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전주류씨 개요
전주류씨 최초의 족보로서 1652년에 발간한 임진보(壬辰譜)의 시조(始祖) 기록에는 문화 류씨로부터의 분관설을 기록하고 있으나 1726년 두번째 발간된 구병오보(舊丙午譜) 범례에서 邦直(방직)과 橒(운) 두위를 첫권에 별도로 쓰고있는데 시조와 시조비 비문에는 올려있지 않고 직제학공 비문에도 생원공(휘 橒)은 시조의 考位(고위)로 올려 있으나 都副丞公(휘邦直)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 전주류씨보 와 다른 족보 世系에는 두분 윗대를 문화류씨보에 이어 놓아 柳寬을 도부승공의 아버님으로 하였으나 寬은 조선조 세종시에 우의정을 지낸 분인데 우리 선조중 3世이신 영흥공(휘濱)은 太宗大王과 고려조에 함께 進士시에 합격하셨으며 4世이신 회헌공(휘義孫)은 세종때 참판까지 역임하셨으니 柳寬과는 世系가 맞지않으니 邦直. 橒 두 윗대의 기록은 믿을바가 못되는등, 이를 고증한 전주 류씨가 4번째로 1876 년에 발간한 "병자보(丙子譜)"에는 최초 족보에 기록된 "문화 류씨 분관설(文化 柳氏 分貫說)"의 잘못을 입증하는 사실을 찾아내어 기록한 "전주 류씨 보계 변증(全州 柳氏譜系辨證)"을 수록하고 있다.
나. 『丙子譜』에 收錄된 全州柳氏譜系辨證 16代孫 炳文 謹撰
우리 柳氏는 본래 全州(전주)에서 出系하였는데 중간에 文化(문화)로부터 移籍하였다는 잘못된 說이 있어 지금에 와서 넓게 고찰하고 자세히 변증하여 그 잘못된 것을 아래와 같이 바로 잡는다. 16代孫 炳文(병문)이 삼가 적는다.
삼가『高麗史』(고려사)를 살펴보건대 貞簡公(정간공) 戴肅公(대숙공) 莊定公(장정공) 등 三平章事의「列傳」(열전)이 있는데 모두 全州人(전주인)이라고 되어 있고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의 「全州人物條」(전주인물조)에도 빠짐없이 들어 있어 檜軒公(회헌공)과 眞一齋公(진일재공)의 윗단에 실려있다.
또한 杏村(행촌) 李公?(이공암)께서 完山(완산) 柳仁雨(류인우)의 詩를 손수 베껴 놓은 것이 海東名蹟(해동명적)에도 실려있으니 곧 全州柳氏(전주류씨)가 존재한 것은 실로 오래된 것이다. 그러니 어찌 掌令公에 이르러 移籍한 것이 처음이 된다고 할수 있겠는가? 年代를 가지고 推定하여 보더라도 貞簡公께서 高麗의 成宗朝에 벼슬하여 이미 禮部侍郎이 되었으니 고려개국과의 시간적 거리가 육십여년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 時世가 文化柳氏의 (문화류씨) 大丞 車達(차달)의 시대와 아주 가까운데도 그 당시의 史筆들이 이미 大丞의 親屬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이로 미루어 보아도 곧 文化(문화)와 全州(전주)는 따로 二本인 것이 확실하다 하겠다.
또 살펴보건대 牧隱 李穡公께서 寶文公(직제학공,극서)과 함께 같은 고려 조정에서 벼슬하며 그때 이미 全州柳氏(전주류씨)라고 稱한 바 있고 그후 虎巖(호암) 梧桐坊(오동방) 鍾陵(종릉) 黃竹里(황죽리) 등의 비갈명과 署令 之盛公 眞一齋公과 全陽公墓碣과 遺逸齋와 壺隱公墓誌와 李植(이식)의 『澤堂集』(택당집)에 실려있는 駱峯公諡狀에도 「우리 全州柳氏」가 모두 文化(문화)에서 移籍하였다는 말은 없다.
典翰(전한)벼슬을 지낸 檜軒(회헌)의 文科榜目(문과방목)에 실린 記事 역시 全州(전주)가 본관이라고 쓰고 있는데 우리 全州柳門(전주유문)이 南쪽으로 落鄕한 이후 갑자기 文化柳氏(문화류씨)로부터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全州(전주)로 移籍한 지 이백여 년인데 이를 곧바로 고치지 못하고 모든 各派의 狀碣文字에 계속하여 쓰고 있으니 크게 개탄하는 바이다.
○虎巖公 墓碣文에 「公의 姓은 柳요 諱는 克恕(극서)니 系出은 全州(전주)이다.」萬曆丙午〔宣祖 39年1606年〕에 後孫 觀察使 永詢(영순) 지음이라고 하였다. ○鍾陵(종릉)의 墓碣文에 「公의 姓은 柳氏요 諱는 濱이고 系出은 全州(전주)이다.」위와 같음이라고 하였다. ○梧桐坊(오동방) 墓碣文에 「延安克恕(연안극서)도 역시 完山(완산)의 大姓이다」萬曆〔光海君 8年1616年〕丙辰에 郡守 李成吉(이성길) 지음이라고 하였다. ○遺逸齋公 墓誌에「先生의 諱는 ?이니 系出은 完山(완산)이다.」正德〔中宗 10年1515年〕壬申 文平公 李繼孟(이계맹)지음이라고 하였다. ○署令 之盛의 墓碣文에 「柳氏(류씨)는 完山(완산)의 名望있는 가문으로 諱 濕이 掌令을 贈職 받았으며 고려말에 가문에 경사가 거듭되고 복된 터전이 갖추어져 다섯 아드님과 한 분의 사위가 모두 文科에 급제하여 그의 妻는 三韓國大夫人으로 封해졌다.」弘治 庚申〔燕山君 6年 西紀1500年〕提學(제학) 權健(권건) 지음이라고 하였다. ○眞一齋公의 神道碑에 「그의 선조는 完山(완산)에서 나왔으니 고려말에 諱濕께서 집안에 慶事를 쌓았다.」正德 壬申〔中宗 7年 1512年〕晋川君 姜渾(강혼)이 지음이라고 하였다. ○壺隱公의 墓誌에「公의 성은 柳요 이름은 堪이니 完山人(완산인)이다.」隆慶己巳〔宣祖 2年1569年〕嘯皐 朴承任(박승임)이 지음이라고 하였다.
위 일곱 분 位의 묘지와 묘갈은 모두 萬曆〔明나라 연호로 1573- 1619〕이전에 나온것인데도 文化에서 分貫되었다는 언급은 없다. 右七條誌碣. 俱出於萬曆以前. 而不言文化分貫之事. ○黃竹里(황죽리) 묘갈문에 「公의 諱는 末孫이요 系出은 全州(전주)이다.諱 濕이 掌令을 증직 받으셨는데 이 어른이 우리 柳氏의 始祖할아버지가 된다.」〔明陵 乙未 肅宗 41年1715년 後孫 近지음〕이라고 하였다. ○駱峯公 諡狀에「公의 諱는 軒이요 出系는 完山(완산)이다.」 〔年月과 지은이 미상이다〕라고하였다. ○全陽府院君즉 春湖相公의 墓碣文에 「柳氏(류씨)는 系出이 全州(전주)요 고려조로 부터 빛나는 벼슬이 서로 이어졌다.」從子 觀察使 恒이 지음〕라고 하였다. ○『澤堂集』(택당집)「柳氏(류씨) 本貫 全州(전주)는 고려말에 이르러 直提學 克恕(극서)가 더욱 顯達(현달)하였다.」라고 실려 있다. ○墨溪公 旌閭閣의 비문에 「公의 字는 君瑞이고 完山人(와산인)이다.」〔陶菴 李縡가 지음〕이라고 하였다.
위의 다섯 항목은 모두 萬曆以後에 쓰여진 金石文(금석문)인데 역시 文化柳氏로 부터의 移籍은 거론되지 않았고 경기도와 충청도에 거주하는 宗人들의 行狀과 묘갈문에도 「文化」(문화)라는 두 글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유독 安東(안동)에 세거한 두 派의 모든 행장과 묘갈문에만 반드시 쓰여져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牧隱集』(목은집)의 「賀 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하 죽계안씨삼자등과시서)에 이르되 「세 아들이 나란히 文科에 급제한 가문으로는 이들 竹溪安氏(죽계안씨) 뿐 아니라 全州柳氏(전주류씨)의克剛(극강) 克恕(극서) 克濟(극제)가 그들이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譜牒에 말하기를 「諱 濕에 이르러 全州(전주)로 移居하여 그 邑을 貫으로 삼았고 子孫들이 始祖할아버님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상상하여 보건대 掌令公께서 立朝顯達한 일이 없었는데 임금께서 籍을 下賜했을 이치는 필연코 없었을 것이고 특히 移居하였기 때문에 그邑을 本貫으로 하고 자손들이 始祖로 모셨다고 한다면 곧 牧隱의 時代에 全州(전주)로 새로운 貫을 삼은 것이 世上에 들어날 수 없을 것인데 무엇때문에 文化(문화)를 버리고 全州(전주)라고 일컬었겠는가?
이를 제처 놓고도 全州柳氏(전주류씨)는 고려조에 현달하여 앞에는 세 분의 平章事가 계셨고 뒤에는 宰臣으로 柳仁雨(류인우)가 계셨으며 寶文公 兄弟도 牧隱과는 같은 시대에 살았던 家門인 柳氏(류씨)임으로 그 때문에「全州柳氏」 (전주류씨)로 칭하였으니 단지 이 한 줄의 글로도 크게 증명될 사안이라고 할 것이다.
○宣德 丙午〔世宗 八年1426年〕文科榜目에 「生員 柳義孫(류의손)은 全州人(전주인)이다.」라고 하였다.〔이 榜目은 秋淵 禹性傳의 家藏本이다〕 ○成化 丙午〔成宗 一七年1486年〕司馬榜目에 「幼學 柳軾(류식)은 본관이 全州(전주)이다.」라고 하였다. ○正德 丁卯〔中宗 二年 1507年〕文科榜目에 「江陵判官 柳軾(류식)은 본관이 全州(전주)이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典翰公 이전에 모두 全州人(전주인)이라고 호칭하였다면 남쪽으로 落鄕한후의 戶籍을 무슨 이유로 갑자기 文化(문화)로 바꿔 불렀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先代에서 전하여 온 것이 위와 같은데 大略이라도 文化(문화) 두 글자는 언급함이 없었으니 만약 文化(문화)에서 分貫을 하였다면 오늘이나 옛날의 文蹟중에 어찌 한낱의 증명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겠는가?
다음에는 거짓이란 사유를 역력히 서술하여 조목 조목 변증하기로 하겠다. ○安東(안동)에 소장되어 있는 『晋州柳氏族譜』(진주류씨족보)에는 「全州(전주) 晋州(진주) 瑞山柳氏(서산류씨)는 모두 文化柳氏의 始祖인 大丞 車達(차달)의 後孫들인데 그 世代를 失傳하였고 濕에 이르러 全州(전주)에 移居하여 그 邑을 本貫으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이러한 잘못된 기록은 柳僉正(류첨정) 錫昌氏(석창씨)〔光海 `1年~肅宗 13年 1609~1687年〕의 通諭文에 辨證한 것이 상세하게 記述되어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晋州柳氏譜』(진주류시보)가 安東(안동)에서 出刊되어 이와 같은 잘못된 說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安東(안동)에 사는 兩派族譜의 책머리에 확실치 않은 몇 가지 말만 믿고 「戶籍」(호적)과 『鶴峯集』(학봉집)에 실었으나 서울의 다른 派에는 알려지지 조차 않았고 全平君께서 修譜할 때에 이르러 마침내 邦直과 橒(운) 두 代를 족보의 책머리에 잘못 기록하고 또 그 序文에 쓰기를「大丞에 이르러儒州에서 일어났고 掌令公에 이르러 完山(완산)에서 흥하였다.」 고 하였으니 僉正이 이에 곧바로 그 잘못된 것을 배척하였으니 그 文錄이 책 속에 기록되어 있어 상고하여 알만하게 되었다.
柳承緖(류승서)의 家牒에 이르기를 「始祖 車達(차달)은 高麗의 大丞이요 그 아들인 孝金은 左尹이요 孝金의 아들인 金奐(김환)은 大將軍이요 金奐(김환)의 아들 盧一(노일)은 檢校 大將軍이요 盧一(노일)의 아들 寶春(보춘)은 少監이요 寶春(보춘)의 아들 寵 역시 少監을 지냈고 그의 아들 公權은 參政이요 文簡으로 諡號를 받았고 아들 彦琛(언침)은 密直使이고 아들 淳(순)은 翰林學士요 아들 成庇는 文山君이란 君號를 받고 아들 湜(식)은 宰臣의 반열에 올랐으며 아들 安澤(안택)은 判官을 지냈으며 아들인 寬(관)의 옛 이름은 觀(관)이었는데 右議政을 지냈다. 그의아들이 邦祐(방우) 邦輔(방보) 邦直(방직) 삼형제인데 邦祐(방우)의 아들이 樞요, 邦直(방직) 의 아들이 橒(운) ?(재) 樑(량) 三人인데 橒(운)의 아들이 濕(습) 津(진) 형제이니 濕(습)은 全州柳氏(전주류씨)가 되고 ?(재)는 晋州柳氏(진주류씨)가 되었으며 樑(량)의 아들 형제 즉 渾(혼)과 澈(철) 두 아들중 渾(혼)은 瑞山柳氏(서산류씨)로 分貫되었다.」고 쓰여 있다.
위의 牒(첩)은 郡守 金啓光(김계광)이 義興人(의흥인) 李琪林(이기림)에게서 얻었고 李(이)는 淸道郡守 柳信男(류신남)에게서 얻었으며 柳(류)는 兵使 柳承緖(류승서)에게서 얻었다고 했다. 또한 柳兵使는 文化柳氏族譜中에서 얻었다고 말했는데 文化柳氏(문화류씨)의 옛날 족보나 오늘날의 족보에 써있는 邦祐(방우) 以下 열 두명의 이름은 모두가 실체가 없는 망발이어서 상고할 수 없는 것들이다.
다시 살펴보건대 邦直(방직)과 橒(운) 二代의 이름은 文化柳氏族譜에도 실려있지 않으니 이것은 분명히 뒷사람들의 말만 듣고 지어낸 것이다.
虎巖墓碣文(호암묘갈문)에 처음으로 「橒」(운)字가 쓰여있고 『壬辰譜』(임진보) 책머리에 또 邦直(방직)을 추가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대단히 未安한 일이 겠으나 두 번에 걸쳐서 刊行한 『丙午譜』(병오보)의 世系 첫 줄에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文化柳氏(문화류씨)『己巳譜』(기사보)〔肅宗 15年 1689年〕에 車達(차달)로부터 淳(순)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上記와 같고 淳(순)의 아들인 良?(양재) 혹은 全州君-仁庇晋州派--로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良?(양재)「全州君」(전주군)에 대한 說은 심히 의심스러워 辨證하기가 어려울뿐 더러 辛丑年〔世宗 3年 1421年〕에 右代言 穎(영)이 만든『永樂譜』(영락보)와 壬戌年〔明宗17年 1562年〕에 僉正 希潛(희잠)이 撰한 『嘉靖譜』(가정보)를 놓고 자세히 살펴 보아도 모두 위와 같은 내용은 빠져있으니 이는 극히 잘못된 것임이 틀림없다.
大凡(대범) 옛날에 없었다가 오늘날에 와서 있는 것은 만일 확실한 근거가 없다면 이들은 모두 진실이 아닌 거짓 저술이 되는 것인데 하물며 극히 의심스러운 것이야 말로 재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柳僉正(류첨정) 錫昌氏(석창씨) 그리고 府使 冕(면) 府使 ?(만)의 通諭文에 이르되 安東(안동)에 소장된『晋州柳氏族譜』(진주류씨족보)에 云云-위에 柳僉正(류첨정)의 글은 이미 인용하였다-하였으나 晋州柳氏(진주류씨)의 여러 大族譜를 자세히 살펴보면 곧 僉正 柳希潛(류희잠)이 말하기를「彦琛(언침)이 晋州(진주)로 移居한 入鄕祖라고 하였으나 彦琛(언침)의 曾孫子인 塘湜(당식)의 후손들 모두가 文化柳氏(문화류씨)로 본관을 삼고 있으니 그렇다면 彦琛(언침)이 晋州柳氏(진주류씨)의 始祖가 아닌것이 明確하다.」고 하였다.
또한 安東(안동)의 柳宗禮(류종례)라는 사람이 소장하고 있는 『晋州柳氏族譜』(진주류씨족보)를 고찰하여 보면 역시 全州(전주) 晋州(진주) 瑞山(서산)의「三柳分貫說」(삼류분관설)이 전혀 없다.
또 『文化柳氏大族譜』(문화류씨대족보)를 보면 곧 柳寬(류관)의 두 아들 孟聞(맹문) 季聞(계문)만 나와있고 季聞(계문)의 두 아들 ?(참)과 晥(환)이 쓰여져 있을 뿐 寬(관)의 아들이라는 邦直(방직)과 邦直(방직)의 아들 橒(운) ?(재) 樑(량)에서 分貫하였다는 세 邑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으니 이른바 「全州柳氏」(전주류씨)등이 모두 大丞 車達(차달)의 후손이라고 한 것은 실로 억측한 견해가 아니면 妄說인 것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晋州柳氏(진주류씨)의 뿌리 또한 文化柳氏(문화류씨)가 아닌 것이 명확한 것이니 全州柳氏(전주류씨)의 淵源(연원)이 文化柳氏(문화류씨)라는 說은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위와같은 通諭文(통유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연코 全州柳氏(전주류씨)의 근본이 文化柳氏(문화류씨)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릇된 것이요 더 未盡한 곳 네 가지 條目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첫째「文化」(문화)의 柳邦直(류방직) 云云 하지만 처음에 邦直(방직)과 橒(운)등 名啣의 白撰을 알지 못하였다. 둘째 柳寬(류관)의 아들은 孟聞(맹문)과 季聞(계문)이나 처음에 柳寬(류관)당시의 世代가 거꾸로놓여진 것을 辨證하지 못하였다. 셋째 이미 彦琛(언침)을 들어 晋州柳氏(진주류씨)의 始祖로 하고 또 橒(운) ?(재) 樑(량)을 끌어 들여 本貫이 나누어진 일을 인용하고 있으나 두 가지의 說이 판이하게 서로 어긋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넷째 全州柳氏(전주류씨)가 이미 高麗朝 初에 시작된 것을 말하지 않고 감춘 것이다. 이와같은 類는 모두 진실에 근거하여 자세히 고찰할 수 있는 사실이 未備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옛날에 없었던 分貫의 說이 지금에 와서 있다는 것만을 충분하게알 수 있을 뿐이다. 『文獻備考』(문헌비고)〔正祖 六年1783〕에 「全州柳氏」(전주류씨)는 本貫이 文化柳氏(문화류씨)에서 分貫되었다.」라고 되어있다.
살펴보자면 이 책은 正祖때 儒臣에게 命하여 撰進한 命撰本이다. 이 책에 기록된 것이 비록 이와같이 사실과 다르나 儒臣의 특별한 견해가 있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 柳氏(류씨)의 近世(근세)에 傳하여 온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그대로 기록된 것일 뿐이다. 보는 이들은 이 책을 근거로 단안을 내려서는 온당치 않은 일이다.
?判 柳誼(류의)의「家史」(가사)에 引用된 文獻(문헌)인『永慕錄』(영모록)〔西厓 柳成龍이 지은 遺書〕에 이르기를 柳寬(류관)의 아들 이름을 邦祐(방우)로 적고 있는데 邦祐(방우)는 곧 고려조 때 사람이고 寬(관)은 조선조의 右議政(우의정)이었으니 앞뒤가 크게 달라 이것이 잘못 전해진것 같고『文化柳氏族譜』(문화류씨족보)에는 예로부터 邦祐(방우)라는 사람은 없었다. ○或者가 이르되 文化柳氏(문화류씨)의 來歷은 잘 알 수가 없고 全州柳氏(전주류씨)는 처음부터 別派라고 말했다.
살펴보건대 『永慕錄』(영모록)은 누가 지었는지 알수 없으나 全州柳氏(전주류씨)에 대한 說이 이와같은 것으로 미루어 이미 옛사람들도 살펴보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살피건대 全州柳氏(전주류씨)가 이미 고려초에 始作되었고 中葉에서 顯達(현달)한 것이 이와 같은데 비록 그 족보의 계통을 잃어버려 자세히 상고할 연유가 없으니 文化柳氏(문화류씨)에서 分貫되었다는 잘못된 說은 다른 증거를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깨칠 수 있는 것이다. ○家弟인 徽文(휘문)이 말하기를 「全州柳氏(전주류씨)와 晋州柳氏(진주류씨)가 文化柳氏(문화류씨)에서 나왔다는 說은 대개 晋州柳氏(진주류씨)가 文化柳氏(문화류씨) 집안에 장가간 女壻이고 全州柳氏(전주류씨)가 또한 文化柳氏(문화류씨)의 外孫壻가 되기 때문에 아울러 文化柳氏(문화류씨)의 족보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或者가 理致에 맞지않은 說을 잘못 해석하여 마침내 分貫의 의혹이 생겨난 것이니 이미 晋州柳氏(진주류씨)가 잘못 되었고 따라서 全州柳氏(전주류씨)도 잘못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晋州柳氏(진주류씨)는 그 그릇된 것을 바로 곧 깨우쳤으나 全州柳氏(전주류씨)는 아직도 의혹을 풀지 못하고 있으니 그 잘못이 심하다고 하겠다. 떠도는 말을 가볍게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와같다. 이는 비단 全州柳氏(전주류씨)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 전국의 柳氏姓을 가진 사람들 스스로가 大丞公의 후손 系行을 끌어다 붙이면서「본래 柳氏는 同姓同本이며 잘못된 것은 晋州柳氏族譜(진주류씨족보)일 뿐이라」고들 말하니 그렇다면 高麗太祖의 國舅인 柳天弓(류천궁)까지도 역시 大丞公의 柳氏(류씨)중 하나의 柳氏(류씨)라고 하겠는가? 丙子譜에 수록된 全州柳氏譜系辨證文에서 十六代孫炳文 謹撰
뿌리에 대한 재 정립
우리 전주류씨는 壬辰譜(임진보) 창간 전에 전릉부원군 묘비(춘호공 찬)에는 完山伯 諱 濕을 始祖로 하여 繼代하였고 그 上系는 言及이 없으나 직제학공 묘비(북천공 찬), 전양부원군 묘비(구봉공찬)를 건립한 내용을 살펴보면 邦直(방직)과 橒(운)을 시조의 祖(조),考(고)로 기록은 하였으나 分貫說(분관설)에 관한 기록은 없었다.
그후 60년이 지나 도계공(휘심)께서 족보를 창간하며 많은 고심을 하신 것으로 보여진다. 족보의 편집내용 첫 기록을 別書(별서)로 한 점과 上系(상계)를 실전하여 繼代(계대)를 하지 못하고 완산백 諱(휘) 濕(습)을 시조로 하여 계대하고 효종 3년 壬辰(1652년)에 출간하여 임진보라 명명한 이래 창간보로서 오늘에 전해오고 있다. 영조 2년 丙午(1726년)에 평창군수 選(선)께서 제2 간행본 병오보 출간시에는 창간보의 머리에 기록한 2대(방직,운)의 오류됨을 첨정 錫昌(석창),부사 冕(면),부사 ?(만)등 3숙질이 밝혀내고 있는 것을 凡例(범례)에 辨證(변증)하여 2대를 삭제한다, 하고 기록을 빼버렸다. 점차적으로 후세들은 의문을 갗고 60년 후인 정조 10년(1786년)에 안동부사 義養(의양)께서 제 3간행본인 再丙午譜(재병오보)를 출간하면서도 上系(상계) 2대(방직,운)를 기록하지 않았다. 고종 13년 丙子(1876년)에 副司果(부사과) 南珪(남규)공께서 제4간행본인 병자보 17책을 출간하면서 그간에 素隱公 炳文(소은공 병문),好古窩公 徽文(호고와공 휘문) 형제분이 변증자료로 고려말 문헌 목은 李穡(이색)문고 중 죽계안씨 3자등과(登科) 축하 시문중에는 전주류씨 극강(克剛) 극서(克恕) 극제(克濟)에 기록을 인용하여 완산백 시조(휘 습)께서 전주로 관향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변증하여 범례에 기록하고 있으며 우왕 2년 병진(1376년) 문과에 급제한 극제(해동용방 수록)의 부는 濕(습) 貫(관)은 전주로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甲子年(1924년) 종사에 참여하여 갑자보를 주관하신 碧(벽)씨는 족보를 출간하면서 南珪(남규)씨가 병자보 간행때 변증한 것을 반증하고 있다. 이것은 문헌비고를 인용하여 문화분관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확실한 증빙자료도 없이 증보 문헌비고에 약술된 내용만으로 문화분관설을 받아들인 것은 옳치 않다고 판단된다.
세종 5년 癸卯(1423년)에 출간한 문화류씨의 족보인 永樂譜(영락보) 서문과 명종 17년 壬戌(임술1562년)에 출간한 嘉靖譜(가정보) 서문등 두곳 모두 분관설의 기록이 없는것으로 미루어 볼 때 문화 분관설과 관련,繼代(계대)문제나 分貫(분관)문제에 대한 것,어느 것을 막론하고 확실히 단정 지울수 없으니 우리 후손들은 하나의 설로만 믿어 주시기 바란다.지난 2001년 신사 4월에 駱峰公(낙봉공) 종중에서는 후손들의 의문점을 해소키 위하여 병자보 간행시 서문과 수차례 범례에 변증한 것을 譯文(역문)으로 출간하면서 完山伯(완산백) 시조고의 상계는 참고사료를 구할 길이 없어 아쉬움은 많지만 더 이상 논하지 않기로 한 사실이 想起(상기)된다.
이상의 고찰과 같이 시조 이상의 상계에 대한 역사적인 사료가 아직까지는 추가로 발견 된 바도 없고, 위의 내용들은 우리의 선대들과 타인의 문헌 속에 단편적으로 기술되어 마땅히 확실한 繼代(계대)를 가늠 할 수 있는 근거도 찾을 길 없으니, 이번 癸未譜(계미보) 발간 을 맞아 시조 완산백 습 이상의 상계에 대한 추론이나 문화 분관설 등을 향후 각파 종회에서 문헌이나 금석문등에 사용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 전주 柳門(류문)의 최초의 족보 이래로 견지해 오신 선조님들의 뜻에 따라 우리 전주 류문의 뿌리에 대한 논쟁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야겠다.
라. 柳字를 姓氏로 한 本貫
全州, 文化, 晉州, 瑞山, 豊山, 善山, 高興, 靈光, 陸昌, 貞州, 白川, 若木, 富平, 延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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