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천로는 ‘류차분쟁’의 단초를 제공한 이른바 차원부설원기의 저자임은 이미 주지의 사실입니다. 저자가 차천로의 아버지 차식이라는 설과 차식, 천로 부자의 합작설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차천로를 이수광은 자신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총 11건(저의 확인으로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수광과 차천로는 선조 34년(1601)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영접사(迎接使) 일행이었다는 인연으로 시작하여 이후 지속적인 교분을 쌓게 됩니다. 차천로에 대한 이수광의 시각은 대개 뛰어난 문장력은 있으나 현실에서는 현달하지 못한 채, 곤궁을 면치 못하는 차천로의 환경에 동정어린 시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러한대 당시 명색이 양반 간의 만남이었다면(이수광은 태종의 서자 경령군의 후손), 시조를 비롯한 가문의 내력 정도는 교우 간의 간간이 또는 스스럼없는 대화 내용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지봉유설을 통해 보여 준 이수광의 박람강기는 당대 지식인의 진정한 풍모를 과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을 아닐 것입니다. 차천로와의 교분이라는 배경을 전제로 한 상황에서도 이수광이 문화 류씨 시조공의 휘에 관한 이야기를 수록하면서 소위 ‘류차동원설’과 같은 이야기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는 것은 생각해 볼만한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즉 당시 차천로가 이미 마무리 되었을 소위 ‘차원부설원기’에 관해 내용상(차원부설원기)으로는 세상에 자랑할 만한 가문으로 그토록 장황하게 꾸며 놓고는 정작 교우인 이수광에게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이수광이 차천로를 통해 ‘차원부설원기’의 내용과 이에 기술된 연안 차씨의 내력을 알고 있었다면, 문화 류씨 시조공인(류차달) ‘류달’이란 표현과 동시에 분명 연안 차씨 운운 했을 것임에도 이에 대한 단 한마디도 없었다는 것은 아마 차천로 스스로도 당대의 지식인인 이수광에게 또는 역사적 진실 앞에 그와 같은 내용(차원부설원기)을 발설하기에는 자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지봉유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 다방면에 걸쳐 경이러울 정도의 지식과 정보를 소유하고 있는 이수광 스스로도 차씨에 관한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는 것은 당시에는 ‘류차동원설’과 같은 이야기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역사적 반증이 아닐까 합니다.
위의 이야기는 단지 저의 어리석은 고찰이며, 횡설수설이기도 하니 귀 담아 들으실 만한 것은 아닙니다.
채하님의 말씀 중에 '책이 책을 쓴다.'는 것은 저에게 의미하는 바가 컸습니다. 앞으로 인용자료의 선택에 있어서 보다 면밀한 검증을 통해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명가의 아량으로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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