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여립(鄭汝立)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의 본관은 동래, 자는 인백이며 전주 출신이다. 첨정을 지낸 희증(希曾)의 아들로 전주 남문 밖에서 태어났다.
정여립(鄭汝立)은 무예나 활쏘기에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또래의 우두머리로 활동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에도 두루 능통하였다. 15세 때 이미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고을 일을 맡아 보았는데 당시 아전들은 그의 부친보다 정여립(鄭汝立)이 업무를 처리할 때 훨씬 부담을 느꼈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강한 개성과 직설적 성격으로 형제 및 친척과도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나 학문적 자질은 뛰어나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0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대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여립(鄭汝立)은 본래 서인(西人: 경기, 호남지방) 세력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東人:영남지방) 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 박 순을 비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그의 이당(移黨)을 불쾌히 여기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린다.
그가 서인(西人)을 공격하게 된 원인은 분명하지는 않다. 그가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던 적이 있 긴 했으나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東人)의 영수 이발 의 성향과 일치했던 것이 동인(東人)에 동조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이이를 공격한 이유로 서인(西人)의 미움이 그에게 집중되었고, 그래서 그는 동인(東人)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는 낙향한 몸이었음에도 동인(東人)들 사이에서는 명망이 높았다. 그래서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系)를 조직하여 매달 모임을 갖는 등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하였을 때는 대동계(大同系)를 동원해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 대동계(大同系)의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 기인, 모사 세력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정은 커다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鄭汝立)의 대동계(大同系)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여립(鄭汝立)은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 주동자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역모의 진실은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역모는 더욱 사실로 굳어졌고, 서인(西人)의 정철(鄭澈)이 수사책임자인 위관(委官)이 되어 사건을 조사하면서 동인(東人)의 인사들이 제거하였다.
이 때 숙청된 인사는 장살로 죽은 이발을 비롯하여 약 1천 명에 육박했다.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한다.
이 옥사로 한때 서인이 조정을 장악하긴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2 정여립(鄭汝立)과 기축옥사(己丑獄事)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겨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로 잘 알려진 송강 정철(松江 鄭澈)은 1589년(선조 22년), 천 명의 조선의 선비가 목숨을 잃는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수사책임자인 위관(委官)으로 임명된다.
정여립(鄭汝立) 역모 사건으로 시작된 기축옥사(己丑獄事). 이 엄청난 정치 참극의 중심엔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 있었다. 조선시대 가사 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松江 鄭澈), 당시 그는 정계에서 물러나 있었다.
정철(鄭澈)은 기축옥사(己丑獄事)를 통해 권력의 정점에 선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들까지 옥사(獄事)에 연루되면서, 정철(鄭澈)에게는 옥사(獄事)를 무리하게 확대했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정여립(鄭汝立) 역모 사건으로 시작된 기축옥사(己丑獄事). 조선 조정을 공포로 몰아넣은 이 역모 사건은 사백 년이 지난 지금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역모 사건을 입증할만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충분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옥사로 확대된다. 역모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여립(鄭汝立) 과 친분이 있는 사람(대부분 동인들)은 모두 가혹한국문을 받는다. 그 결과 수사책임자인 정철(鄭澈) 조차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다.
3 기축옥사의 흑막(黑幕), 선조의 속내
조선 역사상 최초로 방계(傍系: 자기와 같은 시조(始祖)에서 갈라져 나간 다른 계통. 즉 공동의 조상으로부터 분기된 친족 계열에 속하는 사람끼리의 관계로, 공동의 부모로부터 갈라져 나간 형제자매, 조카, 생질, 공동의 조부모로부터 갈라져 나간 백숙부모, 종형제자매 등을 말한다.) 출신에서 왕위에 오른 선조는 정통성 문제로 항상 마음 한 곳이 무거웠고, 더욱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조선을 통치하려고 하였다. 당시 서인보다 동인의 새력이 너무 비대하여 끝내는 왕권에 도전해올 것을 생각한 선조는 동인에 대한 가지치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을 저울질 하며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였다. 기축옥사(己丑獄事) 당시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을 등용해 옥사를 확대시킨 것도 선조였다.
정철은 이듬해 2월에 좌의정이 되었으며, 동시에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그해 8월에는 종계의 변무로 3등 광국공신, 난을 바로잡은 공으로 2등 평난공신(推忠奮義恊策平難功臣)에 녹훈되었다. 좌의정이 되면서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주도적으로 다스리게 되자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그가 동인을 죽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정철은 동인 중에 평소에 과격한 자들을 모두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이 때문에 조정이 텅 비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로 복귀한 성혼과 '흉혼독철'(凶渾毒澈)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며, 동인의 화살이 그들에게 집중된다. 이때 정철은 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巖壽)를 사주해 동인의 영수인 이산해를 얽어 넣으려고 했으나 이산해에 대한 선조의 신임이 두터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호남 유생 정암수를 비롯한 50여 명이 '이산해, 유성룡, 나사침, 나덕준, 정인홍, 정개청이 정여립과 한몸과 같은 사이였다고 하면서, 그들을 진퇴시킬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받은 선조는 크게 노하여 오히려 이산해, 유성룡을 면접해 위로하고, 정암수 이하 10여 명에게 죄를 줄 것을 명했다. 이에 양사가 계사를 올려 죄주지 말 것을 청했으나 선조는 응하지 않았다.
이산해는 정철이 옥사를 빙자해 자신의 세력을 제거하려 한다고 의심하여 뜬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임금이 간단한 명령을 적은 문서를 승지에게 내려 의금부에서 옥사를 다스리고 있던 정철을 쫓아냈다.
사헌부와 사간원도 함께 정철의 죄상을 논하는 글을 올려 그를 멀리 강계로 귀양을 보냈다. 정철에게 또 벌을 더하고자했으나 이산해가 옳지 않다 하여 그만두었다.
후에 서인들은 이발의 가족들이 옥사할 당시 위관은 정철이 아니라 유성룡이라고 주장하였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비열한 정치공세로 이해하고 원한과 의혹을 한층 더 쌓게 되었다.
하지만 기축옥사(己丑獄事)가 발발한지 3년 지나자 정국은 좀 진정되어가던 1591년, 정철은 선조에게 세자 책봉에 관해 건의를 올렸다. 이 때 선조는 돌연 정철에게 태도를 확 바꾼다.
★. 잘못된 진실1: 나는 조선에 15대 왕 광해다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23
한때는 독수리의 절개를 가졌다며 총애했던 정철(鄭澈)을 좌의정에서 파직시키고, 평안도 강계로 유배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 선조는 기축옥사(己丑獄事)의 모든 책임을 정철(鄭澈)에게 돌린다. 이 모든 일이 너무 빨리 진행하여 정철 조차도 정신이 없었다.
정철은 선조에게 “세자를 광해로 책봉하는게 어떤가?” 하고 건의 했을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정철은 선조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당시 선조는 후궁인 인빈 김씨(仁嬪 金氏: 인조의 할머니)를 총애하여 그녀에게서 낳은 4번째 아들인 신성군 이후(信城君 李珝)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녀는 광해군의 생모이자 선조의 후궁이었던 공빈 김씨와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공빈 김씨가 산후병으로 죽자 선조의 총애가 모두 인빈에게 옮겨가게 되었으며, 또 이때를 틈타 그녀의 아우인 김공량(金公諒)이 이산해 부자와 결탁하여 마침 광해군의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한 정철 등을 유배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부터 정철은 선조로 부터 철저히 외면받게 된다. 선조실록에 기록된 것을 보면 ..
“정철의 일을 말하면 입이 더러워질 것이다. 최원경의 원통함을 재가 감당하겠다.. 그리고 독한 정철로 인해 어진 신하들이 죽었구나..”라며 기축옥사에 모든 죄를 정철에게 돌렸고, 그를 유배시킨 뒤 위리안치(유배지 집 주위를 가시나루를 두루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하였다.
그는 집에서 할 것이라고 책읽고 시를 쓰는 것 뿐이었다. 그가 지은 송강유필에 보면은 그가 읽은 책 횟수를 동그라미를 쳐서 몇번 읽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56세 나이에 가난과 빈곤에 시달리며 쓸쓸히 죽었다.
4 송강 정철(松江 鄭澈)
정철 (鄭澈, 1536년 12월 18일(음력 12월 6일) ~ 1594년 2월 7일(1593년 음력 12월 18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시인이자 문신, 정치인, 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또는 迎日),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별명은 총마어사이다. 그는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 가사 문학의 3대 거장이다.
그러나 그는 두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국문학적 얼굴과 정치적 얼굴이다. 국사학(國史學)에서 송강 정철이란 이름이 주는 의미는가사문학의 시조이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로 알고있다. 그 만면에 그는 정치적으로 보면 조선 최고의 고문기술자에 더 가까울 것이다. 문학 속에 스며있는 감성과 정치 행적 속에서 들어나는 잔인함 어느것이 정철의 얼굴인지 도저히 가름하기 힘들다.
정철은 인종이 죽고 1545년에 명종이 즉위하였다. 을사사화(乙巳士禍::명종이 12살 어린나이로 왕위올랐다.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데, 문정왕후의 친정 동기인 윤원형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 일파 대윤(大尹)을 몰아내어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을 을사사화라고 말한다.
부군인 중종이 승하하여 다음 대를 30 세의 세자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조선 12대 왕 인종이었다. 인종이 중종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몸져 누워 지내다 환후가 악화되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승하하게 된다.
이어서 이복 동생인 명종이 나이 12살에 왕위에 올랐다. 명종의 모후인 문정황후는 인종의 계모이다. 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니 정국은 중종의 첫째 계비인 윤여필의 딸 장경왕후와 둘째 계비인 윤지임의 딸 문정황후의 외척간의 권력투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두 왕후의 외척간의 권력투쟁은 중종의 비 신씨가 즉위 직후 페위되어 제1계비 장경왕후가 세자 호( 뒤에 인종 )를 낳은 뒤 죽고 윤지임의 딸이 제2계비 문정왕후로 책봉되어 경원대군( 뒤에 명종 )을 낳았는데, 이 두 계비는 같은 파평 윤씨였다.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이 경원대군으로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여, 세자의 외숙인 윤임(장경왕후의 아우)과 경원대군의 외숙인 윤원형 사이에서 대립과 알력으로 조정은 윤임을 지지하는 대윤과 윤원형을 지지하는 소윤으로 갈라졌다.
그 뒤 중종이 죽자 세자가 인종으로 왕위에 오르니 윤임을 중심으로 대윤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인종은 사림의 명사를 신임함으로 인해 사림은 기묘사화(중종 때 훈구파가 조광조의 혁신 사림파를 척결) 이후 다시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고 등용하지 못한 사람들은 윤원형 밑에 모여 윤임 일파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즉위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인종이 죽고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이 어린나이에 즉위(명종)하여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정국의 형세는 완전 역전되어 조정의 실권은 대윤으로부터 소윤으로 넘어갔다.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은 예조참의로 재등용되었다. 계급은 낮았지만 그는 소윤의 거두로서 위세가 당당하였다. 윤원형의 일파는 윤임 일파를 없애려고 윤원형의 첩 정난정을 궁중에 출입시켜 문정왕후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윤임 일파를 칠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대윤 일파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병조판서 이기가 어전에 나와서 우찬성 윤임이 계림군 유<桂林君 瑠: 성종의 셋째아들 계성군(桂城君)의 양자이며, 중종의 첫째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아버지 윤여필(尹汝弼)의 외손이다.>를 대행왕의 양자로 삼아 그를 옹립코자 모의하였다고 하고 윤임은 중종 때부터 다른 마음을 품고그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면서 좌의정 유관과 이조판서 유인숙 등과도 공모한 사실이 있다고 아뢰니 중추부지사 정순붕이 뒤이어 윤임이 왕대비의 처소에 들어 내관들을 모두 물리치고 생질부의 손을 잡고 은밀한 말을 주고 받았다고 아뢰니 이들의 싸움은 끝나고 있었다.
문정왕후는 명종을 앞세우고 충선당에 나와 소윤 일파로 하여금 대윤파들의 죄상을 상주케 하고 바로 처분을 내렸다. 윤임, 유관, 유인숙은 사사되고, 계림군 유는 고문으로 대역의 사실을 실토케 하여 효수되었으며, 봉성군 완은 평창으로 귀양갔다가 두해 후에 사사되고, 윤임의 아들 삼형제가 모두 사약을 받아 죽는 등 모두 참형을 당했다.
여기에 희생된 사람은 10 여명이 넘었으며 을사사화가 끝난 뒤에도 이 여파는 계속되어 그 후 5-6 년에 걸쳐 윤임 등을 찬양하였다는 등의 갖가지 죄명으로 유배되는 등 죽은 자의 수가 100 여명에 달하였다.
연산군 이래 약 50 년간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옥사는 을사사화로 마지막이었으나 이 사건은 모후 및 외척이 정권을 전횡하는 외척정치의 길을 열어 놓았다.
)에 매형인 계림군이 윤임에 의해 추대받았다는 이유로 역모죄로 붙잡혀 처형을 당하고, 그의 맏형은 곤장을 맞고 전라남도 광양군으로 유배되었으며, 아버지 정유침은 함경북도 정평으로 유배되었다.
그 역시 계림군의 처가 일족(一族)으로서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유배될 때 정평으로 따라간 이후, 아버지의 배소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곧 아버지 정유침은 유배가 풀려서 되돌아왔다.
1547년(명종 2년) 전라도 양재역에서 벽서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관련자로 지목되어 아버지 정유침은 경상북도 영일로 유배되었으며, 맏형은 다시 붙잡혀와 형문을 당하던 중 곤장을 맞고 함경북도 경원으로 귀양가는 길에 형독으로 32살의 나이에 장살했다. 이후 그의 둘째 형 정소는 과거를 준비하다가 벼슬길에 환멸을 느껴 처가가 있는 전라남도 순천으로 은거하였다. 그는 다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전전하게 되었다.
어릴 때 부터 정철의 가족 수난사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정철이 기축옥사를 주관하고 술을 매우 좋아했던 것이 트라우마가 심했든 것 같다. 가사를 대가인 그가 이른 아품을 잊고져 시선 이백 처럼 술 한잔으로 시름을 달려며 시와 가사를 지은 것 같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당시 국문을 주관하던 형관으로 사건 추국을 담당하였으며, 기축옥사 수사 지휘의 공로로 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推忠奮義恊策平難功臣) 2등관에 책록되었다. 훗날 심문 과정에서 기축옥사로 동인과 그 일족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하여 동인들의 비난을 받았고, 정여립의 난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세자 건저문제를 계기로 귀양에 위리안치되었고, 임진왜란 직후 복귀하였다.
전란 초기에 양호체찰사 직을 수행하였으나, 복귀 후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일로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에 우거하던 중 사망하였다.
당색으로는 서인(西人)의 지도자였고, 이이, 성혼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적으로는 기대승(奇大升) · 임석천 · 송순(宋純)·김인후(金隣厚) · 양응정(梁應鼎)의 문인이다. 《관동별곡》(關東別曲) 등 가사와 한시를 지었으며, 당대 시조문학,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5 정철과 기축옥사
┌ 동인(경상右도 영남사림파): 내암 정인홍, 아계 이산해(화담학파), 정언신, 최영경
동인┤ └ 동인계열 호남사림(전라右도): 정여립 / (화담학파) 이발, 이길, 정개청
└ 동인(경상左도 영남사림파):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서인 - 서인(기호사림파): 우계 성혼, 오음 윤두수, 월정 윤근수, 사암 박순(화담학파), 송익필
└ 서인계열 호남사림(전라左도): 송강 정철, 고경명, 김천일
송강 정철은 사림이 동·서인 분당 때 기호사림파에 가담했으나 고향이 전남 담양군인지라 범(凡)호남사림(서인)으로도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당시 호남사림은 13대 명종(1545~67년) 때의 하서 김인후 이후로는, 동·서인 분당 때의 기호사림파처럼 확실한 구심점이 없던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호남 사림은 영남사림파를 지지하는 화담 서경덕(전라右도) 계열과 기호사림파를 지지하는 면앙정 송순(전라左도) 계열로 양분돼 있었다.
보다 세부적으로 화담 서경덕 계열은 동·서인 분당 때 영남사림파에 가담했던 이발·이길 형제 및 정개청 등이 이끌고 있었다. 반면 면앙정 송순 계열은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송강 정철, 고경명, 김천일 등이 이끌고 있었다.
면앙정 송순(1493~1582년(성종23~선조5))은 전남 담양군 출신으로 동향 후배인 송강 정철의 스승이었다. 한때 의정부 우참찬(정2품, 3정승 보좌역)이자 호남 사림의 거두로 13대 명종조 및 14대 선조조 초반 남명 조식 및 퇴계 이황과 대립해온 인물이다.
또한 동·서인 분당 때 심의겸을 지지했던 선배 관료들 중 핵심인물이기도 했다. 면앙정가(무등곡, 1533년)를 남겨 국문학에서도 유명한 인물이다. 제자인 송강 정철의 가사 문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저런 배경으로 인해 호남 사림 내부의 분열상을 잘 알고 있던 송강 정철은 기호사림파의 제갈공명이라 불렸던 송익필의 도움을 받아 호남 사림 내 화담 서경덕(전라右도) 계열을 제거하는 데 정여립 역모사건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어릴때 부터 눈에 가시였든 이발, 이길 형제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1589년(선조 22년) 10월에 정여립의 옥사가 발생한다. 선조는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정언신(정영립의 9촌간) 등에게 위관(委官)이 되어 죄인들을 심문하게 했다. 그러나 송익필의 권유로 입궐한 정철이 차자를 올려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니 재판관으로는 적당하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선조는 그해 11월 정언신 대신 정철을 우의정으로 제수하고 위관으로 삼았다. 정철은 동인들의 죄상을 추궁하였다. 위관이었던 정언신도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여립과 연루되었음이 드러났다.
정언신이 체포되자 정언신의 아들 율이 상소를 올려 무죄임을 주장하고 성혼도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대신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된다고 권고하여 죄가 감해졌으나, 정여립의 문서와 서신들을 조사했을 때 정언신의 편지가 비교적 많이 들어 있어 정언신에게는 유배형이 내려졌다.
6 정철.. 수모는 목숨으로 갚는다...
정철은 어린 시절 호남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였던 광산이씨 집을 방문했다가 이발·이길 형제으로부터 멸시 받은 일이 있었다. 원래 송강 정철의 연일정씨 가문도 그의 누이들이 12대 인종(1544~45년)의 후궁이요, 계림군(9대 성종의 庶손자이자 대윤(大尹, 파평윤씨-인종외가)의 지도자 윤임의 조카)의 부인이었을 정도로 잘 나가던 집안이었다.
그러나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요절했고 계림군은 을사사화(1545년)에 연루돼 능지처참됐다. 왕실과 혼맥으로 연결돼 있던 송강 정철의 집안 역시 화를 피하진 못해 부친은 귀양 갔고 같이 귀양 갔던 그의 맏형은 그만 죽고 말았다.
그렇듯 송강 정철의 어린 시절, 그의 가문은 무척이나 영락해 있던 상황이었다. 힘들었던 시절 송강 정철보다도 8살에서 11살가량 어렸던 이발·이길 형제는 그런 그를 두고 역적의 집안 출신이라며 몹시 업신여겼던 듯하다.
그때의 응어리가 남았던지 송강 정철은 수사 과정에서 이발·이길 형제를 겉으론 도와주는 척하면서 실제론 끝없이 옥사에 밀어넣었다. 결국 전라우(右)도, 화담학파 출신으로 영남사림파의 차세대 기수였던 대사간(정3품, 오늘날의 감사원장격) 이발·이길 형제는 속절없이 처형됐고, 형제의 82세 된 노모와 8세 난 아들도 고문 중에 죽어나갔다. 기축옥사 이후 광산이씨 가문은 거의 멸문지경에 이르렀다.
당연히 옥사의 물결은 정여립의 불온한 사상에 동조했던 (또는 동조한 것으로 보였던) 화담·남명학파 출신의 명망 높던 재야학자들에게까지 밀려 들어왔다. 전남 무안에서 은거하던 화담학파 정개청과 경남 진주에서 은거하던 남명학파 최영경 역시 옥사의 파고를 넘지 못했던 것이다.
정개청은 정여립의 집터를 봐준 관계로, 최영경은 정여립의 편지 한 장을 받은 죄로 역모자로 몰려 처형됐다. 최영경의 경우엔 우계 성혼까지 나서서 구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이 밖에도 해남윤씨, 나주나씨, 창녕조씨 등 수많은 전라右도 호남 사림들이 피바람을 피하지 못했으니 옥사가 끝나가던 1591년 무렵 호남 지역 내 영남사림파 지지 가문들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후 3년 간의 과정에서 정여립의 친구, 일가족과 자주 교류한 사람, 일족과 편지를 주고 받은 사람들까지 색출하여 처벌함으로써 1천여 명의 동인계 인사들이 처형되었다.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라 한다. 조선의 4대 사화를 다 합쳐도 기축옥사 때 죽은 자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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