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호랑이 설화 관련 토론

ryu하곡 2015. 1. 30. 07:51

1.

 

류몽인의 어우야담은 사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대로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역사 논의에 엄밀하게 끌어다 쓸 사료가 될 자격은 크지 않습니다. 전에 류관 공의 여종이면서 나라에서 충비(忠婢)의 정문(旌門)까지 받은 갑이에 대한 이야기가 몇 가지로 나오는 것을 살피면서 어우야담의 문제를 상세히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먼저 어우야담은 이본이 20여종이 될 정도로 많아서 당연히 정말 류몽인이 쓴 글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점이 제기됩니다. 그리고 대부분 사실에 대한 확인이 충분치 않고, 사실과 달리 잘못되어 있는 것들도 다수 발견됩니다.

 

그리고 류몽인이 소개 했다는 호랑이 설화는 시귀선과 이월영이 해석한 어우야담”(한국문화사)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장서각본이라는 것을 저본으로 한 것입니다. 그 설화는 아마 더 많은 이야기가 실려 있는 만종재본에 나올 듯한데, 이 버전은 1964년에나 나온 것입니다. 어떤 이야기가 그곳에 어떻게 변형이 되어 끼어들어갔는지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할 정도입니다. 특히 호랑이 설화는 내용도 필경 문화류문의 설화를 갖다 적은 것일 터인데 변형이 여러 군데 이루어져 있습니다. 류몽인이 쓴 것인지도 의심이 가는 이런 것을 중시하여 논의할 가치는 없어 보입니다.

 

2.

 

호랑이 설화가 류차동원설을 지지해준다고 하는 차문의 주장에 대해 2011226일에 이미 반박 글을 공개했습니다. 조금 길지만 그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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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설화를 통해 본 차.류 양문의 동원설” - 저자: 차일남

 

이 글은 호랑이 설화들을 소재로 해서 류차동원설을 지지하고자 쓴 글이다. 그 글의 주석 20번에 설원기가 조작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역시 필자()가 설원기의 이본의 다른 점들(‘약간의 첨삭’)만 보고 설원기가 위작이라고 주장한다고 호도(糊塗)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까지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려 할지 두고 볼 일이다.

 

위 글은 논리전개 자체에도 모순이 있다. 곧 저자는 차씨와 류씨에게서 호랑이 설화가 많이 발견되고 그를 해석해 보니 차문과 류문이 동원(同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선, 우리나라에는 호랑이 얘기가 많은데, 대승공 시대 이후에 나온 이야기들은 아무리 많아도 류차동원설을 평가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장황하게 곁가지들을 이어 붙여 결론을 오도하고 있다. 논리전개의 모순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위 글에서 제시된 .류 가문에 관한 호랑이 보은 설화중에 선계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 3건이 있는데, 각각 그 주인공이 (1) 차씨, (2) 류차달, (3) 류효금이다.

 

여기서 우선, 문화류씨 집안에 내려오는 호랑이 설화(호랑이 목에서 비녀를 빼주고 축복을 받았다는 줄거리)는 류문 자체에서도 (2)의 대승공(류차달)(3)의 좌윤공(류효금)의 두 버전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대승공이 나오는 기록은 일찍이 고려시대의 금석문, 1349년에 세워진 문화류씨의 현조(顯祖)인 류돈(柳墩)의 묘지명에 등장한다. 그런데 그것이 가정보(1565)나 그 이전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비슷하면서 더 구체적으로 좌윤공의 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전승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을 것이며, 나중 전승이 와전된 것이거나 혹은 앞의 전승이 와전된 것이거나 할 것이다.

 

그런데 위 글에 언급된 (1)의 차씨 전래 설화는 류공숙이 호랑이 목에 걸린 비녀를 꺼내줌. 부친 차승색(류색)의 묘 자리를 잡아 주고 후손이 잘 되도록 함.”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위 글의 부록에 그 이야기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좌윤공의 이야기에서 이름만 바꾸고 소설적 묘사를 가미한 것일 따름이며, 그 구체적인 근거도 출처도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그 글에서 참고로 한 문헌 중에 한중 호랑이 설화 비교연구”(이호주)라는 것이 있는데, 1980년대 전반쯤에 나온 이 자료를 보면 은혜 갚은 호랑이라는 연안차씨 설화가 언급되어 있다. “왕건(태조) 때 연안차씨가 호랑이가 애원하여 목구멍에서 비녀를 빼줘서 호랑이가 그 보은으로 산소자리를 잡아줘서 그 후로 몇 대의 정승을 지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설화의 출처를 보면 1979년에 인권환이라는 한국구비문학대계의 저자가 충남 당진에서 당시 62세의 차인환이라는 사람에게서 채록한 것이다. 류문과 차문에 내려온 좌윤공(류효금)의 설화를 류씨도 자기 집안이라고 믿은 어떤 차씨가 이야기한 것이 그만 차씨 설화로 둔갑한 것임이 자명하다. 그것도 이야기를 잘못 알고 전달한 것일 뿐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위 글에서는 류공숙이 시대적으로 가장 위이기 때문에 그가 나온 차씨 전래 설화라는 것이 류차 동원의 증거라 제시하고 있으니, 논리의 비약이나 견강부회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구나 류공숙(차공숙)이나 류색(차승색)이라고 하는 인물들도 가공된 것임은 이미 판명이 나 있다. 대승공을 차씨로 바꾸는 망동을 하더니 이제는 류문의 호랑이 설화까지 차문의 설화로 바꾸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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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설화는 구전을 중심으로 내려오는 속성상 그 전승 과정에서 여러 다른 버전을 만들어 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호랑이 설화 역시 금석문이나 문헌에 정착할 때까지 몇 가지 버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호랑이 설화는 문화류문에 얽힌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있음을 생각해 보면 전혀 이상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연산 입향조인 사직공 류응영(문화류문 22)의 현재의 묘소도 호랑이가 꿈에서 점지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이런 이야기는 많습니다.

 

류효금이 등장하는 이야기에서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호랑이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증명하는 이야기까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말 그대로 일어난 사건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한 치의 의심 없이 알 수는 없지만 류문은 호랑이 설화가 문화류씨의 시작 시점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되고 있어 호랑이에게 도움을 주어 그 축복을 받았다는 메시지를 소중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면 충분합니다.

 

4.

 

류몽인은 차식과 그 아들들을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차씨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하면서도 이미 널리 알려졌을 류씨와 차씨의 동원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다가 차식의 신도비명을 썼다고 하며 차제능이 류루(劉累)의 후손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차씨가 류씨로 변성한 내력과 연안차씨가 생긴 내력, 그리고 차원부설원기의 내용까지 싣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적 인물인 대승공은 흔적조차 나오지 않으며 고려 태조를 도운 공적을 오로지 역사에서 자취도 없는 차효전의 것으로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본다면 차씨는 씨에서 나왔고 그 다음에 씨가 되었고 거기서 본관이 생기면서 연안차씨가 나온 것으로 됩니다. 이에 따르면 차씨는 씨 하고도 동원(同源)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류몽인이 차식의 신도비명을 쓰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글의 전래에 대해서도 차원부설원기와 같은 설명이 붙습니다. 곧 그것이 1619년에 쓰였다고 하는데 류몽인은 1623년에 역적으로 모함을 받아 사형을 당했습니다. 설원기를 썼다는 박팽년이 그 글을 쓰고 여기서는 겨우 며칠 후에 사육신 사건으로 역적이 되어 사형을 당했다는 이야기와 판박이라는 뜻입니다아무리 차식의 집안과 가까웠다 해도 당대의 상당한 지식인이었던 그가 자신의 비평이나 판단 없이 앵무새처럼 설원기를 옮겨 적은 것부터 시작해서 여러 모로 그의 저작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차원부의 살해 시점에 함께 죽었다는 사람들의 숫자도 설원기와 다른 점도 눈에 띄지만, 소위 4(하륜, 정도전, 함부림, 조영규)이 차원부를 죽였다는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 좋은 예입니다. 여러 차례 밝혔지만 정도전은 먼저 살해 되어서 차원부를 죽일 수 없었고, 조영규는 더 심해서 이미 그 3년 전에 죽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차문의 얼자는커녕 얼자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정도전의 경우는 논란이 있고 대부분 출신에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김용옥씨 등에 의해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차원부설원기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4이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고 4얼이 차원부와 일족을 죽였다는 말은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들을 죽였다는 말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설원기를 유령들의 놀이터라고 표현해 온 것입니다. 아무리 류몽인이 타성(惰性)에 젖어서 신도비를 차문이 주는 대로 글을 받아썼다고 한다 해도 우리나라 최초의 야담집이라고 평가되는 어우야담을 쓸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류몽인이 쓴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5.

 

차식 3부자가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의 저자일 것이라는 주장은 이미 조선시대에 나온 것입니다. 물론 그런 주장은 짧게 주어져 있어서 상세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때도 3부자가 공모하여 구체적으로 파트를 나누어 함께 공동 저술한 것이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박팽년이 썼다고 조작된 기()와 하위지가 썼다고 조작된 서(), 수 십 명의 인물들이 썼다고 조작된 응제시, 그리고 역시 여러 명이 참여했다고 조작된 주석들을 여러 명이 나누어서 작성했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와 응제시들을 보고 쓴 것으로 나오고, 주석은 판본마다 여기저기 붙이는 위치나 주석자의 이름들이 다르게 붙어 있어서 나중에 저자들을 조작하여 붙인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어서 기, , 응제시, 주석들이 다른 사람들이 쓴 것이라고 의심할 개연성은 있습니다.

 

차식 3부자가 위작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이수건 교수도 논문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사항입니다. 대략 설원기가 세상에 나올 때의 상황을 보면 그들의 범주에서 나왔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설원기를 쓴 사람은 차씨 집안사람일 수밖에 없는데 그들이 아니고는 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도 개연성은 무척 높지만 추정일 뿐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 가운데서도 차천로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여러 근거를 가지고 제안하는데 이것도 아무리 설득력 있는 논의를 해도 역시 추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많은 역사 문제에서 그렇듯이 설원기의 위작자 한 사람 혹은 다수를 확정적으로 특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 논의에서 사건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여러 가능성의 논의를 해 볼 수 있고 대부분 그런 논의가 요구됩니다. 역사적 논의에는 역사적 논의로 대응하면 되는 일입니다. 설원기가 한 가문의 가문사를 만들어 내기 위해 조작된 문헌임은 명백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누가 어떻게 그런 일을 했으며 그것이 어떤 경위로 사회로 퍼져 나갔는지, 그래서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상세히 파악하는 것은 학자들의 의무입니다.

 

차천로가 위작자일 수 없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위작자일 리 없다고 거론되는 것들이 반대로 그가 위작자라는 증거로 이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류차동원설에 입각한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설원기가 대동운부군옥이나 다른 여러 문헌에 들어갈 정도로 알려졌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이 가문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닐 터인데도 문재에 뛰어나고 많은 문헌을 섭렵한 그가 침묵했다는 것은 오히려 더 큰 의심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이런 것 역시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추측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 정도로만 언급하겠습니다.

 

6.

 

설원기에는 황제(黃帝)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차식의 신도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시만 하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류루(劉累) 혹은 왕조명 등의 차이나(支那) 인물들이 언급되면 저절로 황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차이나의 많은 성씨가 전설적인 인물인 황제에서 기원을 찾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몇 년 전에 류문에서 파기한 원파록은 그 전설의 황제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계보가 이어져 있습니다. 그 계보가 역사적 사실이라면 아마도 원파록은 세계적인 보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차이나 쪽에서 전설적으로 황제의 후손의 계보를 그려내는 것은 논외로 하고, 문화류씨와 연안차씨의 선계라고 주어지는 것들은 상당 부분이 19세기 초에 알려진 왕배조의 강남보라는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신분과 관련되어 족보가 중요시 되어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하던 바로 그 시기입니다. 이 강남보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아주 상세하게 밝힌 것은 바로 연안차씨의 강렬공파보입니다.

 

7.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앞글의 댓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a. 설화에 대해서는 조작 운운할 이유는 없습니다. 설화나 신화는 그것을 공유하는 집단 혹은 민족의 관념 또는 세계관을 표현한 것이며, 그것이 사실에 입각한 것일 수도 있고 상징화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문화류문의 호랑이 설화는 누가 왕이 되었거나 어떤 전쟁이 있었거나 하는 것처럼 명확한 사실이 아닐지라도 최소한의 사실에 입각하여 발전한 이야기일 개연성은 큽니다. 설화나 신화는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와 생명을 갖습니다.

반면에 설원기에 대해서는 조작이라는 말을 명백하게 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박팽년이 를 쓰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명백히 증명되어 있습니다.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어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던 것처럼 조작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그것이 소설이라면 이야기는 다릅니다. 소설은 소설적 상상력이 얼마든지 가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설원기가 역사의 탈을 쓰고 우리나라 역사와 사회에 미친 악영향은 무척 큽니다. 설원기의 정체가 널리 알려진 것이 몇 년 되지 않아서 지금도 그 악영향이 제대로 제거되어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b. 지금도 최근의 어떤 안씨의 예에서 보듯이 선계(先系)를 조작하는 예들이 있습니다. 어떤 역사인물과 자신들의 현재의 계통 사이에 역사적으로 계보를 이을 수 없는데 다만 한자로 성씨가 같다고 하여 그 역사인물을 자신들의 계통의 역사에 넣어서 역사를 부풀리는 일은 조선 후기에 활발하게 자행되어 왔으며 지금도 서로 모호한 계통의 집안들이 같은 한자를 쓴다 하여 같은 집안이라고 통합하는 일은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설원기가 조작되어 세상에 나온 효과는 뚜렷합니다. 곧 연안차씨의 선계가 확립되고 시조의 이름과 행적이 확립되고 차원부 조상들 10여대의 혼인관계가 확립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위작자()이 목적한 것이며 그 이익은 상당했습니다. 그런데 혼인관계들이 조작된 것은 이미 상세한 분석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시조의 경우도 설원기 이전에 어떤 문헌이나 금석문이나 역사서에 한 번이라도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선계, 곧 류차동원설 혹은 황제연원설은 근거 없음이 밝혀져 폐기되었습니다.

선계의 조작은 온 집안이 세상에 떠들고 다니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은밀하게 시조에 대해 내력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족보 혹은 어느 문헌엔가 넣습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그것을 근거로 그 다음 일을 크게 벌이는 것입니다. 류씨와 차씨의 동원 조작의 흔적, 곧 증거는 바로 설원기입니다.

 

c. 차운로는 류차동원을 직접 자신의 글에서 밝혔고, 차식의 신도비명을 만드는 데 주도를 해서 류차동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후자는 차문의 글에 나오는 내용임.) 차은로는 요절해서 별로 언급할 말이 없습니다. 차천로가 과거 시험을 볼 때 왜 본()을 적지 않아 문제까지 되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선조 29, 15961028일의 실록 기사 참조.) 4(四祖)를 적지 않았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과거시험에서는 본관과 거주지를 포함한 자기에 대한 정보와 함께 부, , 증조, 외조를 쓰게 되어 있었습니다. 실록의 기사를 보면 거주지를 쓰지 않아도 심각한 문제이고 본관을 쓰지 않으면 더 큰 문제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과거 급제자를 선정할 때 그런 사항들이 참작이 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차천로가 그런 비중이 있는 본()을 적지 않은 것은 단순한 실수는 아니었을 터인데, 왜 그랬는지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d. 기사보는 1619년이 아니라 1689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원파록은 여기에 처음 실렸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황제연원설과 류차동원설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그런 계보를 만들어낸 근거는 류지원의 말과 차원부설원기 두 가지입니다. 여기에 앞에서 언급한 강남보가 붙어서 현재의 원파록이 완성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기사보의 원파록이 1708년에 만들어진 연안차문의 무자보를 보고 베꼈느냐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원파록의 세 가지 소스 중에 역사 및 문헌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실체가 있는 것은 오직 차원부설원기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작되었고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을 믿고 받아들일 객관적 근거가 없다면 류차동원설은 완전히 폐기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에 걸쳐 많은 분들이 고뇌하고 탐구한 결과 그런 결론에 이르렀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8.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가문의 역사라는 것은 거의 모든 집안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족보와 가문사는 15세기에 문화류씨 영락보를 시작으로 해서 퍼져나가다가 조선 후반기의 사회현상과 맞물려서 17세기~19세기에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각 집안에서 족보가 거듭 만들어질 때마다 모호했던 가문사가 더 부풀려지고 또렷해진 것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밝혀진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족보에 앞 족보에는 없던 자손들이 끼어들어간 증거는 많이 보입니다. 조상에 대해 별로 생각을 하지 않고 살다가 사회 분위기 상 조상을 찾아내서 계통을 따라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적당한 사람에게 붙여서 새로 계통을 만들어내서, 부정적으로 말하면 조작해서, 들어간 경우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맥락에서 구태여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차천로의 자식과 후손들이 그렇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살펴보았기에 여기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계속 말씀드리고 부탁드리는 것은 어느 한 작은 부분을 집어서 꼬투리를 잡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설원기에 대해 지금까지 여러 분이 그것이 위작되고 사실을 기록한 문헌이 아니라는 증거를 수십 가지는 제시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것은 애써 피하면서 차천로가 위작자라고 단정하는 것도 아니고 추정하는 것만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해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옛날 역사를 지금 어떻게 아느냐고 억지를 부리면서 설원기를 있는 그대로 마치 바이블처럼 모두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믿는 것은 자유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2015130

류주환

 

출처 :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글쓴이 : 채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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