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世宗朝)의 상신
유관(柳寬)
유관은 자는 경부(敬夫)이며, 처음 이름은 관(觀)이고, 자는 몽사(夢思)이며, 호는 하정(夏亭)이고,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고려 말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비서(判秘書)에 이르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형조 판서를 거쳐 갑진년(1424)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치사하였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공이 죽자, 세종이 흰옷을 입고 백관을 거느리고 울었다.
○ 공의 온량(溫良)하고 돈후(敦厚)한 성품은 태어날 때에 얻은 천성이었다. 공조 총랑(工曹摠郞)이 되었을 때에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는데, 이해에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운검(雲劍)의 책임을 맡아서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다.
공은 자질이 밝고 민첩하였으며, 풍채가 빛나 네 임금을 연달아 섬겼으되 모두 사랑을 받아서 그보다 더 사랑받은 자가 없었다.
태조가 돌아가신 뒤에는 특별히 공에게 명하여 능을 지키게 하였다.
○ 기축년(1409)에 길주도 안무 절제사(吉州道安撫節制使) 영길주목(領吉州牧)이 되어서 북방을 지킬 때, 야인이 침입하자 그 괴수를 죽이고 격퇴시켰으므로 그 위세가 북방에 진동하였다. 태종이 사신을 보내어 술을 내리고, 이어 그곳에 머물러 두어 교화를 펴게 하였다.
○ 공이 우의정이 되었을 때에 글을 올려서 당 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태학생탄금시서(太學生彈琴詩序)>를 인용하고, 또 송 태종(宋太宗)이 대포(大酺)를 하사하던 옛일을 인용하여 3월 3일과 9월 9일을 명절로 삼아 대소 관료들로 하여금 경치좋은 곳을 골라서 놀며 즐겨, 태평의 기상을 표현하도록 할 것을 청했는데, 세종이 옳게 여겼다. 공이 나이 많아서 치사하니, 명하여 제사과(第四科)의 녹을 주어 일생을 마치도록 하였다. 《동각잡기》
○ 공은 청렴하고 방정하여 비록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초가집 한 간에 베옷과 짚신으로 담박하게 살았다. 공무에서 물러나온 뒤에는 후생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 제자들이 모여들었는데, 누구라도 와서 뵈면 고개를 끄덕일 뿐, 그들의 성명도 묻지 않았다. 집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는데,때마침 사국(史局)을 금륜사(金輪寺)에 설치하였으니 그 절은 성안에 있었다. 공이 수사(修史)의 책임을 맡았는데 간편한 사모에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니며 수레나 말을 쓰지 않았다. 어떤 때는 어린 아이와 관자(冠者) 몇 사람을 이끌고 시를 읊으며 오고가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 초가집 두어 간에 밖에는 난간도 담장도 없어, 태종이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밤중에 울타리를 그의 집에 설치하여 주되 공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했고, 또 어찬(御饌)을 끊이지 않게 내렸다.
○ 어느 때 장마비가 한 달 넘게 내려서 집에 새는 빗발이 삼줄기처럼 내릴 때, 공이 손에 우산을 들고 비를 피하면서 그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 우산도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견디겠소.” 하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우산 없는 집엔 다른 준비가 있답니다.” 하자, 공이 웃었다. 《필원잡기》
○ 손님을 위해서 술을 접대할 때는 반드시 탁주 한 항아리를 뜰 위에다 두고 한 늙은 여종으로 하여금 사발 하나로 술을 바치게 하여 각기 몇 사발을 마시고는 끝내 버렸다. 공이 비록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제자들을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학도가 매우 많았다.매양 시향(時享)에는 하루 앞서 제생(諸生)을 예의를 갖추어 돌려보내고, 제삿날에는 제생을 불러 음복(飮福)을 시켰는데 소금에 저린 콩 한 소반을 서로 돌려 안주를 하고, 이어 질항아리에 담은 탁주를 그가 먼저 한 사발 마시고는 차례로 좌상에 한두 순배를 돌렸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공의 벼슬이 정승이 되었으나, 그의 행동은 일반 사람과 다름없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찾아오면 겨울에도 맨발에 짚신을 끌고 나와서 맞이하였고, 때로는 호미를 가지고 채소밭을 돌아다녔으나 괴롭게 여기지를 않았다. 《용재총화》
○ 공은 총명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평소에 한번 배운 글을 종신토록 잊어버리지 않았고, 매양 밤중에 그 글을 외우며 뜻을 생각하고 항상 민생을 건질 것을 마음 먹었다.그리하여 교량(橋梁)이나 원우(院宇)를 지으려 하는 자 있으면 비록 중들에게라도 곧 돈과 베를 시주하였고, 또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였으나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남에게서 취하지는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친구 사이에는 으레 재물을 서로 나누어 쓰는 의리가 있다 하나, 아예 요구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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