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주환, 2011. 5. 12.
정복규씨는 오랫동안 성씨 전문기자로 활약해 온 분이다. 그동안 연안차씨와 문화류씨에 대해서도 몇 차례 글을 쓴 것이 확인된다. 필자(柳)가 확인한 것이 다음과 같다.
(1) "정변의 역사, 류차달*과 연안차씨"(2007. 4. 10.): 잘 못된 류차동원설을 그대로 옮기면서 류씨와 차씨의 내력을 기술하고 있다. (* 필자가 '유'를 '류'로 정정함.)
(2) "정복규의 성씨칼럼, 차원부와 연안차씨"(2010. 8. 23.):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3) "정복규의 성씨순례, 문화류씨(文化柳氏)"(2010. 11. 24.): 문화류씨의 내력을 소개하면서 "한편 그동안 문화류씨가 연안차씨는 선계(先系)가 같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최근 보학계(譜學界)와 사학계의 연구를 통해 잘못된 사실로 판명됐다."고 밝히고 있다.
필자(柳)는 2010년 11월 말에 우연히 정복규씨의 글을 접하였다. 그런데 이미 그 수 년 전부터 문화류씨는 대종회 차원에서 연안차씨와 혈연이 없음을 확인하고 세상에 그 사실을 천명하였으며 또한 기존의 관계('차류대종회', '대승장학회' 등)를 모두 해소하였으며, 인터넷을 통해서도 널리 사실을 알려왔다. 그런 시점에서, 비교적 짧은 시간 간격으로 쓰인 (2)번과 (3)번 글의 내용이 서로 상충되고 있음을 발견하고 의문을 갖게 되었다. 보통 사람이 쓴 것이라면 잘 모르고 그랬으리라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겠지만, 끊임없이 최신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기자'의 경우라면 벌써 몇 년 전에 확인되고 천명되어 온 사실을 간과했다면 지적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필자는 정복규씨의 연락처를 알아내서 2010년 12월 1일에 이메일을 보냈다. (참고로 아래에 첨부하였다.) 대개 류차관계에 대한 학계의 연구를 소개하면서 정복규씨의 정확한 판단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나의 이메일에 아무런 답장이 없었는데, 최근 그에 대한 답장으로 볼 수 있는 글이 게재된 것을 보았다.
(4) "정복규의 성씨순례, 연안차씨(延安車氏)"(2011. 4. 28.)
주소: http://blog.daum.net/12501436/15084668
그 글의 시작이 이렇다.
"연안차씨의 시조 류차달(柳車達)을 둘러싸고는 그동안 이견이 끊임없이 제시됐다. 가장 큰 문제는 차씨와 류씨의 뿌리가 같으냐, 틀리냐 하는 문제였다."
음... 연안차씨의 시조가 대승공(류차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연안차씨들 문중에서는 영의정까지 지낸 어떤 문화류씨 인물께서 대승공의 성씨를 복성(復姓)인 '류차'라고 썼다거나, 18세기쯤에나 대승공의 초명(初名)이라고 만들어진 '海'라는 이름이 대승공의 진짜 이름이라거나 하는 억지 주장을 해왔어도 대승공을 자기 시조라 한 적은 없다. 그들은 차효전을 시조로, 또 그 위의 몇 십 대 전 조상이라는 차무일을 득성시조라 하고 있다. (사족으로, '틀리다'는 말은 '다르다'라고 써야 맞다.)
하여간, 정복규씨는 류씨와 차씨의 뿌리에 대한 연안차씨 주장은 내용까지 자세하고 장황하게 소개한 후 문화류씨의 주장은 구체적인 내용은 없는 주장들 자체만 짧게 소개하고 있다. (이후는 제목에 밝힌 주제인 "연안차씨" 문중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연안차씨 주장은 "차원부설원기"에서 조작이 시작된, 류씨와 차씨가 뿌리가 같다는 것이며, 문화류씨의 주장은 류씨와 차씨가 뿌리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분량의 불평등은 글의 주제가 "연안차씨"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문제 제기에 대한 '성씨전문기자'로서의 충분한 고찰이 느껴지지 않아 아쉽게 느껴졌다.
또한 설원기가 위서라는 문화류씨 문중의 주장에 대해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라고만 말하고 있다. 애초에 필자가 정복규씨에게 보낸 이메일에 상세한 역사 연구자료들을 제시한 것은, 정복규씨가 일반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연구논문들을 읽고 그에 대해 '성씨 전문가'로서의 판단을 제시해달라는 엄중한 요구였던 것이다. 그저 양쪽의 주장을 제시하고 마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류차동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차씨(우리나라 차씨)가 고려시대 이전에 존재했었다는 근거를 단 한 개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고려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선계에 대해 운운하고, 여러 연구자료들이 제시된 지금도 같은 주장을 반복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화류씨 문중에서는 류씨와 차씨의 관계에 대해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실하게 입장을 밝히고 있다. 반면에 연안차씨 문중의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류차동원설이 조작이라는 사실 제시가 전혀 없었다는 듯이, 옛날에 주장되었던 내력만 그대로 싣고 있을 따름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차류대종회'라는 큰 단체가 해산된 일련의 사태에 관여한 당사자들인데도 말이다.
결론은 확실하다. "차원부설원기"는 위서이며, '류차동원설'은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날조이다. "차원부설원기"를 담은 광양의 "차문절공유사목판"에서 국가기관에서 판각했다고 명기하고 있는 것도 날조이고, 차원부가 시호를 받았다는 교지(敎旨)도 날조이다. 차씨 자체가 신라시대에 없었는데, 그때의 왕권을 대리했던 인물이라는 차건갑이라는 가공인물의 무덤이 부산 기장의 만화리 석총(碩塚: 큰 무덤)이라는 주장도 날조이다. 언제까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가문조작, 역사조작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일까.
성씨 전문가인 '성씨전문기자'가 이런 중대한 문제 제기에 판단을 회피하고 있고, 게다가 장황하게 연안차씨의 주장을 실어서 문제의 본질을 여전히 호도(糊塗)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정복규씨의 다른 글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정복규씨가 필자의 연락에 대한 답을 직접 하지 않고 공개적인 글을 쓰는 것으로 답을 한 것으로 간주되어, 필자 역시 공개적으로 필자의 의견을 밝혀 그 추가 답장으로 삼았다. 이 점 오해 없기를 바란다.
2011. 5. 12.
翰軠 류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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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2010년 12월 1일자 이메일 :
Date: Wed, 1 Dec 2010 16:29:45 +0900 (KST)
To: 정복규
From: 류주환
Subject: 차원부설원기에 대한 문의
(전략) 다름 아니라, 어떤 분께서 제게 "OO신문사 사장님께서 보학의 대가이시고 각 성에 대한 사전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차류왕문의 내력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하다고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어찌된 연유인지를 알고자 이렇게 갑자기 연락하게 되었습니다. 결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차류왕문'(車柳王門)이란 말이 암시하는 바는 바로 "차원부설원기"와 그 내용을 받아들인 문화류씨의 족보인 기사보(1689년)에 실린 이른바 "원파록"에서 시작된 류차동원설(柳車同源說: 문화류문과 연안차문이 동원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용어는 2005년초부터 제가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인터넷 사전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류차'로 순서를 쓰는 것은 그 이야기에 의하면 문화류씨의 시조 류차달(柳車達)에게서 두 아들이 나와서 형은 연안차씨가 되었고 동생은 류씨를 계속 이어갔다고 하여 아버지의 문화류문에서 아들의 연안차문이 나왔기에 그런 것입니다. 사장님께서 잘 아시다시피, 이 류차동원설이란 문화류씨와 연안차씨 집안의 조상이 동일하고 그것이 위로 올라가면 류씨, 차씨, 왕씨, 사씨, 희씨로 거슬러 중국의 전설적 제왕인 황제(黃帝)에까지 이어진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차원부설원기"라는 문헌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16세기 후반에 세상에 나왔다고 밝혀진 것인데, 지금까지 400여년 이상 그 내용이 류문, 차문, 왕문뿐만 아니라 사림(士林)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류문이나 차문, 특히 후자에서는 가히 '신봉'되어 왔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10여년동안 류문과 차문 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일련의 사태가 발생하였고 그 여파로 중심에 서 있는 "차원부설원기"(이하 설원기)와 "원파록"이 철저히 검토되고 연구되었습니다. 그 결과 조선시대의 선인들뿐만 아니라 현대의 역사학자들도 설원기가 위서(僞書)라 단정 짓고 있음을 알았고, 아무리 검토해 보아도 설원기가 내용이나 형태 면에서 모두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문헌임을 파악했습니다. 이어서 문화류문은 사실이 아닌 류-차 관계를 모두 해소하였고, 2007년과 2008년에 걸쳐 '차류대종회'를 해체하고, 문화류씨유래비(대전 뿌리공원)와 대동보(무자보, 2008년), 공식 홈페이지 (http://moonhwaryu.kr/) 등을 통해 류씨와 차씨는 관계가 없음을 세상에 천명하였습니다.
참고 문헌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차원부설원기 비평" : http://kenji.cnu.ac.kr/ryu/roots/seolwon-critic-2.htm
(저의 글입니다. 기타 여러 자료들이 http://kenji.cnu.ac.kr/ryu/ 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2. 이수건, 이수환,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 대구사학, 86집 (2007년 2월).
("설원기는 조작된 위서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이 책은 편찬체제, 내용서술, 등장 인물들의 행적이나 序 · 記文, 48인의 應製詩 등 어느 것을 막론하고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 없다.")
3. 김난옥, "여말선초 정치변동과 배타적 가문의식(家門意識) - 정도전을 중심으로", 고려사학회, 2007년, p.243-274.
("설원기는 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위작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연안차씨와 문화류씨가 동일 조상에서 나와서 世系가 같다는 설원기의 주장은 더더욱 신빙하기 어렵다.")
4. 박은정, "≪차원부설원기≫ 이본의 유통과 그 배경", "한국사론" 56권, p.209-275 (2010)
("설원기의 내용 중 위작이라고 판단할 확실한 부분은 무엇인지, 내용 중 문제가 되는 점을 간략히 지적해보고자 한다." "설원기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위작일 가능성이 높고 16세기에 생존한 차식(車軾) 부자(父子)대에 줄거리가 완성되어 유통되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신문사에 계셔서 자료들을 쉽게 입수할 수 있으시리라 믿어 위 자료들은 따로 첨부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원하시면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상과 관련하여, 인터넷에서 정 사장님의 글 가운데 문화류씨와 연안차씨가 나온 글을 몇 개 찾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첫째가 "정변의 역사, [류]차달과 연안차씨"(2007. 4. 10.)였는데 아시다시피, 위의 상황 변화에 따라 몇 년 전부터, 그 내용 중 선계(先系)에 대한 설명은 모두 16세기 후반 이후의 역사 조작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 둘째가 최근의 "정복규의 성씨순례, 문화류씨(文化柳氏)"(2010. 11. 24.)인데 위의 상황 변화를 인식하시고 "한편 그동안 문화류씨가 연안차씨는 선계(先系)가 같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최근 보학계(譜學界)와 사학계의 연구를 통해 잘못된 사실로 판명됐다."(대략 제가 썼던 구절인 것으로 짐작됩니다)고 명기하셨습니다.
그런데 2007년의 글은 류차관계가 확실하게 정리되고 있을 즈음의 글이라 논외로 하더라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세 번 째 글 "정복규의 성씨칼럼, 차원부와 연안차씨"(2010. 8. 23.)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사장님께서는 그 말미에 류차동원설에 입각한 표현을 하고 계시고, 전체적으로 류차동원설의 폐기로까지 이어진 설원기의 위서 판정에 대한 인식은 보이지 않은 채 설원기의 내용을 옮기고 계셨습니다. 단언하건대, 설원기는 온갖 역사 조작과 신분관념의 왜곡으로 얼룩진 추악한 문헌입니다.
저는 진실의 전파를 통해 조금이나마 사회를 반듯하게 만들고자 하는 일념으로 설원기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결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오니 잘 살펴주셔서 위의 내용들에 대해 보학에 밝으신 사장님의 귀한 의견을 들려주시면 큰 은혜이겠습니다. (후략)
2010. 12. 1.
대전에서 류주환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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