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부자 정승과 모산리

ryu하곡 2011. 1. 31. 17:20

 

1. 부자 政丞(정승)        

                               글 : 이덕일(사학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1품을 극품(極品)이라고 하는데, 조선에서 정1품이 수장인 관청은 의정부(議政府), 충훈부(忠勳府:공신 관장), 의빈부(儀賓府:부마 관장), 돈령부(敦寧府:왕실의 친인척 관장) 등이었다.

 의정부를 제외한 나머지 관청은 왕실에 대한 예우 차원의 명예직이었다.

 의정부의 의정(議政) 셋은 모두 정1품 정승(政丞)으로, 대를 이은 정승들을 연상(連相)이라고 했다.

 유명한 부자 연상으론 황희(黃喜)·황수신(黃守身) 부자를 들 수 있는데 500년 조선 역사에서 수십 명에 불과할 정도로 숫자가 많지 않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정승인 조손(祖孫) 정승 중에는 남재(南在)·남지(南智)와 신숙주(申叔舟)·신용개(申用漑) 등이 유명하다.

 선조 때 영의정이었던 홍섬(洪暹)은 부친 홍언필(洪彦弼)과 외조부 송질도 모두 영의정을 역임한 진기한 기록을 갖고 있다.

 연상(連相)이 반드시 영화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고종명(考終命)하지 못한 비운의 정승들도 여럿이다.

 척화파 김상헌(金尙憲)의 두 손자 김수항(金壽恒)·김수흥(金壽興)은 모두 영의정에 올랐으나 김수항은 숙종 15년(1689) 남인들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 때 진도로 귀양 갔다가 사사(賜死:사약을 받음)당했으며, 김수흥 역시 기사환국으로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숙종 16년(1690) 그곳에서 죽었다.

 김수항은 사약을 마실 때 자식들에게 벼슬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그 아들 김창집(金昌集)은 벼슬길에 나와 숙종 43년(1717)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노론 영수였던 김창집 역시 경종 2년(1722)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성주(星州)에서 부친처럼 사사 당했다.

 세종의 장인이었던 심온(沈溫)과 그 부친 심덕부(沈德符)도 부자 정승이었다.

 심온은 태종의 왕권강화책에 희생당했으나 그 아들 심회(沈澮)가 영의정에 오르고, 그 외손 노사신(盧思愼)도 영의정이 되었으니 끈질긴 생명력이라 할 것이다.

 

2. 조선일보 기사

문화 류씨와 연안 차씨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식문헌인 고려사 열전 류공권(柳公權) 전에서는 시조가 차달(車達)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성씨라기 보다는 이름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문화 류씨 측에서는 차씨와의 연관설을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문화 류씨가 고려의 귀족이었냐고요? 네 대단한 명문가문이었죠,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명문의 위상을 과시하였습니다. 고려 조에도 사인망족이라 하여, 고려시대에 가장 높은 신분을 지닌 성씨를  중에 류씨(柳氏)를 제일로 거론하는 데서 당시 류씨의 위상을 짐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려 원종조에 류경(柳璥)이라는 분은, 60년 간 지속된 최씨 무신정권을 제거하는데, 일등공신이었으며, 후일 충열왕조에는 첨의중찬(수상)을 역임하시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최고의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개국원종공신이며 찬성사를 역임한 류만수(柳曼殊)를 필두로 태종조에는 문성부원군 류량(柳亮;우정승.예문관대제학), 류정현(柳廷顯;영의정), 세종조의 류관(柳寬;우의정. 예문관대제학). 연산군 때에는 문성부원군 류순(柳洵;영의정), 인종조의 류관(柳灌;좌의정)은 당시 윤원형을 영수로 하는 소윤 일파에게 밀려 참형을 당하는 참변을 겪기도 합니다. 이후 선조조에는 시령부원군 류전(柳琠;영의정), 부자 정승으로 유명한 숙종조의 류상운(柳尙運;영의정)과 영조조에는 류봉휘(柳鳳輝;좌의정) 등 모두 8인의 상신이 배출되었으며, 그 중 총재인 영의정은 4인이나 되십니다, 대제학은 상신이신 류량과 류관을 비롯하여, 세종조의 류사눌(柳思訥) 등 3인을 배출하였습니다. 부럽네요 ^^

 이외에도 광해군의 부인도 문화 류씨(문성군부인)이며, 때문에 아버지인 문양부원군 류자신(柳自新)과 아드님이신 문창부원군 희분(병조판서), 희발(이조참판), 희량 등, 문화 류씨 일족의 권세가 절정이 이른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인조반정으로 마지막을 참혹하게 장식되고 말았지만요,

 반계수록의 저자 류형원(柳馨遠)과 조선 후기 4대 문장가로 명성의 떨친 류득공(柳得恭)도 계시죠, 이 분은 발해고의 저자로 더욱 유명하십니다.

 8인의 상신과 3인의 문형(대재학)을 배출할 정도면, 판서급은 무수히 많을 수 있기에, 판서급까지 일일이 확인하고 올리지 못 한 점은 죄송합니다.


3. 文化柳氏 하정공파 세거지

                                       글 : 박학다식(http://cafe.daum.net/GS75)


문화 류씨의 시조는 류차달(柳車達)이다. 류차달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 때 사재를 떨어 군량을 보급해 준 공으로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에 책록됐고 대승 벼슬을 지냈다. 류차달의 5대조 차승색 때부터 황해도 구월산 지역의 유주(儒州)에 정착하여 세거지가 됐고, 유주가 문화로 지명이 바뀌면서 본관을 문화로 하였다고 한다.

문화 류씨는 시조 류차달의 10~12대손에서 14개 파로 분파되는데, 이 지파들 가운데 대파에 속한 하정공파가 있다. 하정공파(夏亭公派)의 파조(派祖)는 우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책록된 문간공(文簡公ㆍ諡號) 류관(柳寬)이다. 이 지파(支派)가 영암군 신북면 모산 마을에 세거한 문화 류씨이다. 크게 번성하여 명문이 됨으로써 모산 류씨라고도 불린다.

하정공이 전라도관찰사(태종5년ㆍ1405)로 지방 순찰 때 모산리의 지세가 뛰어나고 경치가 아름다워 살만 한 곳이라고 마음에 두었다가 큰아들 맹문을 시켜 모정(茅亭ㆍ詠八亭 전신)을 짓게 하였다. 그 후 하정공 5대손 용공과 종제인 용강이 이 곳에 정착함으로써 모산 류씨의 세거지가 됐다.

이 가문의 대표적 인물은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후 영의정을 세 번이나 지낸 약제(約霽) 류상운(柳尙運)과 그의 아들로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만암(晩庵) 류봉휘(柳鳳輝)이다. 이로써 모산 마을을 '부자(父子) 정승마을'이라 부른다. 이후에도 충효절의가 있는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근대에도 국회의원 3명(류인곤, 류인학, 김윤덕(류홍근 처)과 고위 관료 등 인물들이 계속 배출되고 있다.

이 마을 입구에는 '호남명기모산리(湖南名基茅山里)' '대승상장구지향(大丞相杖屨之鄕)'이라고 새긴 표지석이 있고, 하정공 신도비와 약제공 신도비가 있다. 이 마을에는 그 조상들이 남긴 유물유적들이 많다. 지체 높은 선비들이 시가를 읊었던 영팔정(詠八亭), 조상의 충과 효를 기리는 충효정, 자제들을 교육했던 학당인 분비재(憤悱齊), 류준과 류상운을 제향하는 죽봉사우(竹峰祠宇), 아천미술관(我泉美術館) 등이 있다.

아천미술관은 항일운동가 류혁 선생의 장손인 류수택씨가 조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립했다고 한다. 미술관에는 그 후손들이 수집 소장한 추상화, 사실화, 조각품이 전시됐고, 유물관에는 조상들의 유품 유물이 전시됐다. 가혜 이방자 여사의 친필 서예 소품 '淸風(청풍)'도 전시됐다.

한 가문의 유적 유물이 모산 마을처럼 많고, 그것들이 잘 보전ㆍ관리된 곳도 없을 것이다. 조상을 위하고 자손을 위한 상문(尙門)정신이 모산 류씨 집안에 깊이 뿌리 내렸음이 아니겠는가. 고색창연한 유적들에는 조상의 숨결이 살아있고 가문의 혼이 깃들어 있다. 대대손손 가문의 자존과 긍지를 심어줄 훌륭한 교육적 자료가 될 것 같다.

모산 마을이 500 년 동안 명문 반촌으로 지속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마을의 지리적 입지 조건이 우수했음을 시사해 준다. 좋은 터로 검증된 의미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다가 모두 떠났을 것이다.

이 마을의 지세를 보자. 마을 입구에서 마을 쪽을 보면, 다른 반촌들처럼 뒤로 배산이 버티고 있고, 앞쪽의 평지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배산이 마을을 안으로 다정하게 감싸고 있다. 그 산이 높지도 낮지도 않고 부드러워서 위압감이나 허전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마을이 한가한 정취가 있고 편안하다. 마을 입구에 서있는 표지석이나 신도비들은 마을의 품격을 한결 높여주고, 위엄이 느껴지게 한다.

마을 앞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그 들판 주위로 둘러싸고 있는 산세는 한결 같이 둥글둥글한 모습의 봉우리들이다. 웅봉(熊峯)과 마주한 마산(馬山ㆍ午方)이 단아하고 수려하다. 호산(虎山ㆍ酉方)은 높고 말쑥하게 솟았다. 이 호산은 영암 쪽이나 신북 쪽에서 보면 그 형국이 마치 호랑이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포면 쪽으로 가다보면 그 꼬리 모양의 산능선이 길게 뻗어있다. 그 꼬리에는 범명당이라고 불리는 나주 임씨들의 선산이 있다.

이 마을의 조산은 월출산이다. 그런데 그 사나운 봉우리들은 보이지 않고 고운 봉우리들만 보인다. 풍수에서 산의 모양이 깨끗하고 아름답고 풍만하고 기이하게 생겼으면 길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깨지고 부서지고 추악하고 사납게 보인 산들은 흉한 것으로 여긴다. 이 마을에서 보면 흉한 산이 없다. 모두 귀하게 생긴 길한 산들이다. 아마 물보다는 산이 좋아서 이 마을 터를 잡은 것 같다. 아무튼 하정공파 문화 류씨들의 텃밭인 모산 마을은 양기(陽基)풍수의 명기(名基)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