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적힌 적서(嫡庶)에 대한 관념은 조선 시대의 그것이며 필자는 그에 전혀 찬동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차천로는 1556년(명종 11년)에 태어나서 1615년(광해군 7년)에 사망했다. 그의 혼인에 관해 선원록과 조선왕조실록과 연안차씨의 족보를 보고 몇 가지가 생각나서 이 글을 쓴다. [이하, 실록의 해석은 모두 실록 사이트(http://sillok.history.go.kr/)가 출처임]
실록에 차천로의 아내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은 선조 38년인 1605년 12월 26일의 기사에서이다. 선조가 “선원록(璿源錄, 왕실의 족보)”의 초안을 보다가 차천로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개탄한다.
“부부란 인륜(人倫)의 근본이라 이를 삼가지 않으면 기강이 멸절되고 만다. 차천로(車天輅) 는 일개 간세(姦細)한 사람이어서 자기 아내가 왜적에게 더럽혀졌다고 핑계하여 유사(有司)에게 알리지도 않고 멋대로 아내를 바꾸어서 타인의 딸을 취해 아내로 삼았는데, 지금 보니 《선원록(璿源錄)》에 그를 아내로 썼다. 이는 사람들에게 출처(黜妻)를 가르치는 것이고 또 처가 있으면서 새로 처를 얻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만약 후인들이 이를 본받아 아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핑계하면서 스스로 개취(改娶)하면 그들을 장차 모두 아내로 삼도록 허락하겠는가. 풍속의 퇴폐가 이로부터 시작되어 인도(人道)가 확립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자기 아내를 내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위로 유사에게 알리고 다음에 문족(門族)들과 의논하여 그 죄과를 따져서 내쳐야 명분이 서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개취(改娶)한다면 누가 불가하다 하겠는가. 천로는 아내 버리는 일을 헌신짝 버리듯이 여겨 아내를 내치고 취하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으니 이 어찌 너무도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의논하여 조처하라.” (夫婦, 人倫之始, 於此而有不謹焉, 則倫紀滅矣。 車天輅, 一姦細之人也。 諉以其妻, 見汚於倭賊, 不以聞于有司, 擅行易置, 娶他人女以爲妻今於《璿源錄》, 以妻書之, 是敎人黜其妻, 有妻而娶妻也。 若後人效之, 托言妻有某罪, 自爲改娶, 則將盡許爲妻乎? 傷風敗俗, 自此而人道不立矣。 若曰: ‘不得不黜其妻, 則上告有司, 次議門族, 數其罪而黜之, 名正言順, 於是乎改娶, 夫誰曰不可? 天輅視棄其妻, 如棄弊屣, 黜妻娶妻, 曾不少忌, 豈非可駭之甚乎? 議處。)
간단히 말해 이미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정리하지 않은 채로 종실의 여자(전주이씨)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유처취처(有妻娶妻)’ 곧 이미 아내가 있는데 또 아내를 들이는 중혼(重婚) 행위였다. 고려말부터 지배층에서 이런 일이 흔히 일어났지만, 조선에 들어와서 국가의 기본 질서인 강상(綱常) 곧 삼강오륜을 흐트러뜨리는 행위라서 태종 13년(1413)에 정식으로 유처취처가 금지되었다. 차천로의 행위에 대한 선조 임금의 격렬한 반응을 보면 그 행위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차천로가 아내를 바꾼 이유를 ‘諉以其妻, 見汚於倭賊’라고 말한다. 諉는 ‘핑계하다, 맡기다, 떠넘기다(전가하다)’ 등의 뜻이다. 과연 차천로의 처가 실제로 왜적에게 더럽힘을 당했는지 아니면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그렇다고 일을 꾸민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선조 임금도 제대로 된 절차를 거쳐서 ‘죄과를 따졌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차천로의 처가 아내에서 내쫓길만한 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따졌어야 하는데 무조건 내쫓고 새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다는 뜻이다.
만일 차천로의 부인이 실제 왜적에게 훼절(毁節)을 당하였다면 임진년(1592년)쯤일 것이다. 왜군은 거침없이 북진하여 임진년 1592년 음력 6월 13일 평양을 함락시켰고, 1593년 음력 4월에는 다시 쫓겨 내려와서 전군(全軍)이 창원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차천로는 개성이 고향이기에 (바로 “차원부설원기”의 주(主) 무대) 당시 그와 그 가족은 최소한 서울 혹은 그 북쪽에서 살았음이 확실하다.
조정에서는 곧바로 차천로의 행위에 대해 조사를 했으며 그 조치를 내렸다. 우선 선원록의 기록을 맡은 담당 관리가 파직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1606년 1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 기사(수정실록이기에 이 날짜로 기사가 정리된 것으로 보이고, 이날 일어난 것은 아닌 듯함)에서 차천로의 잘못된 일은 담당 관리가 마음대로 기록하지 말고 임금에게 아뢴 다음 처단하여 싣지 말았어야 하는데 ‘멍청하게 그대로 기록하였다.’(校正廳不先稟斷, 朦然直錄)고 설명한다. 담당 관리의 파직은 1605년 12월 28일, 곧 선조의 분노가 표출되고 나서 사흘 후에 이루어졌다.
실제 심각한 범죄자나 반역자를 선원록에서 삭제하는 일도 있었다. 따라서 차천로는 결혼이 그 자체로 성립되지 않는 범죄였기에 선조가 계속 관심을 가졌다면 선원록에서 삭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선원록에도 차천로는 계속 실려 있다.
그러면 차천로의 전주이씨와의 결혼은 어떻게 처분되었을까. 바로 앞에 언급한 1606년 1월 1일자 기사에서 이런 기사가 나온다.
예조가 아뢰기를, “차천로는 이미 왕부(王府)의 추국(推鞫)을 거쳤으나 그 이른바 후처에 대해서는 아직 처치한 것이 없습니다. 《대명률(大明律)》을 살펴보건대 처가 있는데도 처를 취한 자는 장 구십(杖九十)에 이혼케 한다 하고, 《대전(大典)》에는 전처(前妻)를 적실(嫡室)로 삼는다고 하였으니 대신에게 의논케 하소서.” 하였다. 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기자헌(奇自獻)·심희수(沈喜壽) 등이 마땅히 《대명률》을 준용해야 한다고 하니, 상이 그 의논을 옳게 여겼다. (禮曹啓曰: “天輅已經王府推鞫, 而其所謂後妻, 尙無處置之擧。 考諸《大明律》, 則有妻娶妻者杖九十離異, 《大典》則以先爲嫡, 請議于大臣。” 李元翼、李德馨、李恒福、奇自獻、沈喜壽等以爲, 宜用《大明律》, 上可其議。)
여기서 ‘대명률’은 지나(China)의 형률(刑律)의 근본이었던 법전이며, ‘대전’은 조선의 법률을 말한다. 위의 논의는 1606년 1월 22일자 실록 기사에 또 다루어져 있다.
《대명률(大明律)》 을 상고하여 보건대 「본 아내를 두고 다른 아내를 들인 경우는 장 구십(杖九十)에 이이(離異)시킨다. 」고 되어 있고 《경국대전(經國大典)》 에도 「본 아내를 두고 또 다른 아내를 들인 경우에는 먼저 들어온 자를 적(嫡)으로 삼는다. 」고 되어 있다. (考諸《大明律》, 則有妻娶妻者, 杖九十, 離異; 《大典》亦云, 有妻娶妻者, 以先爲嫡。)
여기서 대명률에 따르면 유처취처의 경우 벌을 주고 이혼을 시킨다고 되어 있어 이혼 강제가 명문화 되어 있는데, 반면에 대전에 따르면 전처를 적실로 삼는다고 되어 있어 마치 이혼은 시키지 않는 것처럼 해석이 된다. 그래서 대신들이 논의를 했다. 위의 1월 1일자 기사에서의 대신들의 결론은 위에서와 같은 1월 22일자 기사에 더 명확히 설명되어 있다.
《대명률》과 《경국대전》의 입법 본의가 경중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그 차이가 그리 심하지 않고 모두가 먼저 들인 사람을 적(嫡)으로 삼는다는 의(義)를 중히 여긴 것이다. 해조(該曹)에서 《대명률》 대로 시행하자고 청한 것도 범연한 일은 아니니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 (《大明律》與《大典》立法本意, 雖有輕重之殊, 而不甚相遠, 皆出於重其以先爲嫡之義。 該曹之請依《大明律》施行者, 亦非偶然, 依此爲之, 似爲宜當。)
결국 두 법(대명률과 대전)이 같은 취지로서 유처취처가 이루어진 경우 전처와 후처 중 전처를 적처(嫡妻, 정식 아내)로 삼는다는 내용이 기본이며, 후처와의 결혼은 불법이니 이혼을 시켜야 한다는 결론인 것이다. 이런 신하들의 의견을 선조 임금은 그대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최소한 1606년 1월 22일에는 차원부는 전주이씨와 국가에 의한 강제 이혼을 당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적서의 차별이 심화되었고 여전히 유처취처와 첩을 처로 만드는 등의 문제가 계속 발생되어 실록에는 관련 기사들이 종종 나온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본처가 있으면서 다시 처를 들였다가 발각되지 않아 문제가 되지 않은 상태로 죽었고, 전처와 후처에게 모두 아들이 있을 때 누가 적자(嫡子)가 되는지도 첨예한 문제였다. 하지만 조선의 법은 이미 태종 때 확립된 바에 따라 전처의 자손이 적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모두 한 나라에 적통(嫡統)이 둘이 있을 수 없듯이 한 집안에도 두 적통이 있을 수 없다는 이른바 ‘家無二嫡(가무이적)’의 근본정신에 따른 것이다.
과연 현재의 선원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차천로의 부인 전주이씨는 어머니가 이름이 천생(天生)인 양녀(良女, 양인 출신)로 나온다. 차천로에 대해서는 ‘文僉正’이라 하여, 문과에 급제했고 벼슬은 첨정(조선시대 각 부서에 소속된 종4품의 관직)에 올랐음을 밝히고 있으며, 본관이 연안임을 적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有妻聚妻離異’라고 하여, ‘처가 있는데 또 아내를 얻어서 관(官)의 명령으로 이혼하였다.’고 명기하고 있다. 여기서 離異(리이)는 부부관계를 관(官)의 명령으로 파기하고 헤어지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곧 현대말로 하면 국가에서 법적으로 강제로 이혼을 시켰다는 뜻이다.
세조 7년에 “경국대전”의 내용을 보강하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다음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영락(永樂) 계사년[1413 태종 13년] 3월 11일 이후에 아내가 있는데도 아내를 얻은 자는 엄하게 징계하여 이이(離異)하게 하고, 즉시 발각되지 아니하여 자신이 죽은 뒤에 자손이 적자(嫡子)를 다투는 자가 있으면 먼저 난 사람을 적자로 삼는다. (永樂癸巳三月十一日以後有妻娶妻者, 痛懲離異, 其有不卽發覺, 身歿後子孫爭嫡者, 以先爲嫡。)
곧, 즉시 발각되면 당연히 결혼 관계 자체가 없어져서 처고 첩이고를 말할 것도 없고, 강제 이혼 당할 때까지 자식이 있으면 그는 첩자(妾子)로 되며, 평생 발각이 되지 않아 강제 이혼을 당하지 않고 아내로 살다가 죽었을 경우에도 그 부인에게서 난 자식들은 첩자(妾子)가 된다는 말이다. 본처에 자식이 없을 때는 적서(嫡庶)가 문제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실제 옛날에는 본처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자식을 낳고 본처의 자식으로 올린 경우도 흔했음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법이란 것이 일견 단순하면 세세한 상황에 대해 따지기 시작하면 상당히 복잡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까지는 차천로가 전주이씨와 혼인한 것은 전주이씨가 종실의 여자였기 때문에 선조 임금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결혼이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차천로의 문집인 “오산집” 부록에 “차씨세계도”가 간략하게 실려 있는데, 부인 기록도 주어지지 않았고 아들로 차전곤(車轉坤) 한 사람만 나와 있다. “오산집”에 실려 있는 차천로의 행장은 이면주(李冕宙, 1827∼1918)가 썼는데, 부인을 정부인 전주이씨(貞夫人 全州李氏)로 밝히고, 후손으로는 차전곤 하나만 직접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2004년의 연안차씨대동보에는 차천로의 부인을 역시 행장에서와 같이 소개하고 있고, 자식으로 차전곤을 장자로 하여 7자(七子) 윤곤(輪坤)까지 7명의 아들을 싣고 있다.
그런데 선원록에는 차천로의 아들로 차전곤 한 명만 올라 있으며 세 명의 딸이 함께 올라 있다. 연차대동보에는 딸(사위)는 올라 있지 않고 7명의 아들이 올라 있는 것과 대조된다. 더욱 의아한 것은 문과 급제를 하고 현감, 군수 등을 지낸 차전곤의 출생년도이다. 문과에 급제했으니 당연히 공식적인 문과방목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보면 차전곤은 광해군 12년의 경신(庚申, 1620년) 정시 병과(廷試 丙科) 3위로 급제한 것으로 나오며, 외조부가 금천부수(錦川副守) 이보(李俌)로, 생년은 병신년 1596년(선조 29년)이며, 합격할 때 나이는 25세로 나온다. (참조: https://people.aks.ac.kr/ 한국역대인물 종합시스템) 선원록에도 생년이 역시 병신년으로 나온다. 그런데 연차대동보에는 출생년도가 1586년 병술년으로 이보다 10년 앞당겨져 올라 있다. 그 동생들로 나오는 사람들은 막내인 7자 윤곤을 제외하고는 모두 생몰년이 나와 있지 않으며, 윤곤은 을해년(乙亥, 1635년)생이고 1688년 무진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차천로가 1615년에 사망한 것을 감안하면 무엇인가 잘못이 들어 있다.
왜 연차대동보는 문과방목과 다르게 차전곤의 출생년도를 바꾸었고 그 근거는 무엇인가 궁금했다. 연차대동보에는 차전곤도 10자까지 두었고, 차전곤의 장자로 올라 있는 차후재(車後載)도 무려 11자까지 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이 차후재의 생년이 1604년 갑진년으로 나온다. 차후재의 11자 가운데 장자는 생몰년이 나와 있지 않고, 차자 차세창(世彰)이 병자생으로 1636년으로 나와 있고 3자 차세웅(世雄)이 오히려 그보다 11년이 앞선 을축생으로 1625년으로 나와 있다. 혼란이 심하다. 하여간 후손들 기록을 보면 차후재는 그 생년을 1604년보다 뒤로 잡기 어렵다. 이때 그 아버지인 차전곤이 문과방목대로 1596년생이라면 첫아들을 만8세에 낳은 것이 된다. 그래서 연차대동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차전곤의 출생을 10년 정도 앞당겨서 만18세에 첫아들을 만18세에 낳은 것으로 수정한 것은 아닐까.
필자가 확인한 차천로의 아들이 기록된 문헌에는 한결같이 차전곤 한 명만 기록하고 있어서 나머지 아들에 대한 다른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물론 해당 집안의 족보 기록은 제외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로서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 확인 외에는 더 이상 토론할 자료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사실을 상세하게 지적한 것은 차천로의 유처취처의 행위를 다른 각도에서 고찰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차천로의 아들 중 무엇인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장자로 나오는 차전곤뿐이다. 그가 2004년의 연차대동보에서 주장하듯 1586년이라고 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차천로가 언제 전주이씨와 혼인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자료가 없다. 선원록에 전주이씨의 생년이 임신년으로 1572년으로 나와 있는데, 차천로보다 16세 연하이다. 선조 임금이 선원록을 보고 차천로의 잘못을 인지했을 때는 1605년 말이고 그 이듬해 초에 차천로는 강제 이혼을 당했다. 그리고 차천로가 다시 결혼한 이유로 ‘왜적에 의해 더렵혀졌다는 핑계’가 언급되므로 혼인은 1592년 혹은 그 이후일 것이다. 만일 차전곤의 생년이 1586년이라면 그는 차천로의 본처의 부인의 소생이 되며 적자(嫡子)의 자격이 있다. 이 경우는 차천로의 나머지 아들들의 신분에 대해서는 그들의 생년이 밝혀져 있지 않거나 확실치 않기 때문에 논하기 어렵다.
반면에 차전곤의 생년이 1596년이라면 그는 전주이씨 소생일 가능성이 높고, 차천로는 1593~95년 사이에 전주이씨와 혼인한 것으로 추정될 수 있다. 참고로, 차천로의 행적을 보면 1595년에 지나(China)의 장수에게 시를 지어주는 일을 한 것으로 나온다. 선원록에 차천로의 손자 대까지 나오는데, 아들 차전곤은 1596년생, 첫딸은 1598년생, 2녀는 1610년생으로 나오고 3녀는 생년이 나오지 않는다. 차전곤의 첫딸은 1629년생이고, 아들은 차후재 한 사람만 나오는데, 임신년 1632년생이며, 첩의 아들로 되어 있다. 이에 비추어 보면 연차대동보에 나온 차전곤의 생년 1586년은 근거가 없다고 판단되며, 그에 따라 그곳의 차전곤의 아들 차후재의 생년 1604년이나 차후재의 아들들의 생년 기록도 대부분 의심이 간다. 또 차후재가 선원록에서는 첩의 아들로 나오므로 과거를 볼 자격이 없었을 것인데, 차문대동보에서는 ‘성균진사(成均進士)’로 나온다. 앞에서 문과 방목 관련으로 언급된 한국역대인물 종합시스템에서는 진사시 급제자 명단에 차후재는 나오지 않는다.
한편 선원록에 차천로의 2녀의 생년이 1610년으로 나오는데 차천로는 강제 이혼을 당한 후에도 위법적인 상황에서 최소한 2녀와 3녀를 낳은 것으로 추정된다. 선원록에 기록된 차천로의 딸(사위) 3명이 연차대동보에 전혀 기록되지 않은 것도 의문이다. 선원록의 사위의 기록들이 한 사람만 겨우 본관이 나와 있을 정도로 부족하여 더 이상 추적하기는 실상 어렵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족보들은 조선 후기인 숙종 이후에 만들어지면서 부정확한 점이 많았는데, 오히려 뒤로 갈수록 기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기록 내용도 더 명확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상당부분 후대에서 꾸며지고 덧붙여졌을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여러 집안에서 신봉되는 대부분의 족보는 안타깝게도 객관적인 증거가 담보되지 않는 한 사료로 쓰기에 한참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한편 차천로의 첫 번째 부인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차천로에게 내침을 당한 것은 확실하지만 근거가 있어 그런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성씨가 무엇이었는지, 최소한 딸이라도 낳았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나라를 지키지 못하여 왜적의 침략을 당하여 부녀자가 훼절을 당했다 하여 버리는 세상이었다. 실제 그런 경우 자결을 요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를 들어, 명종 때 남편이 죽어 수절하는 딸을 다시 시집보내려고 하던 아버지가 완강하게 거절하는 딸의 뜻을 꺾으려고 그녀가 잠든 틈에 남자를 들여보낸 일이 있었다. 실록의 기자(記者)는 그 아버지에 대해 개탄하면서, 딸에 대해서도 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음과 이미 당한 후에 자결을 하지 못한 것을 함께 비난하고 있다.) 자신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피해를 당한 자들을 도리어 죽게 만드는 허위(虛僞)와 허상(虛像)의 향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주이씨에 관해서는, 족보의 기록에는 이혼을 하였어도 그리고 비록 결혼 자체도 부인(否認)되는 상황이어도 한때 부인(婦人)이 되어 자식을 낳았던 것은 사실이므로 그 후손된 자로서 그 부인(婦人)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 호칭대로 과연 정부인 직첩을 받았을지는 알 수 없다. 정부인의 품계는 2품의 품계를 받은 남자의 아내에게 주는 것이었는데, 차천로는 이면주(李冕宙)이 지은 행장에 “호성원종(扈聖原從)의 공훈으로 인해 예조참판의 벼슬이 추증되었다.”는 말이 있을 뿐이다. 이 행장은 상당히 후대에 지어진 것이다. 실록에는 扈聖原從이란 구절은 선조 38년 1605년에 2,475명을 호성원종공신으로 세울 때에만 이런 용어가 나온다. ‘호성’은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을 모시고 의주까지 따라갔음을 뜻하고 ‘원종’은 공이 큰 공신(功臣)들을 세운 다음 작은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칭호였다. 정부인은 서얼출신이나 재가한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 법칙이었는데, 차천로가 종2품의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해도 불법적인 결혼으로 이미 관(官)의 의해 헤어지게 만들어진 부인에게 정부인의 직첩이 내릴 가능성은 없고, 만에 하나 내렸다면 전후를 알지 못하는 관원의 실수였을 가능성이 크다.
지루하게 이런 것을 상세하게 살펴본 것은 위서(僞書)이자 악서(惡書)인 “차원부설원기”가 4얼과 적자의 대립구도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차천로가 그 위작자로 추정이 되는데, 비록 개연성이 높지만 역시 추정 따름임을 우선 지적한다. 하여튼 만일 그가 위작자라면 여기에서 언급된 시절보다 젊은 시절에 위작을 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얼자(서자)라는 것은 결혼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인데, 혼인을 통해서 신분상승을 꾀한 그런 차천로가 그 자신이 부당한 결혼을 했고, 그 결과로 국가에 의한 강제 이혼을 당하는, 혼인 관련으로 굴욕을 당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2014. 6. 1. 류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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