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게시 글 수정 요청

ryu하곡 2016. 5. 5. 20:53

안녕하세요?

 

게시된 글에 문제가 있어 수정을 요청합니다. 해당 게시판에 글을 쓰거나 해당 글에 답글을 달 권한이 없어 이곳에 글을 올리니 양해 바랍니다.

 

문제 페이지 주소: http://cluster1.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0LkB&fldid=8X4P&contentval=0005mzzzzzzzzzzzzzzzzzzzzzzzzz&nenc=&fenc=&q=&nil_profile=cafetop&nil_menu=sch_updw

 

페이지 제목: 동방문사 오산 차철로 선생의 묘” (*차철로는 차천로의 오기임.)

 

수정 요청 내용: 위 페이지에 있는 다음 내용은 모두 날조된 역사로 판명되었기에 삭제를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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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씨(車氏)는 기원전 2704년 황제(黃帝)이래로 소호(少昊창의(昌意)를 거쳐 내려왔는데, 단군(檀君) 시대에 신갑(辛甲)이란 분이 평양의 일토산(一土山) 아래에서 왕씨(王氏)로 성을 삼았다. 그 후 5세손 왕몽(王蒙)이 일곱 번째 아들 림()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10여 년을 수도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신인(神人)이 나타나 `너희는 성()을 세 번 바꿔야 크게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왕() 자에 동서로 두 획()을 더하여 전씨(田氏)로 하고, 그 뒤 위 아래로 관통하는 획을 하나 더 그어 신씨(申氏)로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두 획을 또 더해서, 차씨(車氏)로 하였다. 그리고 이름은 무일(無一)이라 하니, 바로 차씨의 시조이다. 그리고 신라 시대에는 32세 가운데 14 명의 승상(丞相)이 나와, 삼한의 갑족(甲族)이 되었다.

 

차씨의 32세는 건갑(建甲)으로, 승상 벼슬을 하였다. 신라 39대 소성왕(昭聖王)이 임종할 무렵 승상 건갑을 불렀다. 그리고는 12살의 어린 태자에게 왕위를 전하면서, `아마도 서숙(庶叔)인 언승(彦昇)이 왕위를 찬탈할 염려가 많으니, 연소한 왕을 잘 보필하여 사직을 굳건히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건갑은 소성왕의 유지를 받들어 선정을 베풀다가 큰공을 세우고 세상을 떴다. 이에 애장왕(哀莊王)은 왕의 장례에 준하는 예법으로 그를 안장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은 건갑의 묘를 `차릉(車陵)`이라 일컬었으며, 소성왕의 묘당(廟堂)에 배향하였다. 그리고 42대 흥덕왕(興德王)은 건갑이 살았던 고을 기장현(機張縣) 만화동(萬化洞)을 높여, `차성(車城)`이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그런데 뒷날 과연 언승이 애장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41대 헌덕왕(憲德王)이 되어, 사냥을 일삼았다. 승상 차승색(車承穡)은 아들 공숙(恭淑)과 함께 전왕(前王)의 원수를 갚고자, 헌덕왕이 수렵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복병으로 하여금 괴멸시키고자 한 계획이 사전에 탄로 났다. 이에 생질인 요동백(遼東伯) 김반전(金盤傳)의 집에 피신하고 있던 중, `이들 부자를 체포한 자에게는 금 천근과 식읍 만호를 상으로 준다`는 방이 나붙었다. 김반전은 욕심이 생겨 밀고하려고 하였다. 미리 눈치를 챈 두 부자는 그 날 밤 다시 유주(孺州)의 구월산(九月山) 묵방동(墨坊洞)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모의 성씨인 양씨(楊氏)와 뜻이 같은 류씨(柳氏)로 성을 바꾼 다음, 이름은 승() 자를 빼고 색()이라 하였다. 아들 공숙(恭淑)도 공() 자를 빼고 숙()이라 하여 목숨을 보전하며 숨어살았다.

 

그 후 신라 경명왕(景明王) 2년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남정(南征)할 때이다. 승색의 6세손 차달(車達)은 사재를 들여 수레 천 대와 군량을 보급하여 전공을 세웠고, 왕건은 마침내 삼한을 통합하였다. 그 공으로 차달은 통합삼한익찬벽상이등공신(統合三韓翊贊壁上二等功臣)이 되어 대승(大丞)벼슬에 올랐다. 그런데 그의 성명 차달은 왕건이 내려준 것이었다. 왕건은 `()로써 목적을 달성하였다(以車爲達)`라는 뜻에서 차달이란 이름을 하사한 것이다.

 

그리고 차달의 두 아들 중 맏아들 효전(孝全)에게는 대광백(大匡伯) 연안군(延安君)을 봉하고, 연안(延安)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여 차씨 성을 계승케 하였다. 둘째 아들 효금(孝金)에게는 좌윤(左尹) 문화군(文化君)을 봉하고, 유씨 성을 따로 계승케 하였다. 이런 연유에서 오늘날까지 차씨와 유씨 두 집안은 형제간이라 하여,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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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자료: http://moonhwaryu.kr/home/menu2/sub2_6.html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7wNt&articleno=8649344

 

추가 설명: 위에 인용한 내용은 문중을 높이기 위해 역사조작도 서슴지 않았던 행위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조선 중기에 차원부설원기라는 문헌이 세상에 나왔는데, 이 문헌은 저자들(박팽년, 하위지) 등도 날조하고 역사적 행적이 없는 차원부라는 인물의 행적을 조작하면서 가문의 역사까지 만들어낸 위서(僞書)임이 역사 연구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날조된 가문의 역사가 위에 인용한 내용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최근 이런 역사조작은 아주 교묘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조선 시대에도 몇 분의 선각자들만이 알고 있었으며,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 십수년 사이의 일입니다. 역사학계에서도 차원부설원기가 위서임을 밝힌 논문이 몇 편 나왔습니다. 차원부라는 정체 모를 인물에게는 정몽주 같은 고려말의 충신이며, 이성계와 이방원을 도와 조선을 세운 조선의 공신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정신분열증적 사적이 날조되었고, 그 결과 심지어 그가 두문동 72의 한 사람으로 들어가 있는 상황입니다. “차원부설원기는 우리나라 역사를 혼탁하게 만든 죄가 무척 큽니다.

이 위서 차원부설원기는 차천로가 위작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차천로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부인을 버리고 전주이씨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여 중혼죄를 범함으로써 선조임금이 강상을 어지럽힌 만행이라고 수십 년 간에 걸쳐 비난하였으며 국가에 의해 강제이혼까지 당했습니다. 그는 당시 한미했던 집안을 미화해서 반대급부를 얻으려고 차원부설원기를 지었다고 추정됩니다.

또한 위서 차원부설원기는 자신들을 높이기 위해 남을 비천한 인물들로 날조한 추악한 문헌입니다. 그때 동원된 인물들이 하륜, 정도전 같은 인물들인데, 사실을 조작하여 이들을 비천한 인물들로 묘사하여 그것이 사실로 둔갑하여 널리 유포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 인터넷 시대에 잘못된 사실과 잘못된 역사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퍼뜨리는 데 일조하는 일이 흔히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무척 어려워집니다. 부디 위 내용을 삭제해 주셔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물고기와 물병
글쓴이 : 은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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