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5. 류수원 ( 중상학파의 선구자 : 우서 )

ryu하곡 2015. 1. 5. 18:20

 

 

 

류수원 (柳壽垣, 1694-1755)

 

 

본관 : 문화 (文化)

자    : 남로(南老)

호    : 농암(聾庵)

 

1694(숙종 20)1755(영조 31).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이다.

대사간 상재(尙載)의 손자로 봉정(鳳庭)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징(金徵)의 딸이다.

 

1. 가계와 관직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서울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일가 친족의 집에서 자랐다.

그의 스승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1714(숙종 40) 21세 때 진사가 되고, 25세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약관의 나이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2 .노론세력의 견제

 

 

그러나 벼슬길은 매우 불우하게 이어져갔다. 벼슬길에 들어선 지 5년째 되던 1723(경종 3) 2월에 정언(正言)으로서 조정의 혁신을 요망하는 글을 경종에게 올렸다가, 원로대신을 함부로 비난하였다는 조정 중신들의 성토를 받아 파직되는 불행을 맞았다.

하지만, 당시는 그의 집안이 집권당인 소론(少論)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에 그해 7월에 낭천현감
(狼川縣監)으로나마 다시 임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1년여 만인 1724년에 영조
가 즉위하고 노론(老論)이 득세하기 시작하자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심한 정치적 규제를 받게 되었다.

이른바 임인안옥(壬寅按獄: 1722년에 노론의 네 대신을 처형한 정치재판)의 주모자로 종숙부
봉휘(鳳輝)가 노론에 의하여 처벌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30대시절 10여년간을 줄곧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 옮겨다니게 되었고, 그 중에서 심한 병을 얻어 귀머거리가 되는 신체적 불행까지 맞았다. 스스로 ‘농암’ 또는 ‘농객(聾客)’이라는 호를 쓰게 된 것도 이무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우서 저술

 

 

 

그는 불우한 처지에서 치미는 울분을 연구와 저술로 달랬다. 《우서 迂書》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 나라가 부강해지고 백성들이 잘살게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개혁하고 개선해야 할 것인지를 강구하고 기술한 것이다.

위국경륜(爲國經綸)의 저술은 곧 관계 인사들의 관심을 모아 영조에게까지 소개되었고, 그로 인하여 그는 1737(영조 13)에 다시 조정으로 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노론의 규제는 풀리지 않아
정언에 다시금 임명되는 데 그쳤으며, 뒤이어 장령을 거쳐 사복시정으로 승진되기는 하였지만 끝내 벼슬을 버리고 서소문(西小門) 밖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그는 1741년에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경연(經筵)에 들면서 부호군(副護軍)에 다시 임명되었다.

그는
〈관제서승도설 官制序陞圖說〉을 지어 바치면서 영조와 붓으로 토론하는 진기한 경연을 벌였고, 그 결과 그해 3월에 홍문관 관원에 대한 회천법(回薦法)을 폐지하게 하였다.

출처 : 文化柳氏 靑年會
글쓴이 : 류우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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