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역사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각 성씨 시조 동래설에 대한 견해
출처 : http://botw.egloos.com/11062218
시조가 중국서 왔다는 이른바 시조 동래설(始祖 東來說)이 있는 성씨는 많다. 그 중에는 동래한 시조가 동성의 본관이 다른 여러 문중의 공통 조상이라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 이러한 시조 동래설들은 대부분 명확한 기록적 근거 없이 조선 중기 이후에 느닷없이 나타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대해 족보 연구의 권위자였던 이수건(李樹健, 1935-2006) 전 영남대 교수는 사서(史書)나 금석문 등에 믿을만한 근거 기록이 없는 경우 대부분 후대의 조작이라고 단정한다. 다수의 역사학자들도 같은 견해이다.
이수건(李樹健), 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06.10
다수 성씨가 주장하는 시조의 동래 시기는 믿을만한 기록이 전해 오기 힘든 신라시대인데도 시조가 동래한 연도까지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런 경우는 삼국사기등 사서(史書)에 나오는 경우만 빼고 거의 100% 조선 중기 이후에 꾸며낸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아래와 같은 명확한 기록이 발견된 경우도 있기는 하다.
880-890년 무렵 신라에 귀화한 중국인 왕언영(王彦英), 왕인간(王仁侃) 부자(父子)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04/17/0200000000AKR20090417113400005.HTML?did=1195r
하지만 이는 중국에서 발굴된 후손 묘지명으로 알려진 경우이고, 국내에서는 삼국이나 신라시대에 묘지명을 만들지도 않았으니 이런 경우가 나오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조선 후기의 역사학자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1712~1791,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990 )도 일찌기 광주안씨(廣州安氏) 경술보(庚戌譜, 1790)에 실린 "변무(辨誣, 거짓임을 밝힘)"라는 제목의 글에서 안씨들의 시조가 동래했다는 설이 세상에 나도는데, 이는 맹랑하고 근거없는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믿으면 안된다고 당부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안씨들의 시조 동래설은 먼저 나온 압해정씨(押海丁氏), 의령남씨(宜寧南氏)의 경우와 같은 종류로 모두 조작된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변무(辨誣)
http://botw.egloos.com/483211
광주안씨 경술보(1790) 순암공 변무 원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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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씨(南氏)의 연원과 시조 동래설에 대한 기록들
http://botw.egloos.com/11059106
안씨의 시조 동래설은 남씨들의 완벽한 복제품
http://botw.egloos.com/11058473
나주 정씨(羅州 丁氏) 연원과 시조 동래설에 대한 기록들
http://botw.egloos.com/11060058
안정복(安鼎福) 변무(辨誣)에 언급된 성씨들의 시조 동래설 출현 시기
http://botw.egloos.com/11058353
정씨(丁氏) 시조 동래설 관련 소송에서 이를 부인하는 나주정씨의 패소
: 판사들은 시조 동래설에 우호적이거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못하는 것 같다. 전문 역사학자에게 자문을 구하지도 않는 것 같고. 동래설 때문에 벌어지는 성씨간 분쟁은 법정에서 해결하기는 쉽지 않은 듯하다.
해좌 정범조와 다산 정약용이 정씨(丁氏) 시조 동래설을 배척한 글
정범조(丁範祖, 1723-1801) 해좌집(海左集)
http://db.itkc.or.kr/itkcdb/text/seojiViewPopup.jsp?bizName=MM&seojiType=heje&seojiId=kc_mm_a549
해좌집(海左集) > 海左先生文集卷之十八 > 書
答宗人書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M&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3FbizName=MM%26seojiId=kc_mm_a549%26gunchaId=av018%26muncheId=01%26finId=014%26guboonNodeId=seoji%26NodeId=mm_s_all
해좌집(海左集) > 海左先生文集卷之二十五 > 碑陰記
政丞丁公墓碑陰記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M&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3FbizName=MM%26seojiId=kc_mm_a549%26gunchaId=av025%26muncheId=02%26finId=013%26guboonNodeId=seoji%26NodeId=mm_s_all
정약용(丁若鏞, 1762-1836)《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http://db.itkc.or.kr/itkcdb/text/seojiViewPopup.jsp?bizName=MK&seojiType=heje&seojiId=kc_mk_c001
다산시문집 > 다산시문집 제12권 > 변(辨)
압해(押海)의 정승묘(政丞墓)에 대한 변증 : 押海政丞墓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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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羅州)의 압해섬(押海苫)에 정승동(政丞洞)이 있는데, 그 위에는 정 정승(丁政丞)의 무덤이 있고 묘(墓) 앞에는 비(碑)가 있다. 그 비에 ‘대상 정공의 무덤[大相丁公之墓]’이라고 되어 있다. 고기(古記)에,
“정공(丁公)의 휘(諱)는 덕성(德盛)인데 성당(盛唐) 선종(宣宗) 때에 벼슬이 승상(丞相)에 이르렀다가 어떤 일로 인하여 신라(新羅)의 해도(海島)에 귀양오게 되었고 마침내 압해섬(押海苫)에 유배(流配)되어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대로 여장(旅葬)하게 되었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이곳에 정승묘(政丞墓)가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상고하건대,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멸망하자 비로소 이세적(李世勣)으로 하여금 서방(西方)을 관리(管理)하게 하였으며, 유인원(劉仁願)으로 하여금 남방(南方)을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모두 철수하여 돌아갔고, 오직 서방에만 안동 도독부(安東都督府)를 설치하여 그곳의 재리(財利)를 통괄하였다. 하지만 이른바, 안동 도독부가 처음에는 평양(平壤)에 있다가 나중에는 요동(遼東)으로 옮기었고, 또 요서(遼西)로 옮기는 등 날로 퇴축되어 멀어져 갔다. 그러다가 아래로 천보(天寶)의 난(亂)에 미쳐서는 드디어 포기하고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신라가 통일되어 다시 당(唐) 나라의 내지(內地)가 되지 않았었다.
대저 대신(大臣)을 귀양보내는 데는 반드시 내지(內地)에 보냈을 것인데, 모르기는 하지만 정공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번국(蕃國)의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단 말인가. 더구나 승상(丞相)은 한관(漢官)이요, 정승(政丞)ㆍ대상(大相)이란 우리나라의 말이다. 당(唐) 나라에 과연 승상(丞相)ㆍ정승(政丞)ㆍ대상(大相)이 있었단 말인가. 이로 말미암아 말하자면 정공(丁公)이 당 나라 사람이었는지는 알지 못할 일이다. 혹 동방(東方)의 대신(大臣)인데, 그때가 당 선종(唐宣宗) 때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송(宋) 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왔다가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읽어보았다. 거기에 이르기를,
“그 나라 법은 무릇 중죄(重罪)를 지은 사람은 흑산도(黑山島) 해중(海中)에 귀양보낸다.”고 되어 있으니, 이것은 혹 신라(新羅)의 옛 상법인 듯도 하다. 그리고 압해(押海)는 역시 흑산도(黑山島) 해중(海中)의 한 섬이다. 그러나 신라 시대에 정씨(丁氏)가 현달(顯達)하지 못했으니, 반드시 대관(大官)이 있었는지도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요컨대, 압해(押海)는 정씨의 대본(大本)이며 묘(墓) 속의 대부(大夫)는 정씨의 대조(大祖)인데 사적(事蹟)이 모두 없어졌으니, 슬프다. 지금 사람들은 옛 사적에 소략(疏略)하여 다시 의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생각했던 것을 기록하여 후일의 군자(君子)를 기다리는 바이다.
[주D-001]성당(盛唐) : 한시(漢詩)에 있어서 당(唐) 나라를 사분(四分)한 둘째 시기로, 개원(開元 현종(玄宗)의 연호)부터 대력(大曆 대종(代宗)의 연호)까지를 들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 뜻이 아니고 성대한 당(唐) 나라라는 말이다. 이백약(李百藥)의 〈찬도(贊道)〉 부(賦)에 “빛나도다 성대한 당 나라여, 크도다 신령한 복이여.[赫哉盛唐 大哉靈慶]” 하였다.
[주D-002]여장(旅葬) : 타국(他國)이나 타향(他鄕)에서 표류하다가 죽은 사람을 그대로 타향 땅에 장사지낸 것을 말한다.
[주D-003]이세적(李世勣) : 당(唐) 나라 초기의 명장(名將)으로 당 고종(唐高宗) 때에 벼슬이 사공(司空)에 이르렀으며, 일찍이 고구려(高句麗)를 토평(討平)하였다. 이적(李勣).
[주D-004]천보(天寶)의 난(亂) : 천보(天寶)는 당 현종(唐玄宗)의 네 번째 연호(年號)이며, 천보의 난이란 바로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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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南九萬, 1629-1711)《약천집(藥泉集)》 제24권 > 가승(家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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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서(族譜序) : 정축년 (1697년) :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3FbizName=MK%26seojiId=kc_mk_h048%26noUpSeoji=%26gunchaId=av024%26muncheId=01%26finId=001%26guboonNodeId=seoji%26NodeId=mk_s_all
남씨들의 첫 족보 계유보(1693) 서문이나, 김충(남민)이 당 현종(玄宗) 연간에 동래한 것을 적고, 역사 기록에 없어 고증이 불가능하며, 김충이 안렴사(按廉使)라고 한 것도 현종 연간에 그런 관직이 없어 믿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남군보 이상의 선계에 대해서도 믿을만한 기록이 거의 없고, 남군보 이후 기록은 믿을만하다고 말하고 있다.
남구만의 약천집에 나오는 다수의 선대 묘도문에는 김충(남민)을 남씨들의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남구만과 같은 유력한 인물이 남씨 시조 동래설이 처음 나온 초기에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도 계속 기록하는 바람에 후대에 남씨들 문중이 이 설을 사실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남구만이 분명한 판단을 내리지 않은 것이 아쉽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남구만의 손자 남극관 (南克寬, 1689 ~ 1714,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b_A1689_1_0016137 )은 일찌기 문화유씨와 연안차씨가 동원이라는 주장이 담긴 『차원부설원기(車原頫雪冤記)』를 위서로 판정한 바 있다. 유씨와 차씨 두 문중은 조선 후기 한동안 동족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근자에 문화유씨 문중에서 차원부설원기가 1500년대 중후반에 지어진 위서임을 고증하고, 두 문중이 아무 혈연 관계가 없음을 천명하였다. 남극관은 왜 다른 성씨의 족사 기록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판단을 내리면서, 정작 자신 문중 족사의 이상한 기록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남기지 않았을까?
문화류씨와 연안차씨간 분쟁은 시조 동래설 때문은 아니고 동원이라는 주장 때문임.
題車原頫雪寃記 : 몽예집(夢囈集) > 夢囈集乾 > 雜著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M&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3FbizName=MM%26seojiId=kc_mm_a502%26gunchaId=av001%26muncheId=03%26finId=062%26guboonNodeId=seoji%26NodeId=mm_s_all
2008 문화류씨 세보 : 류씨와 차씨는 관계없음을 천명함
http://moonhwaryu.kr/home/menu2/sub2_6.html
설원기를 배척한 선각자들
http://ppcl.cnu.ac.kr/ryu/roots/seolwon-pioneers.htm
류차문제 및『차원부설원기(車原頫雪冤記)』
http://ppcl.cnu.ac.kr/ryu/#seolwongi
붙임파일 : 차원부설원기 (한글파일 hwp)
차원부설원기-류재준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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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오씨의 시조 동래설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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