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반계수록과 최흥원

ryu하곡 2011. 2. 6. 17:57

*** 하정공 9세손 류형원의 반계수록을 교정하신분이 백불암 최흥원이라는 자료입니다.***

대구의 역사인물2의 최흥원편 30-32쪽(pdf파일로 용량이 커서 한글파일로 변환함)은 2006년 대법원 예규 개정전에 써진 책이라 대구광역시에 성씨 정정 요구를 하지 못하여 본 파일에서는 “유형원을 류형원”으로 바꾸었음


제목 : 최흥원과『반계수록』


『반계수록』은 반계 류형원의 실학적 개혁론을 집대성한 책이다.

류형원은 어려서 서울에서 생활하였지만 과거와 벼슬을 단념하고 전라도 부안군의 우반동에 은거하면서 독서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류형원은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반계수록』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류형원은 조선시대 실학적인 학문을 처음으로 체계화하였다. 이를 뒤이어 이익 홍대용 안정복 정약용 등 위대한 실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류형원이 살았던 시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까지 몰렸다가 가까스로 위기를 수습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임기 응변에 불과할 뿐이었다. 사회 체제 전반에 걸쳐 이런저런 병폐가 드러나고 있었다. 무언가 근본적인 개혁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다.

류형원은 당시 사회에서 필요한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반계수록』에 담았다. 실학이란 조선 후기의 공리 공담에서 벗어나 국가와 민생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 개혁적인 학문을 말한다.

류형원은『반계수록』을 1652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하여 1670년에 완성하였다.

류형원은 이책을 마무리 한후 3년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류형원은 이책에 담았던 그의 뜻을 제대로 세상에 펼쳐 보이지도 못 하였다.

류형원의 저작을 세상에 알리고 정책에 반영시키고자 노력한 것은 그의 동지이자 사돈이었던 만학당(晩學堂) 배상유(1622∼1686)였다. 배상유는 류형원과의 토론을 통해『반계수록』의 완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배상유는 류형원의 사후에『반계수록』을 여러부 필사하여 당시 최고의 위정자이며 남인의 거두였던 윤휴와 이현일(1627∼1704) 등에게 보내 그것이 발간 되어야함과 그의 개혁안을 정책으로 구체화 시켜줄 것을 적극적으로 건의하였다. 그러나 윤휴와 이현일은『반계수록』의 내용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지만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는데는 큰관심이 없었다. 이후 영남의 남인이 정계에서 몰락하고 배상유 또한 세상을 뜨자『반계수록』은 더 이상 주목되지 못하였다. 따라서『반계수록』은 겨우 몇부 만이 필사되어 후손과 몇몇 사람들에게만 전해졌을 뿐이었다.

최흥원이『반계수록』을 접하게된 것은 1748년 44세되던 해였다. 『반계수록』이 완성된지 70년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까지 여전히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아직 시골의 선비에 불과하였던 최흥원은 어떻게 간행도되지 않은『반계수록』을 볼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다소 복잡한 관계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최흥원의 어머니 함안조씨집안은 서울의 소론 명문 집안이었던 평창이씨와 혼인이 잦았고 그리고 어머니의 외가인 평창이씨는 바로 류형원의 문화류씨와 혼인 관계가 많았다. 따라서 문화류씨는 최흥원의 어머니 진외가가 되고 류형원의 아들은 최흥원에게 조카뻘이 되었다. 그래서 백불암의 아들인 주진(周鎭)은 이런 저런 일로 서울에 왕래할 때 반드시 이들 집안들을 찾아가곤 했다.

아무튼 최흥원은 이러한 인연으로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던 류형원의 아들로 부터『반계수록』을 빌려볼 수 있었다. 이를 본 최흥원이 찬탄해마지 않았고  이를 필사해 두었었음은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다. 중앙과 지방의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있었던 영남의 대유학자 이상정도 최흥원으로부터『반계수록』을 빌려 보았고 경상감사도 이를 빌려 보고자 했다. 당시 필사된『반계수록』은 모두 13책이고 이것은 옻골의 숭모각에 보관되어 있다.

『반계수록』이 발간되어 세상에 공개된 것은 백불암이 필사한 해로부터도 또 20여년이 지난 1770년의 일이었다. 그러니 책이 완성된지 꼭 백년만이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영조 임금이 경상감사에게 이름난 선비에게 교정을 받아 감영에서 간행할 것을 명령했다. 감사는 여러 선비들의 의견을 들어 최흥원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집 보본당(報本堂) 서쪽방에서 시작하였으나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번거롭게 되자 마침내 감사에게 건의하여 동화사에 교정소를 설치하였다. 이리하여 최흥원은 조카 우진(宇鎭) 등의 도움을 받아『반계수록』의 교정을 마쳤고 이것이 1770년에 드디어 대구감영에서 발간되어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이로써 최흥원은 1783년 정조임금의 명으로 경상감사 이병모(李秉模)를 통해『반계수록』교정의 수고에 대한 칭찬과 함께 사서(四書) 언해본 각 한질을 하사 받았다.

최흥원과 류형원의『반계수록』에 대한 이같은 관계를 아는 이 거의 없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필사본『반계수록』


필자 정진영(鄭震英)

1954년 안동에서 출생하여 영남대학교 문리대 국사학과를 졸업하였으며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18, 19세기 재지 사족의 촌락 지배와 그해체 과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연구원, 동명정보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안동대학교 인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16, 17세기 재지 사족의 향촌 지배와 그성격」,「 1894년농민 전쟁기 향촌 지배층의 동향」,「 19세기후반 영남 유림의 정치적 동향」외 다수가 있고 저서로는『조선시대 향촌 사회사』, 『조선후기 향약 연구』(공저, 『조선시기 사회사 연구법』(공저,『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공저 등이 있다.


1. 첨부파일 : 대구의 문화인물2 최흥원편(용량이 5.5MB로 커서 파일을 올리지 못합니다)

2. 사진설명 : 백불암 종가의 반계수록 교정장소와 안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