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Re:문화 류씨 류관(柳寬)에 관한 大東野乘-海東雜錄-四의 기록

ryu하곡 2011. 2. 14. 20:19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자는 경보(敬甫)요, 초명은 관(觀)이며, 자는 몽사(夢思)이고 호는 하정(夏亭)이다. 홍무(洪武)) 신해년에 급제하였다. 기량(器量)이 넓고 굳세며, 공평하고 청렴결백하여, 집에 있으면서 집안살림을 돌보지 않고 담박하게 지냈다. 그리하여 찾아와서 뵙는 사람이 있으면 겨울이라도 맨발에 짚신을 신고 나와 맞았다. 성품은 또 총명하여 평소에 배운 것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으며 밤마다 그 글을 외우며 그 뜻을 생각하였다. 진덕박사(進德博士)에서 정승(政丞)에 이르기까지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으며 공부하는 사람이 책을 끼고 찾아오면 성명을 묻지 않고 모두 가르쳐 주었다. 세종 때에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었다. 아들 계문(季聞)은 태종(太宗) 때에 급제하여 글로 이름이 났으며 벼슬은 병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안숙(安肅)이다.
○ 유하정(柳夏亭)은 비록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으나 단지 초당(草堂) 한 칸뿐이었다. 한번은 장마에 비가 새어 공이 우산을 받치고 가리면서 부인을 돌아보고, “우산 없는 집은 어찌 견디겠소?” 하니, 부인이. “우산 없는 집에는 반드시 덮을 것이 있겠지요.” 하니, 공이 웃었다. 《필원잡기》
○ 집에 있어서는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아 누차 양식이 떨어져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언제나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로써 스스로 즐겼다. 남이 청렴하지 못한 것을 보면 마치 자기 자신을 더럽히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행장〉
부인의 상을 당하여 상례는 일일이 문공(文公 주희(朱熹)의 가례(家禮))에 의거하였으며 단 육포[脯]와 젓[醢]은 쓰지 않았으니 일반 풍속이 놀라게 생각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한문원문

遭夫人之喪. 喪禮一依文公家禮. 但喪去脯醢. 恐有流俗之驚駭也.
○ 정승으로 30년 동안 있었으나 사방에 토지와 별장(別莊)이라고는 없었으며, 단지 나무를 가로지른 문과 울타리에 꽃나무 몇 그루가 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담을 쌓고 대문을 만들도록 권하면 공이, “지금 정승이 되어서 갑자기 지난날의 문을 고치면 될 것인가? 베옷에 쑥대 집도 황량하지 않으며, 홀(笏)과 인끈, 수레와 높은 관도 영광스럽고 빛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매양 자제들을 경계하기를, “친구라면 확실히 돈을 융통하여 쓰는 것이 의리겠으나 삼가 요구하지 말라. 구해서 얻지 못하면 내가 바랐던 것을 얻지 못하니 섭섭한 마음을 면할 수 없으며, 저쪽도 역시 부끄러운 생각이 있을 것이니 사귀는 정이 이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이니, 차라리 구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상동
○ 유사눌(柳思訥)이 3세에 고아(孤兒)가 되니 숙부(叔父) 유하정(柳夏亭)이 친자식같이 길러 독서와 힘써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그로 하여금 성취하여 급제하도록 하였다. 종들을 나눌 때에는 조카를 마치 형과 같이 생각하여 수(數)를 더하여 주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 공평하고 청렴한 것을 우러러보았다. 봉록과 음식을 받을 때면 매번 일가와 이웃들과 나누어 먹었다. 상동
○ 유하정(柳夏亭)이 통나무로 된 관(棺)을 후일에 쓰려고 만들어 두었다가 종매(從妹)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그 관을 주었다. 상동
○ 유하정(柳夏亭)은 비록 정승으로 있었지만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고, 제사라도 지내게 되면 모든 학생들을 불러서 음복(飮福)하게 하고, 질그릇 술잔에다 탁주로서 자신이 먼저 한 잔 마시고 다음 자리에 돌려주었다. 손님을 대하여 술자리를 열어도 반드시 탁주와 질그릇 잔을 계단 위에 놓고 한 늙은 여자 종을 시켜 사발로 술을 권하게 하고, 각기 몇 사발을 마시고는 파하였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태조(太祖)가 서울을 옮길 때 유관이 서울을 설치하는 법을 상소하면서, “옛부터 제왕(帝王)의 서울은 형세가 넓어야 백성들을 안정시켜 거주하게 할 수 있고, 뱃길이 통하여야 조세를 운반하여 올 수 있고, 거리가 일정하여야 사방을 다스리기 쉽고, 땅이 높아야 광활하여 수재(水災)를 피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하면 좋은 곳이라 할 수 없습니다. 송도(松都)는 주(周) 나라의 호경(鎬京 주(周) 무왕(武王)이 처음으로 연 도읍)과 같으며, 한양(漢陽)은 주 나라의 낙양(洛陽)과 같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서울로 삼을 만한 곳은 오직 송도와 한양이 가장 좋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마침내 한양(漢陽)으로 정하였다. 〈행장(行狀)〉
○ 유관이 글을 올리면서 당(唐) 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태학생탄금시서(太學生彈琴詩序)〉를 인용하고 또 송 태조(宋太祖)의 사포고사(賜脯故事 신하들에게 술을 대접하는 잔치)를 인용하여, “3월 3일과 9월 9일을 국경일로 삼고, 높고 낮은 신하들로 하여금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게 하여 태평기상(太平氣像)을 상징하게 하십시오.” 하니 세종이, “좋다.” 하였다. 유관이 나이가 많아 관직을 그만두겠다고 하니, 평생 동안 제4과(第四科)의 녹봉(祿俸)을 주도록 명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관직을 물러날 때 유관(柳寬)이 글을 올리기를, “매일 조회에 참석하시니 임금님의 노고가 대단할 것이니, 청컨대 격일로 참석하소서.” 하니, 세종이 답하기를, “아뢴 뜻은 내가 알았다. 경(卿)이 늙은 몸으로 힘써 참여하니 내가 실로 두렵소. 후일 의논할 일이 있으면 사람을 시킬 것이니, 경은 몸 편히 수양하여 쇠약한 몸을 더욱 보호하오.” 하였다. 상동
○ 유하정은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으나 행장(行裝)이 보통 사람과 같아서 때로는 호미를 들고 채소밭을 돌면서도 괴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용재총화》
○ 좌의정 유관이 죽으니 세종이 흰 도포를 입고 검은 모자에 검은 띠를 두르고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나와 임시로 장막을 쳐놓고 슬픔을 표하였다. 《동각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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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류관공의 다른 행장에 기록은..

 
우의정 문간공(右議政 文簡公) 휘관(諱寬) 행장(行狀)
...夫人 安氏歿 敎諸子曰 不作佛事 一依朱文公家禮 但去脯醢 恐有流俗驚駭也 我歿之後 亦依此例 雖當忌日 亦不供佛飯僧......... 配 廣陵郡夫人 安氏 先公卒 生三男 長孟聞 參判 次仲聞 護軍 次季聞 判書 後配豊川府夫人 李氏 判戶曹典書 悚之女 生一男曰 異聞 管軍千戶也 公卒之年 八月 葬于楊根郡 南中面 王忠里 辛坐原
[찬자, 연도 불명] 

...부인(夫人) 안씨(安氏)가 졸하자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불공을 하지 말고 일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 에 따르되, 포해(脯醢)만은 없애라. 시속에서 놀라고 해괴히 여길까 두렵다. 내가 죽은 후에도 역시 이 예를 따르고, 비록 기일(忌日)을 당할지라도 불공을 드리고 승려를 먹이지 말라.” .........배(配) 광릉군부인(廣陵郡夫人) 안씨(安氏)는 공(公)보다 먼저 졸(卒)하였는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長男) 맹문(孟聞)은 참판(參判)이고, 다음 중문(仲聞)은 호군(護軍)이며, 다음 계문(季聞)은 판서(判書)이다. 후배(後配) 풍천부부인(豊川府夫人) 이씨(李氏)는 판호조전서(判戶曹典書) 송(悚)의 딸로, 아들 하나를 낳으니 이문(異聞)이며 관군천호(管軍千戶)이다. 공(公)이 돌아가신 해 8월(八月)에 양근군(楊根郡) 남중면(南中面) 왕충리(王忠里) 신좌(辛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라고하여 佛事. 佛供을 경계하는 말이 추가되었으니....알 수 없는 의문이다.

이 류관공이 만약, 우리 선조 18세 판전농시사 (휘 器)의 사위(壻)라면 판전농시사공은 佛心이 깊어 불경간행에 참여한 기록이 있으니 이와 관련하여 설왕설래한 일이 있어 관련 기록을 찾아본 것이다.

 


 

출처 : 廣州 安 씨
글쓴이 : 안택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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