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풍산류씨에 대하여 ...

ryu하곡 2015. 3. 3. 12:12

(위키백과 자료)

풍산 류씨(豊山 柳氏)의 시조 류절(柳節)은

고려 초에 수주(樹州, 부평)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인물이다.

풍산유씨세보(豊山柳氏世譜)에 따르면 유절의 증손 류백(柳伯)이 고려 충렬왕 때

은사(恩賜)로 급제하여 가문의 기틀을 세웠고,

7세 류종혜(柳從惠)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고

낙향해 하회동(河回洞)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과거에는 문화 류씨에서 분적했다는 설이 있었고,

풍산 유씨의 시조가 류차달의 14세손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현재에는 부정하는 추세이다.

풍산 류씨 문중에서도 문화 류씨와의 관련성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풍산 류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2명을 배출하였다.

고려 문과

유백(柳伯)

조선문과

유경심(柳景深) 유경심(柳景深) 유공권(柳公權) 유광목(柳光睦) 유광억(柳光澺) 유도위(柳道緯) 유도창(柳道昌) 유도해(柳道海) 유도휘(柳道彙) 유벽조(柳璧祚) 유상조(柳相祚) 유성룡(柳成龍) 유세명(柳世鳴) 유세빈(柳世賓) 유양춘(柳陽春) 유종개(柳宗介) 유중영(柳仲郢) 유지영(柳芝榮) 유진한(柳進翰) 유치목(柳致睦) 유태좌(柳台佐) 유후조(柳厚祚)

 

풍산 류씨 중 안동 하회마을에 세거하는 류(柳)씨들은 별칭으로 '하회 류씨'라고도 불린다.

 

(안동시 자료)

류절을 시조로 하고 류종혜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안동시 세거 성씨.


[개설]
안동의 풍산류씨는 시조 류절(柳節)의 6세손 류종혜(柳從惠)가 조선 초 하회에 정착한 이후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크게 번창한 가문이다.


[연원]
풍산류씨는 고려 때 호장을 지낸 시조 류절의 증손 류백(柳伯)이 충열왕 때 출사하여 가문을 일으켰고 류절의 6세손 류종혜가 조선 초 공조전서를 지내고 풍산현으로 낙향하여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입향경위]
류종혜는 친구인 배상공(裵尙恭)과 함께 산수가 아름다운 하회촌으로 이거하였다. 이후 배상공의 아들 배소(裵素)의 사위 권옹(權雍)이 이어서 살게 되고 류종혜의 손자 류소(柳沼)가 권옹의 사위가 되어 다시 하회촌으로 복귀한 이래로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류소의 큰아들 류자형(柳子泂)의 후손은 자형의 아들 류공지(柳公智)가 예안 서촌에 살던 영양김씨(英陽金氏)의 사위가 되면서 예안으로 이거하였으나 현황은 알 수 없다.

류소의 둘째 아들 류자온(柳子溫)은 진사에 급제하고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류공작(柳公綽)은 간성군수를 지냈고, 류공작의 아들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 1515~1573)은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내 외직을 두루 거치고 풍산부원군(豊山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류중영의 아들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은 원주목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영의정이 되었다. 이들의 후손은 각각 겸암파와 서애파로 분류된다.

류자온의 둘째 아들 류공권(柳公權)도 문과에 올라 공조좌랑을 지냈고 류공권의 아들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 1516~1571)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대사헌, 평안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류운룡의 증손 회당(悔堂) 류세철(柳世哲, 1627~1681)은 1666년 복제 문제를 논하는 영남유림소의 소수(疏首)가 되었고, 우헌(寓軒) 류세명(柳世鳴, 1636~1690)은 문과를 거쳐 병조정랑 홍문관교리를 지냈고 도학에 깊었다. 류세철의 증손 류영(柳泳, 1687~1761)은 『겸암문집(謙菴文集)』과 『풍산류씨족보(豊山柳氏族譜)』를 편찬·간행하고 퇴락한 겸암정사(謙菴精舍)를 중수·복원하였다.

류성룡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은 풍수지리설을 따라 상주 낙동으로 이거하였는데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류후조(柳厚祖, 1798~1876)가 그의 7세손이다. 서애 류성룡의 장손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1598~1674), 현손 주일재(主一齋) 류후장(柳後章, 1650~1706), 6세손 임여재(臨汝齋) 류규(柳氵+奎) 등은 학문과 도덕으로 추앙되었다.

류원지의 6세손 일우(逸愚) 류상조(柳相祚, 1763~1831)가 병조판서를 지내고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학서(鶴棲) 류이좌(柳台佐, 1763~1837)가 이조참판, 류지영(柳芝榮, 1828~1896)이 안동부사를 지내는 등 많은 이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류성룡의 10세손 회은(晦隱) 류도발(柳道發, 1822~1910)은 경술국치의 비분을 이기지 못해 식음을 끊어 순절하였다.

풍산류씨는 하회에 터를 잡은 이래 문과 급제자 22명, 무과급제자 5명, 사마시합격자 70명 등 많은 명신과 선비를 배출하며 명문거족으로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지역에서는 세거지 이름을 따서 ‘하회류씨(河回柳氏)’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현황]
류경심의 후손은 참판공파로 분파하여 풍천면 하회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류자온의 셋째 류공석(柳公奭)의 아들 류중청(柳仲淸)의 후손은 모하당파(慕河堂派)로, 넷째 류공계(柳公季)의 아들 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의 후손은 파산파(巴山派)로 분파하여 풍천면 광덕리 일원에 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출처 :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글쓴이 : 山井류기창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