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이 자료로 안씨 유씨 누명이 벗겨진다
조광조는 최고의충신, 조광조를 살리려는 사람은 역적으로 교육
고려 쌍화점 마을 안의의 고향 자시내 풍경
http://blog.daum.net/nongaak/7090594
조선왕조실록 지킴이 안의 고향산천은 고려시대 쌍화점 시무비 조선 세종때 안지. 최항 한글창조자 의 후손이 산다
태인현 안씨의 역사를 탐구하여 보면 한글노래 상춘곡을 지은
그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을미(1475)에 지은 "태인고현 동중 향음 서(泰仁古縣洞中鄕飮序)"가 나온
安忠烈 ..安邦彦 ..安邦豪 ..安邦傑 ..
이 분들은 이름으로 보아 일가족으로 보이며, 이후로도 그 친족 또는 후손으로 보이는 안씨들이 다수 나오다가, 중간에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조선말에 탐진안씨와 순흥안씨들이 나타난다.
앞에 나오는 분들은 본관이 없다. 이것은 그 이유는 친족 안당 안처겸을 안씨 종 송사련이 무고로 고발하여 역적이 되어 안씨들이 연좌제 처벌이 두려워서 성씨를 바꾸거나 숨어버린 것이다
조선시대 역적의 친족은 9족을 죽이고 모든 동성동본은 벼슬금지 시키는 시대였다
이로 보아 처음 안씨들은 시산정 이정숙의 무리 안당 안처겸이 친구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종 송사련이 거짓 밀고로 멸문 다른데로 이주해 가고, 전남 강진섬으로 피신 탐진안씨로 변성, 나중에 탐진 및 순흥 안씨들이 정읍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강진김씨가 호족인 칠보면의 친척이 전남 강진에 많이 살아서 그 연고로 강진으로 숨어 들어간 것이 탐진(강진) 안씨로 안의의 성씨 변경 사유로 보여진다
현 강진군 국회의원 김영진과 이곳 칠보 김원기 전의원이 도강김씨는 같은 강진(탐진)김씨로 같은 친족계보로 원거리 동족거주 지역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1475년 무렵 태인에 살았던 안씨들은 어떤 분들일까? 당시는 호남 지역에 광주안씨나, 순흥안씨들은 살기 전이었고, 주로 구 죽산안씨 복야공파나, 신 죽산안씨들이 살았다.
광주안씨 시조와 같은 이름(安邦傑)이 나오니 광주안씨냐 아니냐 등 학론이 구구하다.
성종시대 전국 최대 벼슬가문의 문화유씨 유자광을 죽이고 그 가문별 벼슬자리를 한명회의 청주한씨가 그 후에 영상급 최대 벼슬이 성씨가 되었다
그래서 최대 벼슬가문 문화유씨는 유자광 탈피 결백을 표시하려고 유자광을 진주유씨로 떼어내고 진주유씨는 유자광의 부친 유규가 예종때 영광군수 였는데 태조 이성계 시절의 조부 유혜손까지 떼어내어 영광유씨로 축출 멸문압박의 고통으로 살았다
명나라 세력 추종자 중종과 사헌부를 강화 모든선비는 유자광 타도의 상소문을 올리게 하고 유자광의 친족과 사돈관계의 타성 친척도 압력을 넣어 유자광 타도의 상소문을 올려야
생존하는 법으로 유자광 누나 고모 이모 등의 친척도 유자광 타도 욕설 처벌요구 상소문을 모두 올렸다 그래야 살았다
문화 유씨와 전주 진주 안동등 유씨에서 유자광 이름과 친족은 모두 삭제되어 없다
그런데 유자광 친척 가문 중에서 안의 외손자 권극평의 안동권씨 족보에 유자광의 조부 유두명 부친 유규가 고모부 권채의 부인 란에 명기 되어 내려 온다
이것은 권채의 3대 외독자 손자 권이를 살려낸 유자광의 은혜와 공적을 대대로 알고 타성족보에 기록한 유일한 곳이다
신숙주 큰어머니 족보 홍길동의 사촌형수 고모들 족보에서도 삭제되어 있다
유자광의 족보는 이처럼 외줄 독자 계승으로 희귀 성씨로 몰락햇다
심지어 중종실록에 유자광 부인이 유자광과 자기 자식을 처벌하라는 내용 그 상소문이 실록 원문에는 없는데 중종실록을 편집책임자나 세력자로 집필하는 사신(史臣)들이 아래와 같이 조작하여 꾸며서 중종실록을 만들어서 유자광 타도 관제 데모를 시켰다
중종 23권, 10년(1515 을해 / 명 정덕(正德) 10년) 9월 8일(신묘) 2번째기사
유자광의 아내 박씨의 상언에 의해 아들 유진을 절도에 유배시키다
유자광(柳子光)의 아내 박씨(朴氏)의 상언(上言)5981) 을 정원(政院)에 내리고 이르기를,
“원하는 바에 따라 그 아들 유진(柳軫)을 절도(絶島)에 이배(移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유자광(柳子光)은 천한 서출(庶出)이다.
젊어서부터 늘 출세하고자 온갖 방법으로 꾀하여 기회를 엿보았는데 세조(世祖)에게 인정을 받아 녹공(錄功) 되었고, 부원군(府院君)에 이르렀다. 무오사화(戊午史禍)는 이 사람이 일으킨 것이며, 갑자 사화(甲子士禍) 때에 사림(士林)이 다 죽었는데도 부족하게 여겨, 송일(宋軼)의 상소에 따라 또 일망타진하려 하였으나, 김세필(金世弼)이 그 간사한 정상을 박원종(朴元宗)에게 애써 알렸으므로, 마침내 귀양가서 죽었다. 그 아들 유진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말감(末減) 하여 사변(徙邊) 하였다. 유진의 아우 유방(柳房)도 변변치 못하였는데, 세상에 용납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서 목매어 죽었다. 독사가 반드시 독사를 낳는 것이니, 이상하게 여길 것이 있으랴!
【태백산사고본】
유자광 부인의 상소문이 없는데 사신 기록자가 악의에 찬 유자광 욕설로 이처럼 조작 편집기록했을 을 알게 한다
유자광의 아들 유방을 죽이고 자살했다고 하고 하는 말은 귀에 익은소리 장준하 선생과 장태완 아들 의문사 자살 위장과 같이 유자광의 아들도 죽이고 자살로 위장했다
유자광 친족이 한맺혀 숨어 살면서도 끈질기게 해명자료로 구출한 마음이 장준하 장태완의 유가족 현대사와 비교된다
그 거짓말 선전 '유자광전'을보고 분성된 문화유씨 이제 조선왕조실록 기록문을 보고 모든유씨 차씨들총친이 통합하여 유자광의 신도비를 세우고 웃었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물제 안의가 조선왕조실록과 이조문기 30여마차, 고려사기(고려사)문 등의 전적 20여마를 적군의 눈을 피해 내장산으로 옮겼다.
내장산 용굴암, 비례암에 어용과 실록을 옮긴 후에도 행여나 정철 송익필 세력이 방화할까 하여 교대로 경비를 하였다
그후 조선실록을 충남 아산현을 거쳐 강화부로 옮겼고 강화에서
과로로 병이 난 안의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안의의 심복.그리고 외손자 권극평의 권씨 가문 머슴들과 함께 평북 묘향산 보현사로 이안하여 임진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실록을 지켜냈다.
특히 권극평은 세종때 정인지와 함께 용비어천가 를 지은 안지의 고손자이다.
안지가 인순부원의 직책에 있을 때 전주사고가 건립되고 직접 실록의
제본을 떠 전주에 이관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의가 손홍록과 외손자 권극평
이 왕조실록을 구했다
세종때 용비어천가를 지은 고은 안지(安止 ; 1377 ~ 1464순흥안씨) 선생의 시문집도 있다.
안지선생은 고려때인 1377년에 김제에서 태어나 태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이 됐으며
변계량과 함께 실록편수에 착수, 태조실록 태종실록을 편찬하고 세종때 집현전 대제학을 역임하고 이어 정당문학 검교 찬성 겸 세자사부빈객 승을 지냈으며 정인지 등 집현전 학자들과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중종실록을 철저하게 김일성과 박정희 정권이 그 수법으로 모방 군사정권을 쟁취에 성공했다
이 처럼 북한의 반동분자 처형과 정치보위부는 중종시대 사헌부 역할을 그대로 모방한 성공이였다
문화유씨는 조선왕조실록 한글판의 증거자료가 유자광 충신으로 밝혀저서 '자랑스런 유자광'으로 모든 문화유씨와 동족 차씨 까지 통합문중회의를 하고 안씨 문중에서는 안당과 안처겸의 종 송사련의 밀고로 몰락 분성된 그 과정을 토론 또는 언쟁 중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역사기록을 고의로 무시하고 누가 어려운 한문 조선실록을 보랴 하고 실록기록을 자기세력만 보고 숨기고 충신 가문을 역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북한이 남침하여 바로 가저간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한 것을 복제했다
산업 예술 국방의 선각자 부산 왜병방어 상소문의 유자광 가문과 조광조 충신을 조의제문을 지어 거짓 조작으로 죽이려는 것을 막으려다 멸문화를 당해 두 가문이 몰락하여 조선실록이 그시대 CCTV 녹화필림 같은 변론 자료를 그 가족들이 찾아내었다
삼국사기. 악학괘범등 대부분 고서가 일본에서 나왔다
그 이유는 일본 풍신수길의 욕심은 조선의 문화재 강탈이 였다고도 한다
서울. 성주. 충주. 실록이 왜병이 강탈아려고 욕심내는 책과 글씨를 소각했다는 말은 좀 더 연구하여 밝혀야 한다
조선통신사에게 글씨 하나 받기위해 몰려든 일본 왜군이 전투와 무관한 책창고 부터 방화 했다니 ...
왜 정철이 시급히 심복 홍서봉을 성주목사로 발령하였는가 그 의문을 풀어야 한다
성종 시대는 유자광 실력시대 나이 70세에도 벼슬 못한 정극인이 유자광 세력에 벼슬을 하고 유자광 몰락에 그 벼슬도 마친다
오경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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