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 3대 청백리(선초3청)
조선 청백리 중 퇴임후 한양에 거주한 청백리 황희 맹사성 류관 선조(이하 선조 존칭생략함) 최만리 홍계방 등을 대상으로 서울시에서 추구하는 청백리 상에 맞는 인물로 류관을 선정하고 호 하정으로 “하정청백리”상을 제정하여 현재까지 매년 서울시 공무원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선조 3청중 서을시 청백리 상 명칭 후보에서 제외된 사유
① 황희
황희(黃喜, 1363~1452년)는 약 23년 정승에 19년은 영의정이었다. 태조, 태종, 세종 시대 관료로 고려 후기인 1389년(공양왕 1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태종 신임으로 형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지내다.
1418년 태종이 세자인 양녕대군의 폐출을 결정에 반대하여 태종의 분노를 사서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유배갔으나 한양 근처에 두지 말라는 태종의 지시로 황희는 본관(장수)과 가까운 남원으로 간다
세종 때인 1422년 2월 태종의 추천으로 복귀하여 1426년 우의정에 이어 1427년 좌의정이 된다.
1427년 사위 서달이 아전을 구타해 죽인 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 맹사성에게 사건의 무마를 부탁하였으나 결국 탈로되어 파직되었고 1430년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의 일에 개입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됐다. 또 청백리 정승으로 이름이 높지만 실제로는 한때 매관매직과 뇌물 수수 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르는 등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1431년 69세 나이로 복직한 황희는 결국 영의정에 오른다.
1449년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부분도 있다.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다는 지적을 받은 게 대표적이다. 세종 역시 황희가 수신제가에는 일부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인식했지만 치국과 평천하에는 황희를 최적의 인물로 보고 변함없는 신뢰를 보낸다
②맹사성
1360년,공민왕9~1438년,세종,20)
1427년에 우의정이 되고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다
③류관(1346년,충목왕2~1433년,세종15)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내사사인으로 왕명에 의해 대학연의를 진강한다.
1424년 우의정이 된다.
3정승의 순위를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보는데 류관은 우의정에서 더 승차하지 못한 이유는
황희가 1426년 우의정 1427년 좌의정 1431년 영의정에 오르고 1449년 관직에서 물러나고 고려귀족들을 회유하려고 태종이 발탁한 인물이고
맹사성은 1427년 우의정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1435년 물러나서
류관은 1424년 우의정이 되고 1426년 우의정을 물러나고 황희가 우의정에 오르기에 황희보다 17살 많은 원인이다. 즉 류관 우의정 후임 황희는 이후 좌의정 영의정으로 승차한다..
2. 조선시대 청백리록 218명중 柳씨 명단
①태조조의 류순 : 진주 (제학)
②세종조의 류관 : 문화(우의정), 류겸 : 진주(좌참찬), 류염 : 진주(이판)
③성종조의 류훈 : 문화(판서)
④명종조의 류헌 : 전주(대사간), 류빈 : 진주(이판), 류희철 : 문화(집의), 류흔 : 문화(부정),
⑤선조조의 류성룡 : 풍산(영의정),
⑥숙종조의 류경창 : 전주(이참),
⑦경종조의 류상운 : 문화(영의정),
※문화5명 전주2명 진주4명 풍산1명 계1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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