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검한성공파(檢漢城公)는 대승공(大承公) 휘 차달(車達)님의 12세손이신 파시조 휘 원현(元顯)님으로부터 세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파시조의 아드님이신 양도공(良度公) 휘 영(潁)님은 조선 전기 사가 족보의 시작을 알린 영락보(永樂譜) 서문을 남기신 분이십니다.
영락보는 현재 서문만 존재하고 족보는 발견되지 않아 한국 사가 족보의 효시는 안동권씨 성화보로 인정되고 있습니다(순흥안씨 가정보, 문화류씨 가정보는 성화보의 형식을 취함).
1.검한성공(檢漢城公) 류원현(柳元顯) 약사(略史)중 일부.
공(公)의 초휘(初諱)는 원술(元술)이요, 생졸년(生卒年)은 가고(可考)할 수 없고 배(配)는 파평윤씨(坡平尹氏) 파평군해녀(坡平君垓女)이라. 6남 2녀를 생(生)하니 선(善)은 한림부평부사(翰林富平府使)요, 영(潁)은 대사헌(大司憲) 형조판서(刑曹判書) 시양도(諡良度)요, 계(繼)는 현감(縣監)이요, 간(澗)은 별시위(別侍衛)요, 혜(潓)는 봉례(奉禮)요 형(衡)은 현감(縣監)이요, 판관 홍지택(判官 洪之澤)과 장령 강진덕(掌令 姜進德)은 2녀 서(婿)라.
선(善)은 4남3녀니 판관(判官) 효순(孝順)과 병참(兵參) 효진(孝眞)과 효당(孝當)과 별좌(別坐) 효임(孝任)과 헌납정설(獻納鄭枻)과 진유성(陳有誠)과 도사려(都思慮)의 부인(夫人)이다. 영(潁)은 3남 6녀니 군수(郡守) 효련(孝聯)과 소윤(少尹) 효반(孝班)과 공판(工判) 효강(孝綱)과 도사(都事) 곽음(郭陰)과 판관(判官) 윤자신(尹自信)과 군수(郡守) 김남묘(金南畝)와 교수(敎授) 김전(金甸)과 직강(直講) 박려(朴려)와 목사(牧使) 이원증(李元增)의 부인(夫人)이다. 계(繼)는 3남 2녀니 효안(孝安)과 생원(生員) 효관(孝寬)과 효녕(孝寧)과 정랑(正郞) 권축(權畜)과 노종지(盧從智)의 부인(夫人)이다. 간(澗)은 무남(無男)하고 1녀 서(婿)는 군수(郡守) 송유철(宋有撤)이요 혜(潓)는 1남이니 효근(孝根)이다. 형(衡)은 4남 1녀니 사정(司正) 효량(孝良)과 군수(郡守) 효용(孝庸)과 현령(縣令) 효중(孝中)과 교리(校理) 효장(孝章)과 직장(直長) 최안례(崔安禮)의 부인(夫人)이다. 외손(外孫)은 홍지택(洪之澤)이 3남이니 효성(孝誠)과 효남(孝男)과 효생(孝生)과 1녀다. 강진덕(姜進德)이 3남이니 민(敏)과 치(致)와 미(美)와 3녀라.
※ 효장(孝章)과 3자가 모두 대과에 급제하여 一問四科 집안으로 명성을 날림
孝章(영광군수)께서는 참의공 仁濠 선친이시며 2자 仁洪, 3자 仁濡와 함께
大科에 급제, 공 四父子가 모두 大科에 급제하여 要職을 역임하니 당시에
「一門四科집」으로 일컬었다
또한 18世 호성공신 예참 문양군 희림(希霖)과 23世 수사공 징구(水使,동지중추부사 懲龜)께서는
당상관에 오르심 (송파구 오금공원에 위치한 참의공 인호(仁濠), 문원군 복룡(伏龍) 문양군
희림(希霖) 墓의 석물은 서울시 문화재 등록되었으며 수사공의 묘소는 참의공 아래 위치함)
2.영락보 서문의 일부.
대제학 류 관(柳寬)은 도관찰사 류 사눌(柳思訥)과 더불어 문간공(文簡公)과 근원을 같이 하였으며 정승 류 량(柳亮)은 정신공(貞愼公)의 현손이시고 총제 류은지(柳殷之)는 장경공(章景公)의 증손이시다. 그 외에 동원분파하여 조정에 벼슬한 이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우리 문화군(文化君)은 이에 문간공(文簡公)의 오대손이시다. 영의정 류정현(柳廷顯)에게 전수(傳授)하여 도관찰사 류장(柳暲)에 이름으로써 8대를 연이어 가풍을 더욱 떨쳤으니 가히 남은 경사 있다고 하겠다.
이 어찌 한 때의 선행(善行)으로 이를 이루겠는가? 그 사연을 밝혀보면 애당초 대승공(大承公)께서 재물을 내어 주상(主上)을 보필하였고 문간공(文簡公)께서는 재상이 되어 염근하였으니 이는 그 시초시다. 우리 문정공(文正公)께서는 권신을 죽여 없애고 정권을 왕실에 돌려주시고 무릅을 꿇고 다니며 충간하여 왕비의 화를 모면케 하였다. 또한 감옥에 투옥되었어도 입바른 소리를 하여 중국사신의 잘못을 깨우쳐 주셨으며 노예된 백성을 찾아내어 양민으로 전환을 시켜주셨다. 금은으로 뇌물을 주는 이를 물리치셨고 무릇 선한 것이란 충성과 정직과 청렴보다 더 큰 것이라 공께서는 홀로 이를 겸하시고 정신공(貞愼公)은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이와 같이 장경공(章景公)의 강직함과 기백은 문화군(文化君)의 올곧음이 어울어져 한 때의 선한 것이 아니라 후손의 경사도 이 때문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조선 전기 문화류씨는 양반의 가문인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사회와 정치의 소용돌이속에서 신분은 계속 변화되어 왔으며. 호란이나 양란을 통해서 신분의 수직상승과 함께 족보를 사고 파는 일 또한 심심찮게 일어났을 것입니다. 또한, 17~18세기 여러 문중에서 선대를 과장하거나 위조를 하는 일도 없지 않았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현상에 대한 반성의 하나로 현재 류차 이성이조론(성도틀리고 조상도 틀리다)이 그 이유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는 선현의 선과를 통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선택하여
본인과 가정은 물론 국가와 사회에 크게 이바지할 올바른 삶에 매진함으로써
현대에서도 우러러 보는 가문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 참고 : 31세부터 37세까지의 대동항렬.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根○ ○烈 志○ ○善 濟○ ○桓 榮○
寅○ ○杰 在○ ○鉉 浩○ ○榦 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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