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차천로 부인과 묘 자료 소개

ryu하곡 2016. 5. 5. 21:24

출처 : http://tip.daum.net/openknow/81236028?q=%EC%B0%A8%EC%B2%9C%EB%A1%9C%EB%B6%80%EC%9D%B8

패륜 차천로는 奉化鄭氏 11鄭元浩外孫婿

자료1 봉화정씨족보 권2 , 515



 

* 자료 봉화정씨족보 권2 , 515쪽에 鄭元浩의 사위 錦川正. 그의 사위 車天輅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금천정(錦川正)이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조선왕실 종친에게 부여하는 호칭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간략히 설명드리면 적통 왕자에게는 00大君, 종실 왕자에게는 00이라 호칭합니다. 00의 아들에게 어머니의 출처와 관련된 지명 뒤에 副正 혹은 을 붙이는 봉호입니다. 예를들면 위 자료 鄭元浚에게 奉城尉라고 봉호하였는데, 정원준은 성종대왕 부마(왕의 사위)이기 때문입니다. , 는 왕의 사위를 뜻하는 호칭입니다. 奉城은 봉화정씨 관향의 다른 명칭이 곧 봉성이므로 정원준의 관향을 표시하여 奉城尉 라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錦川正은 성종대왕 숙의홍씨의 아들 제9 왕자 景明君의 자손으로, 景明君의 둘째 아들 安南君 李壽鍊의 장자 李俌의 봉호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왼쪽에 아들과 사위를 기록하였는데, 昌平守, 昌林守, 昌漢守 역시 이름이 아닌 종실들의 봉호인 것입니다. , 昌平守李世禮, 昌林守李世智, 昌漢守李世溫, 사위는 車天輅 입니다. 봉화정씨는 이들보다 지체가 낮은 가문이기 때문에 감히 종실들의 이름을 피하여 봉호만 기록하였고, 차천로는 동일한 사대부이므로 성함을 기록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따라서 차천로는 봉화정씨 11鄭元浩의 사위 錦川正 李俌의 딸을 취하였으므로, 봉화정씨 11鄭元浩의 외손녀 사위인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위 자료에서 봉화정씨 9鄭叔墀의 배위는 공란으로 있습니다. 이는 갑자사화로 후손들이 문적을 실전하여 비워두었으나, 최근문화류씨대동보를 열람하던 중 문화류씨 14柳畦의 사위가 萬戶 吳仁剛이고 그 딸이 정숙지에게 출가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氏族源流에서 봉화정씨편에서 이조참판 鄭叔墀妻父萬戶 吳仁剛이라는 기록을 발견하여 사실 확인 후 2007년 이 사실을 고유하고 표석을 세웠습니다. 안타깝게도 두 자료에서 처부 오인강의 본관 기록이 없어 해주,동복 등 여러 오씨족보를 검색하였으나 찾지 못하여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자료2 조선왕실 족보 선원록 제39






* 또한 조선왕조실 족보 선원록 제39권은 適妾聚妻에 대하여 아주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위계차서를 정확히 기록하는데 목적을 둔것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錦川正 李俌가 부인을 여럿 거느렸고, 그 중에 한 사람이 鄭元浩의 딸이라는 사실입니다. 錦川正 李俌의 부인 良女天生[鄭元浩의 딸]31녀를 낳았는데, 1남은 昌平副守 李世禮, 2남은 昌林副守 李世智, 3남은 昌漢副守 李世溫, 그리고 딸 李應福車天輅에게 출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만 여기서 차천로의 장모에 대하여 봉화정씨 鄭元浩의 딸이라고 구체적으로 출처를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 그 아들 옆에 생모를 표시하면서 '어머니는 여진 여인 천생[母良女天生]'이라고 기록하였는지, 天生이 이름을 뜻한다면, 天生은 아버지의 본관과 성함이 누락되었는지는, 차후 고증을 통해 살펴봐야 겠지만, 봉화정씨족보 기록과 대조하여 볼 때 전체적인 관계 내용이 모두 일치하므로, 李俌妾子 어머니 天生鄭元浩의 딸 이름 또는 그녀의 품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차천로는 봉화정씨 11鄭元浩의 사위 錦川正 李俌의 딸을 취처하였으므로, 봉화정씨 11鄭元浩의 외손녀 사위 즉, 外孫婿인 것입니다.

 

차천로는 우리 봉화정문을 대상으로 연안차씨 가문에게 깊은 원한을 심은 원흉이기에, 지나칠 수 없어 대략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차천로는 한 때 출중한 문장가로 소문이 있었지만, 수양되지 않아 광패하고 탐욕한 성격으로 인하여 벼슬에 나아가 크게 빛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다 아는 바와같이 차천로는 출세를 목적으로 본처가 버젓이 있음에도, 왕가의 종실인 이보의 첩녀 李應福을 취처하여, 부부윤리를 저버린 패륜아로 지탄 받은 사실이 선조실록 195, 선조 39(1606 병오) 122(신묘)조에 소상히 나타나 있고, 이 자료에서도 '처가 있으면서 취처한 것은 위법이므로 이혼시켰다. [有妻聚妻離異]'라고 기록하여 패륜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차천로 본인이 출세가도를 좇아 그 아들을 첩의 소생으로 만들고 또, 봉화정씨 문중은 그의 처외가임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을 그들의 먼 족속 서얼로 엮어서 조상 차원부를 죽인 원흉으로 조작, 저들의 후손들에게 철천지 원한을 심어서 오늘날까지 적개심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전후가 뒤바뀐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패악 소행이라고 하겠습니다 

논할 것도 못되지만 만일차원부설원기의 내용이 사실이라 간주하면, 그의 서얼 외손녀을 취처한 그는 또 무엇이 되며, 그 자식은 또 무엇입니까? 곧 더 비참한 천출이 아닐까요. 극명한 자기 모순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차천로의차원부설원기와 이를 비판없이 인용한 몇몇 野史를 제외하고,차원부설원기가 세상에 유포되기 이전 2세기 동안, 그 어떤 정사에도 차원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정도전이 활약하던 고려말과 조선초기에 차원부는 정계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도전과 대립하거나 정적관계가 성립된 사실을 찾을 수 없고, 또 그러한 원인조차 절대로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차천로가 역사로부터 배척 소외된 처외가 조상 정도전을 대상으로 허무맹랑한 낭설을 위작, 세상에 유포한 이후 봉화정문은 그들의 해악에 매도 당하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정황에 견주어 거꾸로 생각해 보면 비루한 글 재주를 가진 차천로의 처지가 곧 자신이 꾸면낸 정도전의 상황과 맞아 떨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진단해 봅니다. 깊은 성찰과 각고의 수양 없이 휘갈긴 글은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주지 못하거나 유익하지 못하고, 오히려 날선 비수가 되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고 갈등과 반목을 조장할 뿐 죽은 글입니다. 실천하지 않고 거침없이 뱉어 내는 말은 신뢰성을 상실하고 공허한 말만 확대 생산하는 허풍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차천로는 봉화정씨 11鄭元浩의 외손서임에도 불구하고, 비루하고 천박한 글 재주로서 봉화정씨를 천출의 나락으로 몰아 넣은 것입니다. 따라서 연안차씨가 봉화정문에게 분개하고 성토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봉화정문이 연안차씨에게 반격해야 할 것이지만, 을 덕목으로 삼아 지금껏 이어 왔기에 저간의 전말 대강을 설명하는 것으로 마치렵니다 

이상과 같은 패륜이 지금도 처외가 앞산 자락(과천 문원동 별왕리)에 묻혀 처외증조부 鄭文炯과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고 통탄할 일입니다 

이글은 차천로가 봉화정씨 외척이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왜 처외가인 봉화정씨에 대하여 그토록 혹독한 해악을 끼치게 되었나를 살피는 과정 중 하나의 자료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차천로와 관련하여 우리문중의 고난사에 대한 참고로 삼기 위해 두서없이 올렸사오니, 해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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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tip.daum.net/openknow/81829275?q=%EC%B0%A8%EC%B2%9C%EB%A1%9C%EB%B6%80%EC%9D%B8

차천로의 묘에 대하여  

경기도 과천시 문원동 산35-1번지 속칭 별왕리 입구 우측 산자락에 매우 화려하게 치장한 묘가 하나 있다. 오산 차천로(1556~1615)의 묘라고 하는데 1968년 조성하고 宋在晟이 지은 비문이 빽빽이 뒷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차례로 읽어보니 상부에 언급된 연안차씨 선대를 다음과 같이 모두 설원기를 따라 적었다. 

소전으로부터 당()()() 제왕의 계통을 거쳐 어룡씨(御龍氏)시위씨(豕韋氏)와 기자(箕子)가 동방으로 건너올 때 수행한 사사공(士師公), 신라의 승상공(丞相公)이 있고, 여기에서 미루어 내려가면 신라와 고려 사이에 명공(名公)과 대신(大臣)이 세대마다 배출되어 끊이지 않았는데, 연성군(延城君)으로부터 간의공(諫議公)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18명의 재상이 나왔다. 간의공의 이름은 차원부(車原頫)인데, 왕씨(王氏)가 망하려고 하자 운암(雲巖)으로 가 은거하였다.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찾아가 치국의 방도를 물으니, 공로가 있는 사람을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 뒤에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으니, 태조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엄광(嚴光)이다.”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송경(松京)에 이르렀을 때 흉측한 무리들이 명분을 꾸며 죽이는 화를 당하였다. 정종조(定宗朝)에 좌찬성(左贊成)의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세종조(世宗朝) 초기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세조조(世祖朝)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에게 명하여 설원기(雪冤記)를 편찬하게 하였다.’  

위에 언급된 차천로의 선대는 모두 근거 없는 허구이다. 이 기술은차원부설원기에 있는 내용 그대로 옮긴 것이고, 차원부설원기는 저자를 가탁하고 왕명을 참칭한 위서 이다. 이 책은 차천로의 천박한 글재주로 조작한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연구자들의 확고한 판단이기 때문이다. 차천로는 문재가 있다하나 그 문재는 귀감이 되지 못하였고, 행실 또한 너무나 보잘 것 없기 때문에 허풍과 같다 할 것이다. 한 사람의 올곧은 행위는 그 언행이 일치 되었을 때, 그 문장과 인격은 존중되어 진다. 

차천로는 대리 과거를 봐주는 부정행위를 저지르는가하면, 왜구에게 몸을 더럽혔다하여 본처를 돌보지 않고, 왕실 첩녀를 취처하여 선조대왕으로부터 강상을 어지럽힌 패륜으로 지탄 받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차천로는 재주가 있다하여 없는 사실을 꾸며 조상을 부풀려 자신을 높이고, 무관한 사람을 서얼로 만든 파렴치 한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였다는 것이 여러 논문에서 밝혀졌다. 차원부설원기라는 위서를 지어서 정도전 등 3인을 서얼로 조작하고, 정도전에게 차원부와 그 내외족을 죽었다고 누명을 지우고 자손들에게는 깊은 원한을 심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정도전이다. 차천로는 실제 정도전의 6대손 정원호의 외손녀를 후처로 삼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성종대왕의 종실 금천정 이보의 첩이다. 이보의 첩은 곧 정원호의 딸이다. 이 사실이 선원록39권과 봉화정씨족보 2515쪽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차원부설원기의 기술은 사실을 확인 할 수 없는 조작이라고 판명되었지만, 차천로가 왕실 첩의 딸을 후처로 맞은 것은 명백히 드러난 사실이다. 그것도 16세 연하의 서얼 녀를 취한 것이다. 따라서 진짜 서얼은 정도전이 아니라, 그의 아들 차전곤과 그 후손들이 정도전의 서얼일 개연성이 짙다 

그런데 그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 기록하였을까? 그들은 족보에는 물론 차천로 행장에서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전주 이씨인데, 아버지는 금천정(錦川正) 이보(李俌)이고, 할아버지는 안남군(安南君) 이수금(李壽錦)이며, 외할아버지는 현감(縣監) 재령이씨(載寧李氏) 이은려(李殷礪)이다.’ 라고 기록하여 사실을 숨기고 왕실계보의 적통임을 내세우고 있다. 차천로 처의 외할아버지라고 기록한 재령이씨 이은려는 금천정 이보의 본처 아버지 이다. 그들은 자신을 낳아준 사람이 첩이라는 이유로 외조모로 기록하지 않고, 낳아주지도 않은 이보의 본처를 외조모라 사칭하여 사실을 애써 숨기고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의 외조모의 존재를 무시한 패륜과 사실을 은폐한 작태를 통하여 그들의 인간 됨됨이가 진솔하지 못하고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함을 알 수 있다 

이 묘는 차천로의 실제 무덤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조선말에 이면주(李冕宙, 18271918)가 쓴 차천로의 다음 행장 기록에서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묘소는 과천(果川)의 동쪽 별앙리(別央里)에 있다고 하는데 산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니, 한스럽다.[墓果川東別央里云 而失不傳 可恨] 

또 다른 기록으로서 19093월 편집 후기 격인 12세손 차일룡(車一龍)이 쓴 '차일오산선생 속집 발(五山先生續集跋)'에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선조의 묘소가 어디 있는지 지금까지 실전하였니, 그 후손으로서 통한이 어떠하겠는가. 이에 가정(柯亭) 선영 옆에 오산 선조의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높이 받들어 추모하는 도리를 삼으려는 것이다. [又先祖壽藏之地 至今失傳 其爲遺裔之慟恨 當如何哉 方設壇所於柯亭先隴之傍 爲尊奉寓慕之道] 

이면주는 행장을 쓰게 된 동기를 '침랑(寢郞) 차일룡(車一龍) 씨가 서신을 통해 속집의 서문을 써 달라고 재차 부탁하였고 또 선생의 행장도 부탁하였다. 나는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적임자가 아니라고 누차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그 전말을 대략 서술하였다.' 라고하여 차일용의 거듭된 부탁으로 오산집 서문과 행장을 썼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행장은 차일용의 발문과 같은 1909년 경에 쓴 것으로 짐작 된다. 여기 두 인용에서 당시 차천로의 묘는 실전하고 없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봉분 앞에 세운 또 다른 작은 기념비문을 살펴보니, 현제의 봉문은 1968년도에 조성하였고, 당시 그의 14세 후손인 종량이 오산 선자 문숙공의 옷과 신발만 묻었다.[五山先子文肅公衣履之藏也]’ 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봉분은 차천로의 실제 묘가 아니라 허묘인 것이다.

 

비문을 살펴보면 제3공화국 시절인 1968년 후손들이 적당한 곳을 골라 묘자리를 정하였고, 옷과 신발만 묻었다. 그리고 송재성(宋在晟)이 비문을 짓고, 10세 방손(傍孫)인 동일(東日)이 글씨를 썼으며, 13세손의 사위인 손경환(孫庚煥)이 비를 세웠다. 따라서 차천로의 묘가 과천 별앙리에 있었다는 인지된 사실만으로, 현재 위치(별왕리 산35-1번지)에 옷과 신발만 새로 장만하여 묻은 시신 없이 조성한 허묘인 것이다. 이러한 형태를 정확히 말하자면 추원단, 또는 제단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명칭이라 할 것이다.

 

그들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참으로 어설프고 부끄러운 작태를 통하여 한편, 조상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겉으로 나타내어 신분상승을 꾀하고자는 허영과 끝없는 욕망을 엿볼 수있다. 이와 같이 그들의 대리만족, 또는 보상심리의 극치는 차원부설원기 위작과 같은 형태로 대를 이어서 보여준다고 하겠다.

 

묘는 실제 사자의 시신이 안치된 곳을 이른다. 족보는 한 가문의 역사이고 행장은 한 사람의 일생에 관한 기록으로서 사실대로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생명력 있고 소중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출처 :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글쓴이 : 夏谷류재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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