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춘추17집(2012년) 67쪽 “구월산과 문화류씨” 글을 소개합니다.
이글은 그동안 구원산별곡 지은이에 대한 다른 견해입니다.
출처 : 문화류씨 대종회(http://moonhwaryu.kr/) 유주춘추17집
【先蹟探究】
九月山과 文化柳氏
文肅公 十八代孫 柳 今 烈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954m)은 고조선 단군 국조가 아사달봉 단군에서 승천하여 신으로 돌아간 민족의 산이요, 또한 우리 문화류씨의 본향으로 시조 대승공이 영면한 성소이다. 구월산은 국조 단군이 도읍지를 정한 곳으로 주장한 류관의 상서를 시말로 그의 조카 류사눌의 상서로 인하여 구월산은 삼성사(三聖祠)에 향사할 수 있었던 주요 사료를 중심 으로 게시한다.
(1) 문화현의 연혁
문화현(文化縣)은 본래 고구려의 궐구현(闕口縣)으로서 아사달산 당장경의 대궐(大闕)에 서 연원한 고을명이다. 고려때 유주(儒州)로 고쳐서 유주감무(儒州監務)를 두었으니 류 씨(柳氏)의 본관은 유주유씨(儒州柳氏)라고 부른다. 현종(顯宗) 9년(1018)에 풍주(豐州) 임내에 붙이었다가, 예종(睿宗) 원년(1106)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 고려시 류공권(柳公權)의 묘지명에 기록한 시령(始寧)은 안녕의 시원지를 뜻하는 고을명은 고종(高宗) 46년(1259)에 위사공신 성균사성(衛社功臣 成均大司成) 류경(柳璥)[1211~1289, 류 공권의 손자]의 내향(內鄕)이므로 문화현령관(文化縣令官)으로 승격하면서 비로소 문화현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조선조에서도 그로 문화현(文化縣)의 고을 이름을 따랐다. 이 밖에 문화현은 단군이 쌓았다는 토성의 흔적을 비롯해 구월산성이 분포하여 문성(文城) 이라 불린다. 문화현의 옛 고을은 본래 현 읍치에서 북 쪽으로 13리 떨어진 삼천군 고현리에 있었으 나 역병이 자주 돌아 1520년(중종 15) 건지 산 남쪽으로 옮겼다. 문화현은 해방 전에 황해도 신천군 초리면, 문무면, 용진면, 산천면, 궁흥면, 문화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황해남도 삼천군 중·북부, 안악군 서부, 신천군 일부를 포함한다.
(2) 구월산(九月山)과 그 별칭
옛 문화현에 구월산(九月山, 954m)은 주산(主山)이요, 진산(鎭山)이다. 구월산 지맥인 남쪽에 아사달봉(阿斯達峰, 687m)은 단군이 신으로 승천한 단군대(檀君臺)가 있으며, 신라 때에 이르러 궐산(闕山)이라고 고쳐 불렀다. 산의 이름의 ‘궐’자를 느린 소리로 발음하여 구월산(九月山)이라고 하였으니 실은 궐에서 유래한다. 구월산의 별칭으로 궁홀산(弓忽山), 궁올산(弓兀山), 증산(甑山), 삼위산(三危山), 백악산(白岳山), 서진(西鎭) 등으로 불렀다. 구월산 주봉(主峯)은 옛날에 별에게 제사를 지낸 성수초처(星宿醮處)로 전해온다. 구월산 북동쪽에는 오봉산(859m) 이, 남쪽에는 아사달봉에 이어진 비산(飛山, 583m) 등이 있다.
(3) 단군왕검의 제2의 도읍지 당장경 (唐藏京) 문화현의 동쪽에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 를, “조선(朝鮮) 단군(檀君)이 도읍한 곳이라.”하나 곧 당장경(唐莊京)의 잘못 이름이다. 주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니, 단군이 그만 당장경(唐藏京)으로 옮겼으며, 후에 도로 이 산으로 와서 숨어, 화하여 신이 되었다 한다. 또한 장장평(莊莊坪)은 고을 동쪽 15리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했던 곳이라 하며 그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려사》에 장장평이라 하는데 이것은 당장경(唐藏京) 의 와전이다. 지금도 산천면 강산리(덕리 편입) 일대 속칭 ‘장재이벌’에는《삼국유 사》에 나오는 당장경은 단군이 도읍지를 정 한 곳에 토성지가 남아 있다고 한다.
(4) 천왕당(天王堂)과 삼성사(三聖祠)
단군(檀君)의 천왕당(天王堂)은 본래 구월산(九月山)의 상봉(上峯)에 있었는데, 뒤에 패엽사(貝葉寺)가 그 아래에 있다 하여, 당(堂)이 불찰(佛刹)의 위에 있음은 마땅하지 아니하여, 절[寺]의 앞 봉우리에 옮겼다가 뒤에 또 산기슭에 옮겨, 천왕(天王) 3위(三位) 인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을 설치한 삼성사(三聖祠)는 구월산 성당리(聖堂 里) 소증산(小甑山)에 있으며, 단인(檀因)· 단웅(檀雄)·단군(檀君)의 사당이 있다. 단군에서 삼성전의 옛터로 가는 길가에는 단군이 과녁 신에 관석(貫石)으로 삼고 활을 쏘았다는 사궁석(射弓石)에 화살이 꽂혔던 자욱이 흐릿하게 남았다고 한다.
(5) 우의정 류관(柳寬)의 상서 《세종실록》10년(1428) 6월 14일 우의정 류관(柳寬)[1346~1433]은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이 본향(本鄕)으로 낙향하여 부로(父老)들의 말을 듣고 유구한 단군의 사적(事迹)을 알게 되었다. 구월산(九月山)의 동쪽으로 고개의 중허리에 신당(神堂)의 초창은 알 수 없으나 북쪽 벽에는 단웅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는 단인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는 단군천왕(檀君天王)을 삼성당(三聖堂)이라고 불렀으며, 그 산 아래는 성당리(聖堂里)라고 불렀다. 신당(神堂)의 안팎에는 까마귀와 참새들이 깃들이지 아니하며,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전한다. 날씨가 가물 때를 당하여 비를 빌면 다소 응보를 얻는다. 단군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니, 문화현의 동쪽에 장장(藏壯)이 단군의 도읍터라고 한다. 또는 단군이 왕검성 (王儉城)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기자묘(箕子廟)가 있는 곳이라 하였다(문화현 이외 평양설). 그리고 단군은 단목(檀木) 곁에 내려와서 태어났다 하니, 지금의 삼성(三聖)인 환인 (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은 진실로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각설로 인하여 유사(攸司)에 명하여 도읍지를 찾게 하였으나 보류한 것은 평양에 단군이 도읍지를 정한 것은 당시 통설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6)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류사눌(柳思訥)의 상서 《세종실록》세종 18년(1436) 12월 26일 류사눌(柳思訥)[1375~1440, 류림의 아들]은 세년가(世年歌)에 단군은 조선의 시조로써 그가 죽어서는 화신이 되었다고 하다. 그 곳이 바로 숙부(柳寬)가 평양에 사당을 짓는 것은 유사가 사실을 살피지 아니한 것으로 변론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이에 류사눌 은 세년가를 상고하여 단군이 처음(기원전 2333년) 평양에 도읍했다가 후에 백악(白岳) 에 도읍했으며, 은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서 신이 되 었는데, 그 노래에, ‘1천 48년 동안 나라를 누리고, 지금도 사당이 아사달에 있네.’ 하 다. 또 고려에서는 구월산(九月山) 밑에 사당을 세워 그 당우(堂宇)와 위판(位版)이 아직 도 남아 있어서 세년가와 합치하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서는 이 곳을 버리고 다시 사당을 다른 곳에다 세운다면 아마 그 장소가 잘못된 듯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시옵소서.”하니, 명하여 예조에 내리게 하다.
(7) 삼성사(三聖祠) 단군 사당 평양 이전 《세조실록》세조 2년(1456) 3월 28일에 구월산(九月山)에는 단군사(檀君祠)가 있고, 《단종실록》단종 즉위년(1452) 6월 28일 황해도 지역에 창궐하는 전염병에 대한 경창 부윤 이선제(李先齊)의 상서문에 류관의 상서를 인용하면서《삼국유사》의 주(註)에서 환인 천제(桓因天帝)는 곧 류관(柳觀)의 상서에서 말한 단인(檀因)이고, 환웅(桓雄)은 천제의 서자(庶子)이니, 곧 이른바 단웅(檀雄) 이라 하다. 상고 사람들이 그 근본을 잊지 못하여 사우를 창립하고 환(桓)을 고쳐 단(檀)으로 하였으며, 삼성이라 호칭하다. 지난번에 단군을 평양으로 옮기었는데 이성(二聖)은 어느 땅에 두었겠습니까? 이것은 단군 이 토인(土人)에게 원망을 일으킬 뿐 아니라 이성(二聖)도 반드시 괴이한 것을 마음로 하고 여역을 지어 백성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면서 류관의 소가 모순이 없음을 아뢰었다. 여기서 이선제가 말한 핵심은 본래 3성으로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인데, 단군을 평양으로 옮겼으니 2성이 노하여 괴질이 창궐하므로 류관이 상소한 바와 같이 구월산은 도읍지로써 삼성각의 복원을 아뢴 것이다.
(8) 구월산 삼성사(三聖祠) 제향 복원 《성종실록》3년(1472) 2월 6일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예(李芮)의 치계에 삼성당(三聖堂)의 사적(事跡)은 속언(俗諺)에 단군(檀君)이 처음 신(神)이 되어 구월산(九月山)에 들어와 증산(大甑山)과 패엽사(貝葉寺) 아래의 작은 봉우리에 지금은 당기(堂基)가 없고, 따라서 그 때 치제(致祭)한 것과 또 삼성(三聖)도 아울러 제사지냈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다. 단군(檀君)과 아버지 환웅(桓雄), 할아버지 환인(桓因)을 일컬어 삼성(三聖)이라 하고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다가, 제사를 폐한 뒤로부터 당우(堂宇)가 기울어져 무너졌었는데, 세종 32년(1450)에 이르러 현령(縣令) 신효원(申孝源)이 중창하고, 세조 4년(1458)에 현령(縣令) 매좌(梅佐)가 단청하다. 삼성당(三聖堂)에 환인천왕(桓因天王)은 남향하고, 환웅천왕(桓雄天王)은 서향하고, 단군천왕(檀君天王)은 동향 하여 다 위패가 있다. 속설에, 옛날에는 모두 목상(木像)이 있었는데, 태종조에 하윤(河崙) 이 제사(諸祠)의 목상을 혁파할 것을 건의할 때 파하다. 삼성당(三聖堂)의 서쪽 협실(夾室)에는 구월산대왕(九月山大王)이 가운데 있고, 왼쪽에 토지정신(土地精神)이, 오른쪽에 사직사자(四直使者)가 있는데, 그 위판(位板)은 모두 남향하여 있다. 예전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없었는데, 매좌(梅佐)가 삼성당 아래에 초옥(草屋) 수칸을 지어 치도(緇徒, 스님)로 하여금 거주하게 하여 제사 때는 재숙(齋宿)하고 제물도 장만하다. 삼성당의 제기(祭器)는 옛적에는 금은을 사용하는데, 왜란 이후 사기를 쓰다가 매좌(梅佐)가 비로소 유기를 만들었다. 묘우(廟宇)를 평양(平壤)으로 이전한 뒤로는 이 당(堂)의 제사를 폐지한 것은 60여 년으로 태종(太宗) 즉위년(1400)부터 1402년 사이라 한다. 삼성당(三聖堂)을 평양으로 옮긴 후 비록 국가에서는 치제(致祭)하지 않았으나, 기우(祈雨)·기청(祈晴)을 할 때는 현관(縣官)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친히 제사지내며, 제사에는 백병(白餠)·백반(白飯)·폐백(幣帛)·실과(實果)를 쓰고 이 밖에 다른 제사는 행할 수가 없는데, 고을의 풍속에는 험이 있다고 일컬어 사람들이 감히 와서 제사하지 못 한다. 기우용단(祈雨龍壇)은 삼성당(三聖堂) 아래 백여 보에 있는데 현(縣)에 소장된 목종 9년 (1006) 5월 의주(儀注)에는, 떡[餠]·밥[飯]·술[酒]과 흰 거위[白鵝]로 제사했으나, 지금은 흰닭[白雞]을 대신 쓰고 돼지는 쓰지 않는다. 삼성당(三聖堂) 아래 근처에는 인가가 조밀 하는데, 제사를 파한 뒤로부터 악병(惡病)이 발생하기 시작하여 인가가 텅 비었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백성이 모두 삼성당(三聖堂)을 평양부에 옮기고 치제(致祭) 하지 않자 그 뒤로부터 악병이 일어났다고 하니, 이는 비록 괴탄(怪誕) 무계(無稽)한 말이나, 옛 기록에, ‘단군(檀君)이 아사달산(阿 斯達山)에 들어가 화하여 신이 되었다.’하고, 지금 본도 문화현 구월산에 그 묘당(廟堂)이 있으며, 또 전에는 향(香)을 내려 치제 하였으니, 청컨대 백성의 원하는 바에 따라 평양의 단군묘(檀君廟)의 예(例)에 의하여 해마다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를 행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9) 류사눌(柳思訥)의 구월산별곡(九月山別曲)
? 九月山 三支江 儒州勝地 後梁末 前朝初 柳氏起家 文簡 文正 貞愼 章敬 代代封公 爲 積善無窮 景其何如爲尼伊古 繼志述事無忝祖 風 再唱 爲我隨良其幾分伊古
? 구월산 삼지강은 유주고을 승지로세. 후양말 고려초 류씨가문이 일어났네.
문간공, 문정공, 정신공, 장경공은 로 봉공하여 적선무궁하니, 경긔엇더니잇고. 뜻
잇고 일 이어 조상 욕되게 않으리, 뜻 잇고 일 이어 조상 욕되게 않으리, 위 날 쫓아 몇 분 이니잇고.
? 父兮生 母兮生 子孫兟兟 出必告反必面 綵舞蹁躚 承顔順色昏定晨省 永言孝思爲餘慶 無窮景其何如爲尼伊古 欲報之德昊天罔極 再唱 爲於奴佐乃酬所五里伊叱古
? 아버지 낳으시고 어머니 키우시니 자손 (子孫)도 많고도 많구나. 나갈때 반드시 아뢰 고 돌아와 반드시 뵈오며 색동옷 입고 빙빙돌며 춤추네. 어버이 낯빛 살펴 스스로 순종하고 저녁에는 잠자리 새벽에는 아침문안 기리 기리 효도(孝道)를 하는구나. 여경무궁(餘慶無窮)이라 경(景) 긔 어떠 하니잇고. 보은하려는 덕(德) 하늘처럼 다함이 없네. 보은하려는 덕(德) 하늘처럼 다함이 없네. 위 어나제 갚사오리니잇고.
? 式相好無相猶 兄弟眞情 總和同無爭訟 先祖遺風 佩腹不忘終身誦之 益篤其情爲親睦 九族 景其何如爲尼伊古 宜兄宜弟天倫樂事 再唱 爲䦧于墻我隱麻奴里羅
? 예법에 서로가 지나침이 없으니 형제의 진정(眞情)이라. 화합하고 다툼이 없는 선조의 유풍(遺豊)이니 마음에 새겨 잊지 않고 종신토록 외우니 그정(情)이 더욱 돈독해지리. 친목구족(親睦九族) 경(景) 긔 어떠 하니잇고. 마땅히 형과 마땅히 아우는 천륜(天倫)의 즐거운 일이라, 마땅히 형과 마땅히 아우는 천륜(天倫)의 즐거운 일이라, 위 집안싸움 나 는 숨어 마로리라.
? 采於山釣於水 可以療飢 行無牽止或泥 惟適所安 用舍行藏安貧樂道 踽踽洋洋爲藏器 待時 景其何如爲尼伊古 思君不忘一片丹心 再唱 爲天乙伊沙乃知飛時里伊多
? 산에서 나물 캐고 물에서 고기 낚으니 가히 기갈은 면하리로다. 나아가되 이끌림 없고 멈추되 구애됨 없으니 가는 바 오직 편안하구나. 세상일에 쓰이면 뜻을 펴고 물러가면 감추어서 안빈낙도하니 홀로 외로이 양양하네. 위장기시(藏器待時) 경(景) 긔 어떠 하니잇고. 임금을 사모하여 잊지 않는 일편단심이니, 임금을 사모하여 잊지 않는 일편단심이니, 위 하날이사 알아나시리이다.
(10) 정암(定菴) 류덕종(柳德種) 구월산 별곡서(九月山別曲序)
고조할아버지 문숙공(류사눌)은 문장으로 세상에 울렸으니 조그마한 도라도 통하지 않음이 없고 음률을 잘 이해하다.
구월산별곡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감탄하는 가사인데 한절 읽고 또 한절 읽을수록 심오한 맛이 있다. 첫문은 지방이 신성하고 선조가 거룩하여 두터운 덕이 후손에까지 흘러 비치었고 선조의 착한 일과 꽃다운 경사를 스스로 이어 받들었다는 것을 말하고, 다음은 아버지는 자애하고 아들은 효도하며 형제간에 서로 우애를 다하니 미루어 구족간에 화목하게 됨을 말하고, 끝으로 용사행장과 안빈낙도하여 잘못됨을 근심하면서 임금을 잊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그치었다. 그 곡됨이 다 정성의 바른데서 나왔으므로 자손을 위하는 훈계의 뜻이 깊다. 이곡은 분명히 한 개의 가훈이다. 그리고 구월산별곡 은 무엇이냐 하면 선조가 그들이 출생한 상서로운 땅에서 반드시 근본 하다는 것을 칭송한 것이다. 그 출생한 곳에 이상한 일이 있었다. 여지서에는 “우리 조상이 처음에 구월산 아래 살았는데 길에서 한 범을 만났다. 흰 물건이 목에 걸리어 입을 벌리고 꼬리를 치며 구원을 하는 것 같아서 손으로 빼내니 은비녀다. 밤꿈에 범이 와서 사례하되 구월산 신령이 잘못되어 고생하는 것을 공이 잘 구원하여 고생을 면하였으니 공의 자손은 대대로 큰 벼슬을 하게 되리라 하다. 그 후로 고귀한 벼슬이 이제까지 이르니 사람들은 산에서 나려온 신령 때문이라고 하다.” 라고 있으나 이렇다면 산을 지목하여 곡을 지은 것이 조상이 출생한 상서로운 땅에 근본 삼은 것이 않이란 것인가? 구월산은 해서에서 제일 크고, 산을 둘러 사는 이가 모두 몇 성인데 반드시 이르기를 류씨들은 불원간에 소생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아아! 문숙공의 자손된 이는 그의 조상을 욕되이 함이 없으리라.
(11) 문화현의 고지도에 실린 대승공의 사적
문화현의 옛지도인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 <지승> 등에는 고려 태조의 남정 (南征)을 도운 공으로 대승(大丞, 고지도에 柳大承은 오기임) 벼슬을 받은 류차달(柳車 達)을 모신 사당인 류대승사우(柳大丞祠宇) 와 류묘(柳墓)가 실려 있으며, <1872년 지방 지도> 문화현에 류묘(柳墓)가 개재되어 문화현은 문화류씨의 관향으로 시조 묘를 특별히 관리하다. 대승공이 처음으로 살았던 지금의 황해남도 삼천군 삼천읍 달천리 서북쪽에 흥률골에 있는 흥률사에서 고려 태조 왕건에게 수레를 운반한 차유령(車踰嶺)이 있으며,
사후에는 신라 때 유황온천(섭씨 50도)으로 알려진 달천리 달천온천[종당온천]에서 동북 쪽으로 비산봉 산기슭 인좌(寅坐)에 류릉(柳陵)은 안치하고 왕릉에 버금가는 관리로 묵방사(墨坊寺)에서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12) 구월산 성당리 은비녀와 정계서원 (程溪書院)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류효금(柳孝金)이 말하기를, “네가 나를 해치지 않으면 내가 꺼내 주겠다.”하니, 범이 머리를 끄덕이며 허락하는 시늉을 하므로 곧 꺼내니, 그것은 은비녀다. 그날 밤에 범이 와서 이르기를, “나는 산의 정령(精靈)이다. 어제 성당리(聖堂里)에 가서 어떤 여인을 먹다가 물건이 목 에 걸려서 매우 괴로웠는데 공이 나를 구원하여 주었으니, 공의 자손이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해동지도>에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 을 모신 삼성전(三聖殿)은 구월산 성당리(聖堂里)에 있는데, 산의 정령은 구월산에 화신 한 단군왕검의 국조신앙과 연관성을 간과할 수 없다. 문화현에 있었던 정계서원(程溪書院)은 1669년(현종 10)에 창건되었으며, 류관(柳寬)의 위패를 모셨다. 1678년(숙종 4) 사액 서원이 되었으며,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으나 문화류씨의 성지로 복원해야 할 현안 문제로 대두된다. 좌윤공이 호랑이의 입안에서 꺼낸 은비녀는 문숙공 류사눌의 후예 감찰공 종중에서 가보로 전해지다가 불행하게도 중도에 유실 되어 진품과 같은 모조품을 소장하고 있다.
(13) 구월산별곡의 찬자(撰者)
구월산별곡은 누가 처음으로 창작했는지 큰 문제는 없다. 즉, 형제간에 우애외 친목을 강조한 가훈적인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차류 종보(車柳大宗報) 20호》(1993)에 <양도공(良度公) (穎)의 제향제(祭享祭)>의 기록 중에 가정보 서두에 구월산별곡은 저자를 기록하지 않았으며, 1689년 기사보(己巳譜) 때 부터 양도공을 찬자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찬자는 대제학 류사눌이라는 정암공 덕종이 1613년 문집에서 별곡서까지 소재하여 놓은 점으로 미루어 논할 수 없다고 기술하였다. 류관(柳觀)의 부친이신 류안택(柳安澤)의 묘소가 대승공 밑에 있고, 류사눌의 부친이신 류림(柳臨)의 묘소도 구월산에 있으니 그 누구보다 형승에 밝았을 것이다.
오늘날 1562년(명종 17) 가정보(嘉靖譜)에 한자·한글 혼용으로 수록한 구월산별곡을 게재하여 양도공 류영(柳穎)께서 지은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생각건대 세종조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은 1446년 10월 9일에 반포하였다. 그렇다면 문숙공 류사눌께서는 1375년에 태어나 1440년에 돌아가셨으며, 양도공 류영께서는 태어 나신 해는 불명이며 1430년에 돌아가셨다. 이 두분 모두가 한글이 반포되기 이전에 돌아가셨으므로 구월산별곡에 한글과 한문을 혼용한 찬자는 미상으로 기록해야 한다. 특히 문숙공의 현손인 정암공(定菴公) 류덕종(柳德種)은 중종 27년(1532)에 태어나 어려서 총명한 자질로 고조부의 유시를 즐겨 암송한 것을 간과할 수 없다.《세종실록》에 세종 15년(1433) 11월 27일에 류사눌이 관료들이 회례 악장(會禮樂章)의 시를 외우고 뜻을 음미하도록 할 것을 상서한 바와 같이 진작가사(嗔雀歌辭)를 작곡하여 관습도감으로 하여금 익히게 한 바와 같이 당 최고의 작곡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정보(嘉靖譜)에 실린 구월산별곡은 후에 한자의 원문을 토로 언문(諺文)으로 개사(改詞)한 목적은 한문을 잘 모르는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널리 암송하여 구월산에 본관을 둔 문화류씨 가문의 자긍심을 진작시키는 가훈가(家訓歌)로 보아야 한다.
(14) 마무리 글
문화류씨의 본관인 유주와 문화는 대승공이 시조가 세거하며 영면한 지명에서 연원한다. 고려시 개성에 도읍지와 지척에 있었던 문화현은 시조 대승공이 영면한 고을에는 성족을 이루면서 당상관을 배출한 관향으로 숭조목종의 정신을 기렸다. 단군의 도읍지로 당장경과 구월산 아사달봉 단군에 화신이 된 단군의 성지인 삼성사를 승화시킨 류관과 그의 조카 류사눌의 공훈이 적지 않았으니 구월산별곡을 찬하여 류씨일가에게 보급되어 형제의 우애와 친목을 승화시켰으며, 문화현에서 당대 존경하는 인물로 류관을 정계서원에 신위를 봉안했다. 아사달봉 산자락에 웅거한 대승공이 태조 왕건의 군량을 보급한 차유령은 시사하는 바가 크며, 그 공훈은 왕릉에 버금가는 류릉을 인좌에 안치하여 묵방사 스님이 극락왕생을 발원한 복덕은 북한에서 문화재로 지정하으니 구월산의 정기를 다시 예찬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문헌】 《삼국유사》 《국역 조선왕조실록》 《국역 세종실록지리지》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문숙공파 문헌록》(1966년) 《차류종보(車柳大宗報) 20호》(1993년) 《광여도》규장각 소장 《해동지도》규장각 소장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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