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에서 분파한 3산2주에 대한 고찰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대승공, 이하 선조 존칭 생략함)의 후손으로 대승공 9세 순 아들 3남 자성의 후손 일부가 “풍산”으로, 4남 성간 후손 일부가 “서산”으로, 5남 원비 후손 일부가 “선산”으로, 6남 양재 후손 일부가 “전주‘로, 7남 인비 후손 일부가 ”진주’로 분파되었다고 합니다.
몇 년전에 풍산 서산 선산 일부종원이 문화류씨와 관련 없다는 주장을 했는데 문화류씨 족보에는 3산2주가 분파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저를 포함하여 누구도 함부로 결론 내길 수 없는 문제이기에 모두 더 연구하자는 의미로 문제를 제기합니다.
제가 알거나 경험한 내용을 제시하오니 좋은 자료나 의견 있으면 댓글로 의견 주시면 더 탐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1. 풍산류씨 어느 분이 문화류씨와 관련 없다는 주장을 제기한 이후에도 문화류씨하정공파종회장 류수택님과 풍산류씨종회장님과 매년 교류하시며 안동하회마을 일가 분들이 2016년 문화류씨 세거지인 전남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 1박 2일 일정으로 방문하시면서 풍산은 대승공 후손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승공 19세 류몽정이 군위현감으로 계실 때 류성룡 형님 겸암께서 일가라고 교류가 있었는데 류성룡이 하회에 왔을 때 동생에게 “우리 일가 한분이 군위에 있으니 만나 보라” 하였고 류성룡이 한양으로 가면서 군위에 들려 류몽정에게 詩 한 수를 써 주신 것이 있어 이번에 풍산대종회장님으로부터 류수택회장님에게 그 詩를 보내 왔습니다.
1500년대 선조 때도 문화류씨와 풍산류씨가 일가 라고 선조들이 해 왔는데 이제 아니라고 하면 좀 이해 불가 합니다.
2. 서산류씨대종회장님께서 문화류씨대종회에 보낸 글이 유주춘추19집(2016년 문화류씨대종회 발행) 62-63쪽에 실려 있습니다. 중요 내용은 문화류씨와 서산류씨는 별개의 성씨라는 것입니다. 서산종회장의 요청임으로 문화류씨 대종회에서 어떤 대응을 할지 알 수 없으나 문화류씨 족보에서 성간 이하를 삭제해 달라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와 별개 안건으로 광주에 거주하시는 서산 류씨 한분이 대승공 후손이라면서 차모씨와 함께 대승공 사우 대동사 소유권을 이전해 달리고 재판을 청구한 사례가 있는데 그 분은 서산류씨대종회가 어떻게 변화되어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 답답한 심정입니다.
서산류씨대종회장은 대승공 후손이 아니라는데 광주 서산종중 류모씨는 대승공 후손이라고 하면서 대동사를 차류종친회로 이전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서산류씨 대종회장 글)
3. 전주류씨는 고려 때 평장사를 한 전주인 류방헌 묘지명에 증조부가 신라 때 각간 류기휴라고 하여 전주류씨는 고려 왕건 때 창성(創姓)된 문화류씨보다 훨씬 앞서 백제 때 성씨라는 것은 류방헌 묘지명이 말해 주기에 맞는 말이나 문화류씨 족보에는 양재 후손이 전주분파로 되어 있고 전주류씨 일부도 양재 후손이라는 종원이 있어 혼란을 방지 하기 위해 “토봉, 이봉”으로 전주 진주류씨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4. 한때 류차달 형제에서 고흥류씨가 되었다는 설을 제기 하는 부류일당이 있었으나 근거가 없습니다. 어떤분은 류차달 아버지 이름이 차천로가 지은 원파록에서 말하는 “류보림”이 아니라고 하면 아비 없는 자식이 있을 수 없어 류차달이 애비 없는 자식이냐고 반박하는 분이 있는데 후삼국 시대 성씨의 세습을 잘 모른 처사입니다. 후삼국시대는 4대까지 구전으로 전해 오다가 기록이 없으면 어느 순간 잊어버리거나 그 이상은 알지 못합니다.
전주에 거주한 류기후→류법반→류윤겸→류방헌으로 이어진 것은 류기후가 신라 각간(국무총리급)이었고 류법반이 궁예 휘하 장군으로 왕건이 발탁하였으며 류방헌은 평장사로 이어지는 특별한 사례이며 묘지명에 기록이 있어 전주류씨(당시는 본관 개념이 없어 전주인으로 표기함) 라는 증거가 되지만 류차달은 유주지방 무역상으로 부를 축적한 호족으로 류공권 묘지명으로 문화류씨 선대를 알게 되지만 갑자기 부를 축적한 호족중에 작제건→용건(후에 왕륭으로 개명)→왕건(3대가 이름에 건자를 쓰거나 성씨를 왕씨로 고치면 천하를 얻는다는 설)과 아자개→견훤을 보면 일국에 왕도 작씨→용씨→왕씨로 아씨→견씨로 당대 성씨가 아들로 이어지지 못하고 아들의 성씨가 바꾸어 진 것을 보면 류차달 아버지도 류씨가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류차달 아버지 이름을 모른 것이며 류차달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차천로가 지어준 류보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5. 고려 광종때 과거 제도가 시행되었고 초기에는 인제 발굴 목적이었으나 과거제도가 양반가 자제 등용문으로 변질되면서 답안지에 증조까지 기록하게하여 양반가에서는 선대를 알 수 있었으나 문화류씨처럼 계속 급제자가 나와 가계도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고 영조 외할아버지처럼 효행을 중시하는 유교국가 조선 왕의 어머니(숙빈최씨)의 아버지 이름을 모른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없는 것 같은 경우도 있는데 하물며 일반 백성이나 과거급제를 하지 못한 몰락한 양반가의 선대 기록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어 문화류씨에서 분파된 이후 풍산 서산 선산 전주 진주 선대에 기록에서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파록에 의하면 신라 1대왕 박혁거세 때 차무일부터 38세 손 고려초 류차달 차효전까지 부인과 관직명이 있는 것은 불가능한 창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문화류씨를 보면 시조 대승공 9세 이후 분파된 3산 2주 시조 이후 공백기록으로 문화류씨와 관련이 없다는 설이 나오는데 차문은 신라 건국부터 고려 건국 때 까지 독자로 내려오면서 모두 관직과 부인 기록이 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6. 문화류씨 3산 2주와 이봉전주 이봉진주라는 문제는 과거 선조들이 족보를 필사본으로 만들어 전하면서 오자(誤字)나 옮겨 쓰면서 변형된 글자를 가지고 새로운 역사를 발견한 것처럼 확대생산하여 혼란을 만들지 말고 현재 기록을 중심으로 더 연구 하고 함부로 가겹게 말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 이상은 저의 사건이 개입된 주관적인 글이기에 오해 없기를 바라며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면 공유하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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