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제공=광주안씨 은둔학자
=========================
역사적 인물 이면엔 빛과 그림자 |
|
기본 | 2008/09/20 (토) 14:28 |
| ||||
충신이 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성삼문 이야기는 고려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 이야기와 함께 조선 500년을 이어온 양대 '충신(忠臣)
신화'의 하나였다. 일편단심(一片丹心).
그러나 정작 실록을 보면 성삼문의 '행적'에 의문이 가는 대목이 한 둘이 아니다. 첫째 그는 왜 1453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일파를 제거한 계유정난 직후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정난공신 3등'에 책록되었을까?
물론 이에 대해서는 성삼문이 적극 참여해서라기보다는 수양대군이 회유 차원에서 포함시켰다는
설명이 있긴하다.
둘째 2년 후인 1455년 9월5일 수양대군이 결국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한 좌익(佐翼-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보좌한 공이 있다는 뜻)공신(功臣)을 정할 때도 성삼문은
3등공신에 책록됐다.
이때는 분명한 공이 있었다. 1455년 윤6월11일 수양이 왕위를 이어받을 때 동부승지였던 성삼문이
옥새(玉璽)를 수양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셋째 이듬해인 1456년 6월 성삼문을 비롯해 훗날 '사육신'으로 불리게 되는 뜻있는 인사들이 세조를 내쫓는 거사를 꾸미다가 발각돼 참화를 빚게 되는데 실은 그에 앞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등이 미리
결행을 주장했으나 성삼문 등이 머뭇거리는 바람에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실은 거사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이 성삼문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는 죽는 과정이 장렬했기 때문에 훗날 사육신을 대표하는 충신(忠臣)으로 추앙을 받게 된다.
이런 성삼문의 행적에 대해 일찍이 비판적 시각을 보였던 인물이 있었다.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심수경(沈守慶 1516년 중종 11년~1599년 선조 32년)이다.
그는 '견한잡록(遣閑雜錄)'이라는 문집에서 성삼문이 수양에게 옥새를 올리던 때의 일을 거론하며
이렇게 논평했다.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대신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될 때 성삼문은 집현전 숙위(宿衛 당직)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훈에 참여하였다.
성삼문이나 김질 등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승지(禮房承旨-예조 담당 승지)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失聲痛哭)
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이라든지 선위(禪位)할 때 실성통곡한 정상을
의심하고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오활(迂闊)하다고 하겠다.'
한 마디로 세조가 좀 더 세심하고 치밀했다면 성삼문의 '어색한' 행동은 훨씬 일찍부터 요시찰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심수경의 결론은 단호하다. '대사를 이루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오활하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성삼문이 충신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흔히 뜻만 크고 일이 치밀하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비판한 것이다.
중종 때의 조광조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개혁의 화신', '미완의 개혁사상가' 등으로 극찬 일색이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사림계열의 인사들은 조광조를 깍듯이 받들었다.
중종 12년(1517년) 중종의 총애를 받던 신진사림 조광조는 "일부에서는 스승을 찾거나 벗을 사귀는
사람을 화태(禍胎-화의 씨앗)라 하지만 사우(師友)의 도가 있은 연후에야 인륜이 밝아지는 법"이라며
당파 형성의 조짐을 이루던 사림파를 적극 옹호한다.
그러나 결국 기묘사화의 원인을 제공함으로써 "조광조는 화태"라는 비판을 이미 당대에 받아야 했다.
선조 즉위 초 영의정 이준경은 신왕(新王)의 학문연마를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의 후배이기도 했던 명유(名儒) 이황을 초빙했으나 이황은 한양에 잠시 머물다가 곧장 고향으로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이에 이준경은 이황의 이같은 행태를 '산새(山禽)'에 비유했다.
게다가 이준경은 선조 5년 세상을 떠나며 선조에게 남긴 유서에서 당쟁(黨爭)의 조짐이 있다며
사실상 이이를 지목했다. 조광조 이후 또 하나의 화태로 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이황은 남인(南人)의 정신적 뿌리가 되고 이이는 서인(西人)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특히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세상이 200년 이상 계속되면서 '조선 최고의 정승'으로까지 당대에
추앙받았던 이준경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에서 사라져야 했다.
결국 역사적 평가는 붓을 쥐는 평가자의 뿌리나 주변에 유리하게 이뤄지는 것인지….
입력 : 2008.09.20 02:43 |
=============================
출처 : 廣州 安 씨
글쓴이 : 안병식..밀양사포 원글보기
메모 :
'문화류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삼족을 멸하라! 그런데...삼족(三族)이 누구야? (0) | 2011.02.14 |
---|---|
[스크랩] 호로 새끼를 찾아서... (0) | 2011.02.14 |
[스크랩] 조선시대 14-16세기에는 부계.모계 동등했다는 연구물. (0) | 2011.02.14 |
[스크랩] 고려시대에 이미 가보(家譜), 가첩(家牒)이 있었다. (0) | 2011.02.14 |
[스크랩]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결로 일어난 조선조의 사화(士禍) (0) | 2011.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