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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왕조실록 유자광.안당 친족들이 구해냈다(2 )

ryu하곡 2017. 2. 22. 02:44

 

 

조선왕조실록 유자광.안당 친족들이 구해냈다(2 )

 

안의와 권극평의 친족이  유자광과  친교 기록문은 명나라 식민지 걸림돌 유자광 죽이기  음모자료로서  사수했다 

http://blog.daum.net/nongaak/7090592   본문기사 (1)

 

 

남명 조식선생의 친구  일제 이항 선생이  김천일. 안의 .손홍록 송상현 권극평을 가르킨  남고서원 애국학당

 

유자광이 '악학괘범'을 만든 예술문화 계승자이다  

유자광이  유규의  서자로서  가족 천대에서 벗어나  두 고모집  태인현 옹동면과 산내면 대장금 마을에서 어려서  살았다  

정읍시 옹동면 냇물건너 마을에 이항이 살았는데  이항의  고모할머니가 권이의 며느리 로서 훗날 임진난 조선실록을 지킨  의병장 권극평의 고조 할머니다

그리고  조광조를 벼슬시키고 천거한  안당 안처겸 등 안씨가  권이의 친척으로 조선실록에 기록이 있다 

예종1년은 유자광이 남이장군의 역모를  방지하여  그 해 최고의 세력시대 였는데도  유자광의 조카 권이를  납치 죽이려는 행동이

일어났는데 여기에서 안당의 친족 안씨가  유자광에게 달려가서  알려서  유자광이 사헌부에 신고하여  조카를 살려냈다

여기에서  권이가  다행히 살아나서 억울한 유자광 죽음의 이야기를 가훈으로 듣고  그  고손자 권극평이 외조부 안의에게  부탁하고 진주유씨 유자광 세력이 의병이   이르켜 지킨 진주성으로 달려가  왜적과 전투 성곽외부  전투대로 농악피리신호 군악전투 하다 부상으로  순직했다 

그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보면  유자광은 안씨 이씨 권씨와 이웃마을에서 어려서 살며  다진 가족애가 보인다    

 

예종 3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2월 10일(을미) 1번째기사

군기시 판관 정이원이 아들을 시켜 권이를 결박시키니 국문하게 하다

 

처음에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 정이원(鄭而元)이 그 오촌질(五寸姪) 생원(生員) 권이(權怡)와 더불어 노비(奴婢)를 소송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정이원이 그 아들 정정(鄭靖)을 보내서 형조(刑曹)의 장수(杖首곤장치는 대장) 를 청하여, 이들과 함께 권이의 집에 가서, 권이를 결박하여 그의 집 뜰 가운데 눈[雪] 위에다 놓아 두고, 밤을 새고 한낮이 되어도 오히려 놓아주지 아니하므로, 권이의 아내가 정이원의 집에 찾아갔으나, 문을 닫아 걸어서 들어갈 수 없으므로, 울기를 매우 애통하게 하였다. 이웃 사람이 가엾어서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제 정이원의 아들 정정이 내 남편을 결박해 왔는데, 그 생사(生死)를 알 수 없어서 우는 것이니, 나를 위해서 살펴보아 달라.”

하였다. 그리하여 이웃 사람이 살펴보니, 권이가 과연 계단 위의 창(窓) 밖에서 꿇어앉아 있었는데, 이때 마침 그 족인(族人친척) 안근(安謹)이 와서 구원해 주어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권이의 오촌숙(五寸叔)인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이 그 연유를 자세히 갖추어서 예종에게 아뢰니, 승정원에 명하여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승정원에서 곧 정정과 증인(證人)들을 불러서 사실을 물으니, 모두 대답하기를 사실대로 하였으므로, 의금부에 명하여 추핵(推覈)하게 하였다.

이때 정이원이 이성 현감(利城縣監)을 제수받아 길을 떠난 지 하루가 되었는데, 이를 잡아오게 하여 국문하는 데 예종이 참여하게 하였다.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시산정,  조광조의  우두머리   이정숙은 이곳 이름 '시산詩山正정'으로 태어나 부르며  유교의 성지

해동 공자라고 했으나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이곳의 모든 유교서적이   안당의 종 송사련이  고발한 공로 상으로 받아가서  이율곡의 스승으로  이율곡 태양의  조선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전주의 조선왕조실록을 권극평 외조부 안의와 안의의 조선왕조 실록을  구해낸 친족의 행적자료를 보면 유자광의 애국 결백의 기록문이기에 대대로 안씨 권씨가 지키려 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유자광이 어려서 살았던 정읍 옹동면 고모집에서 가사를 돌보며 3대독자 권이를 보호하며 기르고 살다가  세조시대  조카 권이(權怡)를 가르치고 벼슬을 시킨 가족장이였다

 

이처럼 유자광 세력이 최고인 시대에 유자광 고모의  유일한 3대독자를  친척 정이원에게  얼어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죽이게하여고  함경도 현감으로 멀리 보내려는 명나라황후  한명회 인수대비 세력의 유자광 뿌리 암살계획으로 보여지고  그공으로 현감 벼슬로 보내다가 유자광이 살려낸 예종의 특명으로 무산되었다 

정이원은  이집에 시집와서 아기를 낳지 못한 부인의 조카로서   시기하는 터에 한명회와 그딸 예종 성종비가 유자광의 뿌리 암살의

음모로서 유자광의 고모는 숨어 다니며 손자를 살렸다고 족인들은 전한다

그래서 예종이 죽자  성종1년에  한명회 사둔 신숙주를 시켜서 종을 매수하여  유자광을 역모로 꾸며  죽이려 했으나  유자광이 남원윤씨 페비 윤씨 왕비(연산군어머니)가  어린 성종에게 부탁하여  수렴청정  세조비에게  사실을 알려서  살려냈다

한명회 천하시대 한명회 딸의 시아버지 신숙주는  세조왕비 태후가  내용을 파악하고 살려주라고 명령해도 신숙주는 자꾸 반대하며  죽이려 했고  어린 성종은  유자광 처형을  끝까지 반대했다  

 

 세조왕비 태후는  이시애난 평정에서 유자광을 삼국지 촉나라  '제갈양'이라 고 불리며  아낀 역사가 있다

이런 명나라 황족 식민지 세력이  민족 세력자  유자광 조카   권이의 고손자 권극평이 임진난에 태인 의병장으로 호남에서 진주성 전투 지원군에 까지 참전하고 부상으로 순직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서울. 성주. 충주에서 소실되고  전주에서 만 구해 낸  안의와 손홍록이 내장사와 아산 황해도 묘향산까지 숨긴 것은 권극평 의병장이 친척 권율장군이 있었다

조광조는 이장곤 안당  시산정 이정숙 일제 이항등 사실상   유자광계 들이 길러낸 선비들이 추천하였다

여기서 시산정‘시산정(詩山正) 이정숙은  시산은  태인현  현 정읍군 칠보면 시산리 詩山里 이름으로  단종왕비 고모가 할머니로서  그때부터 칠보면에서 대대로 살아온 세조의 동생 임영대군 후손 이구 이준의 후손이다

 

그 당시 중종이  유자광을 죽이기 위해 유자광을 잠시 유배로 위장 안심시키려는 계획으로  유자광파 이정숙  이장곤 안당 박영문을 등용하고 유자광을 평창으로 유배 즉시 눈을 멀게하여 식물인간으로 만들고  죽였다

그리고 차례로 조광조 안당 박영문을 반역죄로 그들의 종을 매수하여  거짓 역모로 씨워  죽이고 종 송사련 막개등이 귀족이 되었다

 

이런 유자광 숙청 계획 사실을  잘아는  이항의 백부가  귀향 명령하여 이항은  미리서 태인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이항은   의병장 김천일 안의. 손홍록 이영남등을 가르치며  살아난다 

 이항의 절친한 학우  경상도   남명 조식은 정인홍 곽재우등 영남 의병장을 가르친 영호남의 수호 햇심 두 어른이였다 

 

 진주성에 참전 순직한 권이의 고손자  의병장 보공장군 권극평의 충열사  유자광의 고모가 살았던 마을 정읍 옹동면 모충사

 

고려시대   기와에  학당이  이곳에 세워진  현종부터 충열왕시대 이자겸 송인세력자 인재양성소 학교 '학당' 글씨기와

 

세종대왕때 사가독서 1호이며 우부승지로서  향약 집성방을 지은  권채의 고향으로  친구 최항 안지 등 집현전

친구들이 모두 옆마을에  최씨 최항 후손 집성촌으로 살고 있다  

  안지가 인순부원의 직책에 있을 때 전주사고가 건립되고 직접 실록의 제본을 떠 전주에 이관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웃 칠보면 삼리에 사는 손 홍록 선생과 함께

전주사고를 지킨 손홍록과 안의 선비에 대해  손홍록과 안의가 7년 전쟁 내내 내장산, 강화도를 거쳐

 청천강 거슬러 묘향산 까지 실록을 이안하고 지켜내어 역사의 맥을 이어준 충정은

내장산 용굴암, 비례암에 어용과 실록을 옮긴 후에도 행여나 하여 교대로

수직을 섰는데 1592년 6월 23일부터 1593년 7월 8일까지 총 370일 동안 안 의가 174일, 손홍록이 143일, 함께 구직한

날이 53일로 그 정성이 대단했 다. 그후 순홍록은 실록을 충남 아산현을 거쳐 강화부로 옮겼고 강화에서

과로로 병이 난 안의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안의의 심복 한춘과 함께

평북 묘향산 보현사로 이안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실록을 지켜냈다.

그런데   송익필 정철의 친구  이율곡의 매제 권태일 권진등 그 세력들이  후에  묘향산 실록사고까지 가서 실록을  관리하여  '수정선조실록' 을 만들어 낸 '변명실록'으로 보인다

 

 

 

오경 notany350@hanmail.net

출처 : 한민족소리 찾기. 아리랑은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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