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차원부 관련 오류 기사 소개

ryu하곡 2017. 8. 15. 19:16

출처 : http://band.us/band/57472108

禪庵 류찬길 하정공파 대승공35

차원부에 관한 기사가 있어 올립니다

여수를 지금까지 고생하게 만들어 놓은 그런 씨앗을 뿌린 오흔인.공은.차원부등은 결코 역사의 평가에서마저 용서할수 없다.

http://www.ysinews.com/ArticleSearchView.asp?intNum=24233&ASection=001009

(김용필/역사추적)여수현이 폐현 당한 이유?

김용필 소설가(여수출신)

고려 때 존재한 여수 현이 이조 때 폐현 당하였다. 이유는 조선 태조가 이조에 반역한 땅이라고 순천에 예속시켜 버린 것이다.

그 내막은 이러했다. 여수는 고려의 충절공 차원부와 오흔인, 공은이 조선에 불충했다는 이유였다.

1392년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씨조선을 세우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며 수많은 신하가 참형을 당하였다. 두문동 72현의 죽임은 칼과 피로 세운 나라라는 오명을 남겼다. 사실이 그랬다.

여수는 한나라의 신하는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충절을 부르짖다가 죽은 3명의 원혼이 깃든 땅이었다. 여수현감 오흔인은 관아 석보창에 갇혀 아사하였고 개국공신이지만 조선왕조를 거부했던 차원부는 여수 장도에 유배당했다가 하륜의 부하에게 살해당했으며 공자의 54직계 후손인 공은 은 여수현 삼일포(낙포)로 유배 와서 3년 만에 살해당했다.

공은이 개성에서 여수 현으로 걸어올 때 3마리 기러기가 따라왔다. 그가 삼일포에 도착하자 3마리 기러기가 밤새워 하늘을 맴돌며 울더니 한 마리가 삼일포(사포)에서 떨어져 죽었다. 공은은 기러기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리고 남은 2마리 중에 한마린 순천 조계산에서 죽었고 한마린 금호도에서 죽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고려 중엽 보조국사 지눌이 전국을 순회하며 절을 짓고 다니다가 여수 영취산에 와서 절터를 살피는데 난데없이 까마귀 3마리가 날아와서 3일 동안 하늘을 맴돌더니 한 마리가 영취산 아래 사포에서 죽었다. 두 마리 중 한마린 순천으로 날아갔고 또한 마린 금오도로 날아갔다. 그리고 3일 동안 까마귀가 울다 죽었다고 하여 지눌은 이곳을 삼일포라고 이름 지었다.

보조국사 지눌은 까마귀가 날아가서 죽은 그곳에 절을 지었다. 여수의 흥국사, 순천 송광사, 금오도 송광사가 까마귀가 죽은 곳이다. 그런데 기이한 현상이 300년 만에 일어났다. 공은을 따라온 기러기가 그때 까마귀가 그랬듯이 그렇게 죽고 날아갔다.

공은 은 삼일포(낙포)에서 어부 일을 하면서 살았다. 그는 배를 타고 고길 잡으며 소일 하였다. 그런 어느 날 태종이 보낸 자객의 칼에 맞아 죽었다.

3마리 기러긴 오흔인, 차원부, 공은 3충절 공들의 죽음을 애도 하는 듯 개성에서 여수까지 날아와서 죽었다. 까마귀가 죽고 기러기가 떨어져 죽은 곳을 낙포라 하였고 기러기 3마리가 3일 동안 날다가 죽었다고 하여 삼일포라 불렀고 삼일면의 지명이 되었던 것이다.

과연 이 3마리 까마귀와 3마리 기러긴 어떤 요물이었을까?

후세 성황신을 모신 도사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삼일포에 날아온 까마귄 여수 진례에서 고려의 건국을 도모했던 김총과 견훤, 박영규의 혼령이 까마귀로 변하였고 3마리 기러긴 고려 충절의 고향 여수에서 절의를 지킨 오흔인, 차원부, 공은 3학사들의 죽음을 예언하고 애도 했다는 것이다.

삼일포의 까마귀와 기러기는 충절을 상징하는 여수의 혼으로 고려를 세우는데 공헌한 3장군과 고려의 패망을 슬퍼하는 3공신들의 한이 서린 고장이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이성계가 이씨 조선에 반기를 든 고장이라고 여수 현을 폐해 버렸다. 고려 말까지 엄연히 여수현은 석보창(석창)에 동헌을 두고 해양 경계를 탄탄히 했던 고장이었다. 그런데 이조는 석보창(석창)에 관청을 두었던 여수현의 동헌을 폐쇄하고 용두(해룡), 율촌, 소라, 삼일, 여수 부곡을 순천부에 예속시켜버렸다.

여수현(석보창) 우물터.

바로 조선에 반기를 든 오흔인과 차원부, 공은의 충절로 인해 현이 폐쇄 되는 비극을 맞았다. 그리고 현의 청사인 석보창을 창고로 만들어 버렸다. 여수현은 석창이란 청사 유적만 남기고 흔적 없이 사멸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전라좌수영이 섰을 땐 정4품인 순천부사보다 종3품인 좌수사의 권력이 높아 모든 관치가 좌수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삼일포 기러긴 차원부, 오흔인, 공은의 3인을 일칭하는 것이며 삼일포 까마귄 고려개국공신 박영규, 견훤, 김총의 혼령이 환생한 것이다. 아무튼 여수현은 삼일포 기러기처럼 절의와 충절이 깊은 고장이다.

-스토리 텔링-

 

(삼일포 기러기- 공은, 오흔인, 차원부)


여수현(석보창) 기와편.

어전에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이태조는 말없이 공은을 바라보았다. 그는 숨을 죽이고 엎드린 채 임금의 조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내 곁에서 나와 같이 일을 할 수 없단 말인가?”

, 전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라.”

백번을 생각해도 신은 왕조의 신하로 이조를 섬길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신하는 주군이 바뀌면 두 임금을 섬기는 것은 상례인데 그게 무슨 말인가?”

두 임금은 섬길 수 있으나 두 왕조는 섬길 수 없는 것은 유교의 도덕률입니다. 소신은 공자님의 직계 손으로 유교의 도덕률을 지킬 뿐 입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구먼, 임금을 모멸하는 자를 가까이 둘 수는 없지.”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이성계는 평장사 공은을 불러놓고 충성을 맹서 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은 고려의 신하가 이조의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부름을 거절하였다. 이성계는 공은을 여수 땅으로 유배를 보냈다. 여수 현령은 공은을 여수 진례 포구로 유배지를 정하였다. 공은은 개성에서 천리길인 여수를 향하여 걸었다. 언제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발길이었다. 하루 이틀 힘들게 형수를 따라 걸었다.

그때였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기러기 3마리가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길을 잃은 기러기구나, 갈길 몰라 헤매는 너나 난 같은 신세로구나.”

공은은 하늘을 보며 혼잣말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계속 기러기가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가 밤을 새며 기러기도 주변의 나뭇가지에서 잠을 자고 날이 밝아 걸으며 다시 날았다. 보름 만에 석보창 여수에 왔을 때 역시 기러기는 그를 따라 왔다. 여수 현령 오흔인은 그를 극진히 모셔 여수 삼일포에 유허지를 마련해 주었다.

어찌하여 개성에서 이 먼 삼일포까지 왔단 말입니까?”

오흔인 현감이 애통하여 물었다.

불사이군, 두 왕조를 받들 수 없어서 쫓겨 왔습니다.”

불행한 일이죠. 이제 고려는 영원히 사라진 것입니까?”

그렇다오.”

저 역시 개성에서 태어나서 자라 등과하여 고려의 녹을 먹었던 신하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다니.......이조가 원망스럽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옵니다.”

제가 학사님을 잘 모실 테니 편안히 유숙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를 따라 온 기러긴 삼일포를 맴돌고 있었다. 그런 3일 만에 다. 상공을 맴돌던 기러기 한 마리가 삼일포(사포)에서 떨어져 죽었다. 공은은 죽은 기러기를 붙들고 깊은 시름에 젖었다.

나도 너처럼 길 잃은 신세이니 그렇게 죽고 말겠지?”


사포-지금은 초대형 원유부두로 변했다.

기러기 한 마리가 포구에 떨어져 죽자 다른 두 마리는 어디론가 날아갔다. 한 마리는 순천 선암사로 가고 한 마리는 바다로 날아갔다.

사람들은 기러기가 날다가 떨어져 죽은 사포를 낙포 또는 삼일포라고 불렀다. 공은은 자신도 언젠가는 저 기러기 신세가 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은 은 오흔인이 마련해 준 유허지에서 낚시질을 낙으로 삼고 지냈다.

태조왕이 공은에게 미련이 남아 파발마를 여수로 보내 높은 벼슬을 줄 테니 돌아오라고 회유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며 거부하였다. 왕명을 거부하자 파발마 형수는 그를 베어 버렸다. 그렇게 공은은 삼일포에서 사자의 칼날에 그만 죽고 말았다.

공은의 죽음을 본 여수현 백성들은 그의 충절을 애도하며 이조에 항변하였다. 그러나 엄청난 비극이 내려지고 있었다.

공은(1348-1403)은 누구인가?

공자의 54대 직계 손으로 고려 충정왕 때 고려로 귀화한 공소의 손자다. 공소는 한림학사로 어린 고려왕자(공민왕)와 원나라 노국 대장공주와 결혼을 하고 고려로 입국하자 수행비서로 따라온 한림학사였던 것이다.

공민왕은 그에게 문화시랑평장사란 벼슬을 내렸고 공소는 고려로 귀화하여 고려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 공노(孔努)를 낳았다. 공노는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학자였고 조선시대에 검교한성부윤과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다. 그의 두 아들 공부(孔府)와 공은(孔隱)을 낳았다. 공부는 높은 학문을 이루어 집현전 태학사에서 한성판윤을 지냈다. 공은은 평장사란 벼슬을 얻었으나 조선건국과 동시에 은퇴 하였다.

공은이 죽자 형 공부는 여수현으로 내려와서 동생의 시신을 거두어 기러기가 떨어져 죽었던 사포에 묻었다. 그리고 오흔인은 하치리 첨산과 덕양의 비봉산에 공은의 영당을 짓고 조선을 저주하였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전국의 치안을 확보한 후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전국 순회를 하였다. 순회사자들이 임금이 오기 전에 사전답사를 하여 지방 현령들을 포섭하고 있었다. 임금의 사자들이 여수현에 왔다. 사자는 오흔인 현령을 불렀다.

임금의 행차를 위해 대대적인 주민홍보를 하십시오. 그리고 건국을 찬양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환영하십시오.”

라고 사자가 명령했다.

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난 고려의 신하이지 조선의 신하가 아닙니다. 절대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뭐라?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군.”

죽으면 죽었지, 두 임금은 못 모십니다. 그렇게 주군께 전해주시오.”

저놈을 포박하라.”

사자가 명했다. 그러나 병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흔인이 일어났다.

저놈을 포박하여 옥에 가두어버려라.”

명했다. 현 치안 병사들이 임금의 사자를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다른 사자를 통하여 임금의 칙사가 감금당했다고 일렀다. 그리고 사자는 석보창에서 죽었다.

다른 사자가 곧장 임금이 머무는 전주로 달려갔다.

뭐라? 오흔인이란 놈이 그런 소릴 했단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칙사를 가두어 버렸답니다.”

당장 병사를 규합하여 여수로 가거라. 그리고 오흔인을 없애버려라.”

라고 호위병관에게 일렀다.

전주에 머물던 관군이 여수로 내려왔다. 그리고 오흔인을 포박하였다.

너의 행동은 새 임금을 모멸하는 행위다.”

난 고려의 신하입니다. 새 왕조의 주군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흔인의 태도는 너무나 당당하고 강했다.

너 결코 새 왕조를 거부한 죄를 달게 받을 것이다.”

호위병관이 호통을 쳤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네놈을 당장 목을 벨 것이나 여수지방 현민에게 새 왕조의 품위를 위해 네놈을 굶겨죽일 것이다. 저놈을 가두고 아무것도 먹이지 마라.”

오흔인은 석보창 성안 감옥에 갇혀 식음을 전폐한 상태에서 7일을 견디다가 죽었다.

  

여수현(석보창)

오흔인이 죽자 태조왕은 명했다.

여수현은 모반과 반역의 고장이다. 여수현을 폐하고 순천부에서 관활하여 민심을 수습하라.”라고 명했다.

오흔인의 불사이군의 충절로 인해 여수현은 이조에 와서 와해되어 버리고 순천부에 속해 버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수현은 순천부가 아니고 5부곡 용두(해룡), 율촌, 소라, 삼일, 여수 부곡으로 존재한 최소 행정단위였다. 따라서 여수는 이씨 조선에 반역한 땅으로 하대를 받게 되었고 현이 폐현 당하는 불운을 맞았던 것이다.

오흔인은 (1348-1404)누구인가?

오흔인은 개성에서 태어나서 문과에 급제하여 여수현령으로 발령을 받았다. 정몽주 이색에게서 학문을 전수받은 한림학사였던 것이다. 1392년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기를 들고 고려에 충절을 고집한 1404년 여수현 석보창에서 죽었다. 이태조는 조선에 불충한 여수현령 오흔인을 석보창에 가두어 굶겨 죽였다.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했을 때 고려의 신하들은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칼의 힘은 무서웠다. 건국을 반대하는 자는 칼로 다스렷다. 조선은 칼과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가장 비참한 것은 왕자의 난과 두문동 72현의 학살이다. 고려의 지식인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처형하였던 것이다.

차원부가 어전에 불려나왔다.

너 어찌 조선개국 공신의 녹을 먹는 자가 두문동 72인과 동조한단마인가?”

난 새 왕조에 동조한 적도 개국에 공헌한 공적도 없는데 공신으로 책정되었사옵니다.”

차원부는 당당하게 태조의 물음에 답했다.

그것은 너의 외가와 처가의 공은을 입은 것이다. 너의 집안은 나와 생사를 같이했던 공신들이다. 고려의 신하지만 지금은 모두 내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가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개국공신의 인척들 공훈으로 에게 개국공신녹권을 준 것이다.”

도움이 안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네 네게 공신 책봉으로 판전농시사에 임명할 것이다.”

싫습니다. 전 초야에 묻혀 글이나 쓰고 그림이나 그릴 것입니다.”

뭐라? 결코 내 호의를 무시하겠단 말이구나.”

황송하옵니다.”

알았다. 그럼 별 수 없지.”

이태조는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공신녹권과 벼슬 등을 거절한 그에게 벌을 내렸다. 여수 장도로 유배를 보낸 것이다. 그는 두문동 72현 중의 한사람이었다. 여수현 장도에 와서 낚시를 즐기며 지냈다. 그런 어느 날 왕자의 난을 수습한 하륜이 실권을 잡으면서 두문동 72현을 학살하였다.

하륜의 자객이 여수 장도에 다다랐다.

달 밝은 밤이었다. 차원부는 유유하게 배를 띄우고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낚시를 마치고 포구로 돌아왔을 때 괴한이 나타나서 그를 내리쳤다.

네놈들은 누구냐?”

새 왕조에 반기를 든 자는 처단하라는 하륜대감의 명을 받고 네놈을 죽이노라.”

뭐라? 하륜이......미쳤구먼.....”

라고 마지막 한마딜 남기고 장도에서 죽었다.

그와 동시에 개성의 차원부 가족들이 처형을 당했고 전국에서 숨어사는 두문동 72현과 그 가족들이 모두 살해당했다.

차원부(1320-1399) 는 누구인가?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화가. 본관은 연안. 자는 사평, 호는 운암.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간의대부에 이르렀다. 정몽주·이색 등과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다. 고려말 정치가 문란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순천의 평산 수운암동에 은거했다. 이성계의 회군을 반대했다.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가 공신으로 책록하려고 했으나 굳이 사양했고, 정언·판전농시사 등의 벼슬도 받지 않았다. 일찍이 정도전·하륜 등이 차씨 외손의 서속이었음을 족보에 사실대로 기재하여 그들의 원한을 샀다. 끝내 하륜은 자객을 보내 그를 죽이고 그의 가속 80여 명을 살해하였다. 고려에 충성을 다하던 송도의 두문동 72인 중 한 사람으로 그림을 잘 그렸으며 특히 매화에 뛰어났다. 순천 운암사에 배향되었다.

 

여수현성(석창성)

여수현 백성들이 이렇게 이씨왕조를 거부하고 왕씨 고려를 숭상한 이유는 바로 이곳 진례 부곡에서 박영규와 견훤, 그리고 김총이 고려를 세운 개국공신이기 때문이었다. 박영규는 바로 여수 용두 해룡 출신으로 여수(순천)박씨의 시조이고 김총은 여수(순천)김씨의 시조였다. 그리고 견훤은 이들의 힘을 빌려 후백제를 건국했다. 따라서 여수는 김총, 박영규, 견훤이 거국을 도모한 원촌이며 오흔인, 차원부, 공은 3인의 고려 충절공의 원혼이 깃든 곳이다.

이들은 삼일포 기러기의 혼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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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 내용 바로 잡기

참고자료 : http://cafe.daum.net/moonwharyu/Gh3E/283

위 참고자료 중간에 파란줄과 문단 참조하시고 이 기사중에 차원부, 오흔은, 공은 중에 차원부에 대한 틀린 내용은

차원부는

두문동 72헌이 아님

고려 개국공신 명단에 없음

여수 장도 유배된 실록에 기록 없음

순천 수운암 은거 아님 : 송원 마원으로 갔다는 기록은 있음

정도전 하륜 등이 차씨 외손의 서속이란 근거 없음

차원부가 누구인가?에서 화가일 것이라 추정되며 순조때 차원부가 순천에서 시호를 받을 때와 관련 있는 듯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