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 주변 지붕선생 비우당 옛터
▲ 복원된 3칸 초가, 비우당(庇雨堂)
◎ 하정공종중에서 가는 길
충무로역 4호선→동대문역하차 → 5번출구 정류장(1호선동대구역은 2번출구임)→종로03마을버스→9개정류장이동→창신쌍용2단지 한성대후문 하차→1분→지붕선생비우당옛터(쌍용2단지에 하정공 집터 표지석 있음)
정류장 남쪽 비탈에 조그만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으로 들어서면 원각사 직전에 3칸짜리 초가가 있다. 낙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비우당이다. 비우당 바로 뒤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 자지동천 바위글씨와 샘이 있다.
비우당이란 이름은 '비를 가리는 집(간신히 비나 가리는 집)'이란 뜻으로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주인공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그의 호인 지봉은 낙산 동쪽의 한 줄기인 지봉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이 집은 이수광이 지은 것이 아닌 문화류씨 집안이던 류관(柳寬. 세종조우의정 1346~1433)의 집이었다.
그는 낙산 동쪽 현 자리에서 약간 서남쪽인 쌍용2차아파트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맹사성, 황희 못지 않은 강력한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집을 짓긴 했지만 재상(宰相)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낡아빠진 초가였고 지붕에 계속 빗물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았다고 한다. 그때 그는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찌 견딜까?' 남 걱정도 참 팔자인 유명한 농담을 남기니 그 말이 '류재상의 우산'이란 뜻의 류상수산(柳相手傘)이다.(현재 서울시공무원을 대상으로 매년 하정청백리상을 시상한다)
류관이 죽자 외손인 전주이씨 집안에게 상속되었는데 그 집안에서 태어났던 이수광이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없어진 것을 1613년 계축옥사로 잠시 관직을 버렸을 때 홀연히 다시 찾은 것이다.
그는 다시 집을 짓고 류관의 일화를 바탕으로 집의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며 지봉유설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작성했는데 '동원비우당기'를 통해 집과 관련된 사연을 적었다.
조선 중기에 뛰어난 문신이자 학자로 실학의 시조격인 인물이며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정국을 이끈 그가 바람처럼 사라진 이후 집은 고된 세월에 지쳐 쓰러졌고, 그가 노래한 비우당8경도 개발의 칼질에 재현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서울시에서 뒤늦게나마 비우당 표석을 세웠고, 원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앉으면서 2011년에 그 부근인 자지동천 앞에 비우당을 복원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비우당은 툇마루를 갖춘 초가 3칸으로 부엌을 가지고 있다. 초가 주위로 싸리나무로 얇게 담장을 둘러 옛 초가의 정취도 조금은 풍기는데 사립문이 열려있는 경우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면 된다. 허나 무심히 닫혀있더라도 담장이 낮아서 안으로 넘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 서울시장 조순이 1995년에 세운 비우당 옛터 비석
출처: http://pynce43.tistory.com/282 [도봉산고양이의 여행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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