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설원기 독후록 26. 설원기 (記)

ryu하곡 2013. 11. 25. 16:49

✩ 문화류씨-뿌리깊은 버드나무 170번에 서, 해제, 가 등재되어 있어 기(記)만을 올립니다.

 

*『대호하루』위서와 가문사 류주환교수 저 차원부설원기비평이 참고가 될 것입니다.

* 네이버 포털 사이트의 차원부설원기비평이 참고가 될 것입니다.

 

❒ 댓글 또는 덧 글을 많이 올려 주셔서 [차원부설원기]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차원부설원기』기(記)

 

청천백일의 빛을 사람들이 다 같이 받고 있는데 그 누가 그 밝음을 모르겠으며 형산(荊山)의 옥덩이는 세상이 보배라고 하는데 누군들 그 아름다움을 모르겠는가? 그런데 백일처럼 고명(高明)하고 옥덩이처럼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이 모호한 사이에서 위협을 받다가 결국 사원(私怨 : 사사로운 원한) 보복의 그물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모호한 사이에서 위협을 받았다는 것은」 태조와 태종이 남쪽과 북쪽으로 떨어져 있을 적에 권신(權臣)이 서로 유언비어를 퍼트리었다.

그 유언비어는 차원부가 김씨(정종의 비) 사촌 대부로서 정종의 외숙 반열에 있으면서 태제(태제 태종⇨공정 恭定, 恭靖)를 배척하고 방석으로 왕통을 이으려 하였다고 하였다. 또 서얼 정도전 함부림 조영규 하륜 등에 관한 양인(良人) 천인(賤人) 서얼의 신분을 족보에 그대로 썼다는 사적인 혐의를 품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일 때문에 임금의 명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송원과 마원 두 골짜기 사이에서 차원부의 안팎 일가붙이와 종(노복) 등 70여 명을 죽였다. 태종이 무함(誣陷)한 것을 알고 결국 억울함을 씻어 주고 서로(西路)에서 차원부에게 제사를 지내고 또 찬성(贊成)의 관직을 내렸다.

그 뒤 차원부의 아들 차안경과 손자 차보성 이 모두 선량으로 특별히 정당에 뽑혔는데 차안경이 또 엄하고 곧아 권근과 이색의 당류(黨流)에게 모함 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권근과 이색이 비록 처음에 모사를 하였다고는 하나 사실 연유(緣由)를 몰랐었다. 처음에는 자기 당류들이 무함하는 사술에 의혹 되었다가 갑자기 차안경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음식을 먹지 않고 울었다.

결국 사원(私怨) 보복의 그물에 떨어졌다는 것은」조영규 정도전 함부림 하륜이 모두 차씨 가문의 가까운 서얼로서 차문과 류문의 세계(世系)가 같은 근원으로 된 책은 모두 해주의 신광사(神光寺)에서 불태운 다음에 일시의 권신(權臣) 귀신(貴臣)들과 손을 잡고 화근(禍根)을 만들어 그 적씨(嫡氏)들을 모두 죽인 것이다.

신 성삼문은 하교(下敎)를 받들어 주석을 냄

주(註) 그 손 보성으로 기록된 것은 왕명에 의한 조신들이 조사과정에서 잘못으로 기손 상도로 기록되어야 한다.

 

이 사람에게 일이 있을 때에 그 누가 엿보았단 말인가? 산악(山岳)과 같은 그 분함은 천년이 지나간 들 가지겠는가? 하해(河海)와 같은 그 원한은 만년이 되더라도 끝이 없을 것이다. 가시지 않는 분함은 세상이 다 같이 원망하고 끝이 없는 원한은 사람들이 다 함께 슬퍼하였다. 등불을 던지고 지팡이로 책상을 치며 분노한 자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또한 타고 온 소를 잊어버리고 갔거나 술동이를 깨면서 한탄하고 슬퍼한 사람도 있었다.「등불에다 책상을 던지고 책상을 친 것은」 길재와 조운흘의 일이다.

차원부의 불행을 분하게 여겨 길재는 책상을 끌어내고 여러 개의 등불을 던지고 통곡하였으며 조운흘은 지팡이로 책상을 치며 통곡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투등(投燈 등불을 던짐)한 아비와 격안(擊案 책상을 두들김)의 맹인이 애통해 하였다고 하였다. 소「를 잊은 것은」희안대군 방간이고 「술동이를 깬 것」은 이양중이다. 방간은 그가 시골로 쫓겨 날 때에 자신이 품은 마음을 차원부가 모른 것을 상심하여 애통해 하다가 농촌 전사(田舍)에 이르러 술을 마시고 자기가 타고 온 소가 간 줄도 잊고 돌아갔다.

이양중은 그가 초야에 숨어 있을 때에 자신의 마음에 차원부가 비명에 간 것을 깊이 원망하지 않다가 자신이 화에 연루된 깊은 분노를 견디지 못하여 고장 사람들이 천렵(川獵)한 곳에 이르러 술을 담아 놓은 그릇을 깨뜨리고 떠났다. 그 때 사람들이 망우지자(忘牛之子)와 파료지공(破醪之公)이 분노했다고 하였다.

신 최항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누가 장인(匠人)을 보내어 돌 속의 옥을 캐낼 것이며 누가 검은 구름을 쓸어 내려 백일하에 빛을 발휘하게 한단 말인가? 거문고 줄이 이미 끊어졌으나 그 줄을 이을 기약이 없고 구슬이 바다에 빠졌으니 어느 해에나 다시 찰(佩)수 있겠는가? 신은 정말 높은 나무는 걸 맞는 숲을 얻을 수 없고 외로운 소리 고음은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 사람의 억울한 일에 대해 신이 씻어 주려는 마음을 가진지 정말 오래되었고 생각이 간절하였다.

지난날에 대해 신이 씻어 주려는 예철(睿哲 뛰어나게 총명함))한 황고대왕(문종)이 승하 하시시기 전에 신원(伸寃)해 주라고 명하였으며 지금 인명(仁明)한 전하께서 즉위한 뒤에 통쾌하게 씻어 주라고 하교하였다. 모든 사람이 취해 있으나 신만 깨어 있는 것을 믿으시고 모든 사람이 그르게 여기지만 신만 옳게 여기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다. 비루(鄙陋)한 신을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어리석은 신을 어리석게 여기지 않으셨으므로 지난 늦봄에 주상께서 교지를 내리셨으며 다시 초여름의 중반에『설원기』를 쓴다는 말을 쉽게 듣지 못하였다 말씀하셨고 한 여름에 마침 연영전(延英殿 학문을 연구하던 곳)의 모임을 맞이하였다. 앵화(櫻花)의 반이라는 것은 초여름의 중간인데 앵화라는 것은 앵화지(櫻花地)를 가지고 라는 뜻이다.「미량수(微凉首)는」 중하(中夏)의 초반인데 미량은 궁전의 모퉁이에서 서늘한 기운이 생긴다는 뜻이다.「 때 마침 연영의 모임을 만났다는 것은」 집현전의 모임이 있을 때이다. 그 뜻을 말하자면 늦봄에 차원부의 일을 기록하라는 하교가 있었고 초여름 중반에 재차 차원부의 일을 기록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사람마다 두려워서 기피하는 바람에 이 일을 기록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팽년이 새로 주상의 명을 받고 스스로 분노하고 스스로 격동하여 편수(編修)하여 올렸으니 차씨 문중 남은 서얼의 세력을 알 수 없으며 은혜가 있어도 없어졌다 뜻을 또한 알 수 있다.

신 최항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위소주(韋蘇州 : 당나라 시인 도연명에 비유됨)의 춘일시(春日詩)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깊은 한(恨) 서린 들에는 건너가는 사람도 없는데 배만 저 홀로 가로 놓여있구나」 라는 뜻을 생각하게 하고 장횡거(張橫渠)의 만흥시(漫興詩)를 생각하다가 만연(漫然)한 맑은 세상 하나의 한인(閑人)되지 못했네 라는 구절을 빨리 따르지 못하였다. 한인(閒人)이란 구절은 뜻이 매우 깊으니 세상의 일에 마음이 끌리어 한인이 되지 못한 것을 스스로 한스러워 한다는 뜻이다.

대체로 시를 읊는데 하필 위소주가 춘일시나 만흥시 뿐이겠는가? 보기에 그때 일이 이미 글러버리고 또 도를 닦을 여가가 없어서 그런 것이니 박팽년의 뜻을 누가 알겠는가? 빨리 따르지 못하였다는 뜻은 가장 의미가 깊으니 마땅히 여러 번 음미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다만 청풍명월만이 알고 있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그런데 특별히 신을 불러 이 사람을 설원하라 명하고 재차 신에게 칙지(勅旨)를 내려 이사람의 조상 계통을 밝히라고 명하였다.

아득한 옛날 다행스러운 일개 외로운 신하가 속이 상하여 처음에는 답답해 하였는데 이번에 단봉(방원)이 조서(詔書)를 물고 날아와 세 번 부르기에 남향하여 받들어 따르니 명하심을 북면하여 결국 감격하게 되었다.「다행스럽다」는 것은 다행이 이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이다.「단봉」은 봉이 붉은 종이에 쓴 조서를 물고 왔다는 뜻이다.

대체로 이 구절의 뜻은 구상이 온갖 정사를 보는 이 일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준 것만 보아도 다행스러운데 더구나 하늘(임금이 있는 곳)에서 봉이 조서를 물고와 세 번이나 불렀는데 말 할 것이 있는가? 이에 천고 중 일개 외로운 신하가 자오를 따르면서 시종 감격했다는 뜻이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수석을 냄

 

전하의 밝은 지혜로 더욱 더 관심을 가지고 또 성조(聖祖 : 세종)께서 남긴 생각을 이어서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남긴 생각이란 것은 세종의 전지(傳旨)이다. 전하의 총명이 어찌 성인이 아니겠으며 전하의 사려(思慮)가 지극한 뜻이 아니겠습니까? 시론(時論)을 바로 잡아 후세를 경계한 뜻을 여기에 알게 되었다. 사석(沙石)을 버리고 진주를 귀중히 여기는 뜻도 이로 인해 이뤄질 것이다. 신이 어떻게 감히 삼현의 억울함을 잘 살피지 않겠으며 신이 어찌 기꺼이 성주(聖主)의 명을 밝히지 않겠습니까? 삼현은 차원부 차안경 차보성 삼부자를 말한 것이다. 밝힌다는 것(蘭燭 : 밝은 촛불로 광명하여 만사를 달통한다는 것)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註 : 차보성은 차안경의 손자이므로 차보성의 부이며 차안경의 자인 車尙道의 오기임 이 책의 27쪽의 기손 보성과 함께 잘못 기록된 것을 밝힘

 

유방(劉邦)의 형수는 국이 없다고 솥을 긁었지만 신은 국이 없다고 하지 않겠으며 장횡거의 토상(土狀 흙 마루)에 때는 나무는 신이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유(劉)는 한 고조 유방인데

알갱후(戛羹侯 : 한고조가 임금이 되기 정에 손님이 집에 왔는데 형수가 거짓으로 국이 없다고 하였다.) 황제로 즉위한 후 한고조는 형수를 갱일후로 삼았다고 한다

장은 장횡거인데 토상(土狀)에서 발을 쪼인다는 시의 뜻이다. 대체로「국이 없다고 솥을 긁지 않겠다고」한 것은 사실대로 모두 말하겠다는 것이고「땔 나무를 제공하겠다는 것은」인사를 족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譯註 : 한나라 유방이 항상 손님과 같이 형수의 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그러자 형수가 솥에 국이 남아있어도 일부러 바가지로 솥을 긁어 국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유방이 형수를 원망하였다. 그 뒤 유방이 황제가 되자 형수의 아들 신(信)을 갱일후(羹頡侯)에 봉하였다. 후세에 어질지 못한 형수를 알갱수라고 불렀다.

 

사간원(司諫院 : 조선시대 간쟁 논박 諫爭論駁을 맡은 관청) 좌정언(左正言 국왕의 득실과 정국의 득실을 강언하는 벼슬) 차원부는 문성인(文城人) 류차달 의 첫째 아들 대광지백 효전의 후예이다. 효전은 일명 효생인데 生자의 온른 쪽에 한 획을 그으면 전자가 된다. 전 자는 人과 王이 합쳐서 仁王이 되기 때문에 간사한 사람에게 불행을 당하였고 또 그 당시 인왕이 라는 참언(讖言)으로 인해 불행을 당하여 역사에 그 자취를 없애 버렸는데 현재 내사(나라의 법전이나 궁중의 기록을 맡음) 서희의 가사(家史)에 두루 말하였다. 정언이라는 것은 태조가 그를 불러 특별히 간관(諫官)에 임명하였다는 말인데 지금 발현(發現 밝힌다)하여 후세에 알린다는 뜻이다.

 

신 최항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차달은 고려의 병력을 수송하는 일에 열심히 하였으며 효전은 임금을 섬김에 있어 곡식이 없을 때에 흥원(흥원 : 황해도 구월산 문화현 주변)에서 구제의 곡물을 실어 나름으로써 현릉(顯陵)의 정사에 공을 세웠다. 현릉은 고려시조 묘호이다. 정사(定社)라는 것은 개국하여 종사(宗社)를 안정한 공로이다.

신 최항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나라를 위하여 실을 수 있는 수레와 양곡을 변통해 줌으로써 남쪽을 정벌할 때에 쌀을 송하였다고 하여 특별히 그 아버지에게 車로서 달성한 공으로 세적(世績)의 칭호를 내리고 별도로 차씨성을 하사 하였다. 이에 따라 효전은 수공(首功)을 세운 성씨라는 것으로 표상 하였으며 천호의 식읍을 봉하고 이어 연안의 땅을 관향(貫鄕)으로 삼도록 하였으니 효전은 귀족 집안의 후손이요 원부 또한 대대로 드러난 명문세족의 후예이다. 성을 하사한 연유는 정지상의 서경야사(西京野史)에 자세히 기록 되어 있다.

신 최항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차원부가 고려 말에 태어나 당시의 어려움을 민망히 여긴 나머지 평산의 수운암동에 자취를 감춘 채 좋은 집을 일삼지 않고 몇 칸의 흙집에서 시국이 되어 가는 조짐을 보아 세상을 밝게 할 것을 생각하며 주역(周易)의 이치에 깊이 잠기어 성(城)안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몸은 비록 초야에 숨어 있었으나 신(辛)을 죽여야 한다는 지조나 지론(持論)이 정대 하였으며 林견미 廉흥방을 제거해야 한다는 집념은 그들이 자신의 친척이라고 해서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聖神文武康獻大王과 智仁誠孝恭定大王(태종)께서 요동을 정벌하자는 최영의 모의를 매우 딱하게 여기었다.「요동을 정벌하자는 모의는」최영의 본심이 아니였다. 온 나라의 신민들이 태조의 위덕(威德)이 날로 치성(致誠)한 것을 두려워하여 요동을 정벌하자는 모의로 태조가 명나라에 죄를 짓게 하려는 것이였다.

신 최항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이에 進退兩難(진퇴양난)의 회포를 않은 채 평산에서 사냥을 한다 핑계대고 운암동으로 깃발을 앞세워 차원부를 노선배(老先輩)의 옛집을 찾아보는 것으로 방문하여 요동 정벌의 일을 자문하니 차원부가 사정을 들어 정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눈물을 흘리고 만류한 이 사람의 의로운 의논이 없었다면 어찌 꿈속에서 신인 이 준 상서로운 금척(金尺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신이 나타나 금척을 주면서 이것으로 천하를 헤아려라 한데서 나온 것이다.)의 부절(符節)과 맞았겠는가?「사정을 들어 정벌해서 안 된다는」것은 요동을 정벌하자고 처음 모의할 때에 태조가 고민 하다가 사냥을 핑계 대고 차원부를 찾아 묻자 차원부가 울면서 손가락을 꼽을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불가하다는 것을 말한 뜻 이였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그러므로 이 사람의 은공에 대해 상을 줄 경우 배극렴보다 더 높은 관작을 주어야 하고 이 사람의 자손들을 격려할 경우 또한 용손세작(龍孫世爵)보다 좀 낮게 대우해 주어야 할 것이다. 배극렴은 개국 일등공신이다. 용손은 창근경문(昌瑾境文) 참서(讖書)에 용의 아들이 왕이 될 것이다. 고 하였다. 용은 고려 시조 왕건의 아버지 왕륭인데 말할 때는 용이라고 하나 용이라고 말한 것은 隆과 龍은 소리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세작이라는 것은 왕건이 삼한(마한, 진한, 변한)을 통일하였다는 뜻으로 숭의전에 배향(配享) 하고 그 후손들에게 대대로 관작을 주기 떄문이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註 昌瑾鏡文 :신라 경명왕2년에 당나라 商客 왕창근이 저자(시장)에서 옛날 거울 한 개를 샀더니 기사년에 동쪽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날 것인데 한 마리는 몸을 푸른 나무속에 감추고 한 마리는 모습을 黑金의 동쪽에 나타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송사홍 백조 허원 등이 해석하여 이르기를 푸른나무라는 것은 소나무 송악군(개성)을 이르는 것이요 사람이 용으로서 이름 한자의 아들이 군왕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왕시중이 왕후의 상이 있으니 그는 이를 이르는 것이며 흑금이란 쇠이니 지금 도읍한 후고구려의 서울 철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 임금(궁예)은 처음이곳에 융성했다가 아마도 여기에서 終滅할 것이다. 하였다.

용흥(龍興)한 해와 봉상(鳳翔)한 날에 태조께서 꿈을 꾸면서 생각한 것으로 인해 「꿈을 꾸면서 생각한 것」이라는 것은 태조가 꿈속에서 차원부를 보고 불러 오라고 말한 것이다.

신 신숙주는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자상한 칙지를 내렸다. 그때 차원부의 나이 80에 가까웠으나 번연(蕃衍)히 일어나서 처음에는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나중에 간흉(奸凶)에게 배제를 당하여 「나중에 간흉에게 배제를 당하였다는 것은」차원부가 지난 날 간의대부(諫議大夫가)되었을 적에 임견미 엽흥방이 이인임 이숭인 등과 뜻을 같이 하여 없는 일을 조작하여 자신들을 의논하지 못하게 제거 하고자 한 일을 말한다. 평의낭중으로 좌천되었고 또 전농사사로 옮기었다. 관직의 녹봉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누추한 잠자리에서도 편안히 거처하고 음식은 사기그릇을 덮듯이 말하였다. 비록 중요한 지위에 있었으나 초야에 있을 때처럼 하여 공적이나 사적이나 털끝만큼도 사사로이 자기 것으로 하지 않았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이 추수(秋水) 가운데 명주(明珠)에다 비교하였고 세상 사람들이 빙설(氷雪) 중의 청상(凊霜)에다 비교하였다.

그런데 신성(神聖)께서 북쪽으로 가고 사성(嗣聖)께서 남쪽으로 갔을 때(신성은 태조, 사성은 태종) 권력이 아랫사람에게로 넘어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사람을 살육하였는데 저 빙호(氷壺 마음이 결백함))같은 사람도 불행하게 뜻밖의 변을 당 하였다. 공교롭게 조준 조반 조영규 정도전 조민수의 모함을 입었고 거기에다 남재 유창 정희계 이승상 함부림이 사사로이 시기 했으며 먼저 이양우 신극례 등이 모의를 꾀하도록 하였고 그 뒤에는 하륜 이종무 등이 탄압하였다. 어찌하여 한 두 명의 간인(奸人) 모의가 10여명의 흉악한 자들이 죽게 됨을 피하도록 하였단 말입니까? (정도전이 죽은줄 알고 남재와 정희계가 알고 피하였다.) 이는 마치 향풀과 누린내풀이 같은 그릇에 있고 올빼미와 난새가 날개를 맞대듯이 어울려져 차원부는 임견미의 외손 무리라고 일컬어 정몽주의 당여(黨與)라고 모함하여 향풀과 누린내풀 올빼미와 난새는 군자와 소인을 비유한 뜻이다. 대체로 함부림은 정몽주의 문인이였고 함우치는 함부림의 아들이였으므로 일시 비난하는 평론이 청의(淸議)에 들끓었다. 밝고 진실한 뜻을 가진 함우치는 항상 스스로 자결하려 하자 그의 벗인 황효원 홍달손 매가염 매시 정수충 홍윤성 신숙주 한계희 조림 성삼문 최항 등이 굳이 만류하였다.

「임견미」의 외손 무리라는 것은 차원부의 아들 차안경의 빙장 임득중은 임득중의 계손(繼孫)인데 그 본족을 말한다면 임견미와 염흥방은 모두 차원부의 재종재(再從弟)였다. 그리고 임견미는 아들이 없어서 다른 사람의 아들을 양자로 세운 것이 아니다. 옛날 풍속에서는 문벌이 있는 사람은 비록 자기의 아들이 있어도 일가붙이의 자제를 양육하면서 전지 노복 가재(家財)를 한결 같이 자기의 자식과 똑같이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세족(世族)의 사람들은 모두 명영(螟蛉)이니 계자니 하는 의호(義號)가 있었다. 그리고 정몽주는 차원부의 종제이고 정도전은 정몽주의 첩 손주 사위다.

신 최항 신 신숙주는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결국 송원에서 멸문의 화를 당하여 정호 수구 즉 고향에 가고자 하는 생각을 영원히 끊어 버리고 말았다. 정(征)이란 간다는 뜻이다.「수구(首丘)의 생각」이라는 것은 여우의 성질이 살아서 처음 태어난 곳을 잊지 않다가 죽을 때에는 반드시 태어난 언덕으로 머리를 향해 죽는다. 이것으로 차원부가 불행하게 종신토록 고향을 향해 돌아가지 못한 것을 비유해 말한 뜻이다.

신 신숙주는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정당에서(政堂)에서 공로를 의논하는 날에 공이 없다고 굳이 사양한 자취를 소급(遡及)해서 위로할 줄로 여기였는데 권귀(權貴)들에 의해 증오의 늪에 빠지고 결국 가문의 서얼들이 꾸민 덫에 걸려들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공로를 숨기고 굳이 사양한 자취라」는 것은 지난날 조준 신극례 이양우 등이 운대(雲臺 : 공신들의 초상을 걸어 놓은 곳)에 차원부의 화상을 그릴 것인가에 대해 차원부를 찾아 묻자 「차원부가 차라리 다섯 말의 초를 마실지언정 공신의 선발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대답하면서 엄중한 말과 준열한 뜻으로 물들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그런대 말년에 벼슬을 하였다고 말한 것은 사실 그 뜻한 바를 알 수 없고 또한 그 뜻도 알 수 없다.

신 최항 신 신숙주는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차원부가 교학(嶠鶴차원부가 기르던 학))에게 잠시 초가를 지키라고 당부한 뜻은 지금 어디로 갔으며 호신(湖神호수의 신))에게 임시 쌍청(雙淸)을 수호하라는 뜻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의 형 참정 숭부 밀직 숭질이 결국 송원에서 죽고 서형 전 정당 종부 부사 형부는 마원에서 죽었다. 거짓으로 꾸민 일을 다스려 밝히지 않고 사술(邪術)로 모함하여 죽인 사람이 무고한 3,4 형의 친족뿐만 아니라 무고한 70명의 노복까지 죽였다. 무고한 사람을 죽인 바가 이뿐만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도 심하였다.

그의 아우 총랑 원명과 그의 아우 찬성 견실은 그들의 가족을 이끌고 처음에는 자주로 귀양 갔으며 셋째 아우 진사 견명과 서제(庶弟) 시어사 원석 은 여러 형들과 세 번이나 북쪽 변방으로 옮기었으며 승부의 어머니 윤씨는 본은 파평인데 정주 로 귀양 가고 숭질의 어머니 김씨의 본은 안동인데 안주로 귀양 갔다. 원석은 자남이라고도 한다. 명나라 황후의 친척으로서 중국으로 들어갔다. 차원부 이하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낳았고 견질의 아들 병마사 안기는 남주로 귀양 가서 사망하였다. 그의 아우 견명 및 제질 안혁 안성 종혁 종경 운혁 운포 지안 지순 현경 등 10여명은 일시에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쌍성의 관노로 두 번째는 회령의 관노로 유배되었다 사면을 받았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駐 : 정도전의 사위 이석형은 달아났는데 처음에는 면죄의 대상 중에 있었다.

 

그의 족친인 정당(政堂) 중부 시중 인부는 남쪽 변방으로 귀양 갔는데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총제(總制) 강질(剛質) 원윤(元尹) 안명(安命)은 서쪽 변방으로 귀양 갔는데 역졸을 면치 못하였다. 代言 公質 典書 命童은 멀리 남주로 갔는데 鄕吏를 자원하였고 문학 수동 참정 보명은 여흥(臚興)과 監務(작은 顯) 작은 고을 보륜은 재차 南平으로 옮기었다가 장사에서 굶어 죽었다. 代言 이양은 안주로 귀양 갔다가 청천에서 죽었고. (사농경제사 : 에 필요한 祭書를 공급하는 관부) 류방경 류방선은 남쪽으로 옮겼다가 북쪽으로 옮기는 등 옮기지 않은 해가 없었다. 예빈경 차중문 시중 이세옹은 가까이 가기도 하고 멀리 가기도 하는 등 면죄의 대상에 들어 있었으나 사면을 받지 못했다. 典書 차덕윤 총제 차지남은 懿親 : 중국 황실의 외척이었지만 결국 남쪽에서 죽었고, 조사근 정당 조효삼은 외척이였는데 호남에서 자결하였다.

몇몇 사람들은 각 조항의 죄목으로 임금을 속여 모함하고 그의 가족을 이갈(二鞨 : 양계 북방)과 양만의 열두 고을로 유배하였다. 이제옹 차덕륜 차지남 조사근 네 명은 당시 외척으로서 면죄의 대상 이였으나 모두 차원부와 절친하다고 하여 연좌된 사람이다. 이갈은 양계(兩界)이고 양만(兩蠻)은 이남(경상 전라)이다

신 신숙주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차원부의 아들 차안경은 이해에 사면을 받았고 차안경의 아들 차보성은 그 뒤에 현량(賢良)으로 천거 되었다. (보성이 숨어살며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이름을 상도로 고쳤는데 그의 아우는 아직 어렸다,) 비록 원흉은 지렁이처럼 몸을 감추어 음모하고 자살한 소인들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일어나는 바람에 그 전의 혐의로 연좌되어 다시 권근 이색이 정몽주의 당으로 지목하는 술책에 빠졌고 뒤의 비난으로 인하여 정몽주 최영이 의리에 죽었다고 하였다는 논란을 입어 결국 서교(西郊)에서 자결하는 액운을 면치 못하였으며「의리에 죽었다는 논란」이라는 것은 권근 이색의 잔당이「차원부는 본디 간인(奸人) 정몽주와 같은 당류이다. 그의 아들 차안경이 근래에 망극한 은총을 입고 전에 없는 높은 품계의 추천을 받고도 공론과 國恩의 중함은 헤아리지 않은 체 정몽주를 의롭다하고 내심으로는 나라가 언제 망할 것인가 하는 뜻이 많았다 라고 말을 만들었다. 그러자 차안경이 그의 아들 차보성 등과 같이 사주(使嗾)의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서교에 가 불어 오르는 물을 구경 간다고 핑계를 대고 빾빾한 숲속에서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결하였다. 이일을 보고 사람들은 너 나 없이 기막혀 상심하였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내면서 박팽년과 의논하였다.

註 차안경의 아들은 상도이고 상도의 아들은 보성으로 조사과정에서 잘못된 것을 밝힘

끝내 그의 아버지 봉작(封爵 관작을 내린 일)의 경사를 보존하지 못하였으니「끝내 그의 아버지 봉작의 경사를 보지 못하였다는 것은」태종이 특별히 차원부에게 찬성의 관작을 하사 하였는데 차안경이도 사망하여 봉작을 받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간사한자들의 농간을 어떻게 다 쓸 수 있겠으며 이분의 원통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명추입곡(鳴추入谷)마차를 타고 고향에 나타남) 하기 전에는 길재의 벼슬 이름이 있을까 항상 두려워 하였는데 「벼슬하였다는 이름이란」주서(고려시대의 광직)의 명칭이란 뜻이다.

신 신숙주는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학서(鶴書 = 詔書)가 부농(赴壟 평산의 수운동)에 도착 한 뒤에는 도리어 정품의 준직(峻直 고결하고 정직함) 하다는 이유로 父子가 재앙을 받았다.「부자라는 것」은 차안경의 부자이다.「준직의 재앙이라는」것은 차원부 차안경 부자가 도망가 산에 있을 때에 위난(危難)을 염려하여 항상 길재가 난망의 세상에서 벼슬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산에서 나온 뒤에 준직하다는 이유로 도리어 화를 면치 못하여 결국 멸문하는 데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신 최항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관복을 찢어버리던 해에 발을 싸매고 돌아간 뜻을 누가 알겠으며 상림헌(秘苑)에서 노니던 날 파씨를 보인 뜻을 그 누가 이해 할 것인가?「관복을 찢어버리던 해에 발을 싸매고 초야로 돌아간 뜻이란」것은 전일에 조준 조반 남은 등이 임견미와 염흥방을 제거한다는 핑계로 일시의 의관 자제들 가운데 항상 자신들과 뜻을 달리한 자들을 모두 죽였는데 대략 천 여 명으로 몇 천여 집인지 모른다.

그 실상인즉 임, 염(林,廉) 두 집에 속한 사람은 많으면 이 백 명 적으면 백 여 명으로 그 가운데 괴수는 법으로 처형 하였으니 이는 의리의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가문만 하나도 없이 죽은 게 아니라 같은 마을에 사는 정몽주등 제인(諸人)들의 70여 가문도 조준 조반 등이 사사로운 혐의를 품고 남김없이 도륙(屠戮)하였으니 하늘에 닿은 원망을 어떻게 다 기록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 후로는 태조의 세상에 없는 공, 개국의 공을 도리어 원망하게 되었으나 결국 태조의 하늘에 순응하고 사람의 뜻을 따르는 덕화(德化)로 돌아갔다. 그런데 정종과 태종이 왕위를 순리로 전수(傳授)받지 않기를 조준과 조반 등이 바라는 바였다면 사태의 변화를 또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정중부가 전에만 작란(作亂)한 것이 아니라 조선 태조 때에도 작란을 하였다. 그리고 하륜 이종무 등은 또한 출처가 바르지 못한 사람으로서 이인임 족당(族黨)의 세력을 믿고 전 왕조와 후 왕조에 아첨하고 미천한 내시들에게 부탁하여 마음대로 권력도 휘둘렀다. 태종이 하륜의 외람(猥濫)한 것을 후회 하지 않아 태조가 옛 친구에게 보답하라는 유교(遺敎)를 내리지 않았을 경우 거의 나라를 전복하고 몸을 망쳤을 것이요 신하들의 분노도 또한 기둥에 화살을 쏘는 자리에서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차원부는 태조가 몽매(夢寐)에도 생각한 것을 한스러워하여 날마다 창주(創主)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으나 결국 관복을 찢어 버리고 발을 싸매고도 초야로 돌아가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공을 탐내고 녹을 탐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조준 조반 등이 숨어 산 것을 헤아리지 않은 채 산야를 망라하여 사사로운 원한을 모두 갚았기 때문에 차원부는 임견미와 염흥방이 날뛸 때 옥과 돌을 할 것 없이 모두 타는 화를 두려워하였고 또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는 무상(無狀)한 조준 조반 등의 흉계를 두려워하였다. 조준 조반 정도전 등 삼흉(三凶)과 하나의 하륜 원악(악한 주모자)이 있지 않았다면 차원부가 필시 이처럼 극도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파씨를 보인 뜻」이라는 것은 차원부와 태조가 상림원에 나가 노닐 때에 특별히 파씨 몇 말을 보여 머무르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내면서 박팽년과 주석을 의논하였다.

 

조준과 조반이 조성(造成)한 화를 말하자면 너무나 혹독하고 하륜과 이종무가 이인 난은 너무나 참혹하였다. 옛날 선왕인 차원부의 후손을 돌보실 때에「후손을 돌보신다」는 것은 차안경이 목을 내어 사망한 뒤에 태종이 재차 원한을 씻어주고 또 명을 내려 차상도에게 바로 이픔의 벼슬을 제수한 날이다.

신 신숙주는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차상도가 명을 듣고 두려워하였다. 그는 명을 받아들인 뒤의 화(禍)가 두려워서 눈뜬 장님으로 위장하고 나환자(癩患者)로 모습을 바꾸어 청량동(淸凉洞)에 은신하고 이예장의 집에서 얻어 먹었다. (이예장이라는 이는 차상도의 처사촌 이사관의 아들이다.) 그런데 근간에 황보인(皇甫仁)이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주청(奏請)한 뜻과 재차 유인후(차원부의 사위)에게 높은 관작을 내렸으나 매질(媒姪) 尹垠은 중이 되었다. 윤은은 차원부의 종매 아들 파평군 윤은이다. 차원부의 조카이기 때문에 후손을 돌보며 은, 비단 높은 관작을 하사하라는 명을 의심하여 화가 다시 파급될까 두려워서 눈먼 중으로 위장하고 평양의 영명사로 피해 숨었다. 유인후는 차원부의 사위이다. 윤은은 일명 尹思康이라고도 일명 윤이라고도 한다.

신 신숙주는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단손(單孫) 차상도는 왕명을 의심하고(상도의 아우는 어릴 적에 흩어져서 생사를 몰랐다.) 후손을 어루만진다는 것은 말에 혼비백산하여 가산(家山)의 길을 영원히 버리고 그 전의 화를 염려하여 그의 아들을 남에게 팔고 도망가 숨었다.「그의 아들을 남에게 팔고 도망가 숨었다는」것은 전일 그의 일가붙이 조인옥 조온 등이 누차 화를 입어 공훈을 삭제한다는 의논에 연류 되기도 하고 하옥해야 한다는 논의를 받기도하여 친구나 친척들이 그를 길가는 사람처럼 보았다. 피난 가는 날 사람들이 모두 그의 아들들을 받아 주지 않자 차상도가 일부러 그의 아들 계생과 중생을 조명(趙溟)집 종 금석에게 팔았는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너 나 없이 슬퍼하며 그 두 아들을 어루만졌다 한다.

신 최항 신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註 : 조명(趙溟)의 집 종 금석에게 팔았다고 되어 있으나 그 당시의 실정으로 보아 역적으로 몰린 상태에서 받아줄 사람이 없음으로 후손을 보호할 목적에서 그렇게 소문을 냈을 뿐 오히려 돈을 주고 맡겼을 가능성 부분에 진의가 더 있다고 사료되며 또한 ‘乳母學金을 乳婢學金으로 본 설원기에 기록한 것으로 보아 두 아들(계생 중생)은 비속(卑屬)으로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어 독자께서는 이 뜻한 바를 깊이 음미(吟味)해 주기 바람

 

안신처 (安身處)를 얻고자 순흥 지방에서 걸식을 하고 성명을 바꾸고 도살하는 집에서 살았으며 남은 여생은 중들 사이에서 보냈다.「성명을 바꾸고 도살하는 집에서 살았다는」것은 차상도가 성명을 임성부로 바꾸기도 하고 善生으로 바꾸기도 하면서 7년간 才人 이종실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다. 남은「여생을 중들 사이에서 보냈다는」것은 차상도가 절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과생거사(誇生居士)라고 일컬으기도 하면서 5년간 해주 신광사에서 피란하였음을 말한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끝내 출사(出仕) 명령을 따르지 않은 채 짧은 지팡이에다 생애를 맡기고 천지를 몇 자의 길이에다 붙이였다. 이것은 행장(行藏 : 군자의 거취)이면 저것은 무슨 물건이란 말인가? 오직 잘못된 사람인양 하였지 다른 뜻은 없었다. 생애를 맡겼다는 시대가 어진 이를 용납지 못한 것을 원망한 것인데 기사 중 실사(實事)를 극진히 그린 것이다.「다른 포부가 없었다」는 것은 다른 뜻이 없이 오직 한 같이 잘못된 사람인양 하였다는 것이다.

신 최항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풀지 못한 여한을 먹고 마시며 산다는 운재(雲栽)를 본받으면서 비로소 그가 삶을 온전히 하였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느꼈고「운재」는 이인임의 동성 조카이다.「여한을 먹고 산다」는 것은 운재가 이인임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을 분히 여기고 時事가 이미 글러버린 것을 한스러워 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산으로 들어갔다. 이인임이 운재가 벼슬을 버린 것을 비난하고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 「산에서 나무를 하고 물에서 고기를 낚는 것은 좋기는 좋지마는 어찌 이처럼 미련스럽게도 쓰디쓰게 굶주린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운재가 그 편지를 받고 답하기를 「하루는 열두 시간이 있는데 奸人을 죽이지 못한 여한을 먹고 사니 비록 녹을 먹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슨 쓰디쓰게 굶주릴게 있겠는가? 다행히 미련한 조카의 소회를 펼 수 있다면 또 한 번 죽는 것이야 어찌 싫어하겠는가?」 하였다. 이인임이 또 답장을 받고 내심으로 매우 꺼려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이인임이 귀양 갔다. 대체로 그 뜻을 거절함으로써 물들지 않았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처음에는 비록 삶을 보전하려고 꾀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분노하여 한번 죽는 것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 이였다. 그렇지만 실은 l시대의 불행을 원망한 것이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발가벗고 울분을 되씹는 조자의(曺子義)를 본받으면서 결국 죽고 말겠다는 그의 마음을 가졌다. 조자의는 조민수의 동성 일가인데 자기주장을 견지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발가벗고 울분을 되씹는다는 것은」 최영의 정치하는 것이 어려움에 분노하고 도 예측할 수 없는 요양(療養)의 상황을 염려하여 한 여름에 숯을 많이 쌓아 놓고 그 가운데에다 불을 붙인 다음에 발가벗고 말하기를「정권을 쥔 최영의 머리를 구워서 온 나라 사람들과 같이 그 고기를 먹겠다.」하고 최영의 정치하는바가 어려움이 있음을 들추어 말하였다. 그때 태조와 조민수가 공무로 조자의를 방문하였는데 조자의가 이처럼 발가벗고 곁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는 것처럼 분노 하다가 이어서 통곡하였다. 조민수가 몸을 구부려 옷을 덮어 주면서 무례하다고 말하자 조자의가 비로소 깨달은 듯이 말하기를「이장군은 어디서 오셨습까? 그리고 아저씨는 어디서 오셔서 무례불경(無禮不敬)한 미친놈의 말을 들으셨습니까? 남은 분노가 몸에 두루 감돌았는데 발가벗은 일신(一身)에 옷을 덮고 여기에 장군을 뵐 필요가 뭐 있겠소이까?」

하고 덮었던 옷을 버리고 울면서 두 공(公)을 향해 두 세 번 미안하다고 절을 하였는데 마땅히 최영의 집에서 죽겠다는 것처럼 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실 요양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또 실지 최영의 뜻도 아니였고 조자의가 미친 것처럼 한 것도 그의 아저씨 조민수를 가르킨 것이 아니였다.

신 최항 신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사람이라면 누가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겠으며 세상에서 좋아하는 귀(貴)를 누가 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저 사람 차안경은 죽음을 즐거워하여 삶을 버렸으며 지금 이 차상도는 천한 것을 좋아하여 귀(貴)를 버렸단 말인가? 지난날 비록 온전히 살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도살하는 사람과 친구를 삼고 중들과 어울릴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이미 쓰러져 죽을 마음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영원토록 어찌 그 부친을 본받아 목에 노끈을 매려하지 않았겠습니까? 「합(盍)」은 어찌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는 뜻이다. 차상도가 비록 이미 죽었다고는 하나 실은 죽지 않고 화를 피한 것이다. 목을 매달은 것은 위의 글에 나타났다.

신 최항 신 신숙주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다만 불교에 귀의한 5년 사이에 나의 몸을 거의 네 번이나 버리려 했고 도살을 7년간 할 적에 그 업을 열심히 하여 거의 이룩하였다. 이 구절은 차상도가 억울한 뜻을 반대로 그의 아들 차중생에게 학문을 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말이다.

신 최항 신숙주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駐 : 其子 仲生)은 仲連의 오기임을 밝힘

 

「너의 후예와 너의 후손이 내가 앞에서 훈계한 것을 아랑곳 하지 않거나 내가 뒤에 경계한 바를 생각지 않은 채 성현(聖賢)의 글을 배우거나 성현의 뜻을 실행하려고 하는 자는 이목(耳目: 간관)의 자리에선 임금에게 아첨하지 말고 조원(調元)의 자리에선 임금의 권한을 침해하지 말라」耳目은 耳目의 관직이고 「조원은」재상의 직책이다.

신 최항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오직 이 하나의 뜻뿐이다, 라고 한 몇 마디 뿐 이였다」신이 이 사람의 뜻을 살펴보고 또 후손에게 경계한 뜻을 생각해 보건대 한편으로는 무능한 聖主와 明王을 부끄럽게 하고 한편으로는 어진 사람을 할퀴는 간인(奸人)과 영신(佞臣 아첨하는)을 싶어먹고 싶은 것 이였다. 그리고 나라를 훔친 자의 머리와 쓸개를 씹어 먹고 싶어서 탄식하고 원망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서이지성(庶以之成) 이상 26자와 행이지후(幸以之後)이하 46자는 차상도가 그의 유복자 차중생 에게 경계한 말이다. 그리고 이하의 기사(記事)중 의미를 생각해 보아도 된다.

신 신숙주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러 주석을 냄

註 유복자 중생은 차상도의 유복자가 아닌 차자이며 중영 또는 보성으로 되어야 함으로 바로 잡는다.

 

신이 삼가 세종이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글을 읽고 그 뜻을 생각해 보건대 서얼(庶孼)들이 적자(適者)를 능멸하는 불의를 개탄하고 미워하였으니 은근히 어진 이를 중히 여기는 태조의 생각으로 얼음과 옥처럼 한 점의 티도 없는 그 사람의 자태를 게시(揭示)한 것이다「어루만지고 위로하는 글(撫慰之書)이라는 것은」세종이 교지를 내렸는데 그 교지에 선왕조에 죽은 차원부는 본디 처사(處事)로서 공리(公利)를 탐하지 않고 깊은 산속으로 숨자 선성조(先聖祖)께서 음명(恩命)으로 기용하려 하였으나 그 사람이 끝내 솔직한 바람에 권세 있는 사람에게 모함을 당하였다. 이는 비록 선왕조께서 한 바이나 실은 선왕(太宗)께서 몰라서 그렇게 된 것이다. 과거 피(避)해 있던 해에 태조께서 별궁(別宮)에 계시어 양궁(兩宮)이 위태롭고 의심할 때 훈귀(勳貴)의 신하들이 거리낌 없이 방자하였다. 그러나 오직 차원부 만은 홀로 거처할 곳이 없고 의지할 침구도 없었으니 밝은 달과 바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문의 서얼들이 적자(適者)를 꺼려한 바람에 도리어 덫에 걸렸는데 교묘하게 문란(門蘭 : 문중의 서얼들)의 세력을 꾸며 우리 지정(摯鼎)의 사(絲)를 끊고 말았다. 선왕이 전에는 살피지 못하였다가 뒤에 뉘우치고 깨달아서 결국 잘못된 명을 거두고서 서로(西路)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비록 김계란 최운 등이 임금의 부름에 이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조영규 정도전 함부림 하륜 등이 사기(士氣)를 꺾었을 것인데 이를 내가 훤히 알고 있으므로 소급해서 정당(政堂)을 제수하여 위로 하였다. 비록 공이 없다고 크게 사양하였으나 권근 이색 등의 여러 사람들도 와서 왕명을 도와주었는데 더군다나 일찍이 조회에 나왔던 일개 빈한한 선비가 어찌 정몽주의 마음을 가졌겠는가? 다만 서얼들에게 모함당한 것이 한스러우나 유명(幽冥)의 사이에 매우 불미스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태조께서 어진 이를 대우한 뜻에 어긋났다.

일찍이 설원(雪冤)하였으나 나의 마음에는 시원스럽지 않다. 어떻게 해야 지하에 사라지지 않은 영혼을 위로하고 천고(千古)토록 물들지 않은 청백을 보상 할 수 있단 말인가? 차원부의 자손들을 다시 찾아서 빨리 등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게시(揭示)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차원부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신이 지금 상왕께서 깨달으시고 하신 말씀을 보고 이 하교를 살펴보니 네 분 선왕께서 어진 이에게 보상하려는 유념(遺念)을 가슴에 새겨 정종의 후덕하고 인자하신 왕비(차원부는정종비 안정왕후의 사촌대부)의 뜻으로 지하에 사라지지 않는 그 사람의 영혼을 크게 위로하였다.

「깨달으시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은」상왕이 경영(經筵)에서 황보인이 황망히 말한 것으로 인해 세종이 문종에게 경계한 뜻을 깨달아 특별히 차원부의 억울함을 씻어 주라는 명을 내렸는데 회계(回啓 : 임금의 하문)에 대하여 내(內)의 하교에 말하기를「차원부의 자손들이 전에 권신(權臣)이 왕명을 마음대로 할 때 미혹(迷惑)되었으나 그 뒤에 선왕께서 특별히 찬성(贊成)의 관작을 내림과 아울러 토지 노복 가옥을 모두 되돌려주고 또 요역과 세금을 면제해 주라고」 명하였다. 「지금 무엇 때문에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스스로 와서 신분을 밝히지 않는단 말인가? 순흥에 사는 종은 오직 하나의 적손(嫡孫)인데 성씨를 말하지 않고 보성이라고 명단을 바쳤을 뿐이다. 그의 외족 김윤함 과 신광사에 숨어사는 중은 또 중영이라고 명단을 바쳤는데 한 사람이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알 수 없다.

그의 유비(乳婢) 학금과 김윤함 중 의종 등을 일시에 다시 살펴 보고하라고 하였다. 지금은 비록 어리다 하더라도 급료를 주어 장성함을 기다려 육품관직에 올려 그로 하여금 청백(淸白)하였던 할아버지의 업을 밝히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의관(醫官)을 불러 물어보니 영영 살길이 없다고 하였는데 6~7일간의 길에 빨리 보고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비록 머리의 털이 마르지 않았지만 미리 관곽(棺槨)을 마련하게 하고 별도로 소급해 관작을 봉함으로서 곧고 맑은 후손을 위로해야 할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 차원부와 그의 아버지 차안경이 모두 선량(善良)으로 선발 되었고 그 뒤 명을 받고 나아갔다가 또 사사로운 모함에 빠졌고 재차 무함을 입었는데 지금 이미 뼈가 되어 보답하고 위로할 길이 없으니 고려조의 선비 이존오 정추 등의 관례에 따라 각각 1, 2품의 관작을 주도록 하라.

그리고 따님의 손자 총체 신상조의 처 황보씨가 후손이 없는 것이 유감스러우나 비단과 수신전(守身田)등을 주도록 하고 다음 따님의 손자인 파평군 윤암의 아들 윤명 손자 윤금산과 그 다음 따님의 손자 전리사(典理司) 유흥순 그의 아들 유진 등을 다시 자세히 물어서 별도로 동반(문관)의 관직에 등용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신 최항 신 숙주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이는 옛날부터 차원부의 엄준청직(嚴峻淸直)하였던 기상이 흉악잔폭(凶惡殘暴)한 하륜의 사나운 독기에 흐트러진 것이다. 이미 삼황(天地人 약채)의 약채 뒤에는 청개(靑芥푸른채소)의 채소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또 이미 활에 놀란 나머지 구부러진 나무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또 이미 활에 놀란 나머지 구부러진 나무를 경계할 줄 도 알아야 할 것이다.

일찍이 황보인이 관모를 거꾸로 쓰고 임금님을 모시고 차원부의 일을 아뢴 것으로 인하여 신이 또한 손에 홀(笏)을 잊어버리고 다시 차원부의 사실을 개진(開陣)하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능히 三皇의 치기(稚氣유치하고 철없는 감정)를 뺏을 수 있을 것이라고 부언하였다.」 대체로 이 구절의 말뜻은 약을 복용할 때에 기피하는 바로서 인사의 기회(忌諱 꺼리어 싫어함)에다 비유한 것인데 박팽년은 기피할 바를 헤아리지 않고 정직을 숨기지 않은 채 낱낱이 사건을 열거하였고 활에 상처를 입은 새란 구절의 뜻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박팽년을 비유한 것이다. 손에「홀을 잊어버리고 대답하였다는 것은」 박팽년이 신숙주 신영손 등과 같이 임금을 뵈올 때에 문종이 불러 세종께서 시호(詩號)를 하사한 의논에 대해 물어 보았다.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시호를 하사한 것에 대한 의논은 마땅히 그 일을 담당한 부서에 물으셔야 합니다. 다만 신이 손에 든 홀을 잃어버려 신의 체통을 잃은 것은 전일에 차안경이 스스로 죽은 연유에 대해 항상 두루 말씀드리고 싶은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 부르신다는 명을 받고 이 사람에 관한 일을 먼저 생각하다가 손에 홀이 있는지 없는지 잊어버렸으니 신이 살피지 못한 잘못은 만 번 죽어도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정을 쇄신한 날 맨 먼저 차원부 부자의 억울함을 씻어 주어 세종께서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뜻을 포상 하셨습니다. 고 하였다 대체로 이 구절의 말뜻은 황보인이 경연에서 아뢴 뜻으로 인해 특별히 차원부의 억울함을 씻어 주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황보인이 아뢴 것으로 인한 것이지 지난 날 聖上의 뜻을 특별히 아뢴 것이 아니였다. 전일에 박팽년이 손에 홀을 잃은 뜻은 또 상왕의 교지로 인하여 두루 아뢰었다는 뜻이다.

신 최항 신 신숙주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신의 앞에 수레가 엎어진 것이 뒷 수레의 징계(懲戒)에 귀감(龜鑑)이 된다는 것을 헤아리지 않은 채 다만 성상께서 어진 이를 중히 여기는 실상이 성대하길 바랄 뿐 이였습니다. 신이 어찌 당시의 貴臣에게 아부를 하기 위해 저 세상으로 간 사람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까? 「당시의 귀신이라는 것은」 조정에 가득한 권신과 귀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저 세상으로 간 사람은 차원부를 가리켜한 말이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이 사람의 정도가 아니였다면 도를 밝힐 수 없으며 신의 불령(不佞 : 아첨하지 않음)이 아니면 사실을 캐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찌 한 점의 구름이 일월의 빛을 가릴 수 있으며 어찌 몇 명의 간사한 사람이 그 뒤에 발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몇 명의 간사한 사람이란 것은」 하륜 등 네 명의 서얼을 말한 것이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조석을 냄

 

슬프다 전하께서 이 열매(차원부의 사실)를 먹고 싶음이 비록 구름을 바라보듯 하여도 전하의 신하들이 받들어 이행할 적에 물에다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신이 어찌 혼자만의 의리로 어진이가 지하에서 안고 있는 천년의 한을 통쾌하게 씻어줄 수 있겠으며 신이 비록 정대하지만 깊은 궁궐에서 만고의 고애(孤哀)를 안고 있는 전하를 편히 해 드릴 수 있겠는가? 임금을 누가(姬旦 : 주공)의 생각처럼 사랑했으며 임금을 그 누가 자탕(子湯은나라 초대왕 탕왕)의 뜻처럼 받들었는가?

들은 바에 따라 견해가 변하는 데 진실한 의논을 어찌 면담으로 다 하겠는가? 천경(千頃땅 넓이)이의 사황(絲簧작은 대나무 숲)이 실로 百頃의 王篁작은 대나무)이 실로 백경의 왕황보다 못하고 다른 나라에서 열 가지를 잘한 것이 사실 우리나라에서 한 가지를 잘한 것 보다 못하다. 신은 미사려구의 문자를 쓰지 않고 신은 다만 인정과 사리의 진실을 열거하였다. 신의 일대에 격렬한 말로 신이 천년 금석 같은 법을 살펴 남아 있는 왕씨에게서 분파한 후손의 세계를 근거하여 이 사람 선조의 난과 옥같은 자손의 원계통 중의 파보를 살펴보면 「왕씨에게서 분파한 후손의 세계」라는 것은 고려 宗室의 자손에 관한 선원(璿源왕실의 근원)의 한가닥 족보의 계통이다. 그 뜻을 말한다면 같은 근원인 차씨와 류씨의 계통에 관한 이미 불탔으나 전일 김사형 김균등이 편찬하여 정종에게 보고한 계보에는 사(絲)가 존재해 있으니 이른바 실마리는 미약하지만 사(絲)는 존재해 있다는 것이다. 란과 옥이라는 것은 사람의 자손을 일컫는 호칭이다.

신 최항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임견미와 염흥방이 구분 없이 모두 불타던 날에 조준 조반이 가문을 마음대로 하여 봉(鳳)(방석)이 떨어지고 (용(龍차원부)이 놀랐으며 공(차원부)을 모함하여 사사로운 원한을 갚을 때에 한사람 하륜에 의하여 근원의 세계(世系)를 불태워 버렸다. 차효전 이하 안팎의 자손은 다 손꼽기도 어려우나 중규 이후 좌우의 조상은 계통이 모두 같았다. 위를 근본으로 하여 아래를 접하고 이 족보를 따라 세계(世系])를 더듬어 보면 효전의 아들 태보 수비는 광평시랑(廣評侍郞) 계린의 아버지이고 계린의 아들 내사 용기는 시어중승(侍御中丞) 백소의 아버지다. 백소의 손자 서평백 계한 은 평장사 부강의 아들이고 계한의 아들 유주백(孺州佰)의 아들 삼한대장(三韓大將) 중규는 창원인 평장사 최유정의 사위이고 중규의 아들 (태복시사(太僕時事) 거수는 남평인 평장사 문극겸의 사위이다. 파평인 승상 윤인첨은 거수의 아들 병부시랑(兵部侍郞) 약춘의 장인이고 양천인 중찬 허승은 약춘의 아들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 덕위의 장인이다.

덕위의 아들 참정(參政) 척은 언양인 시중 김취려의 사위이고 척의 장자 낭장(郎將) 수하는 영가인(永嘉人)추밀 권준의 사위이다. 아래로부터 위로 연하고 이 세계를 하나 살피며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차원부의 아버지 지방어사(地方御使) 차종로는 능성인 부사 구위의 사위이며 차종로의 아버지 좌승상 차포은은 단양인 중찬 우탁의 사위이다. 차포은의 아버지 도총제(都總制) 차득규는 왕중규의 사위이고 차득규의 아버지 중흥백 차송우는 차수하의 아들이다. 이름의 밑에다 일명 이라고 한 것은 한결 같이 왕씨의 계통을 따른 것이다. 고려조의 사람들이 개명하기를 좋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더욱 좋아 하였으므로 개명하여 복을 구하였기 때문이다. 차송우의 둘째 아들 차덕규의 자손을 선산으로 귀양 가 살면서 선산을 관향으로 삼았다. 이 기록의 체재는 오로지 설원을 위해 만들어졌고 또 조상 계통이 흐트러진 것을 민망히 여겨 차원부의 호걸 가문과 큰 문벌의 근원을 잇댄 것이다.

차수하 이하와 차종로 이상은 일시에 드러났던 명현이였는데 그의 자손들이 정몽주와 같은 당류라 하여 임견미 염흥방과 같이 연달아 화를 당하였다. 그 가운데 말할 만한 호걸들을 어떻게 다 들 수 있겠는가? 성문에 불이 나자 연못의 고기에 재앙이 미치고 초인(楚人)이 원숭이를 풀어 놓자 숲의 나무에 화가 미쳤다. 연못의 고기와 숲의 나무는 드러날 수 있지만 연못의 고기나 나무가 아닌데 어찌하여 엉뚱하게 화를 당하였단 말인가? 이것이 어찌 임견미 염흥방의 작은 연고로 인해 화를 당할 일인가? 은미(隱微)한 것을 꿰뚫어 보는 밝은 지혜가 아니면 역세(歷世)의 일을 달통(達通)하기 어려운 것이다.

일개 조반(趙胖)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말하자면 슬프다. 이러한 말세 에 권신이 모함하여 유배(流配)를 갈 때 이 화의 근본을 말하지 않고 이 사람들의 실상을 취하지 않은 채 속여 보고할 경우 이는 위에 계시는 성상으로 하여금 누구의 아들인지 누구의 손자인지를 몰라 사면의 은전을 내리지 못하게 한 것이니 십분 고증해야 할 것이다.

차송우는 고려 고종조의 훈구(勳舊) 노신이다. 전일에 권신 최충헌 자손 4대가 국권을 계속 잡아 조정의 기강을 어지렵혔는데 역적의 싹이 이미 중국에서 드러났었다. 공이 류경(柳瓊) 등 10여 명과 같이 임금을 도와 대계를 결정하여 최의 등 뭇 흉측한 무리들을 제거하고 옛날 정사를 다시 새롭게 함으로써 위사(衛士)의 호칭을 받았다.

신 최항 신숙주 신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차송우는 왕씨의 지친으로 벼슬이 내시윤에 이르렀는데 내시는 내시윤(內侍尹)으로서 1품이나 2품등이 있어 겸직하였다. 궁중의 환관을 거느려 임금의 행동에 따라 지휘를 하는데 매우 가까운 종친이나 외척이 아니면 할 수 없다. 공이 왕씨의 사직을 호위한 훈신(勳臣)으로 원나라 조정에 이름이 드러나 금은제기(金銀祭器)를 하사 받았는데 그의 아내 구씨가 꽃(妓女)을 질투하여 깨트리였으므로 물의가 생겨 임금을 움직여 그의 아내 지기(之己)가 영원히 부모의 은혜를 끊고 오로지 여자의 행실에만 고민한다고 벌을 주었다. 공이 또 부끄러워하고 송구(悚懼)하여 10여 년 간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고 질투하는 아내 성질의 어려움을 경계하였다.(공에게 아내 다섯 명이 있었다. 구씨가 아들 넷을 낳았다.

그 뒤에 두 집의 권신 딸에게 장가를 갔는데 끝이 좋지 않아 결국 내서 강윤소에게 참소를 입어 간신 임연에게 해를 입었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혹은 공이 1백7세를 살았다고 하는데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리고 류씨와 차씨의 신라 본계에 있어서는 고려조 서희가 찬집한 찬집여사(撰集餘史)와 정시상의 서경잡지(西京雜記 ) 김방경의 초당일기(草堂日記)에 드러나 있다.

신 신숙주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그 뿌리는 세은지관(世恩之觀)에서 태동하였고 신(신발)은 귀봉지계(龜封之階)에다 놓았다. 세은(世恩)이라는 것은 왕씨의 지친으로 대대로 왕씨의 국은을 입었다는 것을 일컫는다. 귀봉이라는 것은 거북이의 문양으로 계단을 꾸미는 것이다. 종족(宗族)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몸은 비록 귀하지만 귀하게 여기지 않고 사람이 비록 천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궁핍한 외딴 마을에서 평범한 신분일 적의 뜻을 변치 않았다. 위포(韋布한색한 의복)의 뜻을 변치 않는 것은 귀해져도 평범할 때의 뜻을 변치 않고 외딴 마을에서 살 때의 은혜와 친구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 최항 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장인 구예도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전에는 공이 송우의 첩 손서였는데 뒤에는 공이 도리어 송우의 장인이 되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비난 하였다. 왕씨의 외척으로 벼슬이 추밀(樞密)에 이르렀으나 임금이 능원(陵園)에다 연회를 하사할 때 몸소 술을 노인에게 먼저 올렸다. 밥상에 무김치를 대하면 북쪽으로 간 임금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고려 충선왕이 북쪽 원나라에 가 입조(入朝)했을 때이다.) 충선왕이 무김치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공이 밥을 먹을 때에 반드시 무김치를 놓았는데 북쪽으로 간 임금을 사모하기 때문이었다.

신 최항 신 신숙주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아문(衙門관청)에 소라 소리가 나면 대뜸 평상(平床)에서 내려가 땅에 엎드리며 가난하게 살던 조상이 고초를 읊었던 생각을 늦추지 않았으니 공(具藝)의 윗대 조상은 능성의 아전이였다. 아문에 소라 소리가 나면 대뜸 평상에서 내려가 땅에 엎드린다는 것은 소라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내려가 땅에 엎드린다는 것이다. 전일에 권신 임연 임유무 부자를 죽였으니 잔당을 섬멸하지 못하여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교만과 사치를 숭상하였다.

그러나 공은 가세가 너무 성대한 것을 경계하여 외람된 생각을 하지 않고 조상이 미천한 사람에게 굽혔던 뜻으로 공손히 기를 낮추어 자신의 귀한 티를 내지 않았는가 하면 그의 사위 송우가 해를 입은 것을 더욱 두려워하여 더더욱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었다. 비록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이 있었으나 공의 이름이 큰 문벌에 속해 있으므로 화를 면치 못할까 의심하여 날마다 시종(始終) 경선(慶善)을 유지 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고 그의 할아버지 민첨도 근신하고 사람에게 허리를 굽혀 미천한 조상을 잊지 않았다. 공이 할아버지를 이어 효도하고 문채를 갖추어 일신을 편안이 보존하였고 남을 이길까? 두려워하는 등 세심히 생각한 것은 신명(神明)스럽고 덕이 있었다.

신 최항 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윗대 조상이 쌓은 덕이 어찌 깊지 않겠으며 이부(차원부 차안경)가 남긴 향기가 어찌 멀리가지 않겠는가? 차종로의 아들 차원부는 평산인 대언(代言) 신군평의 사위이고 차원부의 아들 차안경(中郞將이다) 보성인 전서(典書) 임득충의 사위이다. 차안경의 아들 차상도는(성균과 유학) 광산인 예빈경 김소광의 사위이다. 차상도의 아들 차보성이 장년일 때 이름은 차중련인데 그때 아직 어려 품안에서 젖을 먹고 있었다.

그는 차원부의 친손자이고 또 김소광의 외손으로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강보에 있을 때 어머니를 잃었다. 처음에는 그의 어머니 이성(異姓) 재종 오라비 이함장의 집에서 양육되었고 재차 그의 어머니 동성(同姓) 재종 오라비 김봉서의 집에서 양육되었는데(차상도의 첩 아버지) 구사일생으로 실낱같은 생명을 보존 하였다. 아버지 잃은 외로움과 어머니 잃은 슬픔을 그 누가 마음을 쓰고 불쌍하게 여기겠으며 그 누가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해 주겠는가?

그런대 성상께서 마음을 쏟아 사람을 위로하는 뜻으로 그의 유비(乳婢) 학금을 통해 듣고 뜻한 바를 물어 보았더니. 그 자손을 등용하시겠다는 왕명을 기뻐하여 결국 지나날 위장(僞裝)하였던 말을 버리고 바로 그 아이의 이름이 차보성이라고 말하였다. 또 그의 외족 김윤함의 말을 살펴보고 그가 생각한 바를 따져보니 어루만진다는 미끼로 인하여 후일의 혹독한 화를 입지 않을 가 두려워하여 ‘어루만진다는 미끼라는 것은 어부가 미끼로 고기를 유도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후손을 돌봐준다는 뜻은 처음에는 비록 정당에 등용하였으나 결국 큰 화에 빠져 도륙을 당하고 말았으니 말로는 돌봐준다고 하였으나 결국 큰 화에 빠져 도륙을 당하고 말았으니 말로는 돌봐준다고 하였으나 실은 죽음으로 가는 큰 계단이였다.

신 최항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처음에는 그의 생사에 관한 진실을 숨기고 장년 차중연이라는 이름을 아뢰기를 꺼렸다. 처음에는 그 이름을 가진 아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았다가 나중에는 그 이름 중연이 장년의 이름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으니 지금 비록 말을 잘못하는 어린 아이이지만 넉넉히 옛사람의 청덕(淸德)을 이어 갈만 하다. 말을 잘못한다는 는 것은 한두 살 먹은 아이를 일컫는 말이다. 옛 사람은 차원부를 가리킨 것이다.

신 성삼문 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친척(왕실일가)이 모두 연루되어 도륙 당하였는데 외로운 손자가 살아남았으니 실로 그 사람의 경사이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것이 또 어진 이와 의로운 분의 후손이 아니면 그가 긴 어둠 앞에서 몰래 숨어 자랄 수 있었겠는가?「몰래 숨어 살았다는 것은 차상도의 아들 차보성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신 신숙주는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스스로 거(莒 지명)에서 품팔이 할 때 무고한 법장(法章 제나라 양왕)처럼 애도하고 어느 집이고 들어가면 숨겨주는 것은 장검(張儉동한의 고평사람)처럼 현량(賢良)함을 어여삐 여겼기 때문이다. 법장과 장검은 차상도를 비유한 것이다.

신 최항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어진 이는 적이 없다고 말한 뜻을 여기에서 불 수 있고 덕이 있는 이에게 이웃이 있다는 도리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대체로 정도전 조영규가 앞에서 화의 기틀을 조성하였고 뒤에는 함부림과 하륜이 난을 빚어냈다. 앞에 화를 조성하고 귀에 난을 빚어 낸 자들이 비록 임금을 가까이 하여 귀신貴臣 과 근신近臣이 되는 운수를 만났다 하더라도 그들이 발신(發身형편이 펴짐) 한 점을 따져 보면 모두 차문의 천한 서얼의 처지에서 나온 것이다.

지난 날 태조와 태종이 남쪽과 북쪽으로 떨어져 있을 때 때마침 이 세 명의 흉칙한 자들이 발악하던 때였다. 이 무리들이 임금을 속이고 때를 틈타 교묘하게 외로운 봉의 날개를 잘라 내였다. (봉은 방석을 말함) 이 무리가 不忠한 것은 자기만을 믿고 영원히 후릉(厚陵)의 은총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영원히 후릉의 은총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은 한때의 勳臣과 貴臣이 정종을 모함하고자 하였으나 태종이 동요하지 않아 결국 안정되었다는 것이다.

신 신숙주는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이는 실로 전 왕조에서(태종) 어리석은 유창(劉敞)과 함께 교활한 민여익에게 은택을 지나치게 주었고 하륜과 이종무에게 은택을 많이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 당고조(唐高祖)의 사사로운 생각이 건성과 원길에게만 치우치고 세민에게는 적게 기울인 것이겠는가? 당고는 당 고조를 말한 것이다. 당 고조로 우리 태조를 비유하고 건성과 원길은 정종과 방석을 비유하고 세민은 태조에게 비유한 것이다.

신 최항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피차의 두 부류는 公과 私의 두 부류이인 것이다. 피(彼)는 조영규 정도전 함부림 하륜 등이고 此는 차원부 등이다. 사판(史板널판지)을 근거로 한 것은 출처가 공이고 족보를 불태워 서얼의 근원을 없앤 것은 사(私)이다.

신 최항 신숙주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이보다 더 통분한 것이 있고 이보다 더 심한 바가 있으니 족보를 불태워 류씨와 차씨에게서 유래한 서얼의 근원을 엄폐(掩蔽사실을 숨김) 하고 족보의 근원을 불태운 내용은 모두 본 설원기 첫머리 엄매지경사망(釅昧之經私網) 대목 아래 주석에 있다.

사판에 근거를 자기 마음대로 하여 어진이(賢能)가 출처한 근원을 삭제한 것이다. 「어진이가 출처한 근원을 삭제하였다는 것은」권신이 역사를 마음대로 적어 차원부 등의 공정한 출처를 삭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 중에 자신에게 빌붙지 않은 사람에게 불리하게 쓴 혐의가 있으니 역사의 부정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다.

신 신숙주 신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이 사이에 미세(微細)한 틈을 파고들어 주관한 자는 누구이며 이 구운데 曲直을 바꾼 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미세한 틈을 파든 자는 누구인가 라는 것은」그 가운데 일을 주관하는 사람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곡직을 바꾼 자는 누구인가? 이 사람이 주관하는 일을 누가 감히 바로 잡겠는가 라는 것이다.

신 신숙주는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난새와 봉황은 솔개의 무리와 어울리지 않는 법인데 지초와 난초가 어찌 똥풀 속에서 더렵혀지겠는가? 난세와 봉황은 차원부를 말한 것이다. 광은 和光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 것인데 어울린다는 것이다. 지초와 난초는 차원부를 말한 것이다. 塵은 동진이다(속세에 파묻혀 사는 )것. 그의 지조(志操)는 소나무와 대나무 같았고 그의 마음은 얼음과 눈 같았으므로 동린(東鄰동쪽 이웃)의 경작한 것을 겁주어 빼앗고 서가(西家)의 곡종(穀種)을 위협하여 점유한 자들이 눈에 바늘처럼 여기고 등에 가시처럼 여기었다. 검은 구슬에 눈같이 흰점이 찍힌 것을 누가 좋아 하겠는가? 캄캄한 방의 야광주는 도리어 요괴로 보일 수도 있다. 칠실(漆室)은 캄캄한 방이다. 야광은 명월주이다. 명월주를 캄캄한 방에다 던지면 사람들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요괴라고 한다.

신 신숙주는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수청(水菁)의 공문과 응렵(應獵)의 문안은 수청의 공문이라는 것은 임견미 염흥방 두 사람이 수청목(물푸레나무)의 채찍으로 백성을 때려 공문을 엄중하게 만들어 재물을 탈취한 것이다. 응렵의 문안은 임견미 염흥방 두 사람이 사냥을 하면서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여 공공연히 전지(田地)를 빼앗은 것이다.

신 신숙주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비록 임견미와 염흥방이 하였다고는 하나 그들은 그래도 다소의 양심이 있었고 이보다 더 심한 자들이 있었으며 비록 조준 조반이라고는 말하지 않지만 그 일을 논한다면 외람하고도 지나친 데가 있었다. 더 「심한 자들이라는 것은」그 당시 貴臣(貴臣)들이 임견미 염흥방 보다 더 심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임견미 염흥방이지만 어찌 양심이 없었겠는가?

신 최항 신 신숙주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임견미 염흥방은 비록 공공연히 빼앗고 거두기는 하였으나 사적인 혐의(嫌疑)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데 이 무리들은 사사로이 왕인(王人)을 죽이고 또 공공연히 빼앗아갔으니「왕인」은 차원부를 말한 것이다. 다만 그때 연좌된 10여인의 재물을 한때의 권신(權臣)과 귀신(貴臣)이 공공연하게 탈취하고 점거하였다. 그 삶으로 말한다면 임견미 염흥방의 소행보다 더 심한 것으로서 이곳으로 오면 영광이 되고 저곳으로 가면 욕되므로 처지를 바꾸어 놓으면 모두 그렇지만은 이 사람들이 심하다는 말뜻이다.

신 최항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만약 상부(相符)를 지니고 하늘과 사람을 순응한 신성(太祖)의 운수가 아니였다면 이들은 오랑캐 땅인 말갈(靺鞨)로 도망갔던지 남만(南蠻)으로 귀양 가서 가지가 떨어지고 줄기가 꺾였을 것이다. 임견미 염흥방을 없앨 때에 임득충이 면한 것은 다행이며 염흥방이 벗어난 것은 다행 중에 다행이다. 임득충은 임견미의 계손(繼孫)인데 청백으로 면하여 편안히 살았고 물망은 염흥방의 친손자인데 간직(簡直)하였으므로 벗어나 중이 되었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위력과 권세가 있는 곳에 대대로의 세력이 더욱 중해지는 법이니 세세(世勢)라는 것은 일국의 권세 있는 자손의 세력이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스스로 최운(崔沄)이 선성(先聖)이 있는 자리에서 건의하지 않고 김계란이 정당에서 힘써 분변(分辨)하지 않았다면 허물이 없고 청백한 분이 검은 흙탕물에 빠졌을 것이고 응당 창랑(滄浪)에 나가 시비가 거의 혼동되었을 것이다. 계란은 김계란이다. 최운 김계란 두 사람은 방석과 같은 때의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이 차원부는 참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국중에 변론하였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검은 것과 흰 것이 서로 다투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이 뒤바뀐 것은 실로 저변(低邊)에 깔린 일로 인한 것이다. 권귀(權貴)의 담장과 궁궐의 뜰은 이어지지 않는 곳이 없고 은혜 사랑 증오 원수는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가슴속에 간직되었다는 것은 전후와 좌우가 모두 권신과 귀신이였는 데 오직 차원부 한 사람만 외딴 산속에서 왔고 태조의 총망을 잃었으니 이는 정말로 외롭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태종이 처음에 비록 애매했다고는 하나 실은 강대한 권신이 두려워서 왕명을 속여 남을 모함한 자에 관한 법을 적용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어찌 윗사람에게는 유(柔)하고 아랫사람에게는 강(强)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언덕과 같은 작은 산이라도 누가 힘으로 뽑을 수 있겠으며 얽히고 설킨 뿌리는 또한 도끼 하나도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다. 서얼들이 적자(適者)를 능멸하리라고는 헤아리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때보다도 심하게 음흉한 자들이 어진 이를 할퀸 적은 없었다. 형편없는 자의 간담(肝膽)을 누가 씹어 먹고 싶지 않겠는가? 「이때보다 더 심한적은 없었다는」 것은 권신과 귀신이 몰래 사사로운 원수를 갚을 뿐 아니라 원기(元氣)를 깎아 내리는 바가 또한 너무나 심하였음으로 인인(仁人 노인 : 차원부 노인) 의사(義士)가 너나없이 간인(奸人)의 머리와 쓸개를 씹어 먹고 싶었다는 것이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의로써 의리에 죽은 것은 정몽주의 절개이고 돋음으로 억울하게 죽은 것은 차원부의 올바름이다. 뜻은 비록 다르지만 그 마음은 하나이다. 정몽주는 절개에 죽은 신하이고 차원부는 피하여 숨은 선비이다.「뜻은 다르지만 그 마음은 하나이다. 라는」 것은 정몽준은 벼슬을 하였고 차원부는 숨었다는 뜻이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어찌 한때의 간사하고 미세한 사사로운 의논으로 만세의 정인(正人)에 대한 공론을 굽힐 수 있는가? 권근과 이색은 망국의 남은 신하로 그 임금을 버리고 이곳으로 달려왔고 정몽주와 최영은 건국의 기둥으로서 절개를 안고 저 쪽으로 달아났으니 어찌 하얀 실(素絲선비)이 이처럼 일정하지 않단 말인가? 이는 현(玄하늘)과 황(黃땅)이 번갈아 일어난 것이다. 권근은 고려 조정으로부터 온 자이다. 대체로 이 구절의 말뜻은 계사(啓辭임금에게 올리는 글) 가운데와는 별도의 뜻이다. 차원부에게 있어서는 한 가지 일이 비록 관계되지 않은 것 같으나 자신이 혐으로운 데에 처하였으므로 자기를 어떻게 할까 염려하였으니 그것이 어찌 보잘 것이 있겠는가? 이색 역시 죽교(竹較를 타고 원수를 기다리는 등 구차한 뜻이 많으니 사실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구절의 말뜻 역시 계사(啓辭) 가운데와는 별도의 뜻이다. 차원부 일이 비록 관계되지 않은 것 같으나 권근 이색의 마음을 정몽주 최영의 뜻에 비교한다면 정몽주 최영 두 사람은 한 번의 죽음을 잊은 채 결국 절의(絶義)를 세웠으니 사실은 사기(士氣)를 일깨운 것이다.「하얀 실」은 권근을 비유한 것이다.

신 최항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그는 웅장하게 자리 잡은 높은 산처럼 우뚝 서서 그 높은 절개를 굽힐 수 없고 해와 달의 밝음을 합친 동뢰(動雷)와 같아 등급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갈면 닳아지고 물들이면 변하는 무상(無常)한 것과 같겠는가? 이것이 어찌 갈고 물들여서 뒤집을 있는 것인가? 높은 산과 해와 달은 모두 정몽주 최영을 비유한 것이다. 갈면 닳아지고 물들이면 변하는 것은 권근과 이색의 나중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신이 권근과 이색이 언심(偃心)한 바탕을 생각해 보고 정몽주 최영이 주지(駐志)한 것을 탐색해 보건대「언심이라는 것은」상대방의 생각은 잊고 자신의 뜻만 편안이 한다는 뜻이다. 주지(駐志)라는 것은 정몽주 최영의 입지(立志)를 가리킨 것이다.

신 성삼문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끊임없이 살기를 좋아하는 자는 권근 이색의 마음이요 죽음에 뜻을 두고 몸을 생각지 않는 정몽주 최영의 뜻이다. 오호라! 살고 싶어 하기는 쉽고 죽기로 마음먹기는 어려운 것이니 천성(天性)으로 받은 것이요 사람의 욕심에 구애되어 그런 것이다. 그 기품을 타고나는 것이며 이미 그 근원의 첫머리에서 판가름된 것이니 오염됨이 어찌 그 무리의 끝에서 라고 논할게 있겠는가? 권근은 한때의 유명한 선비로서 공리에 급급하여 결국 자신까지 잃어버렸으니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이색은 본디 차원부와 같은 사람들이였다. 비록 한때의 유명한 선비였으나 지조(志操)가 굳지 않아 저쪽에 있을 적에는 저쪽 생각을 가지다가 혹 여러 사람이 이쪽이라 하면 이쪽에 뜻을 두었던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저쪽에 있을 적에는 저쪽 생각만 한다고 봤지만 이색의 실상을 말한다면 이는 선비의 풍습을 없앨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 세운 공로가 사실 매우 컸다. 그리고 윤이(尹彛) 이초(李初)와 같이 명나라에 하소연 한일에 있어서는 차원부가 마음먹은 일을 우리 조정에서 종결지어 살길의 틈을 요구하려다가 도리어 차원부의 뜻을 어기었으니 비록 실신(失身)은 하지 않았으나 사실 마음을 잃었기 때문에 박팽년의 기사(記辭 )에 바로 실절(失節)했다고 쓴 것이다.

박팽년이 비난한바가 어찌 이유가 없겠으며 또 식견이 없는 것이 있겠는가? 이러므로 박팽년의 기사 가운데 또 차원부를 두둔하여 우리 조정에서 정언의 벼슬을 하였다는 것은 거짓 말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차원부는 본디 고려 조정의 간의대부로 우리 조정에 있으면서 윤이 이초의 본심을 알았던 분이다. 박팽년이 태조께서 이름을 하사하였다는 것을 인용한 것은 혹독한 가문의 화를 영원히 끊어 무상(無常)한 무리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한 것이다. 박팽년이 어찌 생각하지 않고 우리 조정의 사람이라고 말하였겠는가? 그리고 이색의 실행이라는 것은 다만 조민수가 화를 내며「내 계책이 정해졌는데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의론은 즉 의(義)라고 한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도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어찌 보는 바도 없고 아는 바도 없겠는가? 의(義) 의에 죽는다는 것이다. 권근 이색 이하 주석은 크고 작은 글 뜻을 익히 음미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차원부의 품은 마음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신 최항 신 신숙주는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냈는데 박팽년 이석형과 의논하였다.

 

마음가짐의 난이(難易)로 족보 세계의 연관된 근원을 말한다면 차원부는 권근과 형제의 항렬이고 차안경은 이색과 숙질(叔姪의) 항렬이다.

「형제의 항렬이라는 것은」 차원부와 권근의 본족 재종 처 4촌인데 안동김씨의 족보에 나타나 있다.「숙질의 항렬이라는 것은」차안경의 장인은 임득중이고 임득중의 장인 정당 김당의 아내 류씨는 이색의 이성(異姓)5촌 아저씨이자 찬성 류돈의 누이 동생이고 류숙의 딸이다.

신 신숙주는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신(박팽년)은 권근 이색과 같은 동종(同宗)의 사람이고 차원부와도 같은 내손(4세손)의 항렬이다.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근본이 그전에 만연(蔓延)한 화였다는 것을 모르지 않고「그전에 만연하였다는 것은 차원부의 가문이 화를 입을 때 박팽년의 할아버지도 이에 관련되어 귀양갔다는 뜻이다.

신 최항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옳으니 그르니 하는 사이에 화(禍)가 뻗힌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모래밭에 묻힌 옥을 캐어 내지 않을 수 없고 옥중에 묻힌 칼을 파내지 않을 수 없다. 모래밭에서 옥을 캐내어 옥중에서 캐어내고 옥중에서 칼을 파낸다면 비록 변화(卞和춘추시대의 초나라 사람)와 같이 세 번 발꿈치를 베일지라도 두우(斗牛북쪽 송원과 마원을 가르킴)의 원한을 풀 것이다.「卞和는」 박팽년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벼화를 풀 것」 이라는 것은 차원부의 분을 씻는다는 것이다.

신 최항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저 어찌 옥과 돌이 불에 타 다 같이 탄 것만 밝히겠는가? 이 또한 사기(士氣)를 먹는 것을 꺾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아뢴바가 비록 미세하지만 그 실상을 말한다면 중대하고 신이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비록 번거롭지만 그 의리인즉 굳건하고 흔들림이 없다. 그러므로 신이 사사롭게 거리낀 바를 헤아리지 않은 채 신이 아는 바를 모두 개진하였고 그러므로 공의(公義)의 바른 바를 속이지 않은 채 신이 바르게 여긴 바를 별도로 말씀 드린 것이다. 삼가 생각컨대 열성(列聖)과 열조(烈祖)와 태조가 완산全州 에서 경사를 쌓고 북방에서 떨치고 일어났으니 어찌 어질고 지혜로운 용맹을 누가 이에 더 하겠으며 신성(神聖)한 덕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매우 신령스러운 것은 귀신이지만 귀신도 헤아리지 못하고 가장 영묘한 것은 영물이나 영물도 따라갈 수 없는데 (龍飛御天歌) 더군다나 무식한 하륜이 어찌 태조의 성지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물며 부도덕한 하륜이 어떻게 성조의 신덕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번갈아 가며 왕위에 올랐다가 끝나면 다시 시작하되 특별히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영구히 전수(傳授)하도록 하려는 것이 태조의 처음 뜻 이였다.「번갈아 가며 왕위에 올랐다가 끝나면 다시 시작하되 특별히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영구히 전수 한다는 것」은 태조가 하기 어려운 임금의 자리를 만들어 장자와 차자에게 번갈아 전수하여 만세토록 무궁하게 한다는 뜻이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그들이 항상 건국할 때에 개국신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여 사사로이 간사한 꾀를 꾸며 은밀히 사직을 정하려고 도모하였는데 한결 같이 하륜의 사술(邪術)이였다. 그들이 항상 건국할 때 개국공신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여 사사로이 간사한 꾀를 꾸며 은밀히 사직(社稷을 정하려고 도모였다는 것은」 하륜 이숭인 등이 항상 회군의 의논을 같이하여 건국의 공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여 내심 앙(怏)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태종이 사저에 있을 때 안팎의 권신들과 손을 잡아 온갖 방법으로 얽어 짠 군친의 지극한 사랑과 효성을 어긋나게 만들고 화근을 선동하여 없는 것을 사실로 조작하여 정사공신(1차 왕자의 난 공신) 이 되려고 하였다는 뜻이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조석을 냄

 

신덕왕후의 근친을 노려보고 간사한 자취를 태제(太弟)의 사석에서 드러내었다.「신덕왕후의 근친을 노려보았다는 것은」 하륜이 처음 신덕왕후의 근친인 강호 강민 등 두서너 사람들과 같이 결의형제를 맺고는 뇌물을 받아들이고 행실을 바르게 하지 않자 강민이 다시 절교해 버렸는데 하륜이 밤낮으로 분개하여 강씨의 일족을 모함하여 내부의 권한을 빼앗으려고 하였다는 것이다.「‘간사한 자취를 태제의 사석에서 드러냈다는 것은」 태종이 집에서 여가를 보내고 있을 때에 하륜이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고금에 변란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극구 말하고 궁중에 사병을 사용해야 한다고 설득하였으나 태종이 처음의 뜻을 몰랐는데 하나는 호위(護衛)할 수 있다는 뜻이고 하나는 도리어 수상쩍다는 뜻 이였으므로 흔쾌히 따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태제는 태종을 말 한 것인데 그 때 동궁으로 책봉되지 않았다.

신 최항 신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정종 내권의 공론을 은근히 시기한 나머지 그들이 차원부의 직계라고 은밀히 사사로운 독기를 품었다.「정종 내권의 공을 은근히 시기한 나머지 그들이 차원부의 직계라고 은밀히 사사로운 독기를 품었다.」는 것은 김문표 권민신 등은 모두 일시 명망있는 인사로서 정종 내권(內眷)이였다. 하륜이 강씨 일족을 모함하려고 했다는 듯으로 태종에게 아뢰고 아뢰어 하륜의 사술(邪術)을 제거하려 하자 하륜이 공론으로 나타낼까 두려워하여 사술을 부리지 못하고 스스로 그만 두었다. 이는 하륜이 나쁜 짓을 하고 싶었으나 자기를 도울 사람을 얻지 못한 때였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공론을 엄폐하고 사사로운 독기를 품었는데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하륜의 심한 짓은 동궁에서 술을 마실 때 사사로운 독기를 품었는데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하륜의 심한 짓은 동궁에서 술을 마실 때 외람되게 옷에다 술을 엎지른 것이고 하륜의 가장 간사한 짓은 동궁을 따라가 동궁이 의심하도록 만든 것이다.「옷에다 술을 엎지르고 동궁이 의심하도록 만들었다고」 한 것은 하륜이 은밀히 화의 덫을 만들어 사건이 발발하려던 찰라에 감사(監司)로 나가게 되자 그 모의가 이룩되지 않을까 염려 하였는데 전별(餞別)하는 자리에서 동궁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바람에 자신의 뜻을 말 할 수 없었다. 하륜의 일이 잘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일부러 동궁의 옷에다 술을 엎지르자 동궁이 매우 노하여 말없이 돌아갔다. 그러자 하륜이 겉으로는 취한체하고 동궁에게 사죄해야 하겠다고 하면서 동궁을 쫓아가 내당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동궁이 또 문을 닫고 보지 않자 하륜이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그 전에 하륜과 절친한 궁인이 동궁에게 사죄해야 하겠다고 말하기를「하륜이 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출발을 눈앞에 두고 꼭 아뢸 말씀이 있는데 손님이 많아 아뢰지 못하고 이렇게 문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하륜이 또 궁인을 통해 간절히 빌자 동궁이 비로소 노기가 풀려 주위사람을 물리치고 하륜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륜이 말하기를「주상께서 작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습니다」고 하자 동궁이 타 이르기를 「어린 아들과 딸을 사랑하는 것은 주상만 그런 게 아니라 경도 자녀가 있으니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다. 하륜이 말하기를「차례로 왕위를 전수한다는 뜻은 일찌기 편전에서 주상께 들었습니다.」

하니 동궁이 냉소(冷笑)하였다. 하륜이 또 말하기를「왕씨들이 귀양 가던 날 무분별하게 당하였습니다.」하니 동궁이 믿지 않고 흔쾌히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어찌 그러한 일이 있겠으며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하륜은 모의가 수포로 돌아갈까 염려하여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울자 동궁이 도로 웃으면서 하륜을 위로하기를 「사세(事勢)가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하륜이 말하기를 「이숙번은 용맹과 지략이 이 사람보다 뛰어 난 데 지금 안성군사로 있으니 이숙번이 돌아올 시기를 기다려 처리하는 것이 지당하겠습니다. 하니 동궁이 웃으며 말하기를「사세가 급박하다면 1년 뒤에 하륜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 뭐 있겠는가?」하였다.

그리고 하륜이 신덕왕후의 일가와 묵은 원한이 있다는 것을 동궁이 벌써 알고 있으며 김문표 등의 공론이 격발(激發)한 내용도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동궁이 그의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내심 의혹하지 않고 다만 중당에서 술로 위로 하였다. 동궁이 하륜과 이야기할 때에 동궁을 모시는 두서너 시종들이 병풍 뒤에 또는 중당 난간의 안에 숨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얼굴색이 변하여 떨었는데 동궁이 혹 오발(烏髮)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동궁이라 한 것은 깊은 뜻이 있으니 독자는 깊이 음미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박팽년 남질원 민여성 한상우 등과 같이 의논하여 주석을 냄

 

남공 민공 한공 은 모두 우리 조정에 명망 있고 의논을 견지한 인사이다.

가사 태조께서 공로가 있는 왕자를 제치고 다른 아들에게 왕위를 주려고 하였다면 세상에 드물게 재지(才智)를 가진 뛰어난 태조께서 일발에 물리칠 수 있는데 어찌 1년 동안이나 유념하겠는가? 그러니 하륜이 지방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 뭐 있겠는가?「하륜이 지방에서 돌아 올 때 까지 기다릴 것이 뭐 있겠는가?」라는 것은 하륜이 한 쪽 지방에 있을 기한인데 하륜이 처음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1년 뒤에 돌아올 때를 기다려 거사(擧事)를 하라」라고 말한 뜻이다. 대체로 그 사건을 말하자면 태조가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지(才智)를 지니고 있으므로 어린 아들에 대한 사랑에 현혹되어 공로가 있는 왕자를 제치려고 할 경우 일이 경각(頃刻)에 발발 할 것이다. 오랫동안이나 유념할 것이 있겠으며 어찌 하륜의 지방 임기인 1년이 끝날 때를 맞출 것인가? 하륜이 허위로 꾸민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리고 태종이 대답한「사세가 급박하면 하정승의 임기인 1년까지 기달 것이 뭐 있겠는가?」라는 말이 실로 깊이 알고 있는 것이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태종이 만약 태조가 자기를 배척(排斥)하고 사랑하는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전수하려는 것을 보았더라도 어짊과 효성을 천부적으로 타고 난 태종이 기꺼이 한 몸 바쳐 헌신하려고 하였지 어찌 의심스러운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겠으며 어찌 내전에서 병력을 동원하였겠는가? 「어찌 내전에서 병력을 동원하겠는가?」라는 것은 태종이 하륜의 사술에 빠져 내전을 뒤흔들었다 하더라도 실상을 말한다면 본디 태종의 뜻이 아니다. 만약 태조가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전수 하더라도 어짊과 효성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태종은 자신의 배척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생과 유무를 헤아리지 않은 채 일체로 태조께서 헌신하였을 것이다.

불행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기꺼이 군친의 명을 받아들여 죽음만 기다렸을 것이고 다행스럽게 될 경우에는 태종과 어린 아들이 고죽군(孤竹君 상나라 묵태초의 (封戶)의 아들 백이와 숙제가 모두 왕위를 사양한 것처럼 하였지 어찌 천리를 거역하고 병력을 동원하여 내전에서 임금을 협박하여 만세의 죄를 더하겠는가? 태종이 단발문신(斷髮文身머리를 풀고 몸에 먹물을 넣어 문신을 함)을 하여 왕위를 사양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아우의 목숨을 다시금 이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태조가 극도로 노하자 기꺼이 하륜의 군대 핍박을 달게 받아들여 결국 정릉(貞陵)의 야학(野壑 골짜기)에 이르러 동쪽으로 머리를 향하였으니 하륜의 죄악이 너무나도 커서 바닷물로 씻어도 다 씻지 못한다는 뜻이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박팽년과 의논하여 주석을 냄

 

먼저는 외적이 내성으로 들어온다고 소문을 내고「먼저는 외적이 내성으로 들어온다는 소문을 내다는」것은 하륜이 태종에게 속이기를「지난날 정몽주의 잔당들이 초야에서 당파를 결성하고 또 조정의 저명한 인사들과 손을 잡아 주상의 거동을 살펴 경성을 도륙하려 꾀하였습니다. 만약 여의치 않을 경우 예양(진나라 사람)이 측간에 숨어 지백을 위해 복수하려는 뜻을 본받아 기어코 고려에 보답하려고 합니다.」라는 뜻이다.

그러면 하륜 등이 어찌 사병을 동원하여 저들의 도발(挑發)을 기다려 후환을 막지 않는단 말인가? 그런데 태종이 그의 거짓말을 믿고 임금에게 아뢰어 미리 방비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하륜이 그 일을 임금에게 아뢸 경우 일이 이루어지지 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후환이 두려웠으므로 또 거짓말을 꾸며 말하기를「그 전에 적의 무리들이 사적으로 양전(兩殿)의 내시들과 손을 잡아 주상의 동정을 살펴 안에서 변란에 응한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곧 바로 주상에게 아뢸 경우 반드시 누설될 것이므로 아뢰어서는 안된다고 여겼으며 또 그 일이 궁색하여 미처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하륜이 두서너 내시들과 같이 안팎 궁성의 수구에서 변란을 기다려야 겠습니다.」고 하였다.「결당초야자(結黨草野者)라는」것은 차원부를 가르킴 양전이라는 것은 태조와 정종을 말한 것이다.

신 최항 신 신속주 신 성사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나중에는 내사(內嗣)가 외원에 와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나중에는 내사가 의원에 와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는 것은」하륜이 어린 아들 방석 방번 등을 제거하고자 태종의 뜻을 거짓으로 꾸며 두 사람에게 말하기를「요사이 태종이 정종의 하교한 바를 따르려고 하였으나 요즈음 주상이 편치 않아서 아우들과 자리를 같이 못하였다. 지금 주상에게 병중이지만 문안을 드리고 나서 후원에 와 아우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고 하였다.「대전(大殿)에 게 문안하였다.」고 하자 기뻐서 따라 갔다. 그런데 작은 아들들이 말하기를 의원에 나깠으나 태종이 오지 않자 작은 아들들이 말하기를「내가 형님이 문안 보낸 사자를 만나고 나서 서둘러 여기에 왔는데 형님은 어디에 계시는가?」하였다. 대전에 문안하였던 내시가 그때 미처 도착하지 않았는데 하륜의 변복(變服)한 역사(力士)가 원대(苑臺)의 밑으로 끌고 갔다는 뜻이다

신 최항 긴 신숙주 신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어구(御溝)에서 철퇴의 소리가 났는데 쌍봉은 어디로 왔단 말인가?「어구」는 궁성의 수구를 말한다.「쌍봉은」방석과 방번 등을 말한 것이다.「쌍봉이 어디로 갔단 말인가?」는 하륜의 역사가 방석 방번 등을 원래의 아래로 끌고 가 철퇴로 치고 다시 궁성의 수구에서 철퇴로 쳤는데 그 뒤에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말하자면 철퇴로 쳐 죽일 때에 두 역사가 참아 철퇴로 치지 못하여 결국 배가 아프다고 핑계 대며 눈물을 질펀하게 흘렸다고 한다. 방석과 방번이 역사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말하기를 「형님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형님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하였는데 매우 슬퍼하고 참담해 하는 것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 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용이 적전에서 튀어 오르자 신하들이 재앙을 받았다.「용」은 태조를 말한 것이다. 적전(赤田)이는 것은 태조가 살았던 함길도 덕원의 이름이다.「용이 적전에서 튀어 올랐다는」는 것은 태조가 봉이 적전에 있다는 말을 듣고 봉을 쫓아갔다는 뜻이다. 다만 변란이 일어난 날 태조가 태종만 원망 하였을 뿐 하륜의 음모가 안에서 움직인 것은 의심치 않은 채 궁중내관 가운데 태종과 연관된 자들을 모두 죽이니 그들이 토한 피가 5~6승(丞)이였다. 처음에는 궁실을 버리고 적전으로 들어가 의병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북적(北狄)으로 가려고 하였으며 또 중국으로 들어가려고 하였기 때문에 용이 적전에서 튀어 올랐다고 말한 것이다.「신하들이 재앙을 받았다는 것은」태종이 날마다 임시 행재소로 사자를 보내 문안 하였는데 태조가 분개하고 원망하여 수행한 사신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일국의 신민들이 태조가 죽인 것을 원망하지 않고 태조가 애통해 하는 것만 보아도 처절(悽絶)하게 여겨 따라 죽을 마음만 있었지 사는 낙은 생각하지 않았다. 이 변란에서 죽은 사람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이것이 어찌 태종이 같이 하였던 일이겠으며 이것이 어찌 태종이 불효한 탓이겠는가? 태종을 불측한 데로 몰아넣고 태종을 불의 한 곳에 빠뜨리었으니 이것이 어찌 하륜이 임금을 합당한 의리로 이끈 것이겠으며 하륜이 임금을 합당한 도리로 인도한 것이겠는가? 정종과 방석의 우애를 깨뜨리고 태종으로 하여금 당 태종이 형제를 죽이는 전철을 밟게 하였으니 「소사(小嗣)라는 것은 신덕왕후의 한 아들 방석이다.「입애지문(立愛之門)은」 정종과 방석이 우애하여 틈 없이 서로 좋아 하였는데 하륜이 우애 있는 것을 엿보고 왕위를 차례로 전수한다는 틈을 타 아무생각이 없는 정종과 공모하여 평생의 조그만 원망을 갚고자 안팎으로 부탁하고 임금을 동요시켜 존귀한 왕자들에게 화를 입힘으로써 아무 생각 없는 태종으로 하여금 당 태종이 피를 밟았던 전철을 밟게 하였으니 하륜의 간사함을 어찌 다 말 할 수 있겠는가?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이것이 또 태종이 그전부터 아는 바인데 어찌 태종이 평소 모의하였던 것이겠는가? 이는 모두 하륜이 만든 것이고 하륜의 간사함이다. 군친의 지극한 사랑과 은혜를 영원히 어긋나게 하더니 결국에는 머무르는 자리에서 기둥에 화살을 맞히는 극도의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하륜이 태종으로 하여금 지친(至親)을 지극히 사랑하는 덕을 손상하게 하였다는 것이요 또 태조가 임시 머물던 날 태종을 불러 볼 때에 태조가 태종을 향하여 활을 겨누자 하륜이 태종으로 하여금 기둥 밑에 엎드려 맞지 않게 하였는데 그의 본의를 따져본다면 태조가 활을 태종에게 겨눈 것이 아니라 실은 적신(賊臣) 하륜이 활을 태종에게 쏘았다는 뜻이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태종의 본심이 천륜의 지극히 사랑하는 덕을 손상하여 그러하였던 것인가? 태조의 쌓인 생각이 임시 머무는 자리에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활을 쏘려고 한 것이겠는가?「그러하였던 것인가 한 것은」라는 두 구절의뜻이 가장 긴요하니 음하여 생각 할 것이다.

신 최항 신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지극히 사랑하는 천륜의 덕을 손상한 것은 실로 태종의 본심이 아니고 임시 머무른 자리에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활을 쏜 것은 태조가 생각하였던 바가 아니었다면 어떤 자가 이간을 하였으며 어떤 자가 화근(禍)을 만들었단 말인가? 신이 이른바 태종을 불측한데로 몰아넣은 자는 하륜이고 신이 이른바 태종을 불의에 빠뜨린 자도 하륜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누가 하륜이 임금과 나라를 도왔다고 하겠는가? 하륜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임금을 해쳤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나라의 터전을 세우고 건국할 때에 만약 윤곤 류양의 도움을 입지 않고 또 이원 남재 정희계 등이 호위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명맥이 억만년까지 이어지기를 어찌 기약 할 수 있겠는가? 우리 태조가 분개하여 북적(北狄)으로 가 이 소식이 중국에 알려지면 우리나라의 명맥이 영구히 이어지겠는가? 태조가 분개하고 중국으로 가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지금 방석의 원한을 영원토록 씻어 주지 않으며 차원부의 억울함을 지금과 같이 풀어주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고 어찌하여 태조를 위로하고 태종을 위안하지 않는단 말인가? 차원부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방석의 원한을 씻어주며 태조를 위안하지 않는단 말인가? 차원부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방석의 원한을 씻어주며 태종을 위안하고 태조를 위로하면 그 삶이 어진가의 여부를 말하지 않아도 밝혀지고 그 사람이 어진가의 여부를 말하면 그 사건이 옳은가 그른가는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밝혀지고 자연히 드러난다면 누가 하륜이 사직을 안정시켰다고 말하겠는가? 신은 홀로「난신적자(亂臣賊子)는 하륜이다 라고 말한다.」누가 태종은 시작만 있고 끝은 없다고 말하는가? 신은 홀로 태종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말한다.「도움(도움(翊衛)과 호위(扈衛)라는 것은 태조가 진노하여 안팎에 사실을 알리고 대대적으로 병마를 동원하여 국가의 운명과 사생을 결정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크게 삼키고 뱉는 듯으로 북적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조정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의 죄악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며 도 여의치 않을 경우 중국으로 들어가 상황을 모두 알리고 명나라의 병력을 크게 동원하여 의리의 깃발을 들려고 하였다. 그런대 윤곤 류양 등 10여명이 유사(儒士)를 통하여 임시 처소에 있는 태조에게 별도로 아뢰면서 군사를 일으키면 불리한 유를 간곡히 개진하였다. 그리고 이원 남재 정희계 등 7.8명이 또 산승을 통하여 따뜻한 말로 뜻을 맞추어 태조의 진노를 풀고 이어서 차원부는 방석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는 뜻을 말하고 다음에는 명나라의 비위를 거스린 흠에 대해 조목조목 말하였다.

끝으로 새로 등극한 황제가 본국의 참소를 믿고 실상에 대해 말하고 또 그렇게 하면 나라를 깨뜨리고 자신을 망치는 길이라고 말하자 태조가 비로소 마음에 중심을 잡고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니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태조가 입은 그의 노여움은 천지 다하도록 영원히 원망한다는 뜻이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그러므로 아래로는 흉측한 자가 스스로 임금의 명을 거짓으로 꾸며 나라의 사람을 마음대로 죽인 것에 대한 분노를 금할 수 없고「스스로 임금의 명을 조작하여 나라의 사람을 마음대로 죽인다는 것은」임금의 명으로 꾸며 마음대로 차원부 등을 죽인 것을 말한 것이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위로는 성상께서 수고롭게 당부하고 억울함을 통쾌하게 씻어주라고 명하신 뜻을 감당할 수 없어「수고롭게 차원부의 억울함을 통쾌하게 씻어주라고 당부하신 뜻이라는 것은」 상왕이 (단종) (二李聖세종과 문종)의 유지로 차원부의 원한을 씻어준 뒤 역리(驛吏)에 속한 뜻을 감당(勘當)할 수 없어 수고롭게 차원부의 억울함을 통쾌하게 씻어주라고 당부하신 뜻을 조정에 물어 보고 또 차원부의 자손을 채용하였다는 말의 뜻이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열 번의 죽음을 피하지도 않고 그 사실에 만분의 일이라도 열거하여 주상께서 여가에 보시도록 한통을 정서(正書)하였는데 후세의 임금을 경계하기 합당하고 천만년의 본보기(龜鑑)가 되기에 마땅할 것이다. 방서(方書)는 정서하였다는 듯이다. 후세의 임금을 경계한다는 것은 훈신(勳臣)과 권신은 탐욕스러웠으나 차원부는 청백 한데다가 머무르지 않고 높이 날으는 기러기 같고 고상한 뜻이 있었다. 태종이 비록 차원부가 뜻 한 바를 두루 알고 있었으나 권신과 귀신을 극력 제어 할 수 없어 항상 뜻은 가지고 있어도 무심한 것처럼 하고 아는 바가 있어도 모를 것 같이 한 바람에 권신과 귀신에게 이끌려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었다. 그런데 상왕이 재차 세종과 문종의 뜻도 이러한 것으로 특별히 두서너 차례나 사면하라는 명을 내렸고 박팽년이 또 주상의 뜻을 받들어 후세의 임금을 거듭 경계한다는 뜻이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 등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신이 한 통을 쓴 뜻은 지금 선을 상주고 악을 벌하는 데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하더라도 어찌 한 시대의 가르침만 보탬이 되겠으며 신이 천만년을 비추려는 뜻은 비록 당장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하는 데에 합당하지 않다 하더라도 어찌 만고의 전형(典型)이 아니겠는가? 신이 지난 날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지금 처벌하고자 하는 것은 신이 또 지금의 난신적자로 하여금 후일을 두려워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조영규 정도전 함부림 하륜 등에게 부월(斧鉞생살권의 상징 작은 도끼)을 시험하지 않으며 어찌하여 뒤에 임금을 업신여기고 부도(不道)한 자에게 정확(鼎鑊 죄인을 삶아 죽이는 솥))을 사용하지 않는단 말인가? 「신이 한 통을 썼다」 대목 이하의 뜻은 자세히 음미해 생각해야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선량(善良)들을 극도로 해치고 나라가 위태로운 가운데 박상(剝喪)은 어진 차원부를 해친다는 말이며 을얼(杌隉)은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뜻이다.

신 최항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신이 아뢴 바가 이 뿐만 아니라 정통(세종 29년) 정묘 9월에 신과 성삼문 신석조가 모두 집현전의 학사로 있을 때에 같이 차안경이 스스로 죽은 연유에 대해 아뢰었으며 성삼문이 부르심을 받고 대답하는 가운데 신이 짧은 글월을 올릴 때에 당시 시론을 수렴하여 많은 말을 하였다. 그리고 영락11년 계사년에 주상의 부름을 받아 대담하는 자리에서 윤곤과 박은은 처음엔 혁명의 근원을 말하고 나중에는 차원부의 억울함을 아뢰었으며 류양과 이래는 처음엔 나라의 명맥을 영구히 유지하는 논리에 대해 아뢰고 나중에는 차원부가 애매하게 누명을 썼다는 것을 말하였다. 조은과 조영무는 사흘 밤의 대담에서 고금의 억울함을 크게 설명하고 나중에는 차원부가 극도로 억울하다는 것을 아뢰었으며 정탁과 성석린은 면담에서 울며 당시의 억울함을 한꺼번에 씻어 줄 것을 아뢰고 나중에는 차원부의 고통스러운 원한에 대해 말하였다. 김승주와 이원은 날마다 간사한 사람을 제거할 것을 아뢰면서 나중에는 차원부의 원한에 대해 말하였으며 김사형과 김균은 때로 어진 사람을 써야 한다는 의논을 드리고 나중에는 차원부의 억울함을 아뢰었다.

특히 조정에서 이미 극도로 한스러워 할뿐만 아이라 야에서도 또 심하게 원망하기 때문에 조준과 조영규는 전에 부름을 받은 가운데 지난날을 뉘우치고 먼저 차원부의 억울함을 말하였고 조반과 민여익은 뒷날 근심이 있어 앉아도 자리가 편하지 못할 때 잘못을 깨닫고 마침내 차원부가 허위와 사심이 없었음을 아뢰었는데 사제(私第)에 있을 적에 원한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합문(閤門)에 나가서도 뉘우치는 뜻을 임금과 대담할 때 밝혔던 것이다. 조인옥이 학문을 일으키는 말씀을 드릴 때에 눈물을 지으며 말한 것과 홍길민이 국방에 관한 말을 아뢰고 통곡하며 한 말이 천지처럼 뚜렷하고 일성처럼 분명하였다「학문을 일으킬 때의 대답」이라는 것은 임금이 학문을 일으키는 말씀으로 인하여 차원부가 허위와 사심이 없었으나 피살당한 것을 아뢰었다는 뜻이다.「국방에 관한 관 것을 아뢰었다는 것은」또한 임금이 변방을 수비하는 의논을 제기할 때에 차원부가 불행하게 멸문의 화를 당한 것을 거론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인옥과 홍길민 두 공도 감개한 바가 많고 또 이처럼 그의 억울함을 밝혔으니 또한 그 당시에 공론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그리고 선덕(선덕 선종 년호)년 간에 좌대언 이맹진이 숨김없이 상소함으로써 또한 명백해 졌는데‘ 이맹진도 처음에는 모르다가 나중에야 안 사람인데 모두 차원부의 일가이다.「외(巍)라는」 것은 높은 것이고「항(亢)」이라는 것은 드러난다는 것이니 숨김 없고 꺼리낄 것 없다는 뜻이다.

신 성삼문은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냄

 

경태(景泰 명나라 景帝 조선 문종 단종 1450~1456)에 신 박팽년은 한낱 초개였으니 어둡고 비루한 의논으로 어떻게 그 사이에 끼어 들 수 있겠는가? 신이 옛날 폐부 깊숙한 마음속에 들었던 고질병이 지금은 골수까지 아픔이 되어 굶주려도 밥을 그리워하는 생각이 없고 기대어 누워도 평신의 잠이 끊어져서 혼미하여 전에 아는 바를 기억하지 못하고 어두워서 시비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피지 못하므로 다만 평소 잊지 않은 생각을 취하여 후세에 유식한 자의 마음을 일깨우려고 하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쓸모없다 여기시지 마시고 유념하여 살피시어 말이 사리에 동 떨어진다 여기시지 말고 마음에 새기어 절실히 생각하소서

景泰 7년 세조 2년 1456 5월17일에 嘉靖大夫 行刑曹參判 신 박팽년 하교를 받들어 삼가기록한다.

 

기(記)라는 것은 일의 옳고 그름을 기록하여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하는 大義이다. 그리고 어느 기사의 주에 누가 주를 달았다고 쓰지 않는 것은 박팽년이 스스로 낸 주이다. 다만 기 가운데 실상의 뜻은 조영규 정도전 함부림 하륜이 모두 고려시대의 잔당으로 차씨 가문에서 날뛴 자들인데 방석과 차원부를 제거한 것은 시비의 소지를 모조리 없애기 위한 것이였다. 방석은 제거 되었더라도 차원부가 존재해 있을 경우 나중의 화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하륜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히 화근을 끊고 후환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강호 강민도 신덕왕후의 근친으로서 하륜과 사이가 좋지 않아 화방을 더럽힌 숙원으로 인해 하륜이 항상 두 강씨에게 배척을 당하였다. 그런데 하륜이 임금의 반석 같은 총애를 얻어 한 대의 권신과 귀신을 제압하고 부를 누리고 위세를 떨치었다. 차씨 강씨 두 일가들에 대해 이 화근의 근본은 지적하지 않은 채 어진 사람을 해친다는 명목이나 조정을 비방한다는 명목이나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른다는 명목 등 세 가지 조항의 법을 적용 관노로 유배하고 처자와 재산을 몰수할 때 에 고의로 가짜 문서를 만든 다음 그의 할아버지 이름을 붙여 속여서 서면으로 아뢰었으니 비록 사리에 밝은 세종이지만 어떻게 사건의 실상을 알아 극진히 살피고 거듭 밝혀 간사한 자를 색출하고 사특한 자를 제거하여 그의 억울함을 씻어 줄 수 있었겠는가? 대체로 그 요점을 총괄하여 말한다면 사람들은 비록 임견미 염흥방이라고 말하나 그들은 고려에서는 순종하고 조선은 거역하셨기 때문에 왕씨를 지켰다가 귀한 시분으로 가문이 멸망하였으며 조순 조반은 조선에서는 순종하고 고려는 거역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크게 출세를 하였다. 그리고 정몽주 최영은 창해에 몸을 의지하여 사생을 돌아보지 않은 사람 이였는가 하면 권근 이색은 중간에서 변화를 관망하며 공세우기에 급급한 사람이였으니 그들은 믿을 것이 뭐있겠으며 그들을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그들이 멸망할 조짐의 시초를 말하자면 임대광은 재상이였는데 임박도 재상이였다. 임대광은 처음엔 나라를 위해 꾀하였다가 지춘주(知春秋 벼슬이름)로 좌천되었고 임박은 시종 정직한 것 같았으나 역사에는 아부하였다고 하는 것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이다. 이러한데 하물며 지금은 사기가 없어지고 천륜이 거꾸로 되었는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충(忠)과 사(邪)가 뒤섞이고 命과 實이 서로 다르니 이는 바로 고려의 김부식이 국사를 자기 마음대로 하여 자신의 간사한 것은 삭제하고 정지상의 올 곧은 일은 지운 것과 같다. 그리고 요양을 정벌하려고 할 때에 태조가 그들의 말을 믿고 차원부를 찾아가 묻자 차원부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따랐던 것은 사실 태조가 중국의 비위를 거스릴까 염려하였던 뜻이다.

윤이 이초 등이 몰래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에서 하소연하였으나 본국의 사람과 대질하여 의심하지 않게 한 것은 이색 등 여러 사람이 고려를 위하여 하소연 하였다는 뜻이다. 앞의 역사가 올바르다고 어떻게 장담 할 수 있겠으며 지금의 역사가 올바르다고 어떻게 실증할 수 있겠는가? 만약 저쪽을 말할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하고 이쪽을 말할 경우 벼슬길이 생기니 인심의 향배가 이처럼 심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이 어찌 사람의 본성이겠는가? 처음에는 법이 엄중하였기 때문에 아들은 비록 개국의 원로이지만 아버지는 고려의 남은 나무꾼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서쪽에 있는 아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아들은 동쪽에 있는 아버지를 편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 누가 아무개는 어떤 주(州의 아무개 아들이고 아무개는 어떤 고을 아무개의 사위라고 말하면서 특별히 천년의 뒤에 까지 아무공의 자손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는가? 속인들이 안하기를 서인(고려)들과 어울리다 가문이 멸망하는 것보다 동인(조선)과 손을 잡아 몸을 편안히 보존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으나 이는 때를 아는 말이 아닌 것이요 또 근본(知禮)을 아는 말도 아이다. 다만 우리 조선의 종씨(전주이씨) 근원도 바로 차원부의 직필(直筆)을 본 받았을 것이다. 전일 신덕왕후를 종묘에 모시자는 의논에 대해 주상이 비록 원하였으나 신덕왕후를 종묘에 모시지 말자는 의논 또한 모두 하륜 등 몇 사람의 당류들이 함께 주장한 것이다. 어찌하여 사망자가 모두 이 가문에서만 나온단 말인가? 그럴만한 일이 있어서 그랬다면 말 할만도 하지만 그럴만한 일이 없는데도 그러하였으니 더욱 참혹하다.

신 최항 신 신숙주 신 성삼문 하교를 받들어 주석을 냈는데 신 이석형이 그 전에 하교를 받은 것으로 인하여 주석을 결정 하였다.

 

 

 

문장의 흐름을 분석하여보면 설원기의 초안을 차천로가 짓고 서(序)는 하위지의 이름를 빌려 또 차천로가 지은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설화, 동화, 전설, 회고록, 소설, 추리, 수필 등의 문장이 총동원 되어 독자가 판단하기를 어렵게 합니다. 사건을 창작 조작하여 사실로 진실로 포장하여 위력을 발휘합니다. 고증 논증을 애써 외면하고『연안차씨약사』에서는 오로지『설원기를』경전으로 하여 문화류씨와 연안차씨를 동원(同源)으로 묶어버리는 망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을 류효금으로 바꿔치기를 하고 있습니다. 허허허허허 그것 참입니다.

출처 :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글쓴이 : 한뜻 류재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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