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ppcl.chungnam.ac.kr/ryu/roots/chamoonjongbo_2007.htm
연안차씨의 차문종보(車文宗報) 2007년판 독후감
- 채하 류주환 (彩霞 柳朱桓, 대승공 36세)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바이오응용화학부 교수
1. 어떤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조선 시대 문헌[1]이 하나 있다. 그 문헌에는 서문이 있고 본문이 있고 부록도 있다. 그리고 그 문헌에서 저자는 스스로 왕명에 의해서 지은 것이라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런 책의 서문의 저자가 어떤 본(本)에서는 A[2]라고 나오고 어떤 본(本)에서는 B[3]라고 나온다. A와 B는 모두 당대의 높은 벼슬을 한 유명한 인물들이다.
본(本)이라는 필사를 한 경우나 활자로 찍어낸 경우 모두 앞글을 가지고 그대로 적는 것이다. 새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이니 간혹 한두 글자를 잘 못 읽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설명을 위해 주석 같은 것을 첨가하는 일도 있다. 그런데 왕명으로 지었다는 이 문헌에서는 서문의 저자가 본에 따라 다르며, 그 저자에 대한 묘사도 확실해서 한 글자를 잘 못 읽은 것도 아니다. 또 본마다 자구들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리고 조선 18세기의 저명한 한 문신[4]이, 그 책의 서문의 저자라고 주로 주장되는 A[2]라는 사람의 유고집을 내면서 그 문헌의 서문이 "뒷사람이 이름을 빌려 거짓으로 지은 것"임을 명확하게 밝히며 배척했다.
2. 그 책[1]에서는 어떤 한 인물[5]에 대한 사실들이 태조부터 시작하여 여러 조선의 역대 왕들을 동원하며 제시되고 있다. 조선의 왕들이 전에 죽은 그 인물에 대해 제사도 내리고 교지도 내리고 최고의 벼슬도 내리고 심지어 시호까지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그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에 단 한번 이름이, 그것도 성씨는 밝히지도 않고 이름만이, 어떤 사람이 올린 상소에서 인용된 구절에만 나온다. 곧 실질적으로는 전혀 언급도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3. 그 인물[5]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 문헌은 온갖 역사적 사실들을 왜곡하고 특히 어떤 사람[6]을 등장시켜서 온갖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꾸민다. 이런 역사의 왜곡은 심각하며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과 전혀 합치되지 않는다.
4. 그 문헌의 부록에는 왕명으로 지었다는 시들이 있는데, 한 저자[7]는 그 책이 나왔다는 시점에 만 2살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저자들 가운데에도 왕명으로 시를 써서 바칠 수 있는 나이나 처지가 안 된 사람들이 여럿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위의 번호들은 다음과 같다.
[1] = "차원부설원기"
[2] = 하위지
[3] = 신석조
[4] = 홍계희
[5] = 차원부
[6] = 하륜
[7] = 남효온
5. 대답은 간단하다. "차원부설원기"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조작된 책이기 때문이다. 소설이라고 부르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워낙 왜곡이 심하고 하륜을 비롯한 특정 인물들을 극도로 폄훼하고 있어 소설이라 부를 수도 없기에, 그저 조작된 책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6. 게다가 그 문헌에서는 저자들을 사육신들로 확실하게 적시하고 있고 그 책을 지은 후 바로 며칠 후에 사육신 사건으로 역적으로 처형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거사에 혼신을 쏟고 있던 당시에 그런 글을 쓸 겨를이 전혀 있을 수 없다는 홍계희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명백한 조작임을 알 수 있다.
또 필자는 설원기의 본문의 저자로 되어 있는 박팽년이 자신의 벼슬을 형조참판으로 명시하고 있는데, 그는 그 시점에 형조참판이 아니었음을 밝혀냈다. 왕에게 글을 지어 바친다고 하면서 자신의 현재 벼슬을 다른 것으로 적었다면 왕을 능멸하는 범죄이기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박팽년이 그 저자가 아님을 100%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바로 그 문헌의 내용을 그럴 듯하게 꾸미고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사육신 사건을 교묘하게 배경으로 삼아 저자들을 참칭하고 있는 것이다. 사육신들이 저자라는 주장은 그 문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이 거짓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믿을 수 없고 심지어 전적으로 배척해야 할 책으로 전락해 버린다. 무엇인가 그 내용에서 철저히 조작을 하려고 이렇게 꾸민 것이 확실한 이런 문헌을 과연 그 주장 하나라도 누가 믿을 수 있을 것인가.
7. 이상의 내용을 포함한 "차원부설원기"의 모든 지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는 그에 입각한 어떤 주장도 사상누각이다.
그런데 문제는 차문종보의 내용들이 바로 그런 상황이라는 점이다.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잡지의 138페이지에 이런 글이 있다.
- "이 책[차원부설원기를 의미]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 차천로(車天輅)의 3부자(父子)를 폄훼하여 글을 날조하고 고증의 근거도 없이 설원기를 위서라고 평론하는 몰지각한 지방대 이 모(李 某)교수가 쓴 논문을 인용하여 류문은 차문과 혈연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 괴문서를 유포하는데..."
평생 역사를 연구한 사학자가 과연 글을 날조하고 고증도 하지 않았을까. [내게는 자꾸만 위 글에 '지방대'라고 폄훼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몰지각함을 보이는 천박함이 용서받을 수 없는 일로 보인다. 나는 서울대를 나오고 외국 유학을 했으니 저렇게 부르지는 않겠지... 앗, 나도 지금 '지방대' 교수이니까... 혹시...? 난 남한의 한가운데, 곧 중앙에 살고 있다. 아니, 지구는 둥글게 생겼으니 누구나 그 어디에 서 있어도 가장 정점에 있는 것이다. 이런 인간 존중의 틀 하나 없는 사람이 아무리 조상 운운한다 해도 어찌 그 어떤 가치를 둘 수 있을까.]
나의 "차원부설원기" 비평만 해도 그렇다. 조선왕조실록을 샅샅이 검색하고 도서관과 온라인 도서 자료들 등 찾을 수 있는 관련 문헌은 다 보고 나서 작성된 것이다. 난 설원기 자체에 허다하게 들어 있는 모순을 들추어냈다. 과연 글을 날조하고 고증도 하지 않은 것인가.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이렇게 말로만 비난하지 말고 "차원부설원기"의 평론에 대해 반박 평론을 내면 된다. 이미 고인이 되신 이수건 교수를 원색적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차원부설원기"가 진짜 의미 있고 역사적으로 합치되고 누구나 인정할만한 타당성을 지닌 가치 있는 문헌이라는 역사학자들의 연구 논문을 가져다가 보여주면 되는 일이다. 이런 실정인데 과연 이수건 교수를 저렇게 비난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 후반의 지식인들은 명분을 극도로 숭상하여 정절과 지조를 강조하면서 사실이 아닌 조작들도 자신들의 대의에 맞기만 하면 비판 의식이 없이 받아들여왔다. 두문동 72현 같은 조작을 숭상한 것이 바로 좋은 예이며(비극적이지만 지금도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다; 관점은 72현의 개개인이 아니고 '72현의 조작'에 있음을 유의할 것) 설원기도 완전히 같은 맥락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허다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비판이 극히 적었던 것이다. 특히 설원기의 비평은 연안차씨 비판으로 그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갈등을 피해온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사정은 완전히 바뀌었다. 필자를 비롯한 여러 분들의 연구도 나오고 역사계의 연구 논문도 몇 편 나오고 있다. 그들의 결론은 한결같이 "차원부설원기는 위서(僞書)"라는 것이다.
8. 차문종보도 그렇고 연안차씨의 공식 홈페이지도 완전히 마찬가지이다. 거의 모든 주장의 출발이 되고 있는 "차원부설원기"에 대한 비평에 대해서는 완전히 귀를 닫아버리고 그저 그 내용을 되풀이 반복하고 또 반복할 따름이다.
그러니 두툼하게 수만 마디 말들을 쏟아 놓아도 난 그에 대해 반박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다. 녹음기에게 논쟁하자고 대드는 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하에 눈에 띠는 몇 가지만 언급한다.
9. 차문종보 125페이지에 이런 주석이 나온다.
"柳車達: 鄭道傳과 鄭摠이 高麗史를 撰進하면서 周易의 學說을 引用하여 政敵인 勢家門閥인 車門의 繁盛氣를 죽이기 爲하여 祖上과 家門을 象徵하는 姓인 車字上에 親弟가 賜姓받은 姓인 柳字를 올려 祖上과 家門을 辱되게 柳車達로 姓名을 造作하여 萬古에 없는 誤謬를 犯하였고, 太祖가 功臣에 내린 復姓名은 車達인 것이다."
한자가 많아서 풀어보면 이런 말이다:
"류차달: 정도전과 정총이 고려사를 찬진(저술)하면서 주역의 학설을 인용하여 정적인 세가문벌인 차문(차씨집안)의 번성기를 죽이기 위하여 조상과 가문을 상징하는 성(姓)인 차(車)자 상에 친제(친동생)이 사성(왕이 성을 내려주는 일)받은 성(姓)인 류(柳)자를 올려 조상과 가문을 욕되게 류차달로 성명을 조작하여 만고에 없는 오류를 범하였고, 태조가 공신에 내린 복성명(원래의 성명으로 되돌린 것)은 차달(車達)인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대승공이 원래 이름이 '차달'인데 정도전과 정총이 고려사를 펴내면서 '류차달'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왜 정도전이 여기서 또 비난을 받아야 할까? 정도전과 정총은 조선조에 처음으로 고려의 역사인 "고려국사"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위 글은 엉터리인데, 바로 이 책은 지금 전혀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현재의 "고려사"는 정도전이 전혀 손 하나 댈 수도 없었다. 그가 이미 태종에게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것도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어떤 집안이나 인물이 왜곡 평가되지 않도록 극도로 보안을 유지하고 어느 날 불시에 공포해 버리는 과정을 통해서 고려사는 세상에 나왔다. 위 글은 그런 가치를 지닌 현재의 고려사에 "류차달"로 움직일 수 없이 명확하게 못 박혀 나오기 때문에 그것을 폄훼하기 위해 한 말인데, 오히려 절대로 그럴 수 없음을 밝혀주고 있다.
10. 차문종보 152-157페이지는 정말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내용이다. 1681년에 류상운(柳尙運)이 사람들에게 대승공의 비석을 세우게 하고 묘갈개견문(墓碣改堅文)을 썼다. 내용을 보면 대승공과 그 자손들을 중심으로 하는 내용의 신도비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런데 차문종보에서는 제목을 "高麗大丞柳車公之墓神道碑銘"(고려대승류차공신도비명)이라고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 모를 제목을 붙였고, 더구나 대승공의 성명을 이 제목에서도 그렇고 본문에서도 왜곡하여 성이 '류차'이고 이름이 '달'이라고 해괴망측하게 부르고 있다. 과연 제정신으로 글을 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류상운은 이때 평안도 관찰사였고, 대사간에 영의정까지 하신 분이다. 이런 분이 '류차'라는 성으로 자신의 시조를 불렀다니,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11. 차문종보 143-144페이지에서 다시 "고려사"의 단점을 지적하며 그곳에 게재된 류차달의 이름은 날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사는 과연 고려를 뒤엎고 들어선 조선에서 작성된 것이기에 이전 왕조의 정통성은 훼손하고 있을 수도 있다. 최소한 찬양하지는 않았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정통성과 크게 관계가 없는 인물들과 사건들은 어떨까. 과연 "류차달"이라는 이름은 어떨까. 날조된 것일까. 그랬다면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랬다는 것인가. 차문종보에서는 앞 9번에서 살펴본 대로 정도전 등이 그 주범이라 주장하고, 오로지 차문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의 그 주장 그대로일 따름이다.
차문의 이전 족보들을 보면 그들의 원파록에서 대승공은 그냥 류차달이다. 그 위의 류씨가 되었다는 조상들도 류씨 그대로 나온다. 지금은 마치 대승공이 시조이고 그 아들이 득관시조라고 주장을 하는 듯하다. 연안이라는 관향을 얻은 시조라는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모두들 차씨로 만들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런데 이미 차천로의 아버지 차식(호: 이재)의 신도비에서 그보다 더 심한 정황이 드러난다. "이재공차식신도비명"은 류몽인(문화류씨가 아님)이 1619년에 작성했는데, 대개 신도비명은 작성자가 다른 집안 역사를 샅샅이 다 알아서 쓰는 것은 아니고 그 집안에서 제공된 기초자료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놀랍게도 대승공은 완전히 빠져서 등장하지도 않고 수레와 군량의 조달이라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승공의 공로를 차효전이 혼자 세운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버지라고 주장되는 분의 공까지 가로채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행된 것이다. 그리고 식읍(食邑)을 받았다고 운운하고 있다. 실제로 식읍을 받는 일은 나라의 재원을 떼어주는 정말 큰일이기 때문에 정사에 그 흔적이라도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역사를 조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또 고려사가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주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류차달이라는 명확한 이름은 고려사에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다. 바로 고려시대의 금석문, 곧 비석글에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그것도 여러 군데에서 나온다. 과연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고려시대의 사료는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을 핑계로 없는 사실을 날조하기 위해 오래오래 지워지지 않도록 돌에 새긴 고려시대의 금석문들까지 부정할 것인가.
그리고 대승공의 초명(初名) 해(海)는 16세기에, 그리고 호는 18세기 이후쯤에서야 만들어져 나타나는데, 그 초명이 지금은 대승공의 진짜 이름이라고 주장하니, 뭐라 대꾸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간다.
명확한 것은 연안차씨들의 가문세우기가 수백 년 동안 계속되어 왔고 이제 그 극에 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가문이고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은, 설사 찬동은 하지 않더라도 비난할 이유는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심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을 통해 나타나고 있고 그 피해는 시조의 이름 가운데에 '차'(車)자 하나가 들어가 있는 탓에 고스란히 애꿎은 문화류씨들이 입고 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12. 이수건 교수는 단정적 추정으로 "차원부설원기"는 차씨 3부자의 위작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그리고 그 위작의 동기는 "차씨들의 한미한 가계(家系)를 돋보이게 하는 보상심리"라고 못 박는다. 이 교수의 이런 주장은 실은, 이런 정도는 아니더라고 크고 작은 조작들이 우리나라 성씨의 역사에 대부분 끼어들어왔음을 직시하고 역사를 바르게 보자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입장에 적극 찬동한다. 우리 사회, 우리 역사, 우리 정신이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불의와 왜곡에 의해 뒤틀려 왔다. 더욱 행복한 사회, 서로를 신뢰하며 미래의 소망을 쌓아갈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나.
13. 결론. 난 연안차씨들 자체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내 주위에도 필경 연안차씨일 차씨들이 종종 보인다. 난 항상 전혀 편견 없이 그들을 대한다. 이 글도 개개인의 차씨들을 향한 글이 전혀 아님을 잘 이해해 주길 바란다.
제발 내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세세하게 답을 주기를 난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어떤 점에서 틀렸다고, 명확하게 제시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난 과학자고 공학자로서 내가 틀렸다고 설득되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벌써 몇 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난 그런, 내가 제시한 문제제기 수준의 엄밀함을 가지고 내게 반박을 하는 사람이나 글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이번 차문종보에서 보듯이, 내가 완전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문헌을 근거로 같은 내용만 앵무새처럼 또 주장하고 또 주장하는 것은 수준 이하의 행위이다. 역사학자들이나 스스로의 연구 등의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나와 이수건 교수 등의 비평에 대해 구체적인 대응을 해주기를 요청한다.
* 자료를 보내주신 류재균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2008년 6월 6일
채하 류주환 (대승공 36세)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바이오응용화학부 교수
Home: http://kenji.cnu.ac.kr/ryu/
E-mail: juwhan@cnu.ac.kr
* 참고: 정도전이 쓴 "고려국사"는 지금 전하지 않을 뿐더러, 고려국사 자체도 정도전이 주도적으로 쓴 것이 아님을 설명하는 글:
"『고려사』는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기초사료로서 조선시대에 갖은 우여곡절을 거쳐 완성되었다. 제일 먼저 편찬된『고려사』는 개국직후인 1395년 태조 4년에 정도전(정도전)이 편찬한『고려국사』로 그 체제는『통감』과 같은 편년체(편년체)였다. 이 고려국사는 오늘에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문선에는 정총이 쓴 고려국사서가 남아 있어 고려국사의 편찬원칙이 실려 있고, 또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후의 개찬과정에서 고려국사의 문제점이 지적되어 그 사서의 일면을 알게 한다.
고려국사의 편찬자는 정도전과 정총이다. 처음 편찬의 명을 받은 것은 우시중 조준, 문하시랑찬성사 정도전, 예문관학사 정총·박의중, 병조전서 윤소종이었으나, 태조 4년 정월에 찬진한 사람은 판삼사사 정도전과 정당문학 정총이었다. 이와 같이 고려국사는 정도전과 정총이 편찬하였으나 실제 편찬의 실무는 예문관춘추의 사관이 담당하였다. 그것은 문종 2년 2월조에 고려국사수찬에 있어서는 정도전이 관장하는 일이 너무 많아 요속들에게 맡겼기 때문에 탈루된 사실이 많았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고려국사는 정도전과 정총이 편찬의 책임자로 지휘 감독하였으나 실제 자료의 수집과 정리 등 편찬작업은 춘추관의 관원인 요속들이 담당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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