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文化柳氏) 시조(始祖)의 기원(紀元)
역사적(歷史的) 배경(背景)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 철원(鐵圓:지금의 鐵原)에 도읍을 정하자 왕건은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왕건은 궁예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군사활동을 하여 큰 공을 세웠다. 즉, 900년에는 광주(廣州)·충주·청주(靑州: 지금의 淸州) 및 당성(唐城:지금의 南陽)·괴양(槐壤:지금의 槐山) 등의 군현을 쳐서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아찬(阿飡)이 되었다.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이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부근 10여개 군현을 쳐서 빼앗아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이해에 양주수(良州帥) 김인훈(金忍訓)이 위급함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달려가 구하여주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해에 그동안 쌓은 전공으로 알찬(閼飡)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波珍飡)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왕건은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하여야만 하였다. 환선길(桓宣吉)·이흔암(伊昕巖) 등의 반역사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하였던 것이다.
신라·후백제·고려의 후삼국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부터였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친화정책을 썼다. 이해 10월에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후백제와 고려는 서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후백제와 결전하여 이기기 위하여서는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초기에는 후백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화전(和戰)양면정책을 썼다. 이처럼 신라·후백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새 왕조의 안정과 국력신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체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에 대하여 군사적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로서도 이 지역을 사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을 도운 사건내용
930년 고려 왕건은 후백제 견훤보다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고창(古昌:지금의 안동지방) 전투는 신라로 침입하려는 후백제 견훤의 진격을 막아야 하는 중요한 전투였다. 현대전에도 원활한 군사물자 보급이 전투의 승리요인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도 왕건에게는 군사물자 보급이 가장 큰 문제요 어려움이었다.
이 때 문화류씨 시조인 류 차달(추정 897년~?)은 황해도 유주(문화현)의 토착(土着)세력(勢力)으로 자체(自體)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는 대단한 부호(富豪)였다. 당시 군수물자 운반수단으로 수레를 이용했는데 군사물자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왕건의 부대에 수레 1천대를 제작하여 군량미와 군수물자 보급을 지원하였다. 토착세력 중에서도 수레 1천대를 제작하여 군량미와 전투 장비를 실어 보급할 수 있었다는 것은 公이 황해도 일대에서 큰 세력을 가진 호족(豪族)이였다는 것이 증명된다. 930년 태조는 고창(古昌:지금의 안동지방)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이로서 왕건은 군사적인 열세를 만회 할 수 있었다.
935년 후백제의 왕실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하였으며, 또 같은 해 10월에는 신라왕의 자진항복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후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마침내, 936년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지금의 경북 善山)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문화류씨 시조의 기원
文化柳氏의 始祖인 柳車達은 後三國 時代(877-943)에 등장(登場)한다. 고려왕조(高麗王朝)의 실록(實錄)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출생과 사망년도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897년 신라(新羅) 52代 효공왕(孝恭王)1년에 출생하시고, 60歲까지 생존하셨다면 957년 고려 4代 光宗 8년에 사망으로 추정된다. 高麗 太祖 王建을 도와 後三國 통일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고려조정은 公을 開國功臣에 봉했고, 大丞의 지위를 부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출생은 황해도 유주(현 지명으로 신천군 문화면)에서 출생하셨으며, 당시 公의 집안은 황해도 유주의 토착세력으로 수천의 사병을 거느린 대 부호였음이 고려태조 왕건을 군수물자로 도왔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公의 선대에 대한 기록이 없어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왕건(王建)은 삼한을 통일한 후 公을 ②대승(大丞)의 작위(爵位)를 부여하고 삼한(三韓) 개국공신(開國功臣)에 봉(奉)했다. 이 기록이 ⑨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통합삼한익찬(統合三韓翊贊)공신(功臣)2등(等)에 봉(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헌 상(文獻 上)에 공(公)에 대한 기록이 여러 있다. 다만 출생(出生)과 사망(死亡)의 연대(年代)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공(公)에 행적(行蹟)은 기록되어 있는데, 文化柳氏는 차달(車達)을 시조(始祖)로 하여 가계(家系)가 이루어진다. 시조의 출생과 사망은 後三國 時代(877-943)의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 생존(生存)시(時)의 인물로 왕건의 출생, 사망의 기준과 公의 후손들이 대대로 고려조정에 출사하여 후손들의 기록에서 공의 출생과 사망년도를 추정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최초의 족보는 1423년 조선(朝鮮) 4代 세종(世宗) 5년에 대승공(大丞公) 14世 검한성공(檢漢城公) 원현(元顯)의 2男인 양도공(良度公) 영(頴)이 창저(創著)한 문화류씨(文化柳氏) 세보(世譜) 영락보(永樂譜)이다. 다음으로 1476년 9代 성종(成宗) 7년에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로 간행되었다. 이후 1565년 13대 명종(明宗) 20년에는 『문화류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血族)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標本)으로 하여 명문세족(名門世族)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族譜)를 간행(刊行)하기 시작하였다. 영락보(永樂譜)와 가정보(嘉靖譜)에서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을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다.
2010년 8월
대승공 31세 검한성공파 함안종중 연창공계 류 인 춘 기술
태조(太祖) 왕건(王建)
출생은 신라 헌강왕 3년(877년)에 출생하여 943년 66세에 사망했다. 재위 기간은 25년(918∼943)이다. 본관은 개성(開城).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 출생.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柳大丞公의 묘(墓)는 황해도 신천군 달천면 초학리에 종제(宗制)와 종답(宗畓)과 제단(祭壇)이 많이 있는 구월산의 남록인좌(南麓寅坐) 에 왕능(王陵) 같이 큰 봉분(封墳)으로 있어 해방전에 황해도에서 柳陵이라고 물으면 아이에서 어른까지 다 알고 있는 구월명산의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는데 해방 후 공산지옥이 된 후 宗祖님의 산소(山所) 가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알 수 없어 궁금할 따름이다.
그래서 해방 후 柳大丞公의 공적(功績)이 남아있는 충남 공주 동학사 경내(境內)의 동계사에 신라의 충신(忠臣) 재상(宰相) ⑦박제상(朴堤上)과 함께 배향(配享) 을 받고 계시며, 전남 광주의 대동사는 후손들의 숭조(崇祖) 열성(熱誠) 으로 柳大丞公을 주벽(主壁)을 모시는 대동사가 있어 춘추향사(春秋享祀)를 받고 계시다.
차류대종보(1987년 4월 29일 발행) 42페이지에서 발췌
용어(用語) 해설(解說)
①묵방동기의 기록은 公은 이름이 해(海)이며, 자(字)는 응통(應通)이며, 號는 아사(鹅沙)이신데, 부인은 金氏(신라김씨)라, 유주(儒州)에 거(居)하실 때에 가세(家勢)가 부유(富裕)하고, 천성(天性)이 부드럽고 지혜(智慧)가 뛰어나며, 인품(人品) 역시 고결(高潔)하며, 머리는 칠흑(漆黑) 같고, 살결은 백옥(白玉) 같고, 마음은 옥(玉)과 같이 신인(神人)이셨다고 전(傳)한다.
⑧동국역대기(東國歷代記)에는 公께서 3國이 서로 싸우고 있을 때 儒州에 居住하셨는데, 당시 후백제 견훤이 南民을 학살하므로 고려 태조가 토벌(討伐)하려고 하였으나, 군량(軍糧)의 공급이 걱정되고 있을 때, 측근(側近)들은 남방(南方)은 토지가 비옥하니 민간(民間)의 남은 곡식을 징발(徵發)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공(公)께서 백성의 곡식을 약탈하는 것은 난(亂)을 구(救)하기 위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대의(大義)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내 창고에 곡식이 있으니, 이를 공급하겠다고 자청하여 하룻밤 사이에 수레 천대를 만들어 군량을 공급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으로 공헌(貢獻)하였으며, 이후 왕건의 3國 통일대업(統一大業) 논공행상(論功行賞) 때에 공(公)은 류씨(柳(氏) 성(性)과 ②대승(大丞)의 높은 벼슬의 작위(爵位)를 받으시고 ③벽상2등공신(壁上二等功臣)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④흥률사 갑자중수기에 보면 北方洞에 오가촌이 있어 닭과 개소리가 마주 들리는 곳에 神人이 한 분 계셨는데 미안(美顔)이 청수(淸秀)하고, 머리가 광택하며, 피부가 옥설(玉雪)같고, 심지(心地)가 광명(光明)하며, 도의(道義)가 명철(明哲) 하였다. 하루는 꽃나무정자아래서 꿈을 꾸고 있는데 청의(靑衣) 동자(童子)가 나타나서 왕장군(王將軍)의 진중(陣中)에 군량이 없어 위급한 상태에 있으니 빨리 가서 구제(救濟)하라는 신(神)의 계시(啓示)를 받고 신인(神人)이 감명(感銘)하여 충절(忠節)을 자책(自責)하고, 하룻밤 사이에 수레 천대를 만들어 곡간의 곡식을 운반하려고 할 때 영(靈)으로 청의홍의(靑衣紅衣) 신군(神君) 천(千) 여명이 내려와 이를 운반 공급하였다. 이에 왕장군은 견훤과의 대첩(大捷)에 대승(大勝)을 거두게 됐다. 후세학가(後世家)들은 공(功)을 ⑤탕(湯)의 이윤(伊尹)과 ⑥주(周)의 여상(呂尙)과 비유하여 神人의 姓名을 柳車達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①묵방동기
한국고대사산책 (문답으로 엮은)역사비평서 2008.12.03
②대승(大丞)
고려 초기 제도가 정비되기 전에 문 ·무관에게 수여되었으며, 16관계 중 5위에 해당하였다. 995년(성종 14) 문무의 관계를 나눌 때 흥록대부(興祿大夫)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이 호칭은 향직 3품으로 존속, 비관인층(非官人層)과 지방 호족들에게 수여된 것으로 보인다.
③벽상공신
고려시대 공신(功臣)에게 내린 호(號) 가운데 하나로 정1품에 해당하는 공신들에게 내렸다. 무인집권기에 공신호를 받은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의 초상을 조정의 벽에 붙인 데서 지어진 이름이다.
④ 흥률사갑자중수양상소기서(興栗寺甲子重修梁上所記書
년대: 1356년(공민왕 5년)?
* 설명: 신비로운 표현들로 이루어진 글이다. 믿을 수 있는 글인지 판단이 요구된다. 글의 제목은 “흥률사를 갑자년에 중수하다가 대들보 위에서 발견한 기문(記文)의 글”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갑자년은 1564년(명종 19년)인데, 그 글 속에는 1356년(공민왕 5년) 4월에 쓰인 글이라고 밝혀져 있다. 흥률사는 구월산에 있는 절이다.
* 줄거리: 흥률사의 기원에 대한 언급을 한 후에 그 동네의 한 촌락이 있어 56호가 거주하고 있는데 그곳은 신비한 동네라는 묘사가 이어진다. 그런데 그곳에 한 신인(神人)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홀연히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왕장군(왕건을 의미)이 군량이 떨어졌다고 알렸다. 신인은 하루 밤에 수레 천 대의 군량을 꾸렸는데 그 수송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때 흥률사의 부처가 신군(神軍) 천여명을 내어 잠깐 사이에 운송하였다. 그리하여 전공을 크게 세워 삼한을 통합하였다. 그리하여 사명(賜名: 이름을 내려줌)하여 류차달이라 하였다(因其錫名柳車達). 따라서 이 절의 영험이 아니었다면 왕장군이 삼한 통합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생략했지만 신인의 묘사가 아주 훌륭하다. 여기서 왕건이 '류차달(柳車達)'이라는 이름을 내려준 것으로 되어 있고, 왕건은 주로 왕장군이라 불리고 있다.
⑤탕(湯)의 이윤(伊尹)
중국 고대 상(商)나라를 창건한 왕. 걸왕을 명조(鳴條)에서 격파하여 패사시키고 박(亳)에 도읍하여 국호를 상(商)이라 정하여, 제도와 전례를 정비하고 13년간 재위하였다.
이름 이(履) 또는 천을(天乙) ·태을(太乙). 탕은 자이며, 성탕(成湯)이라고도 한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시조 설(契)의 14세에 해당한다. 당시 하(夏)왕조의 걸왕(桀王)이 학정을 하였으므로, 제후들의 대부분이 유덕(有德)한 성탕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걸왕은 성탕을 하대(夏臺)에 유폐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재화와 교환하여 용서하였다.
탕왕(湯王)은 현상(賢相) 이윤(伊尹) 등의 도움을 받아 곧 걸왕을 명조(鳴條)에서 격파하여 패사시켰다. 그리고 박(亳)에 도읍하여 국호를 상(商)이라 정하여, 제도와 전례를 정비하고 13년간 재위하였다. 그가 걸왕을 멸한 행위는 유교에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한 일과 함께, 올바른 ‘혁명’의 군사행동이라 불리고 있다. 《서경(書經)》의 탕서편(湯誓篇)은 그때의 군령(軍令)이라 전해진다.
⑥주(周)의 여상(呂尙)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제(齊)나라 시조가 되었다.
본명 강상(姜尙)이다.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렸고, 태공망이라고 불렀지만 강태공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武王)을 도와 상(商)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 제후에 봉해져 그 시조가 되었다.
강태공은 동해(東海)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고, 집안을 돌보지 않아 그의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전한다. 하루는 웨이수이강[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인재를 찾아 떠돌던 주나라 서백(주나라 문왕이 됨)을 만났다. 서백은 노인의 범상치 않는 모습을 보고 그와 문답을 통해 인물됨을 알아보고 주나라 재상으로 등용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를 태공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주나라 무왕의 아버지인 태공(太公)이 바랬던(望)인물이었기에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강태공 대한 전기는 대부분이 전설적이지만, 전국시대부터 경제적 수완과 병법가(兵法家)로서의 그의 재주가 회자되기도 하였다. 병서(兵書) 《육도(六韜)》(6권)는 그의 저서라 하며, 뒷날 그의 고사를 바탕으로 하여 한가하게 낚시하는 사람을 강태공 혹은 태공이라 하는 속어가 생겼다.
⑦박제상(朴堤上)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왕제(王弟) 복호(卜好)를 데려왔으며, 왜(倭)에 볼모로 간 왕제 미사흔(未斯欣)을 돌려보내고 자신은 체포되었는데, 왜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충절을 지키다가 피살되었다. 부인은 그를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박제상(朴堤上)은 4세기 말 5세기 초반에 활동한 신라 사람으로, 신라의 변경 지대인 양산 지방의 관리(혹은 세력가)로 있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왜·백제로부터 전방위 압박을 받고 있었고,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왕자 두 명을 고구려와 왜에 각각 인질로 보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두 아우를 구하고자 하는 눌지왕의 명을 받들어 박제상은 목숨을 걸고 적국에 들어가서 두 왕자를 생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박제상은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야 했다. 회유하는 왜왕을 향해 “차라리 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자(臣子)가 되고 싶지는 않으며, 차라리 신라의 형장(刑杖)을 받을지라도 왜국의 작록(爵祿)은 받고 싶지 않다.”고 일갈하였다. 박제상은 충의를 먼저 하고 자신을 뒤로 여기며, 지절을 소중히 하고 그 자신을 가볍게 여기는 장부였다. 이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박제상을 충신의 사표로 삼아 그 충절을 본받아 기리고 있는 것이다. 박제상 이야말로 양산이 낳은 전례 없는 충절이라 할 수 있다.
⑧동국역대기(東國歷代記)
저자 : 박희창監.노영철發 : 서진출판사, 발행 : 1993.1.25
⑨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조선(朝鮮) 성종(成宗) 때에 편찬(編纂)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중종(中宗)의 증수 명에 따라, 1530년(중종(中宗) 25년)에 완성(完成)한 조선(朝鮮) 전기(前期)의 대표적(代表的)인 ❶관찬지리서(官撰地理書).( 55권 25책)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朝鮮) 전기 지리지의 集成編(집성편)으로, 속에 실린 지도와 함께 조선(朝鮮) 말기까지 큰 영향을 끼친 지리지이다. 이 책은 지리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치 ㆍ 경제 ㆍ 역사 ㆍ 행정 ㆍ 군사 ㆍ 사회 ㆍ 민속 ㆍ 예술 ㆍ 인물 등 지방사회의 모든 방면에 걸친 종합적 성격을 지닌 백과전서적 서적이다. 조선(朝鮮) 중종 때 李荇(이행)ㆍ洪彦弼(홍언필)ㆍ李思鈞(이사균) 등이 왕명으로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을 증보ㆍ간행한 우리나라 인문 지리서로서( 55권 22책임.) 우리나라 각 도의 지도, 변천 과정, 산천, 토산물, 인물 등이 자세하다.
❶관찬지리서(官撰地理書)
국가기관에서 편찬한 지리서(官=벼슬관, 撰=지을찬, 地=땅지, 理=다스릴리, 書=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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