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화순 언동사 사적보고 내용입니다.

ryu하곡 2017. 1. 27. 18:41

배향 네분 선생(四先生) 사적보고


이의재 류 홍 선생님 추배 행사시 작성한 사적보고 내용입니다.

 

 

이곳 유서 깊은 화순의 언동사(彦洞祠)는 188년 전인 1821년 유학의 종장으로 추앙받는  열역재 류덕용(悅易齋 柳德容)과 공의 오대조이신 태종대왕 잠저(潛邸)시 홍유(弘猷)를 도와 종묘사직을 바로세운  정묵재 류선(靜黙齋 柳善)과 병자호란 때 창의하신 차자 백천공 류함(百泉公 柳涵)을 모시기 위하여 유림들에 의해 지어진 사우입니다.


 오늘 본 사우에 열역재공의 장자이신 선무원종공신 이의재 (履義齋)  류홍(柳泓)선생을 유림의 총의로 추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추배의 고유제를 올리게 된 경과보고와  언동사의 유래 및 네 분 선생 사적을 다시 한 번 살핌으로서 충효의렬(忠孝義烈)의 정신적 가치를 새기고자 합니다.


선생의 언동사 추배문제는 2007년(음)3월10일 향사 시 처음 대두되었습니다. 1차 논의에서 회양부사를 지내시고 임지왜란 시 평양성싸움에서 순국하신 열역재공의 장자 이의재선생을 본 사우에 추배하는 게 좋겠다는 유론(儒論)이 모아졌습니다.

2008년(음)3월10일 향사 시 2차 논의에서 이의재의 사적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어 선생의 사적을 수집하여 검토한바 임진왜란 시 나라를 위해 왜적과 싸우다가 평양에서 순국하신 사실이 선조실록에 분명하고 임란평정에 유공한 공신에게 서훈한 선무원종공신록권에 부장(部將)으로 이등에 책훈한 기록이 확실하며 또한 보책(譜冊)등 유문(遺文)에  행적이 명요(明曜)하게 등재되어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어 2009년 9월19일 임시회의에서 선생의 사적보고가 있었으며 임란에 호국을 위해 충국수명(忠國授命)하신 절신을 추배하여 살신성인의 충절을 흠모하자는 의견에 이의가 없었으며 2009년11월25일 추배의 고유제를 올리기로 하였으며 추배 절차 및 의례는 백천공종친회 류상의 회장과  류정훈 총무에게 위임하였습니다.

 

 

 

 

서원(書院)이나 사우(祠宇)는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대표적인 유산입니다  서원은 고려 말 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소규모 서재(書齋)의 사학(私學)에서부터 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조초기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세워진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는 관학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학(私學)인 서원은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소수서원(紹修書院)을 필두로 하여 16세기 후반부터 전국에 세워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서원은  고려 말 서재의 성격은 단순히 유자의 안거강학(安居講學)의 장소였던 데 반해 조선조 서원은 안거강학의 기능뿐만 아니라 선현을 제사하는 사묘(祀廟)를 가지고 있어 향사를 통해 선현의 덕행을 추모하고 도의정신을 본받아 학행을 바르게 하려는 교육의 도장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격을 가춘 사우는 전국에 많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이곳  언동사(彦洞祠)는 열역재 선생이 강학하던 곳에 세워진  사우입니다. 공이 가신지 약 이백년 후인  1821년에  사론(士論)이 일어나니  성균관과 영. 호남에서 통장(通章)이 답지하고 ,영문(營門)과 이조(吏曹)의 제교(題敎)가 있어 많은 선비들이 동참하고 출재하여 사우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호남의 석유(碩儒)이신 열역재공을 배향하고 그 근본을 찾아 공의 고조 한림 정묵재공를 병향(並享)하는 한편 공의 차자인 향유(鄕儒) 백천공을 제부(躋祔)하여 삼위를 배향해 왔습니다. 이제 열역재공의 장자이신 호국수명의 충신 이의재공을 추배하게된 것은 임진왜란 시 왜적과 싸우다 평양에서 순절하신 사적이 세상에 밝게 나와 공의 나라를 위해 살신성인하신 호국정신을 천추에 기리고 저 배향하게 된 것입니다. 


세분 선생의 훌륭하신 공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위(位)의 휘는 선(善) 자(字)는 덕우(德祐) 호는 정묵재(靜黙齋)입니다. 공은 조선조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동문수학한 분으로 태종 잠저시에 홍유(弘猷)를 도와 사직을 바로 세웠으며 태종과 동갑으로 동갑 20인이 삼각산이 무너질지라도 의(義)를 민멸(泯滅) 말자고 의를 맺은  갑계의 한분 이십니다  공은 태종대왕께서 특히 신임하시던 선비로서 양근군사, 부평 부사를 역임하고, 태종조에 벼슬이 한림에 이르니 청직(淸直)으로서 백성들이 그 청덕(淸德)을 기리며 거사비(去思碑)를 세워주었다는 사실이 전한록(全翰錄)에 전하는 인물 이십니다.

둘째 위의 휘는 덕용(德容) 자는 중부(仲符) 호는 열역재(悅易齋)입니다. 공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성리학에 심취 위로는 수사(洙泗)의 연원에 접해  유학(儒學)이 도통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아래로는 염민(濂閩)의 적전(嫡傳)에 이르기까지 그 미사오지(微辭奧旨)까지도 밝게 이해하시어  유학(儒學)의 종장(宗匠)이란 칭송을 얻었습니다.

 또한 수재헌(修齋軒)이란 서당을 짓고 후학들을 양성하고 학문을 토론하고 의리(義理)를 궁구하여 학자(學者)들이 모두 우리의 스승이라 일컬었고, 주역에 힘써 능히 깊은 이치(微理)를 터득하였으며 옛 성인의  깊은 뜻을 본받아  후학들에 지남(指南)을 열어 주었습니다.

공은  어머니의 환후(患候)가 심하여 백약이 무효인데 의원(醫員)이 말하기를 개구리를 잡아 탕재하여 드리면  효험이 있으리라 하였다.

때는 엄동설한이라  개구리를 구하려  연못에 가서 얼음을 깨고 잡으려 했으나 구하지 못하였다. 연못가에 꿇어 앉아 울며 하늘에 빌었더니 청와(靑蛙)가 고목에서 떨어져 이를 취해 약을 다려드려 어머니 병환을 낫게 한 효자였습니다.

도백인 윤휘(尹暉)가 조정에 이 사실을 고해 양덕현감에 임명하고 孝子旌閭를 내렸다.

또 수(壽)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제수 받았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습니다.

세 째 위의 휘는 함(涵) 자(字)는 자정(子靜)이니 호는 백천재(百泉齋)입니다. 공은 열역재(悅易齋) 덕용의 三子로 홍(泓)선생의 아우 되시는 분입니다. 공은 형의 유품(遺品)인 갑옷과 장검(長劍)을 들고 형의 충혼(忠魂)을 흠모(欽慕)하며, 학문으로 수신하며 무예를 닦으셨습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붓을 던지고 선비의 신분으로 분연이 일어나 의병(義兵) 삼천을 모집하고 수백석의 군량미를 마련하여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남한산성까지 진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고 강화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북향통곡하며 의병을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환산정(環山亭)을 짓고 유학자들과 강논하고, 산수를 벗하여 시를 짓고, 후학양성에 전념하셨던 선생님이십니다.

오늘 언동사(彦洞祠)에 추배(追配)되는 이의재는 열역재의 장자요 백천재의 장형이시니 휘는 홍(泓)이며 이의재(履義齋)는 그분의 호입니다. 공은 가정(嘉靖) 정사(丁巳)1557년에 출생하셨으며, 지기(智器)가 총명하고 풍도(風度)가 괴위(魁偉)하며 문무(文武)가 겸전(兼全)하였습니다. 만력(萬曆) 갑신(甲申)1584년 27세에 무과(武科)에 등제(登第)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역임 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충분의격(忠憤義激)하여 선조몽진(宣祖蒙塵)에 백의로 호종(扈從)하시여 평양에 당도하였다가 전세(戰勢)가 급박함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군영(軍營)에 종사관(從事官)으로 제수되고, 이어 부장(部將)으로 승임(陞任)하여 좌방어사(左防禦使) 정희현(鄭希賢)과 대소교전(大小交戰)에 누공(累功)을 세우고 임전(臨戰)할 새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남아 대장부의 할 일(爲國死義男兒大丈夫之事)이라. 죽은들 무엇이 유감(遺憾)이랴” 하고 제장졸(諸將卒)과 결사구국(決死救國)을 서천맹산(誓天盟山)하고 적진을 돌격하여 무수한 왜구(倭寇)를 무찌르고 36세의 나이에 장렬(壯烈)히 순절(殉節)하시었습니다.

이때 전공(戰功)도 높았으나 아군피해도 많았음으로 정희현(鄭希賢)은 문책이 두려워 전과(戰果)를 숨기고 아뢰지 않았습니다. 후일 이일(李鎰)의 장계(狀啓)로 비변사(備邊司)에서 왕께 아뢰니 대왕(大王)께서 슬퍼하시고, 전지(戰地)에 사당(祠堂)을 세워 공의 충혼(忠魂)을 위로하라 명하시고 간선대부병조참판의 증직과 선무원종공신이등(宣武原從功臣二等)에 책훈(策勳)하시면서 또 이르기를 그 공훈(功勳)을 후세에 전하여 자손이 영광을 누리도록 세상에 널리 알리라 유시(諭示)하였습니다.

공은 1993년 계유(癸酉)에 충남보령 호국사(護國祠)에 배향되시었습니다. 공의 장자 회령부사 응량(應良)도 선부원종공신 삼등으로 공함께 호국사에 배향되었습니다.


 

 

또한 공의 계매(季妹)는 최서생(崔瑞生)의 부인이니 부군(夫君)이 사진포(沙津浦)에서 전사하자 함께 순절(殉節)하여 열녀정문(烈女旌門)이 화순읍 다지리 해주최씨(海州崔氏) 선조 문헌공(文憲公)최충(崔冲)의 영당(影當)옆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렇듯 부자 양대(兩代)에 충․효․의․열(忠孝義烈)이  빼어나 강호사림(江湖士林)의 우러러 칭송함이 높았습니다.

오늘 순국충신이신 이의재선생을 배향함으로서 언동사는 일월이 더욱 요요히 비추고 네 분 선생님들의 충효의열의 덕행은 산과 같이 높고 물과 같이 길이 이어 갈 것입니다.

물질문명의 발달과 외래문화의 유입으로 우리의 정신문화와 윤리도덕의 가치관이 혼돈을 겪고 있는 이때 유학의 덕목인 충.효.의.열 의 정신현양은 더욱 시대적의의가 높다 하겠습니다. 앞으로 네 분 선생님의 정신과 사상을 숭모하고 繼承하여 모선육영(慕先育英)의 교육적 근본을 다지고 사문진작(斯文振作)의 기회로 삼아  도의사회구현에 힘을 기우려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문화시대에 병들어가고 있는 오천년 역사와 민족문화를 바로 세워 세계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에게 민족적 긍지와 시대적 책임감을 심어주어 그로벌시대의 리더로서 자질을 키우기 위하여 전통문화의 보전에 힘써야할 때입니다.

우리조상은 선비정신과  훌륭한 덕행을 기리고  귀감으로 본받고자 정성과 재화를 모아 언동사를 지으셨습니다. 선인들의 정신유산을 수호하고 현양하는데 많은 관심과 사랑을 기우려 주시가 바랍니다.

 

 


주 1) 사수 泗洙; 중국산동성에 있는泗水 와洙水 의 강 이름으로 공자가   이 근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하여 孔子 學 즉  공맹의 儒學을 말함

주 2) 염민 濂閩; 염민은 濂閩之學의 주린 말로 즉 儒敎를 말함이니 이  는 송나라 송학으로 程朱學을 일컬으며 즉 중국 濂溪의 朱敦頥 , 낙  양의 程顥.,아우 程頥 즉 두 사람을 二程子 또는 程子라 하고 閩中 (지금의 복건성)의 朱熹와 閩中의 張載가 주창한  유학을 洛閩之學  이라 하여 염민은 후대 유학을 총칭함.

주 3) 적전 嫡傳; 정통에서 정통으로 전함. 정통적으로 내려오는 학문 또  는 문화



2009년 11월 25일


도산 류영열 지음,  청헌 류정훈 자료제공 


출처 : 무지개 화순을 꿈꾸다
글쓴이 : 화순꿈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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