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시대 요점
- ■ 1대왕 태조왕건 877년-943년 재위기간 918년-943년. 25년 ● 태조 왕건과 민족 대화합의 결정체 "고려" 본관 개성.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 한씨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 정기대감이 되고, 900년 광주·충주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 에서 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侍中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 배현경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 해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 《계백료서》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개성)이다. 태조는 신라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후백제와는 무력으로 맞섰다. 처음에는 군사적인 열세로 후백제에게 계속 패했으나 930년 고창(古昌:지금의 안동)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뒤 935년에 투항해온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신라를 병합했으며, 936년에는 후백제 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통일 직후 태조는 직접 政誡 1권과 誡百寮書 8편을 저술하 여 반포했다. 이것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준수해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이었 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북방을 개척하여 만년에는 서북으로 청천강 하류 安州 지방에서 동북으로 永興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 해의 유민들이 망명해오자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민족융합의 전기를 마련했으며 거란과는 국교 를 단절했다. 943년 죽기 얼마 전에 大匡 朴述熙에게 훈요 10조訓要十條를 남기면서 후세 왕들이 대대로 귀감으 로 삼도록 했다. 훈요10조를 통해서 볼 때, 태조의 정치이념을 뒷받침하고 있는 사상은 불교와 지 리도참설, 유학이었다. 불교와 지리도참설은 새 왕조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으며, 유학은 정치의 실 제적인 실천윤리로서 존중되었다. 특히 태조는 불교를 적극 장려하고 육성시켜 건국초기부터 많은 사찰을 지었고, 국내외의 고승을 극진히 예우했다. 943년 재위 26년 만에 죽었다. 건국초기 왕건은 정주유씨, 평주유씨, 경주김씨, 황주황보씨, 광주의왕씨, 충주의유씨 등 지방호족 딸들과 혼인함. 거란과는 적대관계 - 942년 10월 거란이 사신 30여명과 낙타50필을 보내와 고려와 화친을 제의하 나 단호히 거절함. 왕건은 일찍이 거란이 발해와 동맹을 맺고 있다가 갑자기 의심을 품어 맹약을 배반하고 그 나라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심히 무도한 나라로써 친선관계를 맺을 대상이 못 된다고 못박았다. 그리고 거란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하고 사신은 섬에 귀양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다리 밑 에서 굶겨 죽였다. ● 최응 [898~932]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黃州. 시호 희개. 五經에 밝고 문장이 뛰어나 궁예 밑에서 한림랑으로 있으면서 신임을 얻었다. 915년(신덕왕 4) 궁예가 왕건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울 때 왕건이 변명하자, 장주掌奏로 그 자리에 있던 최응이 붓을 일부러 뜰에 떨어뜨리고 주우러 내려가,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왕건에게 귀띔, 굴하게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그 후 왕건이 즉위하자 지원봉성사를 지내고, 이어 광평낭중 ·내봉경 ·광평시랑 등을 지내면서 태조의 총애를 받 았다. 대광 태자태부 ·사도에 추증,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고려개국공신 4인방 홍유 : ? - 936년 홍유의딸이 왕건의 제26비 경북 의성 출신. 배현경 : ? - 936년 경주출신. 신숭겸 : ? - 927년 전남 곡성출신. 3세때 춘천으로 이사 호는 능산 본관은 평산 평산신씨 의 시조. 왕건과 사냥을 나갔다가 기러기 3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왕건이 날아 가는 기러기 중 3째 기러기의 날개를 맞춰 보라고해서 신숭겸이 화살로 기러기 날개를 정통으로 마 치자 왕건은 그 자리에서 전답 3백 결을 내리고 평산 신씨라는 성을 내렸다. 공산전투 때 왕건을 대신하여 왕건의 복장을 하고 싸우다가 전사함. 복지겸 : ? - ? ● 훈요십조 : 943년 병상에 누워서 후대 왕 들이 명심해야함 10가지를 박술희 에게 구술함. 1. 불교를 진흥시키되 승려들의 사원쟁탈을 금지할 것. 2. 사원의 증축을 경계할 것. 3. 서열에 관계없이 덕망이 있는 왕자에게 왕위를 이을 것. 4. 중국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 것. 5. 서경에 일 백일 이상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도모할 것. 6.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증감 하지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 것. 7. 상벌은 분명히 하고 참소를 멀리하며 간언에 귀를 기울여 백성의 신망을 잃지 말 것. 8. 차령산맥이남 공주강 외각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 말 것. 9. 백관의 녹봉을 증감하지 말고 졸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매년 무예가 특출한 사람에 게 적당한 벼슬을 줄 것. 10.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 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 원 왕실과 혈연관계를 조작한 고려왕실 김관의 의「편년통록」에 실린 왕건 조상들에 얽힌 이야기에 따르면 왕건의 아버지는 왕륭 이며 할아버지는 작제건, 증조부는 당나라 숙종으로 기록되어 있다. 충선 왕이 원나라에 잡혀 있을 때 원나라 한림학사 한 사람이 왕에게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듣건대 대왕의 조상은 당나라 숙종황제 에게서 태어 났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디서 근거한 말입니까? 사실 숙종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대궐 밖으로 나간 일이 없고 안록산의 난이 있었던 때에는 영무에서 즉위 하였으니 어느 틈에 조선에 가 서자식을 둘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충선왕이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편년강목」의 저자인 민지가 대신 대답을 하였다. 그것은 우리 국사가 잘못 쓰여진 것입니다. 사실은 숙종이 아니고 선종 이었습니다. 민지가 숙종을 선종으로 고쳐야 한다고 말하자 한림학사는 선종은 안록산의 난 때(753년) 오랫동안 외방에서 고생하였던 만큼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수긍했다. 하지만 고려왕조의 선조가 선종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제현은 잘못된 이야기라고 논박하고 있다. 즉, 선종이 비록 난리통에 동방으로 왔다는 설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민담에 불과할 뿐, 실록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제현의 주장 대로라면 고려 왕실이 당의 왕족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김관의나 민지는 왜 고려 왕실을 당나라 왕족과 연관시키려 했던 것일까. 당이 멸망하자 수많은 국가들이 난립했지만, 당의 문화와 전통은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왕실이 당 왕실과 혈연 관계 있다는 것은 외교적 측면에서 유리하게 이용되었을 것이 다. 고려 왕실은 이러한 이점을 계산하고 의도적으로 당 왕실과의 혈연 관계를 조작했을 것으로 판 단 된다. 원의 팽창으로 송의 입지가 약해지고, 결과적으로 송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고려 왕실의 입지 역시 약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고려 왕실은 왕족의 권위를 세울 새로운 방향 을 모색해야 했고, 그 결과 당 왕실과의 혈연 관계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고려 중엽 당시에는 이러한 혈연 조작이 여러모로 쓸모있게 사용되었을 것이다.그러나 공민 왕대 이후 반원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에 고려는 더 이상 당 왕실과 혈연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원의 몰락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중국의 정세를 틈타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자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고려는 당 왕실과의 혈연 조작 이 부담으로 작용했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이 고려왕실과 당 왕실의 혈연 조작을 강하게 비판 한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 제2대왕 혜종 912년-945년. 재위기간 943년-945년. 2년 34세 사망. ● 왕자무의 태자책봉을 둘러싼 역학관계 고려실록이 처음 편찬된 것은 제8대 현종 때 1011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궁궐이 불타는 바람에 사초도 함께 소실 되었다. 실록편찬은 바로 이때 소실된 사료의 복원차원에서 1013년 9월 현종의 명으로 '칠대 실록' 편찬에 착수한다. 사초 소실로 과거사를 알 수없자 나이 많은 노인을 찾아다니며 사료수집 작업을 벌이고 사료수집이 완료되자 그것을 토대로 '7대실록' 이 편찬되었다. 고려실록편찬 사료들이 이처럼 허술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혜종, 정종때의 왕위계승 다툼에 대한 내막은 정확하게 기록될 수 없었고 왕규를 역적으로 기록한「고려사」의 역사평가에서 신빙성이 없 는 자료와 정종, 광종의 역사왜곡 정책의 결과라고 볼 수있다. 태조가 죽자 혜종의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고있던 충주유씨세력과 신명순성왕후 소생들인 정종,광종 등이 본격적인 권력팽창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혜종은 박술희를 대광에 임명하고 왕규를 중용하여 그들을 견제하였다. 하지만 왕요와 왕소는 서경세력의 핵심 왕식렴 등과 힘을 합치고 박술희와 왕규 에게만 의존하는 혜종의 태도를 못마땅해 하던 청주 유력가 김긍률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또한 견훤의 사위이자 왕요(정종)의 장인인 박영규와 박수경,수문 형제등도 이들에 동조함에 따라 왕권은 점점 위축되어, 혜종은 침실을 옮겨 다니며 자야할 지경이었다. 왕규는 이러한 현실을 분통해 하며 혜종에게 왕요 형제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고 역모세력을 엄단 할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혜종은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왕소의 두 번째 부인으로 내주면서 화해의 의사를 타진한다. 비록 왕규와 박술희가 보좌를 받고 있긴 했지만 혜종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빈약했고 따라서 혜종은 왕요 형제와 화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혜종의 화해 손짓에도 불구하고 왕요 일파의 왕권위협은 더욱 가속화되고 이에 시달리던 혜종은 마침내 병을 얻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945년 9월 34세의 젊은 나이 로 생을 마감한다. 「고려사」는 박술희가 반란의 뜻을 품고있어 정종에 의해 유배되었다고 쓰고있다. ■ 제3대왕 정종 923년-949년. 재위기간 945년-949년. 집권3년. ● 개경파와 서경파의 정권다툼과 왕요의 등극 개경파를 완전히 제거하고 무력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즉위 초부터 개경세력과 백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이 때문에 그는 서경으로 천도 하기위해 많은 인력을 강제 동원하여 평양에 왕성을 쌓기 ...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Allen(full******)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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