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유자광.안당 친족들이 구해냈다
충주 성주 실록사고 화재 왜군방화 아닐 수도 있어
충주의 한명회 성주의 김성일 정철이 통치, 전주는 권율. 의병장 권극평,
진주성에 참전 순직한 의병장 보공장군 권극평의 충열사 유자광의 고모가 살았던 마을 정읍 옹동면
유자광이 기르고 가르친 권이의 묘 (권극평의 고조부) 정읍군 옹동면
남명 조식선생의 친구 일제 이항 선생이 김천일. 안의 .손홍록 송상현 권극평을 가르킨 남고서원 애국학당
조선왕조실록이 서울 충주 성주 전주에 보관하였는데 조선 문화재 도서에 욕심을 내고
침범한 일본이 실록사고부터 불을 지를 이유가 없다
그 들은 도공과 악공 학문 선비를 납치하고 비문화 인물 정치 관료들을 학살했다
전주의 조선왕조실록을 권극평 외조부 안의와 안의의 학우 손홍록이 조선왕조 실록을 구해냈다
유자광이 어려서 살았던 정읍 옹동면 고모집에서 살다가 성종시대 조카 권이(權怡)를 가르치고 벼슬을 시킨 가족장이였다
권이의 고손자 권극평이 임진난에 태인 의병장으로 호남에서 진주성 전투 지원군에 까지 참전하고 부상으로 순직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성주와 충주에서 소실되고 전주에서 만 구해 낸 안의와 손홍록이 내장사와 아산 황해도 묘향산까지 숨긴 것은 권극평 의병장이 친척 권율장군이 있었다
권극평 외갓집 안의의 집은 조광조를 등용시키고, 후에 남곤 성혼이 죽이려하는 조광조를 살리려 하자 안당의 종 송사련이 역모로 밀고하여 몰살시킨 안당의 친척이였다
조광조는 이장곤 안당 시산정 이정숙 일제 이항등 사실상 유자광이 길러낸 선비들이 추천하였다
그 당시 중종이 유자광을 죽이기 위해 유자광을 안심시키려고 계획으로 유자광파 이장곤 안당 박영문을 등용하고 유자광을 평창으로 유배 눈을 멀게하여 식물인간으로 만들고 죽였다
그리고 차례로 조광조 안당 박영문을 반역죄로 그들의 종을 매수하여 거짓 역모로 씨워 죽이고 종 송사련 막개등이 귀족이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안 이항은 미리서 태인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이항은 의병장 김천일 안의. 손홍록 이영남등을 가르치며 살아난다
남명 조식은 정인홍 곽재우등 영남 의병장을 가르첬다
그런 경상도 남명 조식과 사귀면서 영호남에서 청년들을 같은 시기 임진난의 애국자로 가르친다
이들이 같이 조선왕조실록 보호를 하려고 한 공통점이 여기에서도 보인다
경상도 성주에 있는 실록사고가 있는데 의병장 곽재우가 일어나자 김성일친구 경상감사 김수가 곽재우 도적으로 몰아서 죽이려 했다
안의 외손자 의병장 보공장군 권극평의 묘
전라도 태인에서 안의 송홍록 권극평과 같이 이항 선생으로부터 교육 받은 김천일이 왜 진주성에서 그리고 진주시민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이르킨 그 이유가 조선실록과 왕의 초상화등 보존에 전주와 같은 실록보존에 사수하려 했으나 김성일 정철등이 고의로 막아 선것 같다
여기서 ‘일본이 침략이 없다’ 라고 말한 조선통신사 김성일이 영남전투를 총 지휘하고 있었다
사실상 임진난을 초래한 김성일은 자기가 거짓말한 것이 왕조실록에 모두기록된 사실을 알고 있기에 정대성과 곽재우를 도적으로 몰아서 성주실록사고 보호 이송의 기회를 없게 하여 방화로 소실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 김성일이 선조왕에 올린 장계문 글일부를 보면
‘곽재우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위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켜 초계(草溪)의 빈 성(城)으로 들어가 병장기(兵仗器)와 군량을 취득하니, 이때 동현(同縣)에 사는 정대성(鄭大成)이란 자가 무리를 모아 도적질을 하였으므로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은 곽재우까지 도적으로 의심하여 감사(監司)와 병사(兵使)에게 급히 통보하였습니다. 이에 감사와 병사가 마침내 명령을 내려 대성을 사로잡아 참수하니, 재우의 병사도 흩어졌습니다.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이 그는 도적이 아니라고 말하자 감사(監司) 김수(金睟)는.....’
왜적이 거의 함락한 마당에 의병장을 도적으로 몰아 죽이려다 곽재우가 살아나서 김수를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다
정대성이 성주성을 지키려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학살자 정철이 시급하게 심복 홍서봉을 성주목사를 발령내어 보낸 기록이 아래와 같이 실록에 있다 그 글의 증거를 없애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선조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8월 12일(경인) 6번째기사
한준겸·이형욱·구의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한준겸(韓浚謙)을 공조 참판으로, 이형욱(李馨郁)을 병조 참의로, 구의강(具義剛)을 병조 참지로, 조정립(趙正立)을 성균관 사예로, 권춘란(權春蘭)을 성균관 직강으로, 권반(權盼)을 홍문관 수찬으로, 송안정(宋安庭)을 전라도 우수사로, 곽재우(郭再祐)를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홍서봉(洪瑞鳳)을【정철(鄭澈)을 존숭하여 좋은 벼슬을 얻었다. 】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실록을 쓴 사신(史臣)의 기록문으로 홍서봉을 정철이 임의로 등용했음을 알리는 기록문을 첨부했다
민족에 죄를 많이지고 영화를 누린 정철과 김성일이 경상도 전투에서 실록사고를 왜병 행위로 위장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 들은 조선실록으로 죄가 이제야 모두 알려젔고 김종직의 ‘세조는 역적이다’시를 김일손이 실록에 기록한 것도 훗날에 세조, 연산군세력 유자광 이극돈을 몰락하기 위한 의도로 반역 의도 음모라고 보아진다
충주성은 신립장군이 탄금대로 와서 진을 치고 있으면서 왜적이 근처에 온다는 제보자를
미친놈이라고 참수하였다
그래서 갑자기 포위되고 전사하여 힘없이 충주성이 함락되고 성내 건물의 정보를 잘아는 일본군이 욕심내는 도서관을 첫 번에 소각 시킬 이유가 없다
후퇴하는 관군이나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불을 지른다
특히 청주한씨 한명회 세력 지방 호족으로 한명회가 남이를 죽이고 남이의 딸과 처제를 부인으로 살며 모든 남이 역모를 유자광 만든 것으로 거짓기록된 조선실록 CCTV 녹화 태잎같은 것을 없애고 싶음이 당연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악학괘범 삼국사기 삼국유사등 고서는 거의 일본에 있는 이유가 이 시대 약탈해 간 것으로본다
일본은 스페인 포루트칼의 무기와 문화재 도서의 보물을 알고 침략 약탈이 목적이였다
전주실록사고에서도 전주근방의 수많은 선비 호족이 많아도 전주에서 거리가 먼 정읍 옹동면 자시내 마을 유자광인척이 자기 목숨 살기도 어려운 때 자기 돈으로 구하여낸 이이유가 있다
애국 충신으로 잘못이 없는데도 천하 악인으로 만든 유자광의 행적이 기록된 것이기에 보존하려고 그랬다
전주를 제외한 4곳이나 보관된 실록이 한권도 없이 소실된 것이 의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북한이 남침하여서도 소중히 가저다가 한글 번역하여 남한에 보급되어 모두가 읽어보게 되었다
중종이 명나라 수족으로 한민족파 유자광이 문화유씨 안당이 순흥안씨 연좌제 벼슬금지 화를 피하려고 서로 성씨 분파를 성씨 분성하여 다른 성씨로 사용하였으나
유자광을 버린 문화유씨는300년 만에 조선실록 진실을 읽고나서 차씨 성까지 한성으로 연합하여 유자광의 신도비를 세웠다
조선실록 진실을 읽고나서 문화유씨는 차씨 성까지 한성으로 연합하여 최고의 충신으로 밝혀저서 유자광의 신도비를 세웠다
조광조를 살리려는 안당이 역적이 아닌 의인으로 알려저서 안씨들은 여러 성씨가 아니라 하나의 성씨라는 사실로 다툼과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조산왕조 실록 4곳이나 있어도 3곳이 사라진 허망한 이유 그 당시 세력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조광조를 살리려더 역모조작 고발로 멸문 화를 입은 안당의 친족 안의의 묘 제각이 옹동면 비봉산에 있다
이항 문하에서 수학하였고자라 청렴한 선비로 특히 안의는 세종때 정인지와 함께 용비어천가 를 지은 안지의
고손자이다.
안지가 인순부원의 직책에 있을 때 전주사고가 건립되고 직접 실록의
제본을 떠 전주에 이관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웃 칠보면 삼리에 사는 손
홍록 선생과 함께 전주사고를 지킨 손홍록과 안의 선비에 대해 손홍록과 안의가 7년 전쟁 내내 내장산, 강화도를 거쳐
청천강 거슬러 묘향산 까지 실록을 이안하고 지켜내어 역사의 맥을 이어준 충정은
내장산 용굴암, 비례암에 어용과 실록을 옮긴 후에도 행여나 하여 교대로
수직을 섰는데 1592년 6월 23일부터 1593년 7월 8일까지 총 370일 동안 안 의가 174일, 손홍록이 143일, 함께 구직한
날이 53일로 그 정성이 대단했 다. 그후 순홍록은 실록을 충남 아산현을 거쳐 강화부로 옮겼고 강화에서
과로로 병이 난 안의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안의의 심복 한춘과 함께
평북 묘향산 보현사로 이안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실록을 지켜냈다.
그런데 송익필 정철의 친구 이율곡의 매제 권태일 권진등 그 세력들이 후에 묘향산 까지 가서 실록을 관리하여 '수정선조실록' 을 만들어 낸 변명실록으로 보인다
오경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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