 수정

해야 한다는 논의로 이어졌다. ?宣祖實錄?의 수정 논의는 인조 원년에 처음 제기됐지만 나라 안팎의 사정으로 계속 중단되다가 효종 8(1657)에 이르러 마무리됐다. 그러면 ?宣祖修正實錄?에는 기축옥사 당

시 이발 노모와 어린 아들에 대한 기록이 있을까?

李潑의 어머니 尹氏와 그의 아들을 고문으로 죽였다. 발과 李洁家屬이 옥에 연루된 지 2년이었다. …… 이때에 옥사를 이미 완결시켰으나 이발의 가속에 대해서만은 미결된 상태였는데, 모두 형신하며 국문하라고 상이 명하였다. 윤씨는 82세였고 이발의 아들 李命哲10세였다. 우의정 李陽元監鞫하면서 늙은이와 어린 아이에게는 형벌을 실시할 수없다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명철은 壓膝에도 승복하지 않았고, 윤씨는 나이 80여 세에 장형을 받았지만 역시 승복하지 않고서 죽었다.32)

인조 때 ?宣祖實錄?을 수정하는 책임을 맡았던 인물은 澤堂 李植이었다. 이식은 ?宣祖實錄?에서 기축옥사 기록이 빠진 데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우리의 주제인 이발 노모가 죽었던 시기에 대한 세간의 다른 기억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다음의 편지는 이를 보여준다.

이발의 노모와 그 손자가 국문을 받다가 죽은 일에 대해서, 正史에서는 무시해 버리고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대개 委官이 꺼렸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獄事를 쓰지 않으면 重峯에 대한 일도 함께 붙여서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노모의 성씨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때 나이가 이미 70이 넘었습니까? 당시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은 것이 경인년 정월 같다고도 하는데, 그 말이 맞습니까?33) 이식이 말하는 正史는 곧 이이첨이 주관하여 편찬한 ?宣祖實錄?

 

32) ?宣祖修正實錄? 2451.

33) ?택당선생 별집? 18, 안우산에게 보내다[與安牛山]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61

 

을 말한다. ?宣祖實錄?과 비교할 때 ?宣祖修正實錄?에서 보강된 주제의 하나가 기축옥사 관련 기록이었다. 그 중 이식은 이발 노모가 죽은 시기에 대해 안방준에게 질의하였던 것이다.

이식본 실록, ?宣祖修正實錄?의 공정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역시 그래도 반정 이후 西人들 시각이……하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또 안방준의 ?혼정편록?에서 유성룡이 위관이었던 경인년 513이라고 하여 조정에 있지도 않았던 유성룡이 위관이었던 것처럼 기록한 오류를 범한 일도 마음에 걸릴 것이다.

한편 우리가 너무 실록에서 해당 사건이 발생할 시기에 대한 직접적인 사료만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여 보자.

성균관 유생 崔喜男 등이 상소하기를, “지난 기축년에 국가가 불행하여 역적 鄭汝立 같은 지극히 흉악한 인물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미명하에 縉紳 사이에 끼어 한 세상을 그럴 듯하게 속이면서 명사들을 두루 사귀었습니다. …… 감정을 품고 있는 상대편 사람들이 보복의 기회가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 겉으로는 역적을 토벌한다는 이름을 가탁하고 속으로는 일망타진의 계획을 세워 죄에 얽어 넣음에 있어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姦魁 鄭澈士類에게 버림을 받고서 밤낮으로 李潑 등에게 이를 갈다가, 逆變의 소식을 듣고 나서는 그들과 함께 손뼉을 치면서 서로 경축하였습니다. …… 이발 등의 죄상이 끝내 드러나지 않자 몰래 門客을 보내어 죄수들에게 죽음을 면하여 준다고 꾀어 그들로 하여금 이발을 무고하게 하였으며, …… 늙은 어머니와 어린아이까지 모두 刑訊을 받게 하였으니, 이는 聖代의 허물일 뿐만이 아니라 참으로 만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런데도 당시 위관은 눈치만 보고 움츠려 간당에게 순종만 한 채 부당한 형옥에 대하여는 한마디 말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나라를 그르친죄는 정철에게만 돌릴 것이 아닙니다.34) ?宣祖實錄?은 이이첨이 주도하여 편찬한 실록에 실린 기사이므로 송강에 대해 우호적인 의도를 가지고 넣은 것은 아니다. 게다가 유생

34) ?宣祖實錄? 30411.

262 ?韓國人物史硏究? 23

최희남이 북인의 입장에서 기축옥사의 위관을 비판하는 상소이니만큼

조작설을 내세우기도 어렵다. 최희남은 늙은 어머니와 어린아이까지

형신을 받게 했는데, ‘당시 위관간당에게 순종한채 한마디도 언

급하지 않았다고 했다. 여기서 간당은 정철을 말한다. 결국 최희남의

상소가 올라오던 선조 30년경에는 적어도 이발 노모가 죽었을 때 정

철이 위관은 아니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또 다른 사료를 살펴보자. 1594(선조 27), 최희남의 상소가 있기

3년 전, 송강이 세상을 뜬 다음해에, 상중에 있던 송강의 아들 鄭宗

이 상소한 적이 있었다. 상소를 본 선조는, “崔三峯에 대한 말은

그때 역적의 供招에 있었고 鄭緝은 내가 친히 국문했었다고 대답하

였다.35) ‘최삼봉에 대한 말이라고 했으니, 짐작컨대 최영경의 억울한

죽음을 두고 벌어진 논란으로 보인다.

이때 올린 정종명의 상소는 이이첨본 ?宣祖實錄?에는 수록되어 있

지 않지만, ?宣祖修正實錄?에는 나온다. 정종명은, 前 縣監 權愉가 상

소하여 山林의 선비가 옥중에서 억울하게 죽었으니, 이는 姦臣이 감

정을 품고 기회를 이용해서 모함에 빠뜨렸기 때문이다라고 아버지

정철을 무함했다는 것이다. 정종명은 정철이 최영경을 죽이려고 하기

보다 구원하려고 했다는 논거를 제시하였다.

권유는 영남 사람인데 1년 전 아산 현감으로 있을 때 사람됨이 교만

포악하여 일처리 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므로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

지 못하고 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된 상태였다. 1594년에

그가 올린 상소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비변사에서 알아본

결과가 실려 있어 그가 말한 간신은 정철이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

은 최영경임을 알 수 있다.36)

이때도 최영경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정철에게 묻는 논란이 있었지

이발 노모와 관련된 언급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광해군이 즉위한

 

35) ?宣祖實錄? 27519.

36) ?宣祖實錄? 2754.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63

 

, 상황은 다른 국면을 맞았다. 1608(광해군 즉위년)에 의금부 경력

羅德潤은 장문의 상소를 올려 기축옥사를 거론하며 송강을 몰아세웠다.

정여립은 애초부터 불을 지른다거나 사람을 겁탈하는 도적이 아니고,

사실은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인 간악한 자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에 지식이 해박하고 견문이 많은 인물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습니

. 이이와 成渾이 맨 처음 그와 교유해 보고 나서 그를 추켜세우고 칭찬

하였는데, 그가 청요직에 천거되어 등용된 것은 사실 이이가 이끌어준

힘이었습니다. …… 鄭澈은 본래 괴팍한 성미로 날조하여 얽어 넣으려고

꾀하여, 음험한 함정을 파서 무고한 자를 빠뜨리고 公法을 빙자해 사적

인 원수를 갚았습니다.37)

이에 대해 廣州牧使 申應榘는 스승 성혼을 변론하면서, “정철이 위

관에서 체직된 뒤에 이발의 80된 어머니와 열 살 된 아들까지도 곤장

아래서 죽었으니 그의 원통함을 행인들도 모두 말했는데, 그 당시의

추관들 역시 법을 인용하여 구원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

데 당시 사관의 말이 주목할 만하다.

이발의 모자가 죽음에 나아간 것은 대개 柳成龍이 위관이 되었을 때

이다. 유성룡도 그의 억울함을 알았으나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정철이 알 수 있는 바이겠는가. 鄭彦信은 과거 정여립과 이미 서신을 교

통했으면서도 정여립을 전혀 알지도 못한다고 임금을 속여 거의 刑杖

에서 죽게 되었는데 정철이 극력 구원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정철이 없

는 사실을 꾸며 날조한 것이겠는가. 오늘날 정철을 논하는 자들이 당시

의 사적을 자세히 모르면서 한갓 정철에게 죄를 돌리려고만 한다면 정철

역시 그 죄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38)

 

37) ?光海君日記?(중초본) 즉위년 1112.

38) ?光海君日記?(중초본) 125. 사론 중 「 」표시가 된 곳은 중초본

에서 정초본으로 갈 때 삭제하라는 뜻으로, 인조 때 편찬하면서 했던 표

시이다. 실제로 ?광해군일기? 정초본에서는 삭제되었다.

264 ?韓國人物史硏究? 23

 

사관의 말에 따르면, 한편에서 과도하게 송강을 몰아간다는 말이다.

또 우리의 관심 주제,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죽은 것도 서애가 위관일

때라는 것이다. 이 사론은 인조 때, ?광해군일기?를 편찬할 때 쓴

것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이항복을 지칭하면서 이란 말을 쓰지 않

은 것도 그렇고(백사는 1618, 광해군10년 귀양 가서 운명했다), ‘

늘날 정철을 논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도 논란이 되던 시점에 작

성된 사론임을 보여준다. 또한 1609년에 정종명이 앞의 사론과 비슷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그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이 서로 잇따라 사형된 것을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다고 일컫는데, 그 당시 신의 아비는 위관에서 체임된 지 이미 오

래였습니다. 柳成龍李陽元이 서로 잇따라 위관이 되어 그들의 사형을

좌시하면서 끝내 구원하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니, 대사간 洪汝諄,

金玏, 형방 승지 李廷馦이 그 좌석에 함께 있었으므로 분명하여 엄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에는 그 옥사를 신의 아비에게 떠넘기니 또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39)

정종명의 상소를 통해서 우리는 이미 이발 노모와 아들의 죽음 역

시 정철에게 책임을 묻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후반과

는 다른 상황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정홍명의 상소를 통해서 짐작

할 뿐, 드러내놓고 당시 위관이 송강이었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럭저럭 광해군 시대를 넘겼다. 계해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한 뒤 이

발 형제에게 직첩을 돌려주는가 하면 정철도 복권됨으로써 사태는 정

리되는 듯하였다.40) 이발이길에 대해서는 역적이라는 죄명을 씻어주

고 직첩을 도로 내주었다.41) 浦渚 趙翼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39) ?光海君日記?(중초본) 11223.

40) ?仁祖實錄? 2529.

41) ?仁祖實錄? 273.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65

 

柳永詢이 말하기를,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이 刑訊을 받을 적에 내

問事郞廳이었는데, 그때 松江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다라고 하였는

, 송강은 정철의 別號입니다.42)

이상 실록을 중심으로 여러 자료를 검토했다.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이 추국청에서 안타깝게 죽은 사건이 송강이 위관이었던 선조

23(1590, 경인년)이었는지, 서애가 위관이었던 선조 24(1591,

신묘년)이었는가가 우리의 탐구 주제였다. 빠진 자료가 있을 수도 있

겠지만 중요한 자료는 거의 검토한 듯하다.

그런데 이발 노모와 어린 아들이 죽었을 때 위관이 유성룡인가,

철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빠진 것이 있다. 바로 추국청이다. 추국청이

라는 공간, 추국청이라는 제도, 이걸 다루어야 한다. 기축옥사의 모든

일은 바로 추국청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 제도 : 추국청과 추관

모든 사건은 조건, 의지, 우연이 합쳐져서 생긴다. 역사는 사건에 대

한 탐구이므로 모든 사건을 탐구할 때는 조건, 의지, 우연을 다 살펴야

한다. 조건만 따지다 보면 인간의 책임을 물을 수 없고, 의지만 따지다

보면 사람 탓만 하면서 당쟁론에 빠진다. 우연만 생각하는 경우에는

불가지론, 상대주의에 빠진다.

이발 노모와 어린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이 발생한 시기를 따지면서,

이를 유성룡과 정철의 인격 문제나 동인과 서인의 정쟁으로 다루는

것은 위 세 가지 범주 중 어디에 속할까? 그렇다. 그 비극적인 죽음이

누군가의 의지의 결과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장에서 검토한 결과로

는 위관이 유성룡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기축옥사는 위관 한 사람에

 

42) ?浦渚集? 14, 윤대했을 때 말로 진달한 계사-계사년[輪對口陳啓辭-癸亥]

266 ?韓國人物史硏究? 23

 

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당시 실록에서 전하는 상황을 살

펴보자.

옥사가 일어나던 처음에는 상(=선조)이 수십일 동안 親鞫하였고 그

후에는 혹 廷鞫(궁궐 안에서 하는 추국)하면서 대신이 아울러 참여하였

으며, 최후에는 三省交坐로 추국하면서 대신 한 사람이 추국을 감독하였

. 경인년(1590, 선조23) 5월 이전에는 鄭澈이 감독하였고 그 후에는

成龍李陽元 등이 대신하였다. 이 해에는 이발의 형제 외에는 갇힌 사람

이 없었다.

기축년 10월부터 이때(1591, 선조24)에 이르기까지 20개월 사이에 죽

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조정 신하 중 이름난 관원으로 죽은 자가

10여 인이었으며이발이길白惟讓柳德粹曺大中柳夢井金憑

형으로 죽었고, 尹起莘鄭介淸은 장형을 받고 유배되던 도중 길에서 죽

었으며, 崔永慶은 옥에서 병으로 죽었다.연좌되어 유배된 자가 수백

명이었다. 조정 신하 가운데 귀양간 자로는 鄭彦信金宇顒洪宗祿 등이

었으며, 파직되어 쫓겨난 자도 수십 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옥사가 일어

난 초기에 결정된 자들이다.

경인년 봄에 옥사가 끝난 뒤, 종묘의 제사 그릇을 훔쳐간 옥사가 일어

났으며, 그 후에도 계속해서 밀고하는 자가 있어서 다시 정국과 삼성추

국이 있었다. 3년이 지나서야 옥사가 그쳤는데, 이 때문에 인심이 원망하

였다. …… 이렇듯이 서로 끌어들임으로써 역적과 가까이 지냈던 자들이

모두 죄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이 때문에 전

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었다.43)

실록이 전하는 기축옥사 역시 옥사가 오래 진행되었고, 진술에 얽혀

잡혀가고 밀고가 이어졌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최영경이나 이발 형

제가 억울하게 죽었을 때, 또 이발 노모와 어린 아들이 억울하게 죽은

시기에, 유성룡이나 정철은 모두 정승으로 위관이거나 추관이었다.

기축옥사 당시 서애와 송강은 議政, 곧 정승이었다. 대체로 선배인

정철이 먼저 승진하고 그 뒤를 유성룡이 이었다. 두 사람만 정승이 아

 

43) ?宣祖修正實錄? 2451.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67

 

니었다. 심수경도 우의정으로 위관을 맡았으며, 이산해 역시 영의정이

었고, 이양원도 우의정으로 추국에 깊이 간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

에 많은 추관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국왕 선조가 있었다.

축옥사 초반에는 선조가 직접 친국을 했다.

다음 기록을 보자. 광해군 때 추관 명단이지만 선조대의 추국청 구

성도 동일했기 때문에 추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무신년 221, 軍器寺에서 추국청을 열었다.

 

推官 명단

鵝城府院君 李山海

領議政 李元翼

領中樞府事 李德馨

鰲城府院君 李恒福

行判中樞府事 尹承勳

行判中樞府事奇自獻

行知中樞府事 沈喜壽

左議政 許頊

右議政 韓應寅

判義禁府事 柳根

知義禁府事尹承吉

同知義禁府事具義剛

左副承旨 李慶涵

司憲府大司憲 金信元

司諫院司諫 朴彛敍

問事郎廳

弼善 崔起南

司䆃寺正 權縉

典籍 姜弘立

刑曹佐郞 尹衡彦

刑房郎廳

 

268 ?韓國人物史硏究? 23

 

經歷 高尙志

1608(광해군 즉위년)에 있었던 임해군 옥사의 추관 명단이다.44)

선조는 21일에 세상을 떴고, 광해군이 이튿날 즉위하였다. 그로부

터 보름이 안 된 214일에 임해군은 진도로 귀양을 갔고 추국청이

설치되었다. 위에서 아성부원군 이산해부터 박이서까지가 추국청 당

상관이다. 이산해는 관직이 없이 아성부원군이라고만 적혀 있는데,

아성부원군이 바로 기축옥사에서 討逆’, 즉 역적을 토벌한 공로로 받은

공신호이다. 그는 아마 관직의 서열로 보아 임해군 옥사의 위관을 맡았

을 것이다. 이후로도 계속 추국청 명단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

당상관 아래 낭청이 있는데, 문사낭청인 최기남 등과 형방 낭청인

고상지가 나온다. 이들은 추국청 실무를 담당하였다. 직접 곤장을 치

거나 단근질을 하는 등의 고문은 獄吏들이 담당하였다. 보다시피 추국

청은 한두 사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규모가 작은 三省 추국

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이란 사헌부와 사간원, 그리고 의정부를

가리킨다. 다음 사료를 하나 더 보자. 기축옥사 당시의 상황이다.

어느 날 大臣이 입시했는데 상이 최영경의 옥사가 어떠한가 묻자,

철이 아뢰기를,

전혀 단서가 없습니다. 신이 들은 바로는 그가 평소 氣節을 숭상한다

고 하였습니다. 또 효성과 우애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고 영남의 士論

도 매우 존중한다고 하니, 역모를 꾸몄을 리는 없습니다. 신은 그와 평소

에 전혀 모르는 사이여서 감히 사심을 둘 수 없습니다. 단지 들은 바가

이러하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아우에게 준 편지를 보건대 과연 우애가 있는 듯하였다.”

하였다. 南道 지방을 탐문해 봤지만 삼봉이란 소문에 대해 끝내 신빙성

이 있는 것이 없자, 상이 명하여 석방시켰다. 이튿날 사간원이 아뢰기를,

최영경이 정여립과 편지를 통한 사실을 숨기고 사실대로 공초하지

 

44) ?국역 추안급국안?01(전주대학교 고전국역총서2), 흐름, 2014, 375~376.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69

 

않았고 또 상종했다는 소문이 있으니, 온전히 석방하는 것은 불가합니

. 다시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하문하기를,

영경이 역적과 상종했다는 소문이 어디에서 발설된 것인가?”

하니, 정언 具宬이 아뢰기를,

慶尙都事 許昕지난 해 섣달 그믐날 감사 金晬와 밤에 이야기하였

는데 김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 말하였다는 것을 신이 직접 들었기 때문

에 아뢴 것입니다.”

하였다. 대사간 李海壽 등이 동일한 말로 아뢰니 상이 즉시 윤허하였

. 최영경이 다시 하옥되어 공초하기를,

편지를 통한 일은 기억 착오로 잘못 공초하였으니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적과 상종했다는 소문에 대해선 전혀 그런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허흔을 잡아다 물으니, 과연 김수를 끌어대었다.

수가 당시 병조 판서였는데 추국청에서 그를 잡아다 국문하기를 청하자

상이 승정원에서 문초하도록 명하였다. 김수가 답하기를,

신이 지난 해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마침 도사가 有故하여 밀양 교

姜景禧를 임시 도사로 수행하게 했는데, 경희가 이 말을 신에게 했습

니다.”

하니, 허흔을 석방하고 강경희를 잡아다 국문하였다. 경희는 진주 판

洪廷瑞를 끌어대었으므로 또 홍정서를 잡아왔다. 옥사가 만연되어 최

영경은 오래도록 옥에 갇혀 있게 되었고 또 그 아우가 심문받다가 죽은

것을 애석히 여겨 질병이 생겼다.45)

위 상황은 기축옥사에서 풀려났다가 다시 잡혀와 옥사했던 최영경

의 추국에 대한 기록이다. 최영경은 대체로 억울하게 죽었다는 평을

받았던 인물이다. 다른 것을 떠나, 최영경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이루

어지는지 주목했으면 한다. 아마 이 무렵 위관은 정철이었던 듯하다.

정철이 대표로 추국청에서 있었던 최영경 심문 상황을 보고하자,

에 근거하여 선조가 일단 석방 판정을 내렸다. 사람도 우애가 있고,

영경이 주동자인 삼봉이라는 혐의도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런데 사간원에서 정여립과 최영경이 주고받은 편지를 근거로, 최영경

 

45) ?宣祖修正實錄? 2361.

270 ?韓國人物史硏究? 23

 

이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받은 일이 없다는 진술은 거짓이라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곧바로 최영경을 재수감하지 않았다. 허흔, 김수 등

의 이름이 나오자, 이들을 문초하였고, 다시 이들의 진술에서 강경희,

홍정서의 이름이 나오자 다시 최영경이 옥에 갇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반역사건을 다루는 조선 刑政의 첫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

는 추국청은 위관부터 당상관, 낭청으로 구성된 하나의 제도이자 조직

이었다. 그 조직은 조사 결과를 국왕에게 보고하여 처결을 논의한다.

추국 자체의 일반적인 절차는 고변 심문 진술 刑訊 재심

자백 結案(진술서) 照律(관련 법규 적용) 처형으로 이루

어지지만,46) 추국청 심문 문서를 포함한 추국 상황을 수시로 국왕에게

보고한다. 보고하는 자리에서 사안의 처리, 이를테면 아무개는 혐의

가 없는 듯하니 석방하자라든지, ‘아무개는 누구의 진술에서 나왔으

니 다시 심문하자든지 하는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추국이 진행되었다.

특히 기축옥사는 의금부 단독 추국이 아니었다. 국왕의 친국이거나

위관이 있는 추국청에서 이루어졌고, 적어도 三省 추국으로 이루어졌

. 친국은 국왕이 위관을 대신한다는 점에서 통상의 庭鞫(궐정 추국)

과 차이가 있다. 삼성 추국은 규모가 조금 작다. 그리고 의금부는 주관

관청이므로 자연히 포함되었다.47) 사건의 중요도나 난이도에 따라 추

국의 방법과 형식이 결정되었는데, 참여관원과 장소, 座次에 따라 추

국청의 위상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친림추국(친국) > 궐정 추국(정국, 추국) > 삼성 추국 > 의금부 추국

(나국)

 

46) 김우철, 2010, 조선후기 추국 운영 및 결안의 변화」 ?민족문화?35, 211.

47) 김영석, 2013, ?의금부의 조직과 추국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법학박사

학위논문, 306~307. 조선초기에는 형조와 양사를 삼성이라고 불렀다가

성종 이후 바뀐 것으로 보인다.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71

 

기축옥사는 처음에 친국으로 시작하여, 정국, 삼성추국으로 이어졌

. 그리고 거기서 끝났다. 쉽게 말해 기축옥사는 전 과정에 걸쳐 정승

과 양사가 참여하였고, 국왕의 재가를 받아가면서 이루어진 옥사였다.

정철이 술김에 유성룡에게 왜 이발 노모와 어린 아이를 살리지 못하

고 죽게 두었느냐고 했다지만, 그 일은 유성룡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도 하면서, 유성룡의 말대로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추국청의 조건도 있

었다. 북인 일각에서 정철이 기축옥사를 조작한 듯이 말하지만, 이렇

게 여러 정파가 함께 참여하는 추국청의 경우는 누구 혼자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기 어렵다.

당시 이산해가 수상이었고, 정철이 좌의정, 심수경이 우의정이었

. 兪泓崔滉金命元李增洪聖民李憲國尹卓然 등이 의금부 당상이

었다.48)

平難功臣은 역적을 토벌한 공이다.

1, 推忠奮義炳幾恊策平難功臣 : 朴忠侃商山君, 형조판서를 지냈

.】・李軸좌참찬, 完山府院君】・韓應寅 3인이다.

2, 推忠奮義協策平難 : 閔仁伯驪壤君】・韓準호조판서, 淸川

】・李綏南溪君】・趙球全陵君으로 추봉】・南截南溪君】・金貴

좌의정, 上洛府院君】・柳㙉영의정, 始寧府院君으로 추봉】・兪泓

鄭徹李山海洪聖民李準형조판서, 全城君12인이다.

3, 推忠奮義平難功臣 : 李憲國우의정, 完城府院君】・崔滉金命元)

좌의정, 慶林府院君】・李增鵝川君】・李恒福영의정, 鰲城府院

】・姜紳晋興君】・李廷立廣林君으로 병조 참판을 지냈다.7

이다.

모두 22인이다. 박충간 이하는 告變을 했고 민인백 이하는 역도의 괴

수를 잡았고 김귀영 이하는 推官으로서 죄인의 복초를 가장 많이 받아냈

기 때문이다.혹자가 추관을 녹훈한 것에 대해서 지나치다고 하니 상

, 역적이 縉紳 가운데서 나왔는데 다행히 제때에 주벌했다고 여겨 추

관에게 공을 돌렸다.49)

 

48) ?四留齋集? 8, 행년일기하(行年日記下)

49) ?宣祖修正實錄? 2381.

272 ?韓國人物史硏究? 23

 

첫 번째 자료는 이정암의 문집에 기록된 경인년 15905월경의 관

원 명단이다. 두 번째 자료는 기축옥사를 일단락하면서 옥사를 처리한

공으로 내린 공신호이다. 이 날 종계변무에 공이 있는 光國 공신도 함

께 내렸다. 정철은 寅城府院君, 이산해는 鵝城府院君, 유성룡은 豊原

府院君에 봉해졌다.50) 유성룡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평난공신에서는

빠졌다. 아마 상을 치르고 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이 해까지 유성룡

이 실제로 기축옥사의 책임을 적게 맡았을 수도 있다.

추국청이라는 조건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다룰 문제가 남았다.

로 이발 노모와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형문 자체에 대한 규명이다.

노모는 압슬로 訊問을 받다가 죽었다고 하고, 어린 아들은 옥졸이 죽였

다는 말도 있지만, 어느 것이나 정확하지는 않다. 아무튼 갇혀 있다가

죽었다. 노모와 어린 아들 모두 나이로 보아 형신 대상이 아니었기 때

문에 형신은 불법이었고, 그래서 여론은 이 사건의 책임에 민감하였다.

그러므로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신문이라는 추국 수단을 함께 고

려해야 추국청에서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좀 더 선명해지지

않을까 한다. 기축옥사가 발생했을 당시 조선의 형정과 유럽 봉건사회

말기의 형정이 꼭 같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문화적 토양,

생산력, 정치제도의 작동, 사상적 지향 등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51)

다만, 형벌 또는 형정과 관련하여 모두 왕정에서 이루어지는 신체형

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있다.52)

 

50) 다만, 【 】안의 몇몇 기록은 착오가 있다. ?宣祖修正實錄?을 편찬할 때의

기준으로 적은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백사 이항복은 당시 영의정을 지낼

연배가 아니었고, 오성부원군이라는 봉호도 임진왜란 이후에 받았다.

51) 고통이 갖는 형벌의 의미도 역사적이고 사회적이다. 조선이나 중국은 목

을 베는 참형이 부모가 준 신체를 손상하는 것이므로 가장 높은 형벌이었

지만, 고통을 기준으로 형벌의 등급을 매긴 유럽에서는 교수형이 가장 높

은 형벌이었다. 티모시 브룩 외 지음, 박소현 옮김, 2010, ?능지처참 - 중국

의 잔혹성과 서구의 시선?, 너머북스, 174~182.

52) 미셸 푸코, 오생근 옮김, 2003,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1부 신체형,

1장 수형자의 신체.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73

 

조선시대 형정을 담당한 추국청에는 형신이 가해지는 공간의 일반

적인 긴장 외에 또 다른 긴장을 겪어야 했다. 失刑, 즉 잘못된 형벌이

아닌 正刑이 되기 위해서는 피의자가 자백을 하기 전에 죽어서는 안

된다. 그걸 物故라고 했다. 자백을 하기 전에 죽어서는 안 되지만,

백을 얻기 위해서는 신체에 고통을 주어야 한다는 딜레마가 추국청을

감돌았다.

그러나 추국에서 중요한 것은 정형이었다. 그러므로 자백을 얻기 위

한 형신은 자백의 강제보다는 자백의 자발성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유죄가 되기 위해서는 범죄가 있었다는 증거가 필요하였다.

자백을 얻기 위한 강제 = 형신, 즉 고문 실형의 가능성

자백의 합법성  = 보호, 즉 규칙 정형의 당위성

곤장, 압슬, 낙형 같은 신체형은 유력한 증거인 자백과 밀접히 연관

되어 있다. 유럽 봉건사회에서는, 모든 증거가 수집된 뒤 유죄성이 인

정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피의자라는 사실을 인지할 정도의 증

거가 나오면 유죄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절반쯤 완전한 증거가 하

나 있을 경우, 그것이 완전한 것이 되지 않으면 용의자가 무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절반 정도 유죄인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술,

지 등 다른 증거가 나옴에 따라 단계적으로 유죄성의 강도가 완결되

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중대한 범죄라면 단지 경미한 증거라 하더라도 당사자는

어느 정도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 무죄추정의 원칙이 아니라, ‘

증적 유죄의 원칙을 따랐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피의 사실이

있으면 그만큼 죄가 있는 것이고, 그것은 그에 상응하는 처벌의 단계

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용의자인 한, 그는 어떤 종류의 징벌을 마

땅히 받아야 하며, 무죄의 상태에서 혐의의 대상이 되는 일은 있을 수

가 없었다. 쉽게 말해 혐의가 곧 유죄성이었다. 이것이 정여립 사건

 

274 ?韓國人物史硏究? 23

 

때 바로 추국청이 설치되고 국문이 벌어진 이유이며, 죄 없는 사람들

이 죽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이발 노모와 어린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어느 사람 하나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 맺음말

우리는 2009년 벌어진 필자와 이덕일 사이의 논쟁에서 발견한 주제

하나를 가지고 지금까지 논의해왔다. 1589년 기축옥사 때 李潑이 연루

되었는데, 그의 어머니와 어린 아들도 감옥에 갇혀 신문을 당하다 죽

는 일이 발생했다. 여든이 넘는 노인과 어린 아이가 죽은 비극적인 사

건은, 후일 서로 다른 기억을 낳았다. 이 비극이 경인년(1590, 선조23)

鄭澈이 위관이었을 때라는 기억과, 신묘년(1591, 선조24) 柳成龍이 위

관이었을 때라는 기억이다. 이제 본고의 결론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서

마치도록 하겠다.

먼저 확인할 것은 거의 아무도 기축옥사에서 정여립의 모반을 의심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 공통적으로 이발 형제, 최영경 등의 죽음

은 억울하다, 지나쳤다고 하였다.

둘째, 이런 기억의 혼란 또는 변주는 무엇보다 기록의 부재에 기인

한다. 기록이 없으면 기억은 사라지거나 변형된다. 기축옥사는, 임진

왜란으로 진술, 심문, 판결 등이 적힌 推案이 임진왜란 중에 사라졌다.

그 빈틈으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라진 기억, 변형된 기억이

생겨났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기억 투쟁이라고까지 부르고 싶은 상이한 기억에 대한 혼란

은 연원이 오래되었다. 黃玹도 기축옥사의 기억에는 왜곡과 거짓이

많다고 했다. 기억의 차이가 멀리는 4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넷째,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록을 검토하였다. 이이첨이 책임

편찬한 ?宣祖實錄?에는 아예 해당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식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75

이 책임 편찬한 ?宣祖修正實錄?에는 나왔다. 이에 따르면 이발 노모

와 아들은 죽은 것은 신묘년, 선조 24년으로 유성룡이나 이양원이 위

관일 때였다.

다섯째, ?宣祖實錄?에서 이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기사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를 통해 검토한 결과, 적어도 선조 27년경에는 정철 위관설

이 나타나지 않았다. 광해군 원년까지도 그러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

祖實錄??光海君日記?(중초본)에 따르면, ‘정철 위관설은 부정된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그러하였다. ‘정철 위관설은 뭔가의 곡절을 거쳐

예송 시기에 등장하는 것이다.

여섯째, 이 비극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추국청이라는 공간, 추국

청이라는 제도의 측면을 고려하였다. 적어도 기축옥사가 벌어진 추국

청에서 유성룡이나 정철은 모두 추관이거나 위관이었다. 이들 뿐 아니

, 이산해, 심수경 등 정승을 포함하여 다수의 추관과 낭청이 사건에

간여했으며, 다른 추국과 마찬가지로 정점에는 국왕인 선조가 있었다.

그러므로 애당초 우리의 질문, 즉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위관

이 누구냐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중대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일곱째, 형벌에 무죄추정의 원칙이 아니라, ‘점진적 유죄성의 원

이라고 부를 관념이 작용하였기 때문에 유의미한 피의 사실이 있

을 경우 곤장, 압슬, 낙형 같은 신체형을 통해 자백을 받았던 점을 고

려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처벌하는 형벌제도의 불완전

성에 기초한 이와 같은 취약점은 정여립 사건 때 바로 추국청이 설치

되고 국문이 벌어진 이유이며, 죄 없는 사람들이 죽게 된 이유 중 하

나가 되었다.

본고는 기축옥사에 대한 연구가 아니다. 기축옥사 중에서 하나의 사

건에 대한 기억과 실증이다. 기축옥사의 당사자인 정여립이 자살이라

는 가장 불리한 방법으로 사건을 기정사실화하였다. 정여립 사건 연루

자였던 이발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의 노모와 어린 아들이 추국청에

서 억울하게 죽은 일이 있었다. 잘못된 형정, 失刑이었다. 그렇기에

276 ?韓國人物史硏究? 23

추국청에 간여했던 사람들에게 정신적 외상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트

라우마는 기억의 변주를 불러왔다.

종종 의심은 자료의 확실성을 압도한다. 자료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 의심 및 기억의 편향성을 강화한다. 이때

우리는 억울함을 해소, 극복하기보다 되새기며 상처를 유지하거나 덧

낸다. 400여 년 전의 비극적 사건이 인물 자체로도 흔치 않은 정철과

유성룡이라는 역사적 유산에 대한 오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본고가 작

은 기여나마 한다면 다행이겠다.

 

기축옥사, 이발, 정철, 유성룡, 추국청, 추관, 위관, 기억, 기록

논문투고일 2015. 2. 4. / 심사시작일 2015. 2. 9. / 심사완료일 2015. 2.21.

주제어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77

 

참고문헌

1. 자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중초본)

?宣祖修正實錄?

?肅宗實錄?

?仁祖實錄?

?己丑錄續?

변주승 외 역, ?국역 추안급국안?(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고전국역

총서), 흐름출판사, 2014

황현, ?매천집?

이현일, ?갈암집?

허목, ?記言?

윤선도, ?孤山遺稿?

이항복, ?백사집?

윤선거,?魯西先生遺稿?

윤증, ?明齋遺稿?

이선, ?芝湖集?

박광후, ?安村集?

안방준, ?隱峯全書?

이식, ?澤堂集?

조익, ?浦渚集?

이정암, ?四留齋集?

2. 논저

김우철, 2010, 조선후기 추국 운영 및 결안의 변화」 ?민족문화? 35.

김영석, 2013, ?의금부의 조직과 추국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법학박사

학위논문.

278 ?韓國人物史硏究? 23

티모시 브룩 외 지음, 박소현 옮김, 2010, ?능지처참 - 중국의 잔혹성과 서

구의 시선?, 너머북스.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 279

Abstract

The Memory of the trial in 1590 or 1591

Oh, Hang-Nyeong

I studied two memories about a tragic accident of Gichuk-trial being made

by an illegal trial. There were two memories about one accident! At the trial

Yibal was engaged in and his old mother and baby died in the course of the

trial. His mother was too old to torture for the confession of crime in law and

his son too young. This was the reason to be a hot issue at that time.

According to the tragic and illegal character of the accident, the

responsibility of the accident became a sensitive problem. As the time flew,

two memories conflicted each other. Jung Chul or Ryu Sung-Ryong.

The difference of the memory mainly due to the absence of the records of

the trials. The Imjin Invasion erased the records of the trial 1589~1592.

Second, there was a intentive distortion of the historical material during the

Late Sun-jo and the Gwang-Hae Reign.

I concluded that Ryu Sung-Ryong was the Wigwan(Head officer of Trial) at

the time of the tragic accident. However, including Jung Chul, Yi San-Hea

and Sim Su-Kyeong also were the Chugwan(Officer of Trial) at that time. At

this point, I examined a institution of the Dynasty, the Chugukcheong(Office

of Trial Processes). All accidents happened on base of their historical

conditions. That is the reason why we have to pay attention to the theory of

party-confict.

280 ?韓國人物史硏究? 23

the Trial of 1589, Yi bal, Jung Chul, Ryu Sung-Ryong,

Chugukcheong(Office of Trial Processes) Chugwan(Officer of Trial)

Wigwan(Head officer of Trial) Memory Reco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