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연안차씨 족보와 류상운(柳尙運)

ryu하곡 2009. 5. 4. 22:38

연안차씨 족보와 류상운(柳尙運)

- 채하 류주환 (彩霞 柳朱桓, 대승공 36세)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바이오응용화학부 교수

 

[주: 일반적인 글을 쓰기 위해 존칭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쓰지 않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

류상운(柳尙運): 1636(인조 14)∼1707년 12월(숙종 3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유구(悠久), 호는 약재(約齋) 또는 누실(陋室).

연안차씨(이하 차문)의 최초의 족보는 무자보(戊子譜)이다. 1708년(숙종 34년)에 간행된 것다. 그 서문은 류상운이 썼다고 되어 있다. 비교적 짧은 글인데 그 앞부분에 이런 글이 들어 있다. [차문 족보(강렬공파보)에 실린 무자보서(戊子譜序)]
      車氏余一般同宗之人.... (차씨는 나와 같은 집안사람이다.)

그런데 그 글의 말미에 이런 것이 붙어 있다.
      歲在丙戌八月 日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 柳尙運
      (병술년 8월 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류상운)

병술년이면 1706년이다. 류상운이 죽기 1년 전인 것이다. 족보는 발간되려면 몇 년은 걸리는 것이 보통이니 1706년에 서문을 받고 1708년에 비로소 족보가 나왔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류상운은 "경기금석대관"이라는 책에 그 묘갈명(墓碣銘)이 나온다. ("류상운묘갈") (묘갈은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돌비석을 말함; 내용에 류상운이 자신의 신도비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해서 묘갈에 글을 새긴다는 말이 있음) 그것을 보니 1712년 10월에 건립되었다고 나오고, 둘 다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과 최석정(崔錫鼎)이 글을 쓰고 글씨를 썼다고 나온다.

이 묘갈명에 의하면 류상운이 우의정을 한 것은 을해년(1695)으로 나오고,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다. 정축년에 체직(遞職: 벼슬이 갈림)되고 무인년(1698)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가 기묘년(1699)에 사직,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세 번째로 영의정이 되었다가 곧 파직된다. 병술년(1706; 71세)에는 중추부와 사복시 제조에 서용(敍用)되었는데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듬해 12월에 죽었다.
      (*주: 서용(敍用): 조선 때, 죄가 있어 면관(免官)되었던 사람을 다시 쓰던 일.)

그러니까 병술년에 류상운은 우의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흔히 하듯이 그때까지의 최고 벼슬인 영의정을 밝힌 것도 아니다. 어찌된 일일까. 도무지 문헌들이 믿을 것이 없다는 생각만 든다.

류상운의 묘갈명은 서론 다음에 이렇게 시작한다.
      "삼가 가장(家狀)에 의해서 서(序)하노니
      문화의 류씨는 고려 대승(大丞) 차달(車達)로부터 비롯하였으니 아조(我朝: 조선)에 들어와 ...."

족보의 서문, 행장, 묘비명 같은 것들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유래가 언급되는 것이 보통인데, 거의 예외 없이, 그 유래는 쓰는 사람이 알아서 쓰지 않는다. 여기서 밝힌 것처럼 그 집안의 가장(일종의 간이 족보로 생각하면 됨)을 참고해서 기초를 잡고 거기에 자신이 할 말을 추가한다. 대승공이 성이 류이고 이름이 차달이 분명한 이 글을 봐도 류상운이 묘갈개견문(墓碣改堅文)에 "대승공의 공은 '류차'씨요 휘(이름)는 '달'이다"라고 썼을 리가 만무하며 이는 상식으로서도 그렇게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전혀 이해가 안 될 지경이다.

 
2.

차문은 몇 백 년 동안 대승공을 "류차달"로 써 왔다. 그들의 족보에도 "류차달"로 이름을 밝힌 것이 1980년대의 족보에서까지 확인되고 있다. 다른 것은 다 그만 두고라도 그들이 바이블로 삼고 있는 "차원부설원기"에서 차원부의 얘기는 이렇게 선언적인 언급으로 시작된다.

      "사간원 좌정언 차원부는 문성인(文城人) 류차달의 첫째 아들 ....효전의 후예이다."

사간원... 운운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정말 문제가 많은 문장인데, 그 얘기는 차치하고, 이렇게 명확히 적어 놓은 것을 차문에서 류차달이 차달(성이 차에 이름이 달)이라고 억지를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다. 그러더니 이 이름이 "고려사"에 나오니 애꿎은 고려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고려의 역사를 정리해 놓을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그 처음 집필을 정도전 등이 해냈다. 정도전은 설원기에서 주장하는 4얼의 한 사람이고 차문에 큰 해를 입인 인물이라고 나오는데, 실은 구체적인 주장도 결여되어 있고 모호하게 비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도전은 차원부가 살해당했다는 시점에 이미 정파싸움에서 제거되어 죽어 있었기 때문에 해를 입힐 처지도 아니었다. 하여간 고려사에 정도전이 관여하고 있으니 차문에서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바로 몇 년 전부터이다. 곧 그가 고려사를 집필할 때 '차달'이라는 성명을 류차달로 바꾸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설에는 아쉽게도 구멍이 많다. 그런 소설을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1) 정도전 등이 쓴 고려의 역사는 그가 제거되면서 사라졌다. 그 후에도 고려사는 여러 번 필진이 바뀌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간행되었다.
      2) 고려사 간행에서 문제가 된 것은 고려 후기의 정통성의 훼손문제였다. 특히 정도전의 첫 저술에서는 이것이 두드러졌다고 짐작된다. 이것도 사실대로 기록하라는 태종, 특히 세종의 의지가 있어 시정되었다.
      3) 고려사에는 류공권의 항목에 류차달이 등장하는데 정도전이 차달이라는 이름을 류차달로 바꾸면서 구태여 류공권의 묘사에 넣을 이유가 전혀 없다.
      4) 류차달의 이름은 소설가들에게는 정말 아쉽게도 이미 시대적으로 "고려사"보다 먼저 조선왕조실록에 류량의 항목에 나오며, 더구나 고려사보다 100년쯤 앞선 고려시대에 이미 몇 차례 금석문(비석글)에 나왔다. 이 금석문 중 하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다른 하나는 탁본으로 떠져서 소장되고 있다.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을 수 있을까.

 
3.

앞에서는 차문 족보의 서문이 진짜 류상운의 글인지에 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기사보(1689년)와 그 이후에 문화류씨들은 모두 황제에서 시작된 원파록을 믿었다는 것이다. 기사보의 원파록에 권문해가 나오는데 권문해는 1589년에 "대동운부군옥"이라는 당시의 백과사전을 저술했고, 그 안에는 "차원부설원기"가 명시적으로 언급되면서 그 내용들이 여기저기에 분산되어 실려 있다. 차원부설원기는 여러 정황상 1589년 이전, 그에서 가까운 어느 시점에 조작되었음이 확실하다.

차문의 족보들의 서문들은 여러 성씨들의 벼슬아치들이 써 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이들은 다 차문의 주장을 그대로 싣고 있다. 문제는 문화류씨들이 어떤 커다란 사기극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기사보의 편찬자도 조심은 했지만 싣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으며 그 후의 족보 편찬자들은 말할 나위 없다. 예를 들어, 누구의 표현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내가 갖고 있는 전사령공파보에 원파록이 이렇게 끝난다.

    "이에 멀고먼 화주(華[由 아래 月이 붙은 글자]: 귀한 자손; 후손을 의미)의 놀림을 받을 것을 각오하면서 믿을 것은 믿는 대로 의심나는 것은 의심나는 대로 전하기 위하는 뜻으로 여기에 기록한다."
이 분들이 특히 고민한 것은 가정보에는 원파록의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런 고민도 다 정리되었다고 생각한다. 현존하는 문화류씨 최고의 족보인 가정보가 기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이다.

류상운 선조께서 만에 하나 차문의 족보에 서문을 써 주었다고 해서 여전히 차문과의 관계를 고집한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아무리 큰 벼슬을 해도 얼마든지 같은 상황에서는 실수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도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배웠고 왕씨가 전(田)씨, 신(申)씨가 되었다가 차씨로 되었다거나 형님집-아우집이라거나 하는 얘기들을 믿고 살았다. 그리고 아버님 역시 그 위의 조상들에게서 전해 듣고 믿으며 그 믿음을 내게 전해주셨던 것이다. 내가 이제는 옛날 분들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도 너무 매력적으로 보여 차마 놓지 못하던 거짓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되었다면, 조상님들의 안타까움까지 다 떠맡으며 후손에게는 진실을 전해주어야 할 것이다. 거짓은 아무리 아름답게 보여도 여전히 거짓이다. 그 추함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반면에 진실은 그 빛이 세월에 따라 더해가는 보석이다.

 
2008년 6월 10일
채하 류주환 (대승공 36세)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바이오응용화학부 교수
Home: http://kenji.cnu.ac.kr/ryu/
E-mail: juwhan@cnu.ac.kr

* 참고:

최석정: 1646-1715. 조선 후기의 문신

남구만: 1629-1711*, 호 약천 藥泉) [*주: 묘갈의 건립 전 해에 죽음]

류상운(柳尙運):
1636(인조 14)∼1707(숙종 3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유구(悠久), 호는 약재(約齋) 또는 누실(陋室).
아버지는 좌랑 성오(誠吾)이며, 어머니는 판서 박동량(朴東亮)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로 기용되었다.
그뒤 지평과 홍문관교리를 역임하고, 1680년(숙종 6) 대사간으로 특진되었다. 같은해 경신대출척 때 허견(許堅)의 추대로 역모에 가담한 복성군(福城君)을 탄핵하여 당쟁을 노론측에 유리하도록 이끌었다.
그뒤 평안도관찰사에 제수되었고, 1683년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다시 대사간을 지내고 두번째로 평안도관찰사로 내려갔다.
이해 다시 세력을 잡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이 되었는데 소론인 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 등과 의기투합하여 정사를 처리하던 그는 당연히 소론에 소속되었다.
척신인 김석주(金錫胄)가 노론의 위세를 등에 업고 정사를 전횡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여러 번 탄핵하는 소를 올려 그 기세를 꺾고자 하였다.
1685년 호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형조판서가 되었다.
1694년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희빈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인현왕후(仁顯王后)에 대한 불온한 글귀가 있다는 이유로 투옥된 장희재를 처형하자는 노론의 주장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제시하였다.
즉, 그는 장희재를 처형하게 되면 그 혐의가 세자의 생모인 희빈에게까지 미치게 되어 앞으로의 혼란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남구만(南九萬)과 합세하여 장희재를 제주도로 유배시키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노론의 지탄을 받아 한때 삭직되어 성밖에서 대죄하기도 하였다.
그뒤 우참찬을 지내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696년 영의정에 올랐다.
1698년 노론의 배척을 받아 곤경에 처한 소론의 영수 최석정(崔錫鼎)을 변호하다가 한때 삭직되었다.
그뒤 판중추부사로 복직되고, 1701년 무고의 옥사로 인하여 투옥된 장희재의 종 업동(業同)을 죽이지 않고 유배 정도로 수습하고자 하였으나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 장희빈이 연좌되었다. 세자의 생모에게 사약을 내리는 일은 종사의 장래를 위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일임을 계속 주장하다가 노론의 탄핵을 받아 남구만과 함께 파직을 당하였다.
이듬해 충청도 직산에 부처(付處)되었다가 1704년 석방되어 돌아왔다.
1704년 판중추부사에 다시 복귀하였다. 글을 잘 하였을 뿐만 아니라 글씨도 잘 써서 아직도 여러 곳에 금석문자가 남아 있다. 나주의 죽봉사(竹峰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출처 : 문화류씨 정신공종친회
글쓴이 : 도산 류영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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