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2017. 11. 26 모송재 시제시 참여한 종친께 배포한 홍보물 중 일부 내용이다.
문화 류씨(류문)와 연안 차씨(차문) 양 문중은 2000년 중반까지만 하여도 남한 땅에서 현재 제일 오래된 묘인 부산 기장 차건신(차건갑) 묘에서 함께 제사지내고 문중간 혼인도 없었다. 그러나 2004년 이후 선계 문제로 필전이 있었고 차원부 설원기에 의한 원파록 조작 해명 요청으로 2007.05.28. 차, 류 대종회는 해체 되었다.
류,차 동원설을 긍정하고 있는 차문의 주장을 먼저 살펴보자.
-중국 하나라 사신갑은 형인 공갑왕이 아끼던 용을 죽인 죄로 단군 조선 땅으로
도피 하였다.
그는 평양 일토(一土)산에 살면서 산 이름을 조합하여 성을 왕(王), 이름을 조명으로 개명 하였다.
-왕조명의 58세손 왕몽은 기자 조선 준왕의 모함을 받아 지리산에 숨어들었고 산신의
계시로 왕(王)씨에서 전(田)씨,신(申)씨, 그리고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사성을 받아 차(車)씨로 성을 세 번 고치고 “무(無)에서 시작한다”는 의미로 이름을 무일로 불렀다.
-차무일의 32세손 차건신은 신라 39대 소성왕 때 승상 재위 중 “태자를 부탁한다”는 왕의 유지를 받아 태자를 40대 애장왕으로 등극케 한 후 운명하였다.
애장왕은 크게 슬퍼하고 왕의 능(일명 차릉)에 준하는 묘를 부산 기장에 조성케하고
신위를 소성왕 묘에 배향케 하였다.
-그러나 애장왕은 당시 상대등 이었던 숙부 김언승(헌덕왕)에 의하여 춘추 22세에
시해 당하고 차건신의 아들 33세손 차승색과 손자 34세손 차공숙, 공도 삼부자는
왕위를 찬탈한 헌덕왕을 암살코자 하였으나 거사는 실패 한다.
승색과 큰 아들 공숙은 황해도 구월산에 피신하면서 양씨로, 류씨로 변성하여
류백과 류숙으로 개명하였고 작은 아들 공도는 중국으로 피신하여 왕씨로 복성
(復姓)하였다. 바로 이 왕공도가 고려 태조의 증조부인 국조 원덕 대왕이시다.
-고려 개국 초기 후백제와의 고창(안동)전투에서 류숙의 5세손인 황해도 구월산
지방의 호족 류해(호는 차달, 880년생)는 태조(877년생)를 도와 대승공 직위를
하사 받았고 태조는 큰 아들 효전에게 원 성씨인 차씨를 사성하여 연안 차씨의
득관 시조로, 작은 아들 효금에게는 문화 류씨의 득관 시조로 살게 하셨다.
-차효전의 20세손 차원부(1320~1398)는 고려 공민왕시 충신으로 “이씨 조선에는
출사 하지 않겠다”하여 두문동 72현중 한 분이 되었다.(여말 신현의 화해사전)
그러나 이방원의 책사인 하륜 등에 의거 전 가족이 몰살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이제 류, 차 동원설을 부정하는 류문의 반론을 들어보자.
-문화 류씨의 시조 류차달은 신라 말 황해남도 신천군 문화면에서 태어나 고려
개국의 큰 공을 세워 대승공이 되셨고 차달이라는 이름은 호가 아니고 원래
사용하였던 이름이며 공의 아들 또한 효전과 효금 형제가 아니고 효금 외동이다.
이는 조선 명종 17년(1562)에 발간 된 문화 류씨 족보인 가정보(가정은 중국 명나라
세종의 연호이며, 국내에서 현존하고 체계적인 제일 오래 된 족보)에 잘 나타난다.
-차문에서는 한미한 가계를 돋보이게 하고자 위작인 차원부 설원기를 만든 후
그 저자로 형조 참판 박팽년을 지칭하나 설원기 기록일인 조선 세조 2년(1456)
05.17 당시 박팽년의 관직은 중추원 부사 이었다. 설원기가 위작이라 함은 조선
영조 때 실학자 홍계희, 남극관, 이익 등 석학들이 대변하고 현재로는 이수건,
김난옥 사학자들의 논문에서 입증하고 있다.
-차원부 일가가 죽임을 당할 때 정도전, 조영규, 함부림, 하륜 4얼이 본인들이
첩의 아들이라는 내용이 기재 된 족보가 발각될까봐 해주 신광사에서 소각케
하였다는 사실은 족보사 관점에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일성록(1760~1910, 약 150년간 조선 왕의 언동을 기록한 책)에 의하면 신하들은
1786~88년 3회에 걸쳐 차원부의 억울함을 신원하고 문절 시호를 왕에게 청하였
으나 정조는 거절하였으니 설원기가 신빙성이 결여되었다는 징표이다.
-차씨와 류씨의 연안과 문화 관향(본관)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 성씨 분정시책
(성씨를 국가가 정하는 일)에서 유래하였기 그 이전의 성씨를 인정하는 차문의
주장은 옳다 할 수 없다.
양 문중은 한국의 명문가이다.
전문지식이 없는 본인이 류,차 동원설에 대하여 평을 내린다는 것이 무리인줄 알면서도
개성 왕씨 문중이 연관되어 있으니 소회를 피력할 뿐이다.
차건신의 아들과 손자인 차승색과 공숙,공도 삼부자의 신라 헌덕왕 시해 미수 사건이 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할까?
대승공 류차달의 큰 아들 효전 이름이 문화 류씨 족보인 1562년 발간 가정보에 나타나지 않고
1689년 발간 기사보부터 등장할까?
(류문에서는 연안 차씨 득관시조 효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등등의 내용은 깨끗이 떨추어 내기 어려운 의문점 투성이다.
행여나 개성 왕씨와 중국 왕씨를 관련시키는 후손이 있지않을까 염려되는데
문화 류씨 원파록 속에 등장하는 왕조명, 왕몽, 왕공도 등을 제외하면 개성 왕씨 성은 도선 국사의 계시에 의한 고려 태조 왕건(877-943)이 최초이므로 중국 왕씨와는 무관하다.
태조의 부친되시는 세조(추존) 왕륭 또한 초기 성이 없이 용건으로 호칭되었다.
마지막으로 개성왕씨 문중의 입장은 어떠한가?
2004년 갑신보에서는 국조 왕공도를 배제하고 당나라 귀인의 자로 수정,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귀인이라 함은 황제 연원설(류,차 동원설) 내용과 합치 하므로
문화 류씨의 원파록을 아직 인용하고 있다 할 것이다.
원파록 발원처인 문화 류씨 스스로 원파록을 완전 파기하였으므로 원파록을 인용한 개성 왕씨 족보 또한 수정되어야한다.
그리고 개성 왕씨 선계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가져보아야한다.
2004년 갑신보 고려성원록에는 세조 용건, 의조(추존, 고려 태조의 조부) 작제건, 국조(추존, 고려 태조의 증조부) 당나라 귀인의 자로 고려 태조 계보가 기록되어있다.
고려 의종때 검교군기감 김관의(1146-1170)가 쓴 편년 통록에서는 "개성 왕씨 선계가 고구려 유민이다"라고 적고 있다.
2017년 7월 25일 매일 경제지에 배한철 기자가 기고한 내용을 참고해보자.
그는 2010년 11월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당나라 귀인을 두고 당 숙종이라는 설이 파다했지만 당대에 이미 사실무근으로 판명났다.
왕건이 고려를 건립하면서 고구려를 계승하고 고토회복을 내건 것으로 미뤄 작제건의 아버지가
상당한 부를 가진 고구려계 상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오늘날 언급된다.>
결론적으로 류, 차 동원설은 여러 자료에 의거 신뢰할 수 없기에 류문, 차문,
왕문 세 문중은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고 사료 됩니다.
2017.11.26. 병사공 후손 경 수 (30세손)
위 글은 종중 의견이 아닌 사견임을 밝힙니다. |
하단 사진 2면은 송악산의 줄기가 뻗어내려온 서쪽 산인 개성 특급시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 나지막한 등성 위에 자리잡은 고려 태조 현릉으로써 일제 강점기 때의 모습과 구글 어스 제공 현 모습이다
943년에 창건하고 1994년에 개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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