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진주류씨에 대하여

ryu하곡 2015. 3. 3. 12:10

5. 진주류(晋州柳)씨 명문가 종친회

2007/07/08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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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에 뛰어난 많은 인재 배출, ‘소수정예’ 명문

본지는 숭조(崇祖), 경로효친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기획 특집 면을 마련했습니다. 이 지면은 해당 성씨·본관 대종회의 요청 순서에 따라 기획되며 본지 60호 ‘한국 성씨·본관 총괄 기획특집 기사에 이어 성주이씨(61호), 합천이씨(62호), 서림·서천이씨(63호), 광산탁씨(64호)를 게재했고 이번 호에는 진주류씨(晋州柳氏) 편을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박병로 편집국장>


‘한국성씨총감’에 의하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류(柳)씨 인물은 적어도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목종 때 평장사를 지낸 전주인 류방헌(柳邦憲)의 묘비문에 그의 증조부가 신라 말의 각간 벼슬을 했으며, 조부가 백제 우장군(右將軍)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또 사서에 918년 염주(연안)에서 크게 세력을 떨친 호족 류긍순이 궁예에게 귀순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진주류씨의 비조는 앞선 두 사람의 류씨보다 기록 면에서는 후대이지만 그 자취가 좀 더 뚜렷하다. 고려 개국에 있어 큰 공을 세우고 대승(大丞)에 오른 삼한공신 문화인 류차달(柳車達)로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 사서에 나타난다. 류차달은 고려 태조 왕건이 남방을 정벌할 때 수레를 내어 군량을 공급하여 큰 공을 세웠던 인물.

 

  경기도 향토문화유적지로 단장된 진주류씨 선영.


그런데 진주류씨 비조의 이름자 차달(車達)이 눈길을 끈다. 남방을 정벌할 때 ‘수레를 내었다’는 말의 뜻과 이름자가 완전히 똑같다. 이름자에 그가 세운 공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러 추측이 가능한데, 당시 기준으로 대단히 앞선 문명이라 할 수 있는 수레를 제공하고 그 공을 인정받을 정도라면 왕건의 세력권 안에서 상당히 부유한 실력자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왕건의 고려 건국 과정에서 그런 활동을 했으므로 류차달의 조상이 후삼국은 물론 신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얘기다.


진주류씨의 중시조, 즉 관조(貫祖)는 류차달의 9세손인 판시사공(判寺事) 류인비(柳仁庇)다. 비조 류차달의 6세손인 정당문학 류공권, 류공권의 아들 상장군 류언침, 류언침의 아들 밀직사 류 순의 막내(季子) 아들이다. 류인비는 비조 류차달로부터 9세손이 되며 벼슬이 판시사 제학이며 상호군으로 치사했다.


류인비가 관향을 진주로 쓴 것은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종회의 입장이다. 문화류문의 영락보(1423년), 가정보(1565년) 기록을 근거로 이렇게 보고 있다.


여기에 또 한 가지가 얽힌다. 즉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류씨가 또 있다. 본 지면에서 보는 진주류씨는 이류-문화류씨계(移柳- 文化柳氏系)로 이른바 토류(土柳)계와 구분된다는 것이다. 토류계와 관계나 연원도 복잡하여 이 부분은 아직 미싱링크로 남아있다.


그러나 한 가지 참고할 사항이 있다. 본관지인 진주에 진주류씨의 세거지는 물론 집성촌도 없다는 사실이다. 진주류씨의 유래를 단순하고 도식적으로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지도 모른다. 어느 성씨든 그 본관지가 되는 곳에는 집성촌을 이룬 세거지가 있게 마련인데 그게 없는 것이다.

 

진주류씨가 시대적으로 크게 앞서 생겨난 본관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의아한 일이다. 그보다는 문화류씨의 발원지가 되는 황해도 신천을 비롯한 고려의 심장부를 중심으로 세거하다 점차 외곽지역으로 퍼져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류인비의 할아버지인 류언침이  먼저 진주를 봉작으로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 진주에 가서 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너무 멀어서 관리가 소홀했던 그 봉작지를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손자 중에서 가장 막내(季子)인 류인비가 떠맡은 것으로 보인다.

 

형제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어느 한 시기 잠시 진주에 가 있다가 다시 벼슬을 얻어 상경종사했을 수도 있다. 진주에 그러한 연고가 있어 류인비가 진산군으로 봉군되었다고 보아야 아귀가 맞다.


이것이 류차달의 9세손인 진산군 류인비가 진주류씨의 관조가 되는 이유다. 한림학사 류 순의 아들 중 막내(季子)로서 위의 형들과 관적을 분리하고 선긋기를 할만한 사유가 충분하다.
진주류씨가 번성하는 계기를 맞은 것은 류인비의 손자 대부터였던 것 같다. 손자는 둘이었는데 모두 고려조에서 중용되면서 후사를 크게 열게 된다.

 

류인비의 큰손자인 류혜방은 지영광군사를 역임했으며 증손자인 류 구(1335~1398)가 홍건적의 난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익양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류 구는 정몽주와 문재를 다투었던 문신. 정몽주가 장원급제한 문과에 급제하고 홍건적의 난 때 개성수복 2등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했으며 명나라와의 외교분쟁 때 18개월 동안 억류되었다가 귀국하여 세상을 떠났다. 사관이 실록에 “근검절약 불무외식”이라 평했으며 후에 청백리로 녹선됐다.

 

류 구의 아들 류 겸도 1380년 문과에 급제한 문신. 조선 태종대에 광주 목사, 좌우 사간대부, 형조참의를 거쳤다. 청백리로서 ‘썰어놓은 옥에는 검은 붕어들만 덤비고, 내가 놀리는 수저에는 기장만 있다’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아들 4형제를 두었으며, 위 3형제 류 이(柳怡), 류 열(柳悅), 류 척(柳   )은 진주류씨 이판공파, 북부령공파, 시윤공파 등으로 분파하면서 오늘날 진주류씨 대종회를 구성하는 4대 파 중의 3대 파로 번연했다.


한편 중시조 류인비의 둘째손자인 류혜손은 판첨의평리 밀직사를 역임한 인물로 일찍부터 학문이 높고 절의가 있던 인물이다. 딸이 목은 이색의 며느리로 출가했고, 본인은 안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성계가 조선태조로 즉위하던 때에 아들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켰다. 안간공 류혜손은 현재의 진주류씨 대종회를 구성하는 4대 파종회 중 하나로 번연하고 있다.


고려말을 지나 조선조에 이르면서 진주류씨는 문무 양면에서 명실상부한 벌열 가문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대종회를 구성하는 4대가 각각 세거하는 지역은 지역적으로 연관성이 별로 없이 완연하게 분리가 되고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본관지인 진주에 세거지가 없는 것과 비유할만하다.


즉 한 곳의 세거지에서 조금씩 인근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가는 것이 아니라 연관성이 별로 없는 먼 지역에서 동떨어져 각각의 집성촌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조선조에 문과 77명, 무과에 380명이 급제한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문무를 통틀어 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지방 관직에 나갔다가 그곳을 세거지로 삼아 집성촌을 이루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진주류씨의 파조(派祖)가 되는 주요 인물들을 고양시 행신동 향토문화유적지 한 곳에 모시고 있다. 이중 류 구, 류 겸 류진동, 류 형, 류 림 등의 묘소와 석물은 문화재〈사진〉로 지정돼 전국의 유림, 대종회 사람들이 견학 및 밴치마킹을 하고 있다.

 

이 묘역에는 자료가 없는 시조 이하 후손들의 단을 함께 마련하여 이곳에 건립한 제실 명인각에서 배향하고 있다. 4대 파종회 하부에 43개 지파가 대종회에 등록돼 있다.


4파 42지파
吏判公派:副正公 忠定公 僉使公 茂長公 晉溟君 孝成公 文成公 庶尹公 僉知公 / 北部令公派:連山公 結網窩公 奉事公 忠毅公 仁川公 野堂公 裁寧公 雲山公 兵使公 浦翁公 僉使公 經歷公 佐郞公 忠壯公 / 寺尹公派:參奉公 參議公 承旨公 / 安簡公派:素齋公 謙齋公 江陰公 承旨公 節度使公 東岩公 監察公 直長公 持平公 大司憲公 僉使公 忠靖公 大司成公 兵使公 伴鷗堂公 菁陽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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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글쓴이 : 山井류기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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