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해동문헌총록”과 “증보문헌비고”

ryu하곡 2014. 7. 22. 15:56

해동문헌총록증보문헌비고

                                                            - 2014. 7. 22. 류주환

목차

1. “해동문헌총록

(1) “설원기

(2) “대동운부군옥

(3) “문화류씨족보

(4) “설원기와 관련한 총록의 평가

2. “증보문헌비고

3. 나가는 말

 

차원부설원기와 관련하여 위 두 문헌에 대해 잠시 고찰해 보았다. 이 가운데 17세기 초의 문헌에 해당하는 해동문헌총록은 몇 가지를 논의한 반면 20세기 초에 완성된 증보문헌비고는 시대가 뒤져 개략적으로 언급하는 데 그쳤다.

 

1. “해동문헌총록

 

김휴(金烋, 1597~1638)는 우리나라 최초로 도서를 해제한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이하 총록”)을 저술하여 우리나라 서지학(書誌學)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총록의 서문에서 당시 낙동강 좌우와 동서 주변 고을까지 무릇 명문대가(名門大家)의 서책이 간직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다니면서, 보고 들어서 헤집고 들추어내지 않은 것이 없이 흔적이 발견하는 대로 기록하였다.”고 그 노력을 증언하고 있다. “총록670여 종의 많은 문헌들을 각각 간략하게 해제하고 있다.

 

필자가 총록의 영인본을 검토하였는데, “설원기관련으로 논한 것으로 다음 세 부분이 보였다. 이곳의 해석은 모두 필자의 것이다.

 

(1) “설원기

 

총록사기류(史紀類)항목에 들어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車原頫以河崙鄭道傳咸傅霖趙英珪爲車門之孼直書四名于族譜中崙等因此懷嫌搆陷盡赤其族當松原撲殺之日托以林堅味外孫之屬及其赤族之時擧以鄭夢周之餘黨又當兩聖之際以二芳羽翼詭囿而陷之後恭定知其誣命雪其寃景泰丙子朴彭年奉敎作雪寃記而進

주석: 雜錄曰車原頫爲河崙鄭道傳與其兄崇頫崇質宗頫亨頫皆見殺於松麻二原之地朴彭年以詩悼之有五老雙原事可悲之句

 

이것은 대동운부군옥”(이하 군옥”)과 비교하면 몇 글자만 다르고 군옥의 글을 그대로 전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총록에는 초록색으로 표시한 글씨들이 추가되었고 빨간색으로 표시한 글씨들이 빠져 있다. “군옥에는 이 글의 표제어가 雪冤記(설원기)”이며, 위 설명의 출처로 본기(本記)”, 설원기자체임을 밝히고 있다. 이 글이 그대로 설원기에 나오는 것은 아니고, “군옥의 작자 권문해가 설원기의 내용을 요약하여 설명한 것이다. (“총록에서는 지금 말로 말하면 표절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출처를 밝히지 않고 남의 글을 이용하는 일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흔한 일이다.) 주석 역시 군옥의 표제어 五老雙原(오로쌍원)”의 항목을 거의 그대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차원부는 하륜, 정도전, 함부림, 조영규가 차씨 집안의 얼자라고 네 사람을 족보에 그대로 썼다. 하륜 등이 이로 인하여 혐의(嫌疑, 꺼리고 싫어함)을 품고 드디어 모함하여 일족을 몰살시켰다. 송원에서 몽둥이로 때려죽인 날에는 임견미의 외손의 족속이라고 핑계 대었으며, 일족을 몰살시킬 때에는 정몽주의 잔당이라 하였고, 2(, 태조와 태종)의 때에는 2(, 방석과 방번)의 우익(羽翼, 보좌하는 사람)이라고 속여 모함하였다. 후에 공정(恭定, 태종)이 그것이 무고였음을 알고 그 원한을 씻어주라고 명하였다. 경태 병자년(1456)에 박팽년 등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설원기를 지어 올렸다.

주석: ‘잡록에 이르기를 차원부가 하륜 등의 모함을 받아 그의 형 차숭부, 차숭질, 차종부, 차형부와 함께 모두 송원과 마원에서 피살되었으며, 박팽년이 시를 지어 애도했는데, ‘다섯 노인이 두 원()에서 당한 일은 참으로 슬프도다.’라는 구절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설원기에서 꾸며진 일들이며, 사실이 아니다.

 

(2) “대동운부군옥

 

총록소학류(小學類)”대동운옥(大東韻玉)’이라는 표제로 들어 있다. 권문해가 지었으며, 우리나라 서적들을 수집하지 않은 것이 없고, ()에 따라 배열했다고 설명하며, 아주 자세하다고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탈고하지 못했지만 공을 들인 것이 가장 많다.”고 언급하며, 권문해의 자()는 호원(灝元), 예천인(醴泉人)이며, 수헌(睡軒, 權五福의 호)의 종손(從孫)이라는 사실을 덧붙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일컬어지는 군옥은 권문해의 필생의 역작이며, 1589년 완성되었다. 여기 지적한 탈고는 대개 간행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군옥총록에서 다루어진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일찍부터 알려졌다. 간행은 1836년에 비로소 이루어졌으며 필사본과 간행본 사이에는 첨삭도 다수 이루어졌다. 앞에서 다루어진 바대로 군옥설원기를 주요 텍스트 중 하나로 이용하여, 관련 항목이 수십 개에 달한다. 이것은 설원기의 위작을 알지 못한 결과이며 가치가 높은 군옥의 최대 흠결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3) “문화류씨족보

 

총록보첩류(譜牒類)”에 들어 있다. 먼저 작은 글씨의 주석으로 다음과 같이 주어져 있다.

 

高麗大丞柳車達之後按雪寃記車氏譜圖赫居世時有車蒙一後變車爲柳蒙一卽車達之先然年代世系不可考

고려 대승 류차달의 후손이다. ‘설원기의 차씨보도(車氏譜圖)를 보면 혁거세 때 차몽일이라는 사람이 있어 후에 차씨 성씨를 바꾸어 류몽일이 되었는데, 이 사람이 류차달의 선조이다. 그러나 연대와 세계는 고찰(世系)할 수 없다.”

 

나머지는 문화류씨 족보 가정보에 관한 설명이라서, 지금 주제와는 무관하여 옮기지 않았다. 이것 역시 총록군옥文化柳氏(문화류씨)” 항목을 그대로 전재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총목에서는 표제가 문화류씨족보인데 여기 설명은 류차달의 후손이다.’로 시작하여 이대로는 표제와 설명이 어울리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군옥에서 연안차씨 항목에도 차몽일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폐기된 원파록에서는 차무일(車無一)로 되어 있다. 또 그가 류씨로 되었다는 말은 군옥에만 나온다. 자는 자와 서로 착오할 만한 글자는 아니며(초서 형태를 포함해도 그렇다) 원래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차씨보도(車氏譜圖)”라는 것이 언급되는데, 명칭으로만 보면 계통도의 종류로 보인다. 현재 전하는 차원부설원기필사본에는 차몽일이나 차무일이 보이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보면 권문해가 참조한 설원기의 본()에 차몽일->류몽일-....-류차달-연안차씨-...의 계통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판단된다.

 

(4) “설원기와 관련한 총록의 평가

 

해동문헌총록과 관련하여 차문의 글에 이런 것이 있다. (그대로 옮김.)

 

  “그간 위서라고 혹자가 주장하고 폄하하는 <차원부 설원기> 1600년대(1636년 간행)에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해제 <해동문헌총록>에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해동문헌총록>은 경와 김휴(1593~1639)의 작품이다. 경와 김휴가 살았던 1600년대에는 <차원부 설원기>가 경와가 살던 군읍(안동, 예안, 영주, 봉화, 예천, 영양, 청송, 상주, 문경, 선산) 등에서는 많이 읽혀진 서적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차원부 설원기>는 독자가 의심 없이 볼 수 있었으며, 본 해제는 어떤 거짓도 없음을 알 수 있다.

  1600년대 인정된 책을 지금에 와서 이를 의심하고 위작 등을 주장함은 얼마나 잘못된 주장인지를 알아야 한다.”

 

필자가 이미 대동운부군옥에 위서(僞書) “설원기가 포함된 것에 대해 다양하게 고찰하고 비평하였다. “총록군옥의 기사를 글자 몇 개만 바꾸고 그대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총록군옥보다 대략 4~50년 후의 문헌이다. “설원기의 가치를 주장하려면 총록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항목을 다루고 있는 군옥을 언급해야 마땅하며, “총록을 거론하는 것은 시기에 대한 판단도, 문헌의 전후에 대한 판단도 결여된 소행이다. 문헌으로는 군옥에서 처음 등장하는 차원부의 시호 문절이 조작된 것임은 국보 일성록이 증명하고 있음도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군옥총록은 그 자체로 귀한 문헌들이다. 그러나 권문해와 김휴의 노고(勞苦)설원기의 교묘한 사술(邪術)에 빠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위의 인용문에서 설원기가 널리 읽혔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또한 독자가 의심 없이 볼 수 있었다는 지적도 엄연한 사실이다. “총록설원기해제 자체도 그 책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는 거짓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으로 설원기가 남극관의 표현대로 비루한 위작이라는 사실마저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2. “증보문헌비고

 

필자가 여기서 이 문헌을 언급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차문에서 증보문헌비고가 상당한 가치가 있는 공가(公家)의 문헌이며, 류효전이 차효전이 된 내력이나 차원부 등의 인물 소개, 류차동원설에 입각한 가문의 내력 등의 내용이 들어 있어, “설원기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입각하여 가문사를 정립하겠다고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문의 큰 방침에 대해 필자가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다. 다만 설원기관련 역사 논의의 관점에서 증보문헌비고”(이하 비고”)라는 문헌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필자는 그동안 설원기관련해서 수많은 과거와 현재의 문헌들을 검토하면서도 비고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 문헌 자체는 가치가 있지만 설원기의 정체의 탐구가 주제인 경우에는 후대의 문헌은 그 중요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 다양한 문헌들을 검토한 후에 덧붙였던 다음 말로 비고에 대한 코멘트를 대신하고자 한다.

 

  “이들보다 후대에 나온 문헌들에서는 차원부에 대한 모든 사실은 󰡔차원부설원기󰡕라는 책 하나에만 근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증보문헌비고󰡕에 차원부가 고려말에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였고,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인데, (차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조선 개국(開國) 초에 정도전(鄭道傳) 등에게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과 시호를 본조(本朝) 곧 조선에서 내렸음과 박팽년이 지었다는 설원기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아래를 보면 여기에 언급된 것들은 진실이 아니다.) 그런데 󰡔증보문헌비고󰡕는 최초 편찬된 것이 1770(영조 46)이고 완성된 것은 1908년임을 고려하면 이것은 설원기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예를 들어 두문동 72(후대의 창작임)에 대한 기사나 현재의 백과사전들, 그리고 그런 내용들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 연구서와 창작서들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호하루”, 태극출판사, 2012, p.45)

 

3. 나가는 말

 

요즘 갑자기 필자의 주장과 상반된 몇 가지 주장들이 제기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주장들이 벌써 나온 경우도 있지만 찾아도 잘 찾을 수 없는 상황 탓에 이제야 일부 반응을 하고 있다. 필자도 문헌의 구절을 오해하거나 사실을 착각하거나, 노력은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한문 실력으로 내용을 잘못 파악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특히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며 정의와 불의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어 접근이 쉽지 않다. 그러나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는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는 차원이 아니다. 전자 역시 결코 단순한 작업이라 할 수 없지만, 대개 후자의 해석의 문제보다는 명확하며 접근도 용이하다. 앞으로도 계속 조그마한 문제라도 낱낱이 검토되고 토론되기를 기대해 본다.

 

총록은 영인본을 뒤적거리면서 대략 관련되는 항목들을 찾아보았지만 더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설원기에는 가짜 문헌들이 몇 가지 등장하는데, 혹시나 그것들이 언급되어 있을까 하여 총록의 목록을 살펴보았지만 역시 들어 있지 않았다. 이 사실도 그것들이 가짜라는 효과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설원기관련하여 해동문헌총록증보문헌비고의 두 문헌을 살펴보았다. 실질적으로는 대동운부군옥도 포함된다. 그 결과 총록설원기관련 기록들은 모두 군옥에서 전재(轉載)한 것임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총록설원기의 진위나 가치 평가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며, 다만 당시에 설원기가 널리 퍼져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고는 제작 연대가 20세기 초라서 설원기논의 자체에는 아무런 의의가 없다고 하겠다.

 

2014722

彩霞 류주환

출처 :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글쓴이 : 채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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