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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혈통(血統)과 성(姓)

ryu하곡 2016. 2. 25. 21:23

| 사회   [역사산책]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혈통(血統)과 성(姓)
⊙《고려사》에 의하면 3代祖를 王으로 追贈했지만 이름은 없어
⊙ 작제건-용건-왕건이라는 이름에 나타난 ‘建’은
신라어 존칭 ‘干’이 와전된 것이거나 친족임을 표시한 글자
⊙“왕건도 신하들처럼 姓이 없다가

즉위 후에 王씨 성을 쓰게 되었을 것” 글 | 김정현 역사저술가

 
태조 왕건을 비롯해 7명의 고려 임금 위패를 모신 숭의전(崇義殿).
경기도 연천에 있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태조(太祖) 재위 2년에 왕건(王建)의 3대(代) 조상을 대왕으로 추봉(追封)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3대 조상들의 시호(諡號)를 정하여
증조부(曾祖父)를 시조원덕대왕(始祖元德大王)으로,
증조모(曾祖母)를 정화왕후(貞和王后)로,
조부(祖父)를 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으로,
조모(祖母)를 원창왕후(元昌王后)로,
부친(父親)을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으로,
모친(母親)을 위숙왕후(威肅王后)로 각각 추존(追尊)하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추봉된 태조의 조상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고려 정종(靖宗) 때의

문신인 황주량(黃周亮)이 편찬한 《태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왕건 아버지의 이름은 왕륭(王隆·용건이라고도 함)이고,
어머니의 성(姓)은 한(韓)씨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편찬한 《고려사》는
황주량이 고려 태조로부터 7대 목종(穆宗)에 이르는
사적(史蹟)을 기록한 것을 참고하여
고려 초기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고려사》에서는
본문과 별도로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과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인용해
왕실의 세계(世系)를 기록해 놓았다.

이 책들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지만,
그 일부가 조선 초기에 편찬한 《고려사》에 인용되어 있다.
여기에 고려 태조의 조부는 작제건(作帝建),
증조부는 보육(寶育)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들이 왕씨(王氏)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曾祖母의 아버지를 追贈?
 
 
김관의의 《편년통록》에 나타난
왕건 계보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제현.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 때 대학자로 재상(宰相)을 지낸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은
김관의의 《편년통록》을 이렇게 비판했다.

 
  〈김관의는 말하기를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虎景·보육의 할아버지)이
아간(阿干·신라 때 신하의 별칭) 강충(康忠)을 낳고
강충이 거사(居士·벼슬하지 않은 선비) 보육을 낳았으니
보육이 곧 국조원덕대왕(國祖元德大王)이고,

보육이 딸을 낳아 당(唐)나라 귀성(貴姓·명문세족)에게 시집보내서
의조(懿祖)를 낳았고,

의조는 세조(世祖·왕륭 또는 용건을 칭함)를 낳고
세조는 태조(왕건)를 낳았다고 하였다.
 
  만일 김관의의 말대로 한다면
당나라 귀성이라는 자는 의조에게 아버지요,
보육은 의조 아버지의 장인(丈人)이 되는데
(당나라 숙종이 보육의 사위가 되었다고 하는 데서 나온 말)
보육을 국조(國祖‘왕조의 시조’라는 뜻)라고 칭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김관의는 또 말하기를
태조가 3대의 조상들을 추존하였는데
아버지 세조를 위무대왕으로 어머니를 위숙왕후로
증조모를 정화왕후로 증조모의 아버지인 보육을 국조원덕대왕으로
각각 추존하였다고 했다.

그의 이런 말은 추존에서 증조부를 생략하고

증조모의 아버지를 써넣어서 합하여 3대 조상들이라고 한 것인데 이것 또한 무슨 까닭인가?〉
 
  《고려사》에 인용된 《편년통록》에 의하면, 고려 태조 계보는 다음과 같다.
 
  〈호경(성골장군)-강충-보육(강충의 둘째 아들)-

진의(辰義·보육의 둘째 딸로 당나라 숙종(肅宗)과 관계를 가짐)

-작제건(아버지는 당나라 숙종, 어머니는 진의, 부인은 용녀)-용건(부인은 한씨)-왕건(고려 태조).〉
 
  이 계보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보육은 시조, 즉 국조 원덕대왕으로, 작제건은 의조 경강대왕으로,

용건은 세조 위무대왕으로 추존되었다.

그럼에도 《고려사》의 본문에서는 추존된 왕의 시호만 기록했지,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보육, 작제건을 태조 왕건의 실제 조상이 아니라

한낱 전설 속의 인물로 생각해서일까?
 
 
  ‘王’이라는 姓을 쓸 수 있었을까?
 
  앞에서 이제현이 지적한 것은 보육과 강충 그리고

 호경은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의 외족(外族) 조상들이었지

 친가(親家)의 조상들은 아니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김관의의 《편년통록》에 의하면,

 보육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둘째 딸은 이름이 진의였다.

 진의는 당나라 숙종이 황제가 되기 전 젊었을 때에 고려 땅에 유람차 왔다가

 진의와 관계를 가져 자식을 보았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라는 것이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려 태조 왕건에게는 당나라 황실의 피가 흐르고 있는 셈이다.
 
  김관의의 《편년통록》은,

도선(道詵)이 일찍이 태조의 아버지 용건을 만났을 때 “아들을 낳게 되면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으로 지어주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이에 대해 이제현은 이렇게 비판했다.
 
  〈태조의 아버지에게 성이 있었을 것인데 자식이 아버지와 다르게 성을 고치게 하라 하다니

천하에 그런 말이 어디 있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더욱이 태조와 세조(용건)는 궁예(弓裔)를 섬겼다.

 궁예는 원래 의심과 시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태조가 ‘왕’이란 글자로 성을 삼았다면 자신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궁예가 그런 ‘왕’이라는 글자로 성을 쓰게 했겠는가?〉
 
  《고려사》를 비롯한 다른 어느 자료에서도

고려 태조의 선대(先代)가 어떤 성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오히려 고려 태조의 윗대에서도 성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잠시 쉬어가는 人生
글쓴이 : 들국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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