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문화 류씨 류관(柳寬)의 배위가 광주안씨인가?

ryu하곡 2011. 2. 14. 20:21

◇ 류관(柳寬)의 사적(事績)

서기 1346(고려 충목왕 2~서기 1433(조선 세종 15)년.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문신(文臣). 처음 휘(諱)는 관(觀), 처음 자(字)는 몽사(夢思), 뒤에 휘(諱)는 관(寬), 고침. 호(號)는 하정(夏亭). 세종 8년(1426, 丙午)년 4월 13일에 셋째 아들 계문(季聞)이 충청도 관찰사가 됨으로 계청(啓請)하여 이름을 관(觀)을 관(寬)으로 자(字)는 경부(敬夫)로 고쳤다. 서기 1371(공민왕 20)년에 문과(文科)에 급제, 전리정랑(典理正郞)․전교부령(典校副令)․성균사예(成均司藝)․내사사인(內史舍人)․사헌중승(司憲中丞)을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建國) 후(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1397(태조 6)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대사성(大司成) 이어 형조(刑曹)와 이조(吏曹)의 전서(典書)를 지냈고, 서기 1400(정종 2)년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를 역임․ 계림부윤(鷄林府尹)을 역임하다가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로 전임(轉任), 태종(太宗) 초(初)에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서기 1406(태종 6)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직(兼職), 이듬해 『太祖實錄(태조실록)』 편찬(編纂)에 참여(參與)하였다. 서기 1418년 세종이 즉위(卽位)하자 다시 좌빈객(左賓客)을 겸임(兼任), 서기 1421년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고, 1424년 우의정(右議政)에 승진(昇進)하여 『高麗史(고려사)』를 수교(讎校)하여 찬진(撰進), 세종(世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뽑히어 기록되었으며, 학문에 뛰어나고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황해도(黃海道) 문화(文化)의 정계서원(程溪書院)에 제향(祭享),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시니 근학호문(勤學好問:배움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하여 문(文) 일덕불해(一德不懈:한결같이 덕을 게으르지 하지 않았다)하여 간(簡)이다.

묘소(墓所)는 경기도(京畿道) 양평군(楊平郡) 강하면(江下面) 동호리(東湖里) 유좌(酉坐)로 쌍분(雙墳)으로 표석(表石)에 「朝鮮右議政諡文簡公柳寬之墓」(조선우의정시문간공류관지묘) 묘의(墓儀)는 장군석(將軍石) 한 쌍(雙), 장명등(長明燈) 일좌(一坐)와 신석우(申錫愚)가 짓고, 김홍집(金弘集)이 쓰고, 박용대(朴容大)가 전자[篆]한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배위(配位)는 광주군부인(廣州郡夫人) 안씨(安氏)이니 슬하(膝下)에 3남(男) 맹문(孟聞)․중문(仲聞)․계문(季聞)을 두었다. 아버지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역임(歷任)한 기(器)이고, 할아버지는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판전시사(判典寺事)를 역임한 해(海)이고, 증조(曾祖)는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판첨의사(判僉議事)를 지낸 수육(壽育)이다.

 

배위(配位)는 풍주군부인(豊州郡夫人) 이씨(李氏)이니 슬하(膝下)에 1남(男) 이문(異聞)을 두었다. 아버지는 전서(典書)에 오른 송(悚)이고 할아버지는 봉익대부(奉翊大夫) 호군(護軍)을 지낸 목(牧)이고 증조(曾祖)는 정순대부(正順大夫) 상호군(上護軍)을 역임(歷任)한 화(華)이고 외조(外祖)는 안동(安東) 김안부(金安富)이다.

 

*배위는 전배.후배 두 사람인듯하다.

 

 

문화류씨수원종친회 불로그(http://blog.paran.com/myomyodan)에서 퍼온 글인데 柳寬의 配位가 우리 광주안씨 18세 전농판사공 휘 器선조의 따님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우리 족보에는 기록이 없다.

두루 고증할 일이다.

 

하정(夏亭) 류관(柳寬)
조회(22)
종친회 기록 | 2008/08/03 (일)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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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 남향 언덕에 있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류관(1346∼1433)의 묘.
지정번호 경기기념물 제62호
지정연도 1981년 7월 16일
소재지 경기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 산157
시대 조선시대
분류
1981년 7월 16일 경기도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되었다. 묘역의 규모는 250평 정도이다.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분묘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묘는 부인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봉분은 직사각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둘레는 화강암으로 된 호석()을 둘렀다. 묘 앞에는 각각 묘비와 상석이 놓여져 있으며 그 앞으로는 장대석으로 가로단을 쌓아 구분해 놓았다.
단 밑 중앙에는 장명등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을 중심으로 오른편과 왼편에 망주석()과 문인석을 배치하였다. 묘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신도비는 높이 233.5㎝, 너비 67.5㎝, 두께 24.5㎝이며 신석우()가 비문을 짓고 김홍집()이 글씨를 썼다.
류관은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이 개국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그뒤 예문관 대제학으로 재직하면서 《태조실록()》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고 1424년(세종 6) 우의정 자리에 올라 《고려사》를 찬진하였다. 학문과 시문에 뛰어났으며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간()이다.
 
 
*. 묘비 왼쪽을 유심히 보면 "配廣陵郡夫人 廣州安氏 附左" 라고 새겨있다.
유관선생묘 /

출처 : 廣州 安 씨
글쓴이 : 안택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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